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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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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비는 삼국 시대 촉한의 초대 황제이다. 그는 한나라 황족의 후손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짚신과 멍석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관우, 장비와 의형제를 맺고 의병을 일으켰으며, 이후 여러 군벌 간의 다툼 속에서 세력을 키웠다. 유표에게 의탁하여 신야에 머물며 제갈량을 얻고, 적벽 대전에서 승리하여 형주를 차지했다. 익주를 점령한 후 한중왕에 즉위했으며, 221년 황제로 즉위하여 촉한을 건국했다. 그러나 이릉 전투에서 패배하고 백제성에서 병사했다. 유비는 인덕을 중시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면모를 보였으나, 결단력 부족과 권모술수 부족이라는 평가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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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당나라 시대의 유비 초상화
당나라 시대 염립본이 그린 유비 초상화
이름유비 (劉備)
현덕 (玄德)
시대후한 말 ~ 삼국 시대
출생161년
출생지한나라 탁군 탁현 (현재 허베이성 바오딩시 줘저우시)
사망223년 6월 10일
사망지촉한 백제성
묘소쓰촨성 청두시 혜릉
시호소열황제 (昭烈皇帝)
묘호열조 (烈祖)
연호장무 (章武) (221년–223년)
재위221년 5월 15일 ~ 223년 6월 10일
가족 관계
아버지유홍
배우자소열황후 감씨
미부인
손부인
목황후 오씨
자녀유선 (촉한 회제)
유영 (간릉왕)
유리 (안평도왕)
딸 최소 2명
친척유비 가계도 참고
군사 경력
소속후한
촉한
주요 전투황건적의 난
반동탁 연합
조조의 서주 침공
원술 토벌전
하비 전투
관도 대전
박망파 전투
장판 전투
적벽 대전
강릉 전투
유비의 입촉
형주 영유권 분쟁
한중 전투
이릉 대전
관직
한중왕219년 7월 또는 8월 ~ 221년 5월 15일 (후한 시대)
촉한 황제221년 5월 15일 ~ 223년 6월 10일
익주목214년 ~ 219년
서주목194년 ~ 198년
기타 정보
로마자 표기Liu Bei
중국어 간체刘备
중국어 번체劉備
병음Liú Bèi
웨이드-자일스Liu² Pei⁴
민난어Lâu Pī
광둥어Lau⁴ Bei⁶
객가어Liú Pî
관련 정보

2. 생애

유비


유비는 후한 말기의 군웅이자 촉한의 초대 황제이다. 탁군 탁현(현재 허베이성 바오딩 시 줘저우 시) 출신으로, 한나라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158] 어린 시절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짚신멍석을 만들어 팔며 가난하게 살았으나,[11] 집안 어른의 도움으로 15세 때 노식 밑에서 공손찬 등과 함께 공부했다.[14][15] 젊은 시절부터 호걸들과 교류하기를 즐겼으며, 특히 관우, 장비와는 형제와 같은 깊은 관계를 맺었다.[213]

184년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관우, 장비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토벌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21][163] 이후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안희현위(安喜縣尉) 등 관직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부패한 독우(督郵)를 매질하고 관직을 버리는 등 순탄치 않은 초기 경력을 보냈다.[24][25] 이후 옛 동문인 공손찬에게 의탁하여 원소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평원상(平原相)이 되어 처음으로 안정적인 기반을 다졌다.[31][165]

193년 조조의 침공을 받은 서주목 도겸을 구원한 것을 계기로 서주를 물려받게 되었으나,[166] 196년 여포의 배신으로 서주를 빼앗기고 조조에게 의탁했다.[162] 조조 휘하에서 좌장군(左將軍)에 임명되는 등 후대를 받았지만,[215] 헌제의 밀조에 가담하는 등 조조를 경계하며 독립을 모색했다. 결국 원술 토벌을 명분으로 조조에게서 벗어나 서주를 다시 점령했으나,[212] 200년 조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원소에게 몸을 의탁했다.[171] 관도대전 전후로 원소 휘하에서 활동하다가 형주의 유표에게로 갔다.

유표에게 의탁하여 신야(新野)에 주둔하던 시기, 삼고초려 끝에 제갈량을 얻으며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는 이후 유비 세력의 기본 전략이 되었다. 208년 조조의 형주 침공 시 피난길에 올랐다가 장판에서 크게 패했으나, 손권과 동맹을 맺고 적벽 대전에서 조조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형주 남부 4군을 평정하고 형주목(荊州牧)이 되어 세력 기반을 확고히 했다.

211년 익주목 유장의 요청으로 익주에 들어가 214년 유장의 항복을 받고 익주를 차지했다. 이로써 형주와 익주에 걸친 세력권을 형성하여 천하삼분지계의 기초를 다졌다. 219년 한중 공방전에서 조조군을 격파하고 하후연을 참살하며 한중을 점령한 뒤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에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형주를 지키던 관우손권의 공격으로 사망하고 형주를 상실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

220년 조비후한 헌제로부터 선양받아 위나라를 건국하자, 221년 유비는 성도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촉한을 세우고 한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함을 선언했다. 연호장무(章武)로 정했다. 관우의 복수와 형주 탈환을 위해 222년 대규모로 오나라를 침공했으나(이릉 전투), 육손의 화공(火攻)에 참패하고 백제성(白帝城)으로 후퇴했다.

이릉 전투 패배의 충격과 오랜 전란으로 심신이 쇠약해진 유비는 223년 4월, 백제성의 영안궁(永安宮)에서 제갈량에게 후사를 부탁하며 6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시호는 소열황제(昭烈皇帝)이며, 성도의 혜릉(惠陵)에 안장되었다.

