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구
1. 개요
유부구는 장사대왕 유용의 아들로, 장사경왕의 작위를 받았다. 그의 아들로는 장사날왕 유건덕, 고성절후 유량, 복양엄후 유연년, 종무절후 유도가 있다. 고성절후 유량은 시원 6년 6월 을미일에, 복양엄후 유연년과 종무절후 유도는 원강 원년 정월 계묘일에 봉해졌다. 유부구의 뒤는 장사날왕 유건덕이 이었다.
| 성 | 유(劉) |
|---|---|
| 이름 | 부구(富丘) |
| 시호 | 효(孝) |
| 작위 | 제후왕 |
| 봉국 | 교동국(膠東國) |
| 시대 | 전한(前漢) |
| 출생 | 기원전 106년 |
| 사망 | 기원전 29년 |
| 아버지 | 유단 |
|---|---|
| 어머니 | 왕첩여(王婕妤) |
| 배우자 | 공수(恭遂) |
| 자녀 | 유음 유현 |
| 즉위 | 기원전 82년 |
|---|---|
| 주요 사건 | 아버지 유단의 모반 연루 태후의 비호 작위 유지 |
| 재위 기간 | 53년 |
| 관련 인물 | 한소제 곽광 상홍양 정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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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4년 사망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는 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가로, 마리우스와 연합하여 로마를 장악하고 4년 연속 집정관을 역임하며 독재 권력을 행사했으나, 술라에 대항하려다 반란으로 살해당했다. -
기원전 84년 사망 -
안티오코스 12세 디오뉘소스
안티오코스 12세 디오뉘소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왕으로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통치하며 여러 별칭을 사용해 권위를 드러냈고, 나바테아와 유대아를 상대로 군사 활동을 펼쳤으나 카나 전투에서 전사하며 그의 통치는 막을 내렸다. -
전한 사람 -
전한 무제
전한의 제7대 황제인 전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며 유교 기반 중앙집권 강화, 흉노 정벌을 통한 영토 확장, 소금과 철의 전매제 등 경제 개혁을 추진하여 전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과도한 군사 지출, 사치스러운 생활, 무고의 난 등 부정적인 면모도 보였다. -
전한 사람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가계
아버지는 장사대왕 유용이다.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장남 장사날왕 유건덕이 왕위를 계승했고, 다른 네 아들은 후작에 봉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을 참고한다.
2.1. 장사경왕 유부구
장사대왕 유용의 아들이다. 슬하에 아들 다섯을 두었다.
* 장사날왕 유건덕: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장사왕이 되었다.
* 고성절후 유량(劉梁): 시원 6년(기원전 81년) 6월 을미일에 봉해졌다.
* 복양엄후(復陽嚴侯) 유연년(劉延年): 원강 원년(기원전 65년) 정월 계묘일에 봉해졌다.
* 종무절후 유도: 원강 원년(기원전 65년) 정월 계묘일에 봉해졌다.
* 고성절후(高城節侯) 유량(劉梁): 원강 원년(기원전 65년) 정월 계묘일에 봉해졌다.
고성절후 유량(劉梁)의 경우, 왕자후표에는 시원 6년 6월 을미일(소제 시기)과 원강 원년 정월 계묘일(선제 시기) 두 번 봉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판각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다.
2.2. 유부구의 자녀들
장사경왕 유부구에게는 여러 아들이 있었으며, 기록에 남은 주요 자녀는 다음과 같다.
이들 중 복양엄후 유연년, 종무절후 유도, 고성절후 유량(劉梁)은 원강 원년(기원전 65년) 정월 계묘일에 후(侯)로 봉해졌다.
2.2.1. 장사날왕 유건덕
장사경왕 유부구의 아들로, 장사날왕 작위를 받았다.
2.2.2. 고성절후 유량
장사경왕 유부구의 아들이다. 고성절후(高城節侯) 작위를 받았다.
봉작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기록이 전해진다. 하나는 시원 6년(기원전 81년) 6월 을미일에 봉해졌다는 기록이고, 다른 하나는 원강 원년(기원전 65년) 정월 계묘일에 봉해졌다는 기록이다.
왕자후표(王子侯表)에는 이 두 시기가 모두 기록되어 있는데, 각각 소제와 선제 때의 일로 확인된다. 왜 두 번 기록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판각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