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 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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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한 선제는 전한 무제의 증손으로, 무고의 옥으로 인해 고난을 겪었으나 곽광의 추천으로 즉위했다. 곽광 사후 곽씨 일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친정을 시작했으며, 법가주의적 정치 신조에 따라 민생 안정과 국력 강화에 힘썼다. 흉노를 제압하고 서역에 진출하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어 한나라 중흥의 시조로 평가받지만, 유교를 싫어하고 환관의 권력 강화를 초래하는 등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재위 기간 동안 여러 연호를 사용했으며, 기원전 49년에 사망하여 원제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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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선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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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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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유순 (劉詢) (본명: 유병이 (劉病已)) |
아버지 | 유진 |
어머니 | 왕옹수 |
배우자 | 공애황후 곽황후 효선황후 |
자녀 | 원제 유흠 유소 유우 유경 관도공주 경무공주 |
묘호 | 중종(中宗) |
시호 | 효선황제(孝宣皇帝) |
능묘 | 서안 두릉(杜陵) |
통치 기간 | |
재위 기간 | 기원전 74년 9월 10일 – 기원전 48년 1월 10일 |
연호 | 본시(本始) (기원전 73년 ~ 기원전 70년) 지절(地節) (기원전 69년 ~ 기원전 66년) 원강(元康) (기원전 65년 ~ 기원전 61년) 신작(神爵) (기원전 61년 ~ 기원전 58년) 오봉(五鳳) (기원전 57년 ~ 기원전 54년) 감로(甘露) (기원전 53년 ~ 기원전 50년) 황룡(黃龍) (기원전 48년) |
생애 | |
출생 | 기원전 91년, 장안 |
사망 | 기원전 48년 1월 10일 (43세), 장안 |
왕조 | |
가문 | 유(劉) |
왕조 | 한 (전한) |
기타 | |
전임 | 유하 |
계승 | 유석 |
2. 생애
전한 무제의 증손이자 여태자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여태자의 아들인 사황손(史皇孫) 유진이고, 어머니는 왕씨(王氏)이다.
기원전 91년, 무고의 옥으로 증조모 황후 무사황후, 할아버지 여태자, 조모 사씨, 아버지 유진, 어머니 왕씨, 형과 누나가 처형되었다. 갓난아이였던 유병이는 투옥되었지만 병길에 의해 양육되었고, 은사로 석방되어 민간에서 자랐다. 액정령 장하가 유병이의 후견인이 되고, 장팽조와 학우가 되어, 장안 교외의 상관리에 거주하였다.
기원전 74년 소제가 붕어하자, 창읍왕이 즉위했지만 품행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이후 곽광 등의 추천으로 상관황태후의 조서를 받아 양무후(陽武侯)에 봉작되었고, 머지않아 즉위하였다. 소제 사망부터 창읍왕 폐위, 선제 즉위까지의 과정은 곽광이 주도했으며, 즉위 후에도 곽광이 대사마 대장군으로서 권력을 유지했다.
기원전 68년 곽광이 사망하자, 선제는 곽씨 일족의 권력, 특히 군사 지휘권을 점차 박탈하고 외척인 허씨 등에게 권력을 주었다. 이에 반발한 곽광의 유족들이 반란을 계획했고, 이를 이유로 곽씨 일족은 처형되었다. 반란 성공 후 제위를 찬탈할 예정이었던 대사마 곽우는 요참형에 처해졌고, 황후 곽씨(곽광의 딸)는 폐위 후 유폐되었다. 곽광 사후 2년, 선제는 친정을 시작했다.
2. 1. 어린 시절과 즉위
기원전 91년, 무고의 옥으로 증조모 황후 위자부, 할아버지 여태자, 할머니 사씨, 아버지 사황손 유진, 어머니 왕씨, 형과 누나가 처형되었다.[6][7] 갓난아이였던 유병이는 투옥되었지만 병길에 의해 양육되었고, 은사로 석방되어 민간에서 자랐다. 액정령 장하가 유병이의 후견인이 되고, 장팽조와 학우가 되어, 장안 교외의 상관리에 거주하였다.성장하면서 유협을 좋아하고, 닭싸움을 시키고 말을 달리게 하면서 마을의 간사함과 관리의 득실을 알게 되었다. 장하로부터 학비를 지원받아 학문도 익혔다.