사서에는 유비의 외모에 대해 키가 7척 5촌(약 1.74m)이고, 팔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왔으며, 귀가 매우 커서 스스로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5] 또한 화양국지에 따르면 여포조조는 유비를 '대이(大耳, 큰 귀)'라고 불렀다고 한다.[6][7] 50대에는 수염이 없었다는 기록도 있다.[8]

청두 무후사의 유비상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삼국시대 유비 묘사


유비는 탁군 탁현(현재 허베이성 바오딩 시 줘저우 시) 누상리 출신이다.[158] 한나라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5세기 배송지의 『삼국지 주석』은 『전략(典略)』을 인용하여 유비가 임읍후(临邑侯)의 후손일 가능성도 제기한다. 임읍후 칭호는 한경제의 다른 아들인 장사왕 유발(劉發)의 후손 유복(劉復)과 그의 아들 유탁탁(劉騊駼), 또는 한경제의 또 다른 아들인 상산군 현왕 유순(劉舜)의 후손 유랑(劉讓) 등이 가지고 있었기에, 유비가 이들 계보 중 하나의 후손일 수도 있다.

유비의 조부 유웅(劉雄)은 효렴으로 추천되어 동군 범현령(范縣令)을 지냈고,[9][10] 부친 유홍(劉弘) 역시 주군의 관리를 지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 때문에 유비는 어린 시절 가난하게 자랐으며, 왕족의 후예라 하더라도 당시 법에 따라 재산이 여러 세대에 걸쳐 분배되면서 평민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유비는 어머니와 함께 짚신멍석을 만들어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집 동남쪽에 높이 다섯 길(약 11.5m)이 넘는 큰 뽕나무가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그 모양이 황제가 타는 수레의 덮개와 비슷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가 특별하다고 여겼다.[11] 탁현의 점쟁이 이정(李定)은 "이 집에서는 반드시 귀한 인물이 나올 것이다"라고 예언하기도 했다.[12] 어린 시절 유비는 이 나무 아래서 다른 아이들과 놀며 "나는 반드시 깃털로 장식된 이 수레(황제의 수레)를 타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를 들은 숙부 유자경(子敬, 유홍의 동생)은 유비의 말이 가문에 화를 불러올 것이라며 꾸짖었다.[13][158] 돈황문서에 따르면 이 일화는 유비가 7세 때의 일이다.[159]

유비는 탁현 시절부터 간옹과 친구로 지냈으며, 이웃에 살던 장비에게는 자신의 집 방 하나를 내어주고 식사를 챙겨주며 익덕(益德)이라는 자(字)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의 외모에 대해 팔이 길어 무릎까지 닿고, 귀가 커서 거울 없이도 볼 수 있었다고 묘사하지만, 이는 후대에 민중의 바람이 만들어낸 영웅의 모습으로 여겨진다.

희평 4년(175년), 15세가 된 유비는 집안 어른 유원기(劉元起)의 도움으로 그의 아들 과 함께 노식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유원기는 유비를 자신의 아들처럼 대하며 학비를 지원해주었다.[14][15] 이때 요동 출신의 공손찬도 함께 공부했는데, 유비는 나이가 많은 공손찬을 형처럼 따르며 친하게 지냈다. 동문으로는 고향 사람 高誘|고유중국어가 있었고,[160] 견초와도 교류하며 "단목의 교제"를 맹세한 사이였다고 전해진다.[160] 유비는 독서를 즐기기보다는 개와 말 같은 동물을 좋아했고, 사냥, 음악 감상, 화려한 옷 입기를 즐겼다. 말수가 적고 남을 공손히 대했으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용감한 사람들(豪俠|호협중국어)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고 젊은 시절부터 카리스마가 있어 많은 젊은이들이 그를 따랐다.[16][17]

이 무렵 중산(中山)의 부유한 말 상인 [18]과 蘇雙|소쌍중국어[19]이 탁군을 지나다 유비를 만나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많은 자금을 지원해주었다. 이 덕분에 유비는 많은 동지들을 모을 수 있었다.[20]

184년, 영제 말기에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각지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유비는 관우, 장비, 간옹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조정 군대에 합류했다. 유비는 관우, 장비와는 특히 형제처럼 가까워 같은 침상에서 잠을 잘 정도였다.[213] 유비는 자신의 의병을 이끌고 현지 조정군 지휘관 조경(鄒靖)에 합류하여 황건적과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22]

이후 평원의 유자평(劉子平)이 장순(張純)의 난을 토벌하러 가는 관리에게 유비를 추천했다. 유비는 전투 중 중상을 입고 죽은 척하여 위기를 넘겼다. 이 공로로 조정은 유비를 중산군 안희현(安喜縣)의 현위(縣尉)로 임명했다.[23] 얼마 후, 조정이 군공으로 관직에 오른 이들을 해임하라는 명령을 내리자 유비는 자신이 대상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파견된 독우(督郵, 감찰관)가 병을 핑계로 만나주지 않자 유비는 격분하여 부하들을 이끌고 독우를 결박한 뒤 백여 대를 매질하고 관직 인수를 그의 목에 걸고는 자리를 떠났다.[24][25]

그 후 유비는 다른 의병 부대에 합류했다. 대장군 하진의 명으로 단양(丹陽)에서 병사를 모집하던 관구의(毌丘毅)에게 합류하여 여주에서 황건적 잔당과 싸웠다. 하비(下邳)에서 반군과 싸워 공을 세우고 하밀승(下密丞)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관직을 버렸다.[26] 왕찬의 『영웅기』에 따르면, 이후 유비는 낙양에서 조조를 만나 그의 고향인 패국(沛國, 현재 안휘성 보저우시)으로 함께 가 병사를 모집하기도 했다.[27] 그 뒤 조정은 유비를 고당현 현위(高唐縣尉)로 임명했다가 현령(縣令)으로 승진시켰다.[28]

2. 2. 황건적의 난과 군벌 활동

184년 후한 영제 말기,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유비는 관우, 장비, 간옹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21][163] 이들은 교위 추정 휘하의 정부군에 합류하여 황건적 토벌에 참여했으며[22], 이후 장순과 장거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중산국 안희현의 현위(縣尉)로 임명되었다.[23]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군에서 파견된 독우(督郵, 감찰관)가 유비를 만나려 하지 않거나[164] 해임하려 하자[24], 유비는 독우를 찾아가 묶어놓고 곤장 100여[24]~200대[164]를 때린 뒤 관직의 인수를 그의 목에 걸고 떠났다.[24][25][164] 이후 단양에서 도위(都尉) 관구의의 모병에 응하여 함께 활동하다가[26] 하비에서 적을 무찌른 공으로 하밀현승(下密縣丞)에 임명되었으나 곧 다시 관직을 버렸다.[26][165] 그 뒤 고당현위(高唐縣尉)를 거쳐 현령(縣令)으로 승진했지만, 적에게 패배하여[28] 191년 무렵 옛 친구인 공손찬에게 의탁했다.[29][165]

