북한 (십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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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은 오대 십국 시대에 유숭이 건국한 국가로, 후한의 부흥을 표방하며 951년부터 979년까지 존속했다. 요나라의 지원을 받아 후주 및 송나라와 대립했으나, 979년 송 태종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북한의 역대 황제는 유민, 유균, 유계은, 유계원으로, 마지막 황제 유계원은 송나라에 항복한 후 팽성공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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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 유균
북한의 제2대 황제인 유균은 유승균에서 개명하였으며, 요나라로부터 책봉을 받았고, 곽무위를 재상으로 등용하여 국력을 강화하고 자주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 북한 - 유계원
유계원은 세조 유민의 외손이자 예종 유균의 양자로, 예종 사후 이부형 유계은이 즉위하자 곽무위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으며, 요나라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했으나 송나라의 침공으로 북한이 멸망하자 송에 항복하여 팽성군공에 봉해졌다. - 산시성 (산서성)의 역사 - 조 (전국)
조는 주나라 목왕의 신하 조보의 후손인 조씨가 건국한 국가로, 춘추 시대 말 진나라 분열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무령왕 때 국력이 신장되었으나 기원전 228년 진나라에 멸망했다. - 산시성 (산서성)의 역사 - 진 (오대 십국)
오대십국시대, 이극용과 이존욱이 당나라 계승을 주장하며 세운 진(晉)은 산서성 대부분과 황하 이북 지역을 장악하고 후량 멸망 후 후당 건국에 이르렀으며, 주변국들과 복잡한 외교 관계를 맺었다. - 산시성 (섬서성)의 역사 - 가정대지진
1556년 명나라 가정제 시기에 중국 산시성에서 발생한 가정대지진은 웨이허 계곡의 화주 지역을 진앙으로 하여 수십만 명의 사망자를 낸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지진 중 하나로, 모멘트 규모 약 7.9~8 정도의 강진으로 추정된다. - 산시성 (섬서성)의 역사 - 명하
14세기 중반 명옥진이 충칭을 수도로 건국한 명하는 홍건적 출신 장수가 세운 한족 국가였으나, 명나라에 의해 멸망하고 명승 대에 복속되었다.
북한 (십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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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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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국명 | 한 |
일반 명칭 | 북한 |
시대 | 오대십국 시대 |
위치 | 중국 |
수도 | 타이위안 |
공용어 | 중국어 |
종교 | 불교, 도교, 유교, 중국 민간 신앙 |
통화 | 중국 화폐, 중국 동전, 구리 동전 등 |
역사 | |
건국 | 951년 |
멸망 | 송나라에 의해 멸망 (979년) |
이전 국가 | 후한 (오대) |
이후 국가 | 송나라 |
정치 | |
정치 체제 | 군주제 |
역대 황제 | 세조 신무황제 (951–954) 예종 효화황제 (954–968) 소제 (968) 영무황제 (968–979) |
칭호 | 황제 |
현재 | |
현재 국가 | 중국 |
2. 역사
창시자 유숭(劉崇)은 후한의 창시자 유지원(劉知遠)의 동생이었다. 후한 2대 황제 은제(隱帝)가 휘하 무장 곽위(郭威)에게 살해당하자, 유숭은 임지였던 태원에서 자립하려는 자세를 보였으나, 곽위에 의해 자신의 아들인 유빈(劉贇)이 새로운 황제로 옹립되었기에 자립은 포기하였다. 그러나 그 후 곽위가 유빈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후주을 건국하자 후한을 북쪽에서 재흥시킨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제가 되었지만 단독으로 후주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유숭은 북쪽의 요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후 요나라의 위성국가로써 요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후주와 대립했다. 954년 후주의 곽위가 죽고 시영(柴榮)이 즉위하자, 그 사이를 노리고 다음해 대군을 남하시켜 택주(澤州) 고평(高平)[4]에서 격돌했다. 처음엔 유리하게 전황을 이끌었으나, 후주의 장군 조광윤(趙匡胤)의 분전으로 패배하여 태원으로 후퇴하였고, 얼마안가 유숭은 사망했다.
차남 유균(劉鈞)이 뒤를 이어, 약세를 만회하기 위해 내정에 힘을 기울였으나, 957년 시영에게 영토를 빼앗겼다. 그 후 후주에서는 조광윤에게 선양이 이루어져, 송나라가 탄생하였고, 이 송나라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아 국내는 혼란상태에 빠졌다.
968년 유균이 죽자 유숭의 손자이며, 유균의 양자였던 유계은(劉繼恩)이 옹립되었으나 곧 살해당하고, 같은 유숭의 손자이자 유균의 양자였던 유계원(劉繼元)이 제위에 올랐다. 유계원은 환관에게 정치를 맡기고, 제위의 라이벌이었던 혈족을 살해하는 등 정치를 혼란시켰다가 979년 송나라 태종의 친정군의 공격을 받아 항복하여 북한은 멸망했다. 이로써 송나라에 의해 중국통일이 완성되었다. 그 후 유계원은 송나라에서 팽성공(彭城公)이 되어 천수를 살다 죽었다.