기원전 74년 소제가 붕어하자, 창읍왕 유하가 즉위했지만 품행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곽광 등의 추천에 의해 상관황태후의 조서를 받아 양무후(陽武侯)에 봉작되었고 머지않아 즉위하였다. 즉위할 때, 기휘가 어려워 휘를 병이(病已)에서 순(詢)으로 고쳤다.
소제의 사망으로부터 창읍왕의 폐위를 거쳐 선제의 즉위에 이르는 일련의 움직임은 곽광이 주도한 것이어서, 정권은 계속해서 대사마대장군 곽광이 권력을 차지하였다.
2. 2. 곽씨 세력 제거와 친정
선제는 곽광이 죽은 지 2년 후인 기원전 66년에 곽씨 일족을 제거하고 친정을 시작했다. 곽광의 유족들이 반란을 계획한 것을 이유로 그들을 처형했는데, 반란 성공 후 제위를 찬탈할 예정이었던 대사마 곽우는 요참형에 처해졌고, 황후였던 곽씨 (곽광의 딸)는 폐위되어 유폐되었다.[1]선제는 곽씨 일족의 권력, 특히 군 지휘권을 서서히 박탈하고, 외척인 허씨 등에게 권력을 주었다. 곽광의 부인 선씨는 자신의 딸 곽성군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허황후를 독살했는데, 이 사실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선제 폐위 음모를 꾸몄으나 발각되어 곽씨 가문이 몰살당했다. 이 일로 훗날 역사학자들은 선제가 곽광의 은혜를 몰랐다고 비판했다.[1]
2. 3. 통치와 업적
선제는 법가주의적 정치 신조에 따라 감세, 상평창 설치, 국민에게 작위 수여 등 내정 중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으로 무제 이후 피폐해진 경제를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민간에서 성장하여 민중의 실정을 잘 알았던 선제만이 가능한 시책이었다.외교면에서는 오손과 제휴해 서역에 진출, 기원전 71년에는 15만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흉노를 침공했다. 흉노가 재빨리 달아나 직접적인 소득은 적었으나, 흉노는 달아나는 과정에서 막대한 손실을 입어 약화되었다. 큰 타격을 받은 흉노는 자연재해가 겹치고 정령과 오환에게까지 공격받아 전한으로 쳐들어올 여력이 없었고, 얼마 못 가 분열됐다. 기원전 51년에는 분열된 흉노의 선우 중 호한야 선우를 항복시키는 등, 약화되고 있던 한나라의 국력을 부흥시키는 데 힘썼다. 이러한 성과로 선제는 한나라 중흥의 군주로 평가받는다.
현실주의자였던 선제는 이상주의적인 유교를 싫어하여, 유교에 심취한 황태자(후의 원제)와는 뜻이 맞지 않아 폐위도 생각했지만, 원제에게 후손이 태어난 것을 이유로 보류했다.