공손찬 휘하에서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임명되어 청주자사 전개를 도와 원소군과 싸워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29][165] 공손찬은 유비를 평원현령(平原縣令)으로 삼았다가 후에 평원국의 상(相)으로 추천했다.[31][165] 유비는 평원에서 외부의 침입을 막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며, 신분이 낮은 선비들과도 동등하게 교류하여 많은 사람의 지지를 얻었다.[33][166] 당시 평원 사람 유평(劉平)은 유비의 부하가 된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자객을 보냈으나, 유비가 자객을 후하게 대하자 자객은 차마 죽이지 못하고 사실을 알린 뒤 떠났다고 한다.[32][166] 또한 북해상 공융이 황건적 잔당에게 포위되었을 때, 태사자를 보내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유비는 즉시 군대를 보내 공융을 구출하기도 했다.[34]

193년(초평 4년), 서주 목사 도겸이 조조의 침공을 받자 전개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유비는 전개와 함께 도겸을 도우러 갔다. 도겸은 유비를 높이 평가하여 4천 명의 단양병을 내주었고, 유비는 전개의 휘하를 떠나 도겸에게 의지하게 되었다.[166] 194년(흥평 원년), 조조가 물러나자 도겸은 유비를 예주자사로 추천했다. 도겸이 병으로 위독해지자 서주를 유비에게 맡기려 했고, 유비는 처음에는 사양했으나 진등, 공융 등의 설득으로 서주를 다스리게 되었다.[166] 이때 서주의 부호 미축은 유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며 자신의 여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내기도 했다.[162]

서주를 다스리던 유비는 조조에게 패배하고 의탁해 온 여포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96년 유비가 원술과 싸우기 위해 출정한 사이, 하비의 수장 조표진궁과 내통하여 여포를 성 안으로 끌어들였다. 여포는 하비를 기습하여 유비의 처자를 사로잡았다.[162] 유비는 여포와 화친하고 소패로 물러났으나, 그곳에서 다시 1만여 명의 병사를 모으자 여포는 이를 경계하여 유비를 공격했다. 패배한 유비는 조조에게 귀순했다.[162]

조조는 유비를 예주목으로 삼고 지원하여 다시 소패로 보내 여포를 견제하게 했다. 198년, 여포가 고순장료를 보내 소패를 공격했고, 조조가 보낸 하후돈의 지원군도 패배하면서 유비는 다시 처자를 빼앗기고 조조에게로 도망쳤다.[168] 같은 해 10월,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유비와 함께 하비를 포위했다. 여포의 부하 장수들(후성, 송헌, 위속)이 배신하여 여포를 사로잡아 조조에게 항복했다. 여포가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하자, 유비는 조조에게 여포가 과거 정원동탁을 배신했던 일을 상기시켰고, 조조는 여포를 교수형에 처했다.[214][169]

발릉교(Baling Qiao) 벽화,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유비는 조조를 따라 허도로 돌아와 좌장군(左將軍)에 임명되었고, 조조로부터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215] 조조는 유비와 함께 식사하며 "지금 천하에 영웅이 있다면 그대와 나뿐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때 유비는 놀라 젓가락을 떨어뜨렸는데, 마침 천둥이 쳐서 그 핑계를 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한편, 헌제의 국구인 동승이 조조 주살 밀조를 계획하자 유비도 여기에 가담했다.[215]

199년, 유비는 조조 주살 계획이 발각되기 전에 원술 토벌을 명분으로 삼아 주령, 노초 등과 함께 허도를 떠났다.[170] 원술을 격파한 후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살해하고 하비를 점령했으며, 관우에게 하비를 맡기고 자신은 소패로 돌아갔다. 이때 많은 군현이 조조에게서 이탈하여 유비에게 합류하면서 유비의 세력은 수만 명에 달했다. 유비는 손건원소에게 보내 동맹을 맺었다.[212] 조조가 파견한 유대와 왕충의 군대를 격파하기도 했다.[171]

200년, 유비의 배신에 분노한 조조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오자 유비는 패배하여 청주를 거쳐 원소에게 달아났다.[171] 유비가 과거 무재(茂才)로 천거했던 원소의 장남 원담의 도움으로 원소에게 의탁하여 큰 환대를 받았다. 조조는 유비의 처자와 관우를 사로잡아 허도로 돌아갔다. 관도대전 중, 여남의 황건적 잔당 유벽 등이 조조에게 반기를 들고 원소에게 호응하자, 원소는 유비를 파견하여 이들과 합류하게 했다. 이때 조조 휘하에 있던 관우가 유비에게 돌아왔다.[216] 조조가 조인을 보내 공격하자 유비는 다시 원소에게 돌아갔다.

이후 유비는 원소에게 형주의 유표와 연합할 것을 제안하며 원소 밑을 벗어날 기회를 모색했다. 원소는 유비를 다시 여남으로 파견했고, 유비는 공도 등과 합세하여 수천 명의 병력을 이끌었다. 조조가 보낸 채양을 격파하고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216] 그러나 원소가 관도에서 조조에게 크게 패배한 후, 조조가 직접 남하하여 유비를 공격하자 유비는 더 이상 원소에게 의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형주의 유표에게 몸을 의탁했다.

2. 3. 유표 의탁과 삼고초려

이후 유표에게 귀의하였고, 유표는 교외까지 나와 영접하며 유비를 귀한 손님으로 대우하고 군사를 주어 신야에 주둔하게 했다.

