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운 (동평양왕)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운은 전한 시대의 제후로, 홍가 원년(기원전 20년)에 동평왕에 봉해졌다. 그는 황제를 저주했다는 혐의를 받아 자살했으며, 그의 봉국은 폐지되었다. 이후 왕망의 배려로 아들 유개명이 동평왕에 봉해졌다.

유운 (동평양왕)
기본 정보
휘호묘(繆)
시호동평사왕(東平思王)
작위동평왕(東平王)
유(劉)
이름운(雲)
생몰년기원전 52년 ~ 기원후 23년
국적중국
시대전한 ~ 신
묘소양경현(陽卿縣) 동원(東原)
가족 관계
부친유우
모친정희
배우자가증(賈增)
임보(任 provisions)
자녀유광
유흔
유숭(劉竦)
유개(劉蓋)
유회양(劉恢讓)
유경(劉慶)
관직
관직승상
기타
관련된 인물왕망
공손록
장방(張放)
손총(孫寵)
이심(李尋)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 기원전 1세기 중국 사람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기원전 1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 전한의 제후왕 - 전한 무제
    전한의 제7대 황제인 전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며 유교 기반 중앙집권 강화, 흉노 정벌을 통한 영토 확장, 소금과 철의 전매제 등 경제 개혁을 추진하여 전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과도한 군사 지출, 사치스러운 생활, 무고의 난 등 부정적인 면모도 보였다.
  • 전한의 제후왕 - 유굉 (광릉왕)

2. 생애

홍가 원년(기원전 2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평왕에 봉해졌다. 애제 치세 말기인 건평 3년(기원전 4년), 황제를 저주했다는 혐의로 고발당했다. 당시 정위 양상 등이 무죄 가능성을 제기하며 재조사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애제는 유운을 폐위시키고 방릉으로 유배보냈다. 유운은 결국 그 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애제의 총신 동현에게 공을 돌리기 위해 조작되었다는 의혹이 있으며, 유운의 무죄를 주장했던 승상 왕가는 후에 옥사하였다. 유운 사후 동평국은 일시적으로 폐지되었으나, 평제 즉위 후 실권을 잡은 왕망의 조치로 원시 원년(1년)에 아들 유개명이 동평왕위를 계승하였다. 이후 거섭 2년(7년)에 아들 유신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당시 권력자 왕망은 유운이 아버지를 독살하고 '거서'(큰 쥐)라고 불렀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2.1. 동평왕 즉위

홍가 원년(기원전 20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동평왕에 봉해졌다.

2.2. 황제 저주 혐의와 죽음

애제 치세(기원전 7년 이후)에, 유운이 다스리던 동평국(東平國)의 무염현(無鹽縣) 위산(ως山)에서는 흙이 솟아올라 풀을 덮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고, 호산(瓠山)에서는 큰 돌이 저절로 굴러 똑바로 서는 일이 발생했다. 유운은 후궁 비(妃)인 알(謁)과 함께 현지에 가서 이 돌에 제사를 지냈다. 돌아와서는 동평국의 궁궐 안에 호산을 본떠 돌로 산을 만들고, 그 위에 돌을 세운 뒤 풀을 엮어 만든 신상(神像)으로 사당을 꾸며 제사를 이어갔다.

건평 3년(기원전 4년) 3월, 손총(孫寵)과 식부궁(息夫躬)은 유운의 이러한 제사 행위가 황제를 저주하는 것이라고 고발했다. 애제는 이 고발의 공을 자신이 총애하던 동현(董賢)에게 돌리기 위해, 관련 문서를 위조하여 마치 동현이 중간에서 역할을 한 것처럼 꾸몄다는 의혹이 있다. 옥중 조사를 받게 된 비 알(謁)은 무당 부공(傅恭)과 다른 비 합환(合歡)에게 이 신에게 제사를 지내 황제를 저주하고 유운을 천자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고 자백했다. 또한 알은 유운이 재앙을 예지하는 능력이 있다고 알려진 고상(高尙)과 성숙(成叔)을 언급하며, 애제가 병으로 죽고 유운이 천하를 얻을 것이며, 호산에 돌이 선 것은 선제가 등극할 때의 징조와 같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증언이 나오자 관리들은 유운을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정위(廷尉)였던 양상(梁相) 등은 유운의 무죄 가능성을 의심하고 사건의 진상을 다시 조사하기 위해 유운의 신병을 수도 장안(長安)으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이 시도는 애제의 분노를 사 양상 등 관련자들은 모두 파면되었다.

결국 애제는 조서를 내려 동평왕 유운을 폐위시키고 방릉(房陵)으로 유배 보내도록 명령했다. 유운은 그 해(기원전 4년)를 넘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비 알(謁)은 기시(棄市, 참수 후 시신을 거리에 내거는 형벌)에 처해졌다. 유운 사후 동평국은 폐지되었다.

건평 4년(기원전 3년) 8월, 애제는 이 사건 처리에 공이 있다며 동현 등을 열후에 봉했다. 한편, 승상이었던 왕가(王嘉)는 유운의 무죄를 주장하며 파면된 양상 등의 복직을 요구하다가 애제의 미움을 사 파면되었고, 원수 원년(기원전 2년)에는 결국 옥중에서 사망했다.

애제가 병사하고 평제가 즉위한 후, 실권을 잡은 왕망(王莽)의 조치로 원시 원년(1년)에 유운의 아들 유개명(劉開明)이 동평왕의 작위를 이어받아 봉국이 복원되었다.

2.3. 사후

유운이 건평 3년(기원전 4년) 황제 저주 혐의로 조사를 받던 중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의 봉국인 동평국은 폐지되었다.

이후 애제가 병사하고 어린 평제가 즉위하면서 외척인 왕망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원시 원년(1년), 왕망의 배려로 유운의 아들 유개명이 다시 동평왕으로 봉해져 폐지되었던 왕위를 잇게 되었다.

한편, 애제는 유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총신이었던 동현에게 공을 돌리기 위해 문서를 위조하고, 건평 4년(기원전 3년) 8월에는 동현 등을 열후에 봉하는 등 사건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반면, 유운의 무죄 가능성을 제기하며 공정한 조사를 촉구했던 정위 양상 등은 애제의 분노를 사 파면되었고, 승상 왕가 역시 유운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결국 파면되고 원수 원년(기원전 2년)에는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3. 가계

* 동평사왕 유우
동평양왕 유운
* 동평왕 유개명
* 엄향후 유신
* 무평후 유황
* 도향후 유회
* 태향후 유포
* 창향후 유단
* 신향후 유리
*** 춘성후 유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