선제는 "신상필벌"(『한서』 선제기의 평언)을 기준으로 한 법가주의적 정치 신조에 따라 홍공·석현 등 유능한 법정통을 관료로 기용하고, 정책에 어두운 유학자들을 정치의 중추에서 멀리했다. 감세나 상평창 설치, 국민에게 작위 수여, 중앙(중서를 통한 황제에게의 직접 상소와 상서의 권한 축소)과 지방(지방 행정을 현 중심에서 군 중심으로 이행)에서의 행정 개혁, 범죄 단속을 위한 형벌 강화와 같은 정책을 실시했다. 이는 민력을 휴양시키면서 중앙 정부의 권력 강화를 꾀하는 내정 중시 정책이었으며, 그 결과 무제 이후 국내의 피폐를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옥리(獄吏)에 의한 형무소 내에서의 학대를 금지하고 부당하게 고액으로 민중의 생활을 압박하던 소금의 가격(당시는 정부의 전매였다)을 대폭 낮춘 것은, 형무소에서 성장한 후 민간에서 생활했던 선제만이 할 수 있는 시책이라고 할 수 있다.[1]
외교 면에서는 오손과 연계하여 서역에 진출, 흉노를 약화·분열시키고, 감로 3년에는 흉노의 호한야 선우를 항복시키는 등, 한때 약화되었던 한나라의 국세를 부흥시키는 데 힘썼다.[1]
이러한 내외 정치에서의 성과로부터, 문무에 공적이 있었다고 평가받았으며, 반고의 『한서』 선제기에서 전한 중흥의 조라는 평가를 받았다.[1]
서민 생활을 오랫동안 겪어 세정에 통달한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이상주의·회고주의인 유교를 싫어했고, 유교에 경도된 황태자 유석과는 사이가 좋지 않아 폐태자도 생각했다. 유자 등용을 진언한 황태자를 일갈한 말은 예로부터 명언으로 여겨지며, 『한서』·『십팔사략』 등에서 널리 일본 사회에도 유포되었다.[1]
2. 4. 만년과 죽음
선제는 초기 치세에 혁신, 관대한 관리 임명, 경청하는 자세로 알려졌다. 기원전 67년, 사법 관리 루온수의 제안에 따라 최종 항소를 담당하는 판사 4명을 추가하여 사법 제도를 개혁했다.만년에 선제는 다소 사치스러워졌지만, 여전히 검소했다. 통치 초기의 부지런함도 줄어들었고, 관리들의 허위 보고 검토도 소홀해졌다. 예를 들어, ''봉황'' (신성한 은총의 상징) 보고가 많았으나, 대부분 조작으로 밝혀졌음에도 선제는 비판 없이 받아들였다. 촉에서 녹색 수탉과 황금말 목격담이 보고되자, 선제는 시인 왕포를 파견해 조사하게 했으나 왕포는 가는 길에 병사했다. 그러나 선제는 백성에 대한 관심과 불필요한 군사 행동 자제로 특징지어졌다. 기원전 59년, 흉노 내전 발발 시, 장군들은 흉노 멸망을 원했으나, 선제는 평화를 장려하며 흉노 왕자들의 복종을 기대했다.
기원전 53년, 황태자 유석의 유교 관리 의존과 결단력 부족에 실망한 선제는 회양왕 유흠을 황태자로 고려했으나, 허평군과의 관계와 젊은 시절 장인 의존을 기억하여 실행하지 못했다.
기원전 51년, 호한야 선우 방문 후, 선제는 성공에 기여한 핵심 관리 11명의 초상화를 미앙궁에 그리게 했다. 11명은 다음과 같다.
곽광은 이름 대신 칭호로 언급되어 더 큰 영예를 받았다.
당시 서한은 무제 시대보다 넓은 영토를 가졌다.

선제는 기원전 49년 사망했고, 황태자 유석이 원제로 즉위했다. 두릉(杜陵중국어)은 시안시 남동쪽 약 15km에 있다. 선제는 유오 (성제) 출생으로 유석의 폐위를 보류했다. 황룡 원년 12월 갑술(기원전 48년 1월 10일), 선제는 미앙궁에서 붕어했다. 원제는 유학자를 중용하여 왕망의 전제를 초래, 전한 멸망의 단서를 열었다.