이 시기 유비는 연회 중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허벅지에 살이 붙은 것을 보고 눈물을 흘렸는데, 유표가 이유를 묻자 "늘 말안장 위에서 생활하여 허벅지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었는데, 지금은 말을 타지 않으니 살이 다시 붙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늙어가는데 아무 공적을 세우지 못해 한탄스러워 눈물을 흘렸습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구주춘추》에 전해진다.[217] 여기서 '비육지탄(髀肉之嘆)'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또한 유표의 부하 괴월, 채모 등이 유비를 해치려 하자 적로를 타고 달아났는데, 단계라는 강을 만나 적로가 물 위를 세 길이나 뛰어올라 위기를 넘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218] 다만, 배송지는 이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닐 것이라는 손성의 비판도 함께 기록했다.[219]

서서의 추천으로 제갈량을 얻기 위해 그의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가는 정성을 보였다(삼고초려). 제갈량은 유비에게 당시 널리 알려진 천하삼분지계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고, 유비는 크게 기뻐하며 그를 받아들였다. 관우장비가 유비가 제갈량을 지나치게 대우하는 것에 불만을 표하자, 유비는 "내가 공명을 얻은 것은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다(수어지교)"며 그들을 달랬다. 《위략》이나 《구주춘추》 등에는 오히려 제갈량이 유비를 먼저 찾아갔다는 기록도 있으나,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제갈량이 직접 쓴 출사표의 내용을 근거로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간 것이 맞다고 보았다. 제갈량삼국지연의 등 창작물에서 흔히 묘사되는 신출귀몰한 지략가의 모습보다는 실제 역사에서는 뛰어난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더 강하게 보였다.

유비는 유표에게서 받은 신야에 주둔하며 하후돈우금이 이끄는 조조 군대를 보망파에서 격파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비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유표는 점차 경계하게 되었다. 유비가 조조오환 정벌로 허창이 빈 틈을 노려 공격할 것을 건의했지만, 외정에 소극적이었던 유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안 12년(207년), 제갈량삼고초려로 맞이한 유비는 이미 강대한 세력을 구축한 조조손권에 맞서기 위해, 형주익주를 얻어 천하를 삼분하고 촉한을 세워 조위손오와 경쟁한다는 천하삼분지계의 구체적인 전략을 듣게 되었다.

2. 4. 적벽 대전과 형주 획득

208년 조조가 북쪽에서 내려오자 형주목 유표는 병사하고 뒤를 이은 유종은 조조에게 항복했다. 이때 제갈량은 유종을 공격하여 형주를 차지해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유비는 차마 그럴 수 없다며 거절하고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유비가 피난을 시작하자 유종의 옛 부하들과 형주의 백성 십만여 명이 그를 따랐다. 이 때문에 하루에 겨우 10리(약 4km)밖에 행군하지 못하는 등 행군 속도가 매우 느려졌다. 주위에서는 백성들을 버리고 먼저 강릉을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유비는 "큰일을 이루려면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지금 사람들이 나만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이들을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라며 거절하고 백성들과 함께 이동했다.

결국 조조가 보낸 정예 기병 5천 명에게 당양현 장판교(長阪橋)에서 추격당해 크게 패배했다(장판파 전투). 이 전투에서 유비는 병력을 대부분 잃고 처자식과도 헤어졌으며, 두 딸은 조순에게 사로잡히는 등 큰 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혼란 속에서 조운이 감부인과 아들 아두(훗날의 유선)를 구출했고, 후방을 맡은 장비가 소수의 병력으로 시간을 벌어주었다. 이후 관우의 수군과 합류하고, 유표의 장남인 유기의 군대와도 합류하여 전열을 재정비한 뒤 하구(夏口)로 피신했다.

하구에서 군세를 정비하던 유비는 손권 진영에서 온 노숙과 만나 손권과의 동맹을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제갈량을 사신으로 보내 손권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여 동맹을 맺었고, 208년 겨울 적벽 대전에서 손권과 연합하여 조조의 대군을 격파했다.

적벽 대전 승리 후, 유비는 형주 남부의 무릉, 장사, 계양, 영릉 4개 군을 평정하여 마침내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했다. 유비는 유기를 형주자사로 추천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유기가 병사하자 부하들의 추대를 받아 형주목(荊州牧)의 자리에 올랐다. 이후 관우를 탕구장군(盪寇將軍) 겸 양양태수(襄陽太守), 장비를 정로장군(征虜將軍) 겸 의도태수(宜都太守)로 삼고, 요립을 장사태수, 호포를 계양태수, 향랑을 자귀 등 4개 현의 감독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반준을 치중종사(治中從事)로 삼아 형주의 행정을 맡겼다.[172]

유비가 형주를 차지하고 세력을 키우자 손권은 이를 경계하면서도 관계를 다지기 위해 자신의 여동생 손부인을 유비에게 시집보냈다. 또한 손권은 유비에게 서쪽의 익주를 함께 공략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대해 유비 진영 내에서는 찬성하는 의견도 있었으나, 은관은 손권의 의도를 경계하며 단독으로 익주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비는 은관의 의견을 받아들여 "지금은 겨우 형주를 얻었을 뿐이며,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손권의 제안을 거절했다.

손권은 이에 불만을 품고 손유에게 수군을 이끌고 하구에 주둔하게 하며 압박했다. 하지만 유비는 군대의 통과를 허락하지 않으며 "그대가 굳이 익주를 빼앗으려 한다면, 나는 머리를 풀고 산 속에 은둔하여 천하에 대한 신의를 잃지 않겠다"고 강경하게 대응했다. 동시에 관우를 강릉에, 장비를 자귀에 주둔시키고, 제갈량에게 남부를 맡기는 등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유비의 단호한 의지를 확인한 손권은 결국 손유를 소환하며 무력 충돌은 피하게 되었다.

2. 5. 익주 점령과 촉한 건국

211년 익주자사 유장(劉璋)은 조조의 침공을 두려워하여 부하 장송(張松)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비에게 장로(張魯)를 토벌해달라고 요청했다. 유장은 법정(法正)을 유비에게 사신으로 보냈다. 그러나 장송법정은 유비를 익주의 새로운 주인으로 맞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며, 장송은 유비에게 익주의 지형, 병력, 물자 등에 대한 정보와 지도를 넘겨주었다. 유비는 부군사 중랑장 방통(龐統)과 함께 익주로 들어갔고, 유장은 직접 마중 나와 유비를 환대했다. 유장은 유비를 행대사마 겸 사례교위로 추천하고 병력을 지원하며 백수(白水) 지역 주둔군의 지휘를 맡겼다. 유비는 즉시 장로를 공격하지 않고, 민심을 얻는 데 주력했다.

