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유탁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탁은 후한 말 영릉태수였으며, 209년 유비에게 항복했다. 이후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 『후한서』에는 연희 5년 형주 남부 반란 당시 형주 자사 유도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언급되어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에게 항복하여 영릉태수 직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후한말 사람 - 화타
    화타는 중국 후한 말의 명의로, 약물 처방, 침술, 마취 수술 등 뛰어난 의술을 펼쳤으며, 조조의 치료를 거부하여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후한말 사람 - 유표 (흉노)
    유표는 남흉노 선우 우부라의 아들이자 연제씨 일족으로, 흉노 출신 최초로 유씨 성을 사용했으며, 남흉노가 다섯 부로 나뉘었을 때 좌부를 통괄했고, 그의 아들 유연은 한조를 건국했다.
  • 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유탁 - [인물]에 관한 문서

2. 생애

후한 말기의 관리로 영릉군 태수(太守중국어)를 지냈다. 건안 14년(209년), 유비가 형주 남부 4군을 공격하자 다른 태수들과 함께 유비에게 항복하였다.[1][4] 항복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

한편, 『후한서』에 기록된 연희 5년(162년)의 형주 자사 유도(劉度)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한다.[5][6]

2. 1. 후한 말기의 관료

영릉군(零陵郡, 현재 후난성 융저우시 부근)의 태수(太守중국어)를 지냈다.

건안 14년(209년), 적벽대전 다음 해에 유비(劉備)가 유기(劉琦)를 형주자사로 삼는다는 명분으로 형주 남부의 4개 군(무릉, 장사, 계양, 영릉)으로 진공하였다.[1][4] 이때 영릉태수였던 유탁은 다른 세 군의 태수들(금선(金旋), 한현(韓玄), 조범(趙範))과 마찬가지로 유비에게 항복하였다.[1][4] 유비에게 항복한 이후 그의 생사를 포함한 행방은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후한서』의 「도상전」과 「남만전」에는 연희 5년(162년)에 형주 남부에서 교주에 걸쳐 발생한 반란 당시 형주 자사의 이름도 유도(劉度)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유도는 반란군에게 패배하여 도망쳤고, 이로 인해 처벌받아 환제와 주목(朱穆)에 의해 도상(度尚)으로 교체되었다.[5][6] 만약 이 인물이 영릉태수 유탁과 동일 인물이라면, 47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같은 지역(형주 남부)에 태수로 부임한 것이 된다.

2. 2. 유비에게 항복

영릉군(零陵郡, 현재 후난성 융저우시 부근)의 태수(太守|타이서우중국어)를 지냈다.[1] 적벽대전 다음 해인 건안 14년(209년), 유비유기형주 자사로 삼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형주 남부의 4개 군(무릉, 장사, 계양, 영릉)으로 진공했다.[4][1] 당시 영릉태수였던 유탁은 다른 세 군의 태수인 금선, 한현, 조범과 함께 유비에게 항복하였다.[1][4] 유비에게 항복한 이후 유탁의 생사를 포함한 행방은 불명이다.[4]

한편, 『후한서』의 기록에 따르면 연희 5년(162년) 형주 남부에서 교주에 걸친 반란 당시 패전하고 도주하여 처벌받은 형주 자사의 이름 역시 유도(劉度)였다. 당시 환제와 주목은 유도를 도상으로 교체했다.[5][6] 만약 이 두 인물이 동일 인물이라면, 유탁은 처벌받은 지 47년 만에 다시 같은 지역의 태수로 부임한 것이 된다.[5][6]

2. 3. 연희 5년의 유도와의 동일 인물설

후한서』의 「도상전」과 「남만전」에 따르면, 연희 5년(162년)에 형주 남부에서 교주에 걸쳐 반란이 발생했을 때 형주 자사의 이름도 유도였다고 한다. 이 유도는 반란 진압에 실패하여 패전하고 도망쳤으며, 이로 인해 벌을 받고 환제와 주목에 의해 도상으로 교체되었다.[5][6] 만약 영릉군 태수 유도와 이 형주 자사 유도가 동일 인물이라면, 약 47년이 지난 후에도 같은 지역(형주)에 다시 부임한 것이 된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유탁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유탁은 영릉 태수로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유탁에게는 유현(판본에 따라 유연으로 표기되기도 함)이라는 아들과 형도영(가공 인물)이라는 부하 장수가 있는 것으로 설정되었다.[2][7] 연의에서 유탁은 유비와의 싸움에 소극적이었으나, 항전을 주장하는 아들 유현에게 밀려 싸움에 나서게 되는 인물로 묘사된다.[7] 이후 형도영은 전사하고 유현은 사로잡히자 유비에게 항복하며, 항복 후 영릉 태수 직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그려진다.[2][7]

3. 1. 유비와의 대립

208년 유비형주 남부 지역을 공략하는 형주 평정전 과정에서 영릉군을 공격하였다.[2][7] 당시 영릉 태수였던 유탁은 아들 유현과 장수 형도영을 보내 유비군을 막으려 했다.[2][7] 그러나 형도영은 전사하고 유현마저 사로잡혀 항복하자[2], 유탁 역시 성문을 열고 유비에게 항복하였다.[2][7] 유비는 항복한 유탁을 처벌하지 않고 영릉 태수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하도록 하였다.[2][7]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연의에서 유탁은 유비와의 싸움에 소극적이었으나, 항전을 강하게 주장하는 아들 유현(판본에 따라 유연으로 표기되기도 함)의 뜻에 따라 유현과 부하 장수 형도영(연의에서는 가공의 인물로 묘사됨)에게 군사를 내어준다.[2][7] 하지만 형도영은 전사하고 유현은 사로잡히는 패배를 겪자, 유탁은 결국 유비에게 항복한다.[2][7] 이후 유비에 의해 다시 영릉 태수로 임명되는 것으로 묘사된다.[2][7]

3. 2. 항복과 그 후

208년 형주 평정전에서 유비가 영릉으로 쳐들어오자, 유탁은 아들 유현(劉賢)과 장수 형도영(邢道榮)을 보내 이를 막으려 했다. 그러나 형도영은 전사하고 유현마저 유비에게 항복하자, 유탁 자신도 결국 유비에게 항복하였다. 항복 후에도 유탁은 영릉 태수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도 유탁은 영릉 태수로 등장한다. 소설 속에서 유탁은 아들 유현(판본에 따라 유연으로 표기되기도 함)과 가공의 장수 형도영을 부하로 두고 있다.[2]삼국지연의》에서 유탁은 유비와의 싸움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항전을 강하게 주장하는 아들 유현에게 밀려 유현과 형도영을 출전시킨다. 하지만 형도영은 전사하고 유현마저 사로잡히자, 유탁은 성문을 열고 유비에게 항복한다. 유비는 항복한 유탁을 다시 영릉 태수로 임명하였다.[7]

3. 3. 연의 속 부하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 Yanyi
[3] 서적 正史三国志5 蜀書 ちくま学芸文庫
[4] Wikisource 三國志
[5] Wikisource 後漢書
[6] Wikisource 後漢書
[7] Wikisource 三國演義/第052回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