3. 정책
선제는 법가주의적 정치 신조에 따라 감세, 상평창 설치, 백성에게 작위 수여, 중앙과 지방 행정 개혁, 범죄 예방을 위한 형벌 강화 등 내정 중시 정책을 펼쳤다.[1] 이러한 정책으로 무제 이후 피폐해진 경제를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1] 이는 백성의 실정을 잘 아는 선제만이 할 수 있는 정책이었다.[1]
선제는 옥리(獄吏)에 의한 형무소 내 학대를 금지하고, 소금 가격을 대폭 낮추는 등 백성의 생활을 개선하는 정책을 펼쳤다.[4]
외교적으로는 오손과 협력하여 서역에 진출하고, 기원전 71년에는 15만 대군으로 흉노를 공격했다.[1] 직접적인 성과는 적었지만, 흉노가 퇴각 과정에서 큰 피해를 입어 약화되었다.[1] 이후 흉노는 자연재해, 정령, 오환의 공격으로 전한을 침략할 여력이 없었고, 기원전 51년에는 호한야선우가 항복하는 등 한나라의 국력이 회복되었다.[1]
선제는 현실주의자로 유교를 싫어했고, 유교에 심취한 황태자(후의 원제)와는 뜻이 맞지 않아 폐위까지 고려했다.[1]
선제는 "한 왕조에서는 예로부터 패도[법가]와 왕도[유가]의 좋은 점을 취사선택하고 있다. 유교만을 가치 있게 여기고, 유교의 이상인 주나라의 정치로 되돌리는 따위의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라며 유학자들을 비판했다.[4]
선제의 초기 치세는 혁신 의지, 백성에게 관대한 관리 임명, 조언 경청 등으로 알려졌다.[2] 예를 들어, 기원전 67년 사법 관리 루온수의 건의에 따라 최종 항소를 심리하는 항소 판사 4명을 추가하여 사법 제도를 개혁했다.[2]
선제는 조충국()과 서신을 교환하며 강족(Qiang (historical people)) 반란 진압 전략을 논의하는 등 군사 전략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3] 조충국의 온건책을 받아들여 큰 유혈 사태 없이 강족을 평정했다.[3]
선제는 기원전 61년 불로불사 추구가 어리석은 일임을 깨닫고 중단했다.[3]
선제의 조정은 문학 중심지였으며, 왕포, 유향 등이 활동했다.[4]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황후 | 공애황후 허씨 | 원제 유석의 생모 |
황후 | 폐후 곽씨 | |
황후 | 효선황후 왕씨 | |
후궁 | 첩여 장씨 | 회양헌왕 유흠의 생모 |
후궁 | 첩여 위씨(婕妤 衛氏) | 초효왕 유오의 생모 |
후궁 | 첩여 공손씨(婕妤 公孫氏) | 동평사왕 유우의 생모 |
후궁 | 첩여 융씨(婕妤 戎氏) | 중산애왕 유경의 생모 |
후궁 | 첩여 화씨(婕妤 華氏) | 관도공주 유시의 생모 |
후궁 | 미인 이씨(美人 李氏) | |
후궁 | 미인 주씨(美人 周氏) | |
후궁 | 미인 양씨(美人 梁氏) | |
? | 경무공주 | |
자녀 | 이름 | 비고 |
장남 | 원제 유석 | 공애황후 허씨 소생 |
차남 | 회양헌왕 유흠 | 첩여 장씨 소생 |
3남 | 초효왕 유오 | 첩여 위씨(婕妤 衛氏) 소생 |
4남 | 동평사왕 유우 | 첩여 공손씨(婕妤 公孫氏) 소생 |
5남 | 중산애왕 유경 | 첩여 융씨(婕妤 戎氏) 소생 |
장녀 | 관도공주 유시 | 첩여 화씨(婕妤 華氏) 소생 |
차녀 | 경무공주 | 생모 미상 |
5. 평가
전한 선제의 만년에는 생활이 다소 사치스러워졌지만 지출은 여전히 비교적 검소했다. 그는 국가를 통치하는 초기의 부지런함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관리들의 허위 보고를 검토하는 데에도 덜 적극적이었다.[1] 예를 들어, 이 기간 동안 ''봉황'' (신성한 은총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신화 속의 새)의 보고가 많이 있었는데, 고대 중국에는 봉황으로 여겨졌던 희귀한 새의 실제 목격담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이러한 보고의 상당수는 조작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황제 선제는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고 받아들였다.[1] 촉에서 녹색 수탉과 황금말이 목격되었다는 보고가 있자, 선제는 촉 출신의 총애하는 시인 왕포를 파견하여 조사하고 황금말을 가져오도록 했지만, 왕포는 가는 길에 병으로 사망했다.[1]
그러나 선제의 통치는 이 시기에도 백성에 대한 관심과 불필요한 군사 행동을 피하려는 경향으로 특징지어졌다. 기원전 59년, 흉노 내전이 발발하여 흉노 왕자들이 서로 싸우게 되자, 많은 장군들은 이 기회에 흉노를 완전히 멸망시키기를 원했다. 그러나 선제는 흉노 왕자들이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기대하며 그들 사이의 평화를 장려했다.[1]