같은 해, 조조손권을 토벌하자 손권은 유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유비는 유장에게 병력 1만 명과 군수 물자를 지원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유장은 노병 4천 명과 요청한 물자의 절반만 보내왔다. 이에 유비는 크게 분노했다. 때마침 장송이 유비에게 "지금 촉 공략을 앞두고 어찌 떠나려 하는가?"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려다 형 장숙(張肅)의 밀고로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이 사건으로 유비와 유장의 관계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유비는 백수관을 지키던 유장의 부하 장수 양회(楊懷)와 고패(高沛)를 참살하고 본격적으로 익주 공략에 나섰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부성(涪城)을 점령했다. 유장은 유괴(劉璝), 냉포(冷苞), 장임(張任), 등현(鄧賢) 등을 보내 유비를 막게 했으나 모두 격파당하고 면죽(緜竹)으로 퇴각했다. 유장이 다시 이엄(李嚴)에게 면죽의 군대를 감독하게 했지만, 이엄은 휘하 군대를 이끌고 유비에게 항복했다.

유비의 군세는 더욱 강해졌고, 여러 장수들을 파견하여 주변 군현들을 항복시켰다. 제갈량, 장비, 조운(趙雲) 등도 형주에서 군대를 이끌고 와 합류하여 백제성(白帝城), 강주(江州), 강양(江陽) 등을 평정했다. 이때 관우는 형주 수비를 위해 남았다. 유비는 낙성(雒城)을 포위했는데,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1년간 성을 지켰다.

214년, 마침내 낙성이 함락되자 유비는 제갈량, 장비, 조운과 함께 성도(成都)를 포위했고, 유장은 결국 항복했다. 유비는 익주 자사를 겸하게 되었고, 유장 휘하의 신료들을 그대로 등용하고 백성들에게는 토지와 집을 돌려주는 등 민심 안정에 힘썼다. 이러한 조치로 익주는 안정을 되찾았고, 유비는 마침내 촉한 건국의 기반을 마련했다.[172]

215년, 유비는 형주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손권과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협상을 통해 형주 동쪽의 강하(江夏), 장사(長沙), 계양(桂陽) 3개 군을 오나라에 양보하는 것으로 갈등을 마무리 지었다. 218년, 유비는 마초(馬超)와 장비를 보내 무도(武都)의 하변(下辯)을 공격하게 했으나, 조조가 파견한 조홍(曹洪)에게 저지당했다.

219년 봄, 유비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한중(漢中)의 정군산(定軍山)에 진을 치고 하후연(夏侯淵)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유비는 황충(黃忠)에게 높은 곳에서 북을 치며 기습 공격을 명했고, 이 전투에서 하후연을 죽이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조조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한중으로 왔지만, 유비는 끝까지 한중을 지켜냈고, 더 나아가 상용(上庸)까지 점령했다. 같은 해 7월, 유비는 위왕(魏王) 조조에 맞서 한중왕(漢中王)의 자리에 올랐다.

유비


그러나 같은 해, 형주에 있던 관우위나라조인(曹仁)이 지키는 번성(樊城)을 공격하던 중, 손권의 배후 기습을 받아 패배하고 참수당했다. 이로 인해 유비는 관우를 잃고 형주마저 오나라에게 빼앗기는 큰 타격을 입었다.

2. 6. 이릉 전투와 죽음

220년 위왕 조비헌제로부터 강제로 선양받아 황제가 되었다. 당시 촉나라에는 헌제가 조비에게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이를 바탕으로 촉에서는 헌제에게 효민황제(孝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다. (실제로 헌제는 234년까지 생존한 뒤 자연사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갈량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은 유비에게 황제로 즉위하여 한나라의 정통성을 이을 것을 권유했다. 마침내 221년 4월, 유비는 성도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촉한을 건국했다. 연호장무(章武)로 정하고, 아들 유선을 황태자로 삼았다.[145] 대부분의 신하들이 칭제를 지지했지만, 전부사마 비시는 "강대한 적인 위나라를 아직 이기지 못했는데, 즉위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오히려 사람들의 의심을 살 수 있다"고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좌천되기도 했다.

유비는 이전에 손권관우를 공격하여 죽게 한 것에 대해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221년에는 의제 장비마저 부하인 범강장달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을 겪자, 오나라 정벌을 최종적으로 결심했다. 조운을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위나라를 먼저 경계해야 한다며 오나라 정벌을 만류했지만, 유비는 이를 듣지 않고 221년 8월, 직접 대군을 이끌고 오나라를 향해 출정했다. 제갈량성도에 남아 국정을 총괄하게 했다.[139] 손권이 화친을 제의했으나 유비는 단호히 거절했다.

222년 2월, 유비는 자귀(秭歸)에서 진군하여 무릉(武陵)에 이르렀고, 초기에는 오나라 군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유비는 시중 마량을 보내 오계 소수민족을 회유하고, 진북장군 황권에게 장강 북쪽의 군대를 통솔하게 하여 이릉(夷陵)에서 오군과 대치했다. 오나라의 젊은 총사령관 육손이릉에서 방어 태세를 굳히고 유비군의 예봉을 피하며 장기전을 유도했다.[139] 정사 기록을 토대로 추정할 때 실제 병력은 익주 본대와 형주 유랑군, 이민족 연합군 등을 합쳐 약 4만에서 10만 명 내외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삼국지연의》에서 묘사된 75만 대군과는 차이가 있다.