후한(후오대)이 950년에 몰락한 것은 강력한 군벌인 곽위의 사실상 쿠데타 때문이었다. 유민은 951년에 후한(후오대)의 정통 황위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북한(혹은 동한이라고도 불림)을 건국했다. 유민은 즉시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회복했다.
후한과 북한 황제의 기원에 대해서는 자료들이 상충된다. 일부 자료는 한화된 사타오 혈통임을 시사하는 반면, 전통적인 역사 자료들은 황제들이 한족의 부계 혈통을 주장했다고 한다.
후한의 존재는 요나라와 후주를 계승한 북송 사이의 관계에서 두 가지 주요한 갈등 요소 중 하나였으며, 다른 하나는 요나라가 계속 점령하고 있던 십육주였다.[3]
송 태조는 976년 사망할 때까지 남쪽의 여러 나라들을 송나라에 거의 완전히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의 동생인 송 태종은 형의 성공을 본받고자 했다. 오월은 978년에 송나라에 병합되었다.
남쪽에서의 성공에 고무된 태종(太宗) 황제는 마침내 후한(後漢)을 멸망시키기 위한 원정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황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후한의 수도 태원(太原)으로 진격하여 6월에 포위 공격을 개시했다. 요(遼)에서 파견한 구원군은 송(宋)에 의해 손쉽게 패배했다. 두 달간의 수도 포위 공격 끝에 후한의 황제는 항복했고, 후한은 북송(北宋)에 병합되었다.
2. 1. 건국 배경
유숭(劉崇)은 후한의 창시자 유지원의 동생으로, 후한 2대 황제 은제가 휘하 무장 곽위에게 살해당하자, 태원에서 자립하려는 자세를 보였다.[4] 그러나 곽위에 의해 자신의 아들인 유빈이 새로운 황제로 옹립되었기에 자립은 포기하였다. 곽위가 유빈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후주를 건국하자, 유숭은 후한을 북쪽에서 재흥시킨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951년).[4]유숭은 단독으로 후주에 대항할 힘이 없었기에 북쪽의 요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후 요나라의 위성국가로써 요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후주와 대립했다.[4] 954년 후주의 곽위가 죽고 시영이 즉위하자, 그 사이를 노리고 다음해 대군을 남하시켜 택주(澤州) 고평(高平)에서 격돌했으나, 후주의 장군 조광윤의 분전으로 패배하여 태원으로 후퇴하였고, 얼마안가 유숭은 사망했다.[4]
후한과 북한 황제의 기원에 대해서는 자료들이 상충된다. 일부 자료는 한화된 사타오 혈통임을 시사하는 반면, 전통적인 역사 자료들은 황제들이 한족의 부계 혈통을 주장했다고 한다.
2. 2. 후주 및 송과의 대립
후한의 창시자 유지원(劉知遠)의 동생 유숭(劉崇)은 후한 2대 황제 은제(隱帝)가 휘하 무장 곽위(郭威)에게 살해당하자, 임지였던 태원에서 자립하려는 자세를 보였다.[4] 그러나 곽위가 유숭의 아들 유빈(劉贇)을 새로운 황제로 옹립하였기에 자립은 포기하였다. 곽위가 유빈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후주를 건국하자 유숭은 후한을 북쪽에서 재흥시킨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황제가 되었지만 단독으로 후주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유숭은 북쪽의 요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후 요나라의 위성국가로써 요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후주와 대립했다.[4] 954년 후주의 곽위가 죽고 시영(柴榮)이 즉위하자, 그 사이를 노리고 다음해 대군을 남하시켜 택주(澤州) 고평(高平)에서 격돌했다.[4] 처음엔 유리하게 전황을 이끌었으나, 후주의 장군 조광윤(趙匡胤)의 분전으로 패배하여 태원으로 후퇴하였고, 얼마안가 유숭은 사망했다.
차남 유균(劉鈞)이 뒤를 이어, 약세를 만회하기 위해 내정에 힘을 기울였으나, 957년 시영에게 영토를 빼앗겼다. 그 후 후주에서는 조광윤에게 선양이 이루어져, 송나라가 탄생하였고, 이 송나라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아 국내는 혼란상태에 빠졌다.