이러한 노력은 성과를 거두어, 기원전 56년까지 흉노는 룬전(閏振|윤진중국어), 호한야(), 지즈()의 세 정권으로 분열되었다. 이들 모두 한나라와 평화를 추구했고, 한나라는 군사 방어 병력을 5분의 1로 줄여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할 수 있었다.[1] 기원전 54년, 선우 룬전은 선우 지즈에게 패배하여 살해당했고, 지즈는 흉노를 재통일하기 위해 선우 호한야를 격파하려 했다. 이에 기원전 53년, 관료의 조언에 따라 선우 호한야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한나라의 보호를 요청하며 속국이 되기를 청했다.[1] 기원전 51년, 선우 호한야는 한나라의 속국으로서 장안을 공식 방문했고, 선제는 호한야가 두려움이 아닌 감사의 마음으로 복종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그에게 절할 필요가 없고 황실 왕자들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도록 명령했다. 또한 선제는 선우 호한야의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원정군을 파견했다.[1] 기원전 49년, 선우 호한야는 두 번째 방문을 했다. 한나라의 지원으로 그의 세력이 커지면서, 이전에 더 강했던 선우 지즈는 서쪽으로 이동해야 했다.[1]
기원전 53년, 황태자 석이 유교 관리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하고 결단력이 부족하다고 판단한 선제는 회양왕 유친을 대신 황태자로 삼는 것을 고려했지만, 황태자 석의 어머니인 허황후가 자신의 첫사랑이었고 독살당했다는 점과 젊은 시절 장인에게 의존했던 기억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1]
기원전 51년, 선우 호한야의 방문 이후, 선제는 자신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한 핵심 관리 11명의 초상화를 미앙궁의 주요 갤러리에 그려 넣었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1]
곽광은 이름이 아닌 칭호로만 언급되었는데, 이는 다른 10명에게 주어진 것보다 훨씬 더 큰 영예였다.[1]
이 무렵, 서한 왕조는 무제 시대보다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며 전성기를 맞이했다.[1]
선제는 기원전 49년에 사망했고, 황태자 석(원제)이 뒤를 이었다. 그의 무덤 두릉(杜陵|두릉중국어)은 시안시 남동쪽 약 15km 지점에 있다.[1]
5. 1. 긍정적 평가
전한 선제 중기에 황제의 통치는 정직한 관리를 등용하고 백성을 돌보는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또한 서역 국가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하여 강력한 속국으로 만드는 특징을 보였다. 그는 세부 사항에 주의를 기울였고, 소수 민족 및 외국과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군사 전략에 대해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구체적인 논의를 나누는 등, 장군들과 서신을 주고받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1] 예를 들어, 기원전 62년부터 기원전 60년까지 장군 조충국()이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란을 고려하고 있던 강족을 진압하는 임무를 수행했을 때의 서신 교환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조충국은 다른 장군들이 제안한 섬멸 전략에 반대했다. 선제는 처음에 이 계획을 승인하고 미래의 반란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 정착지를 세웠으나, 결국 부족을 더 잘 대우하는 것을 옹호했고, 강족은 큰 유혈 사태 없이 평정되었다.[1] 기원전 61년, 선제는 짧은 기간 동안 마법에 빠졌다가 불로불사를 추구하는 것이 어리석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그의 증조부인 무제와 그 이전의 많은 황제들과는 달리).[1]기원전 64년에 선제는 새로운 황후를 세울 것을 고려했다. 당시 가장 총애하는 후궁은 화, 장, 위였다. 그는 아들 유흠(후에 회양왕)의 어머니인 장후를 황후로 세우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지만, 곽황후가 태자 석을 독살하려 했던 사건으로 인해 충격을 받았고, 장후가 황후가 되면 같은 일이 반복될까 두려워했다. 그는 아들이 없고, 인자하며 부드럽지만 필요할 때는 강하고 엄격하며 도덕적 가치를 가진 황후를 선택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그리하여 총애하는 후궁 중 하나가 아닌 왕후를 황후로 세우고 태자 석을 그녀의 아들로 키우게 했다.[1]
