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우 (동평사왕)
1. 개요
유우는 전한 선제의 아들로, 감로 2년(기원전 52년)에 동평왕에 봉해졌다. 그는 불법 행위와 황제의 자리를 넘보는 언행으로 인해 여러 차례 벌을 받았으며, 학문에 대한 관심을 보였으나 결국 좌절되었다. 홍가 원년(기원전 20년)에 사망하여 시호를 사(思)라 하였으며, 아들 유운이 뒤를 이었다. 동평국은 유운 사후 저주 사건에 연루되어 일시 폐지되는 등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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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선제의 황자 -
전한 원제
전한의 제11대 황제인 원제는 유교를 숭상했으나 환관의 발호와 파벌 정치로 국정을 혼란에 빠뜨렸고 흉노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왕소군을 시집보냈으며 아들 유오가 성제로 즉위했다. -
전한 선제의 황자 -
유오 (초효왕)
유오는 전한 선제의 아들로 정도왕에 봉해졌다가 초왕으로 옮겨 봉해졌으며 초효왕이라 불렸고, 성제 시기 입조했다가 병으로 죽어 초회왕 유문 등 여러 아들을 두었다. -
기원전 20년 사망 -
복주류약제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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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0년 사망 -
우영 (전한)
우영은 전한 시대의 인물로, 젊은 시절에는 술을 좋아했으나 서른 살에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효행으로 명성을 얻어 관도공주와 혼인하여 산기상시, 광록훈, 어사대부를 지냈으며, 시호는 경이다. -
전한의 종실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전한의 종실 -
전한 무제
전한의 제7대 황제인 전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며 유교 기반 중앙집권 강화, 흉노 정벌을 통한 영토 확장, 소금과 철의 전매제 등 경제 개혁을 추진하여 전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과도한 군사 지출, 사치스러운 생활, 무고의 난 등 부정적인 면모도 보였다.
2. 생애
감로 2년(기원전 52년), 선제의 아들 유우는 동평왕에 봉해졌다. 형 원제가 즉위한 후 봉국으로 부임했으나,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고 죄를 지었다. 원제는 유우를 용서하는 대신 동평나라의 재상과 태부를 벌하였다. 유우는 생모 공손첩여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원제는 사자를 보내 유우를 꾸짖었다.
원제가 붕어하고 성제가 즉위하자, 유우는 황제의 자리를 넘보는 발언을 했다. 세 번 곡하는 것 외에 복상하지 않고 평소처럼 지냈다. 유우는 총애하던 희첩을 매질하고 살해하여, 관원들이 유우를 잡아들일 것을 상주했다. 성제는 영지 중 2개 현을 빼앗는 데 그쳤고, 3년 후 돌려주었다.
이후 유우는 장안에 입조하여 제자백가의 책과 《사기》를 읽고 싶다고 상주하였다. 성제는 대장군 왕봉에게 의견을 물었고, 왕봉은 "제자백가의 서적은 성인의 말씀이 아니며, 《사기》에는 전국 시대의 종횡가와 한나라가 흥할 때의 권모술수, 지형과 재앙 등이 기록되어 있으니, 제후왕이 가져서는 안 됩니다"라고 반대하여, 성제는 이를 거절하였다.
홍가 원년(기원전 20년)에 죽으니 시호를 사(思)라 하였다. 아들 유운이 동평왕을 이었으나, 애제 때 저주 사건에 연루되어 자살하고 동평국은 일시 폐지되었다. 왕망 집권 후 유운의 태자 유개명이 동평왕으로 봉해졌으나 요절했다. 유개명의 형 엄향후 유신의 아들 유광이 동평왕이 되었으나, 유신이 반란을 일으켜 패배하면서 동평국은 왕망에 의해 멸망했다.
2.1. 동평왕 책봉과 불법 행위
감로 2년(기원전 52년), 선제의 아들 유우는 동평왕으로 봉해졌다. 형 원제가 즉위한 후 봉국으로 부임했으나, 나쁜 사람들과 어울리고 죄를 지었다. 원제는 유우를 용서하는 대신 동평나라의 재상과 태부를 벌하였다. 유우는 생모 공손첩여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원제는 사자를 보내 유우를 꾸짖었다.
2.2. 황제 즉위와 왕위 찬탈 시도
원제가 붕어하고 성제가 즉위하자, 유우는 황제의 자리를 넘보는 발언을 했다. 세 번 곡하는 것 외에 복상하지 않고 평소처럼 지냈다. 유우는 총애하던 희첩을 매질하고 살해하여, 관원들이 유우를 잡아들일 것을 상주했다. 성제는 영지 중 2개 현을 빼앗는 데 그쳤고, 3년 후 돌려주었다.
유우가 황제의 자리를 넘보며 한 발언은 다음과 같다.
2.3. 학문적 관심과 좌절
이후 유우는 장안에 입조하여 제자백가의 책과 《사기》를 읽고 싶다고 상주하였다. 성제는 대장군 왕봉에게 의견을 물었고, 왕봉은 "제자백가의 서적은 성인의 말씀이 아니며, 《사기》에는 전국 시대의 종횡가와 한나라가 흥할 때의 권모술수, 지형과 재앙 등이 기록되어 있으니, 제후왕이 가져서는 안 됩니다"라고 반대하여, 성제는 이를 거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