성도에 있는 유비의 묘(혜릉)


222년 6월, 오랜 대치로 촉군이 지치고 방심한 틈을 타, 육손은 결정적인 반격을 개시했다. 병사들에게 띠풀을 지니게 하여 화공(火攻)을 명령했고, 불길은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서로 연결되어 있던 촉군의 40여 개 진영을 집어삼켰다. 불타는 진영 속에서 혼란에 빠진 촉군을 오군이 동시에 공격하여 장남, 풍습 등 많은 장수들이 전사했고, 군대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사망한 촉군 병사가 8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140] 유비는 겨우 마안산(馬鞍山, 이릉 북서쪽)으로 후퇴하여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곧바로 추격해 온 오군에게 포위되었다. 유비는 남은 부하들에게 갑옷을 버리고 불을 질러 방화벽을 만들게 하여 탈출로를 확보한 뒤, 밤을 틈타 간신히 백제성(白帝城)으로 달아났다.[140] 패배 후 유비는 "내 패배는 하늘의 뜻이다!"라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141]

육손은 계속 추격하려 했으나, 조비가 오나라 본토의 빈틈을 노려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140] 8월, 유비는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어복현(魚復縣, 현재 봉절현)으로 돌아와 이곳을 영안(永安)으로 개명했다. 10월, 위나라의 침공을 받게 된 손권은 유비가 다시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고, 유비는 이를 받아들여 종위(宗瑋)를 사절로 보냈다.[142] 한편, 유비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은 한가(漢嘉) 태수 황원(黃元)은 평소 제갈량과의 관계가 좋지 않았기에 유비 사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반란을 일으켰으나 곧 진압되고 처형당했다.[142]

이릉 전투에서의 참패와 관우, 장비의 연이은 죽음으로 인한 충격과 슬픔으로 유비의 병세는 날로 깊어졌다. 223년 6월 10일, 유비는 백제성의 영안궁(永安宮)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그는 제갈량과 상서령 이엄을 불러 아들 유선의 후사를 부탁하며, "그대의 재능이 조비의 열 배이니, 필시 나라를 안정시키고 마침내 큰일을 완성할 것이오. 만약 내 아들이 보좌할 만하면 보좌하고, 그가 재능이 없다면 그대가 직접 자리를 취하시오."라는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또한 아들들에게 남긴 유조에서 "악이 작다고 해서 행하지 말고, 선이 작다고 해서 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오직 현명함과 덕만이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다. 나의 덕이 부족하니 본받지 말라. 한가할 때 한서예기를 읽고, 여러 사상가들의 책과 육도삼략, 상군서 등을 읽어 견문을 넓히도록 하라."고 당부했다.[143][144] 유비는 63세의 나이로 붕어(崩御)하였다.

제갈량성도 무후사에 있는 유비의 동상


4개월 후인 8월, 유비의 유해는 성도로 옮겨져 혜릉(惠陵, 현재 성도 남쪽 교외)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소열황제'''(昭烈皇帝)이다.[145] 유선이 뒤를 이어 촉한의 2대 황제가 되었고, 제갈량은 유비의 유지를 받들어 손권과의 동맹(손유 동맹)을 다시 공고히 하여 위나라에 대항하는 정책을 추진했다.[145]

3. 유비의 자와 호칭

유비의 자(字)는 현덕(玄徳)인데, 이는 노자의 《도덕경》에 담긴 철학적 사유를 압축한 것으로 여겨진다.[220] '현덕'은 밖으로 드러나는 의식적인 인덕인 '명덕(明德)'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무의식적이고 심오하며 무한한 인덕을 가리킨다. 이 자는 노식이 지어주었다고 일본의 한학자 안오카 마사아쓰는 추측한다.[202]

진수(陳壽)가 편찬한 정사 『삼국지』에서는 유비를 시호인 소열제(昭烈帝) 대신 선주(先主)라고 칭한다. 이는 위나라(魏)를 정통 왕조로 간주하는 역사관에 따라, 한 나라에 두 명의 황제가 존재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사용된 호칭이다.[203]

사서 『삼국지』에는 유비의 외모에 대한 묘사도 등장하는데, 키는 7척 5촌(약 1.74m)이고 팔이 무릎 아래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었으며, 귀가 매우 커서 스스로 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5]화양국지』에 따르면, 여포조조 모두 유비를 "대이(大耳, 큰 귀)"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6][7] 조조가 유비를 얕보며 "늙은 큰 귀(大耳)는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군"이라고 말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62] 또한, 장유와의 일화에 따르면 50대의 유비는 수염이 없었다고 한다.[8]

4. 유비의 가계

유비는 탁군 탁현(현재 허베이성 바오딩 시 줘저우 시) 출신으로, 스스로 한나라 황실의 후예임을 내세웠다. 3세기 역사서 『삼국지』 「선주전」에 따르면, 그는 전한 경제의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다.[9] 구체적으로는 유승의 아들 유정이 기원전 117년 탁현의 육성정후(陸城亭侯)에 봉해졌으나, 기원전 112년 한무제에게 바치는 헌납금 문제로 작위를 박탈당한 후 대가 끊겼다고 전해진다.[204] 따라서 유승부터 유비까지 이어지는 정확한 계보는 불분명하며, 이 가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존재한다. 5세기 배송지가 인용한 『전략(典略)』에서는 유비가 임읍후(臨邑侯)의 후손이라는 다른 기록도 전하고 있다.[205]

유비의 조부 유웅은 효렴으로 천거되어 동군(東郡) 범현(范縣)의 현령을 지냈고,[9][10] 아버지 유홍 역시 관직을 지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유비의 집안은 호족 신분이었음에도 몰락하여 가난했으며, 유비는 어머니와 함께 짚신자리를 짜서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유비의 직계 후손들은 촉한 멸망 후 위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옮겨졌다. 유선의 직계는 서진 시대 영가의 난 때 대부분 희생된 것으로 보이나, 유선의 동생 유영의 손자 유현은 난리를 피해 살아남아 성한으로 망명했고, 이후 동진의 역사가 손성에게 목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95] 유현 이후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으나, 그의 후손들이 유비의 혈통을 이어가고 있다고 전해진다.

4. 1. 가계 논란

3세기 역사서 『삼국지』 「선주전」에 따르면, 유비는 전한 경제의 아홉 번째 아들인 중산정왕 유승의 후손이다.[9] 유승의 아들 유정(劉貞)이 기원전 117년 탁현(涿縣)의 육성정후(陸城亭侯)에 봉해졌으나, 기원전 112년 한무제에게 바치는 헌납금인 주금(酎金)을 규정대로 내지 못하여 작위를 박탈당했고, 이후의 계보는 사서에서 명확히 기록되지 않아 불분명하다.[204]

한편, 5세기 배송지가 편찬한 『삼국지주』는 『전략(典略)』을 인용하여 유비가 임읍후(臨邑侯)의 후손이라는 다른 기록을 전한다.[205] 임읍후 작위를 가졌던 인물로는 다음 두 계보가 있다.