같은 해, 그는 백성들이 황제를 존경하여 연설이나 글에서 황제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휘(naming taboo)를 쉽게 수행할 수 있도록 이름을 훈(詢|순중국어)으로 바꾸었다. '빙'과 '이'는 모두 피하기 어려운 흔한 글자였기 때문이다.[1]
기원전 63년, 선제는 빙이 자신에게 기여한 바를 깨닫고 그와 그의 양육에 관여한 사람들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결심했다. 빙과 장합의 양자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열후에 봉해졌다. 그를 친절하게 대했던 감옥 간수들도 포상받았다. 그의 유모였던 호와 곽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들의 후손을 찾아 보상했다.[1]
5. 2. 부정적 평가
기원전 66년, 곽광의 가문이 허황후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선씨 부인은 아들과 조카들에게 자신이 실제로 허황후를 살해했다고 밝혔다. 황제가 실제 증거를 확보할 경우 어떤 조치를 취할지 두려워한 선씨 부인과 그녀의 아들, 조카, 사위들은 황제를 폐위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음모는 발각되었고, 선제는 곽씨 가문을 몰살시켰는데, 이 행위는 훗날 사마광의 《자치통감》 등에서 곽광에 대한 은혜를 모른다는 비판을 받았다.[2]6. 기타
- 텔레비전 드라마
- *: 雲中歌|운중가중국어 (2013년, 중국, 배역: 천샤오)
- 만화
- *: 蒼木友|아오키 토모일본어 『천공의 옥좌』 - 주요 인물로 선제와 그의 아내 허평군을 모델로 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 *: 加藤四季|카토 시키일본어 『아가씨와 나 - 뜻밖의 중국 연애 그림책』 - 주인공 중 한 명으로, 하층 귀족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으로 등장. 아가씨인 허평군의 괄괄한 성격을 반쯤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우연한 기회로 결혼하게 된다.
- *: 白井恵理子|시라이 에리코일본어 『영원한 어둠의 궁궐 여명의 별』(『마경의 문 비접의 검』수록) - 후의 허소군을 사랑하는 마음씨 착한 황제로 묘사된다.
참조
[1]
문서
Changed to make it easier for people to avoid breaching the custom of naming taboo on the Emperor's name, as bing and yi are both very common characters
[2]
서적
Emperor Xuan's biography in Book of Han indicated that he was a few months old when his grandfather Liu Ju became embroiled in the "witchcraft disaster".
[3]
서적
jiaxu day of the 12th month of the 1st year of the Huang'long era, per Emperor Xuan's biography in Book of Han and vol. 26 of Zizhi Tongjian.
[4]
서적
Han-shu 9.1a; Dubs, Han-shu II. 189, 299–300
[5]
서적
Shen Pu-Hai: A Chinese Political Philosopher of the Fourth Century B. C.
[6]
문서
At the time of his son's birth, Jin was about 22 years old. His wife's age at the time is not known, but given that her husband was 22, she was most likely around 20 years old.
[7]
문서
Huo Guang's wife Lady Xian plotted to have a Lady Wang, who was Emperor Xuan's grandmother, murdered as part of her plot to overthrow the emperor and place the Huos on the throne. Since it is known that Emperor Xuan's paternal grandmother was Consort Shi, this Lady Wang must have been Consort Wang's mother.
[8]
문서
中国の歴史家は昌邑王劉賀の即位を認めていない。
[9]
서적
『漢書』外戚伝第六十七上
[10]
문서
《서악화산비》(西嶽華山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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