968년 유균이 죽자 유숭의 손자이며, 유균의 양자였던 유계은(劉繼恩)이 옹립되었으나 곧 살해당하고, 같은 유숭의 손자이자 유균의 양자였던 유계원(劉繼元)이 제위에 올랐다. 유계원은 환관에게 정치를 맡기고, 제위의 라이벌이었던 혈족을 살해하는 등 정치를 혼란시켰다가 979년 송나라 태종의 친정군의 공격을 받아 항복하여 북한은 멸망했다. 이로써 송나라에 의해 중국통일이 완성되었다. 그 후 유계원은 송나라에서 팽성공(彭城公)이 되어 천수를 살다 죽었다.
후한의 존재는 요나라와 후주를 계승한 북송 사이의 관계에서 두 가지 주요한 갈등 요소 중 하나였으며, 다른 하나는 요나라가 계속 점령하고 있던 십육주였다.[3]
2. 3. 멸망
951년 유숭(劉崇)은 후한을 북쪽에서 재흥시킨다는 명목으로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북한을 건국했다.[4] 그러나 단독으로 후주에 대항할 힘이 없었던 유숭은 북쪽의 요나라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이후 요나라의 위성국가로써 요나라의 병력을 가지고 후주와 대립했다.[4] 954년 후주의 시영(柴榮)이 즉위하자, 그 사이를 노리고 다음해 대군을 남하시켜 택주(澤州) 고평(高平)에서 격돌했으나, 조광윤(趙匡胤)의 분전으로 패배하여 태원으로 후퇴하였고, 얼마안가 유숭은 사망했다.[4]차남 유균(劉鈞)이 뒤를 이어 약세를 만회하기 위해 내정에 힘을 기울였으나, 957년 시영에게 영토를 빼앗겼다.[4] 그 후 후주에서는 조광윤에게 선양이 이루어져 송나라가 탄생하였고, 송나라로부터 강한 압력을 받아 국내는 혼란상태에 빠졌다.[4]
968년 유균이 죽자 유숭의 손자이자 유균의 양자였던 유계은(劉繼恩)이 옹립되었으나 곧 살해당하고, 같은 유숭의 손자이자 유균의 양자였던 유계원(劉繼元)이 제위에 올랐다.[4] 유계원은 환관에게 정치를 맡기고 제위 경쟁자들을 살해하는 등 정치를 혼란시켰다.[4] 979년 송나라 태종의 친정군의 공격을 받아 항복하여 북한은 멸망했다.[4] 그 후 유계원은 송나라에서 팽성공(彭城公)이 되어 천수를 살다 죽었다.[4]
3. 역대 황제
묘호 (廟號) | 시호 (諡號) |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및 기간 |
---|---|---|---|---|
시조 (世祖) (Shìzǔ) | 신무제 (神武帝) (Shénwǔdì) | 유민 (유민/劉旻중국어) | 951년–954년 | 건우(乾祐) 951년–954년 |
혜종 (睿宗) (Ruìzōng) | 효화제 (孝和帝) (Xiàohédì) | 유균 (유균/劉鈞중국어) | 954년–968년 | 건우(乾祐) 954년–957년 |
소주 (少主) (Shàozhǔ) | 없음 | 유계은 (유계은/劉繼恩중국어) | 968년 | 없음 |
없음 | 영무제 (英武帝) (Yīngwǔdì) | 유계원 (유계원/劉繼元중국어) | 968년–979년 | 광운(廣運) 968년–979년 |
세조 신무제 유숭(劉崇)은 951년부터 954년까지 재위하였다. 예종 효화제 유균(劉鈞)은 954년부터 968년까지 재위하였다. 소제(소주, 폐제) 유계은(劉繼恩)은 968년에 재위하였다. 영무제 유계원(劉繼元)은 968년부터 979년까지 재위하였다.
- 1 - 4: 북한 황제
- (1),(2): 후한 황제
3. 1. 개요
3. 2. 목록
묘호 (廟號) | 시호 (諡號) |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및 기간 |
---|---|---|---|---|
시조 (世祖) (Shìzǔ) | 신무제 (神武帝) (Shénwǔdì) | 유민 (유민/劉旻중국어) | 951년–954년 | 건우(乾祐) 951년–954년 |
혜종 (睿宗) (Ruìzōng) | 효화제 (孝和帝) (Xiàohédì) | 유균 (유균/劉鈞중국어) | 954년–968년 | 건우(乾祐) 954년–957년 |
소주 (少主) (Shàozhǔ) | 없음 | 유계은 (유계은/劉繼恩중국어) | 968년 | 없음 |
없음 | 영무제 (英武帝) (Yīngwǔdì) | 유계원 (유계원/劉繼元중국어) | 968년–979년 | 광운(廣運) 968년–979년 |
4. 북한 황제의 가계도
947–948
세조 世祖
951–954
인제 隱帝
948–951
d.951; r.950
예종 睿宗
954–968
薛钊
劉氏
何某
소주 少主
968
영무제 英武帝
968–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