  • 광무제의 증손자인 유복(劉復)과 그의 아들 유주(劉騊駼). 이들은 한 경제의 다른 아들인 장사정왕 유발의 후손이다.
  • 유양(劉讓). 그는 한 경제의 또 다른 아들인 상산헌왕 유순의 후손이다.


이들은 모두 중산정왕 유승과는 다른 계보이므로, 『전략』의 기록에 따른다면 유비는 유승의 후손이 아닐 가능성도 제기된다.

아래는 『삼국지』와 『전략』에 기록된 유비의 가계 가능성을 보여주는 계보도이다.


  • '''『삼국지』 기록''': 경제 - 중산정왕 유승 - 육성정후 유정 - (계보 불명) - 유웅 - 유홍 - 유비
  • '''『전략』 기록 1''': 경제 - 장사정왕 유발 - 춘릉절후 유매 - 울림태수 유외 - 거록도위 유회 - 남돈현령 유흠 - 제무왕 유연 - 북해정왕 유흥 - 임읍후 유복 - 임읍후 유주 - (계보 불명) - 유비
  • '''『전략』 기록 2''': 경제 - 상산헌왕 유순 - 진정경왕 유평 - 진정열왕 유연 - 진정효왕 유유 - 진정안왕 유옹 - 진정공왕 유보 - 임읍후 유양 - (계보 불명) - 유비



유비의 조부 유웅은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郎中)을 지내고 동군(東郡) 범현(范縣)의 현령을 역임했으며,[9][10] 아버지 유홍 역시 주군(州郡)의 관리를 지냈다. 그러나 유홍이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유비의 집안은 가난해졌다.

후대의 소설인 『삼국지평화』와 『삼국지연의』에서는 유정 이후 유앙(劉昂), 유록(劉祿), 유란(劉欒), 유영(劉英) 등이 여러 후(侯) 작위를 이어받았으나 점차 가세가 기울어 유비 대에 이르러서는 돗자리를 짜서 파는 신세가 되었다고 묘사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창작으로 여겨진다.

에도 시대의 학자 임라산(林羅山)은 『관영제가계도전(寛永諸家系図伝)』 서문에서 "촉한 유비가 중산정왕의 후손이라 칭하고, 북송 조광윤이 조광한의 후예라 칭하는 것은 중간 계보가 끊어져 의심스럽다"고 지적하며 유비 가계의 불확실성을 언급했다.[206]

반면, 일본의 역사학자 야마다 카츠요시(山田勝芳)는 한대의 복제(服制, 상복 제도 및 관련 면세 특권) 연구를 통해 다른 주장을 제기했다. 그는 연희 2년(159년) 이후 종실 자격을 상실한 황제의 먼 후손들(속진, 屬盡)에게 주어진 면세 특권에 주목했다. 유비가 어린 시절 친척 유원기(劉元起)로부터 학자금 지원을 받는 등의 일화는 유비가 속진으로서 일족 집단의 보호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이는 그가 비록 몰락했더라도 한나라 종실의 일원이었음을 뒷받침한다고 주장했다.[207] 유비가 속진 신분이었기에 가난 속에서도 일족의 도움을 받아 노식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후한을 재건한 광무제가 전한의 선제와 원제를 자신의 양조부와 양부로 삼아 황통을 계승했음을 명확히 한 것과 달리, 유비는 촉한을 건국하고 황제에 올랐음에도 자신의 직계 조상인 유웅이나 유홍을 황제로 추존하지 않았다.

4. 2. 가족 관계

유비는 탁군 탁현(현재 허베이성 바오딩 시 줘저우 시) 누상리 출신이다.[158] 3세기 역사서 『삼국지』에 따르면, 그는 전한 경제의 아홉 번째 아들이자 한나라 중산국의 초대 왕인 유승의 후손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유승의 아들 육성정후 유정의 후손으로, 유정 - 유웅 - 유홍 - 유비로 이어지는 가계이다. 유비의 조부 유웅은 효렴으로 추천되어 낭중이 되었고, 이후 동군(東郡) 범(范)현의 현령을 지냈다.[9][10] 아버지 유홍 역시 주군의 관리를 지냈으나, 유비가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9][10]

그러나 배송지가 인용한 『전략(典略)』에 따르면, 유비가 임읍후(臨邑侯)의 후손이라는 기록도 있다. 임읍후는 한광무제의 증손자이자 장사왕 유발의 후손인 유복과 그의 아들 유탁탁(劉騊駼), 또는 상산왕 유순의 후손인 유랑 등이 있었으므로, 유비가 유승이 아닌 이들의 후손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아버지 유홍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유비는 토호(현지의 소호족) 신분이었음에도 집안이 몰락하여 가난하게 자랐다. 한나라 법에 따라 왕족의 재산은 세대마다 모든 남자 자손에게 나누어졌기에, 먼 후손인 유비에게는 많은 재산이 상속되지 않아 평민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자리짚신을 짜서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어린 시절, 집 동남쪽에 높이 다섯 길이 넘는 큰 뽕나무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마치 황제가 타는 수레의 덮개처럼 보였다. 이를 본 마을 사람들은 이 집에서 귀한 인물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고, 점쟁이 이정은 "이 집에서 반드시 훌륭한 인물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했다.[11][12][158] 어린 유비는 나무 아래서 친구들과 놀며 "나는 커서 이 깃털로 장식된 수레(황제의 수레)를 타야 한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 말을 들은 삼촌 유자경(유홍의 동생)은 "함부로 그런 말을 하지 마라. 우리 일족이 멸족될 수도 있다"며 꾸짖었다고 한다.[13][158] 돈황문서에 따르면 이 일화는 유비가 7세 때의 일이다.[159]

유비에게는 숙부 유자경 외에도 집안 어른인 유원기(유웅의 조카)가 있었다. 유원기는 유비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물질적으로 지원했으며, 15세가 된 유비(175년)를 자신의 아들 유덕연과 함께 유학자로 유명한 노식의 문하에서 공부하도록 도왔다. 유원기의 아내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유원기는 "이 아이는 우리 종족이며, 특별한 사람이다"라고 말했다.[212][14][15] 유덕연은 유비와 함께 노식 밑에서 동문수학했다.

유비는 여러 부인을 두었으며, 슬하에 아들 셋과 딸 둘, 그리고 양자 한 명을 두었다.

구분이름설명비고
정식 배우자소열황후 간씨 (감부인)? ~ 210년경 사망 추정. 유비가 예주목일 때 부인으로 맞이함. 유선의 생모. 황후로 추존됨.유선 출산
목황후 오씨? ~ 245년. 오의의 여동생. 본래 유모의 부인이었으나 사별 후 유비의 부인이 됨. 221년 황후 책봉.
미부인미축, 미방의 여동생. 여포에게 패한 유비를 지원한 미축이 여동생을 유비에게 시집보냄. 장판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설이 있으나 정사 기록은 아님.
손부인손견의 딸, 손권의 여동생. 적벽대전 이후 손-유 동맹 강화를 위해 209년 유비와 정략 결혼. 이후 오나라로 돌아감.
친자녀 (아들)유선 (공사)207년 ~ 271년. 장남. 촉한의 제2대 황제 (후주). 생모는 간황후.간황후 소생
유영 (공수)생몰년 미상. 차남. 노왕(魯王), 이후 감릉왕(甘陵王)에 봉해짐.생모 불명
유리 (봉효)? ~ 244년. 삼남. 양왕(梁王), 이후 안평왕(安平王)에 봉해짐.생모 불명
친자녀 (딸)딸 2명219년 관우손권의 아들과의 혼사를 거절할 때 언급됨.[211] 이후 행적 불명.생모 불명
양자유봉본래 나후(羅侯) 구씨(寇氏)의 아들. 유비가 형주에 있을 때 아들이 없어 양자로 삼음. 관우 구원 실패 및 맹달과의 불화 등으로 220년 처형됨.



263년 촉한이 멸망하면서 유선과 그의 자손들은 위나라의 수도 낙양으로 옮겨졌다. 유선의 여섯째 아들 유순이 안락공의 작위를 이었으나, 서진 시대 영가의 난 중에 유선의 직계 후손들은 대부분 살해되어 절멸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의 손자 유현은 난리를 피해 살아남아, 저족이 세운 성한으로 도망쳤다. 성한 황제 이수는 그에게 안락공의 칭호를 주었다. 이후 동진의 장수 환온이 성한을 멸망시킬 때, 동행했던 역사가 손성유현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다.[195] 유현의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지만, 그의 후손들이 중국 각지에 퍼져 유비의 혈통을 잇고 있다고 전해진다.

한편, 오호 십육국 시대 흉노족 출신으로 한나라 부흥을 내세우며 전조를 세운 유연은 자신이 한고조 유방, 한광무제 유수와 더불어 소열제 유비의 제사를 계승한다고 주장했다 (『진서』).[196] 이 때문에 후대의 삼국지평화 같은 이야기에서는 유연이 유비의 손자라는 설정이 등장하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 1926년에는 『부양유씨종보』라는 족보가 발견되어, 절강성 항주시 부양구의 한 마을에 유비의 후손이 살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이 족보는 광무제의 후손이라 자칭한 인물이 서진 시대에 성을 바꾸었다는 내용만 있을 뿐, 사서를 통해 유비와의 직접적인 혈연 관계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화원 장랑에 그려진 유비가 탄마를 타고 단계를 뛰어넘는 그림


명나라 시대 그림 ''공명산출(孔明山出)'', 제갈량(왼쪽)이 유비(오른쪽)를 섬기기 위해 은거지를 나서는 모습


청나라 시대, 유비의 혼례 이야기를 그린 도자기

5. 평가

진수는 유비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선주(유비)는 도량이 넓고 의지가 강하며, 마음이 크고 친절하여 인물을 잘 알아보고 인재를 잘 대우하였다. 한 고조 유방의 풍모와 영웅의 그릇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나라의 미래를 제갈량에게 맡기면서 마음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으니, 이는 군주와 신하 사이의 지극히 공정한 관계로서 예나 지금이나 훌륭한 본보기이다. 다만, 기지와 임기응변, 재능과 모략은 의 무제 조조에게 미치지 못하여 그 때문에 영토가 협소했다. 그러나 꺾일지언정 굽히지 않고 끝내 남의 아래에 있지 않았으니, 이는 조조의 기량으로 자신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헤아리고 단순히 이익만을 다투지 않고 해로움을 피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208][146]

습착치는 유비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신의를 더욱 중요시했으며, 위급한 상황에서도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유표의 은혜를 생각하여 형주를 빼앗지 않으려 했던 그의 마음이 군사들을 감동시켰고, 의로운 선비들이 그를 따라 기꺼이 패배를 감수하게 만들었다고 보았다. 습착치는 유비가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것은 단순히 백성을 위로하고 보살피는 차원을 넘어섰으며, 그가 대업을 이룬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덧붙였다.[209]

배잠은 유비가 중원에 있었다면 혼란을 야기할 인물이지만, 변방의 요충지를 차지한다면 한 나라의 군주가 될 자질이 있다고 보았다. 훗날 험준한 촉 땅을 얻고 인재들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여 촉한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장구한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동탁, 여포, 원소, 원술 등 수많은 영웅들이 조조에게 패망했지만, 미천한 출신의 유비는 유주, 서주, 형주, 익주, 한중 등을 차례로 얻으며 일어나 , 와 함께 천하를 삼분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유비가 영웅적인 재능과 천명을 지녔기에 가능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나라를 계승하려던 유비가 스스로 황제에 오른 것은 의로운 행동이 아니었다고 비판하면서도, 제갈량에게 후사를 맡긴 것은 군신 관계의 귀감이라고 평가했다.[147]

동시대 인물들의 평가 역시 다양하다.


  • 조조는 유비를 자신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영웅으로 평가하며, 원소 같은 인물은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 진등화흠, 공융 등 당대 인물들을 평가하면서 유비에 대해 "재능과 지략이 뛰어나며 왕이나 패자의 자질(王霸之略)을 가졌다"고 존경심을 표했다.[221]
  • 정욱은 유비의 뛰어난 재능(웅재, 雄才)과 인망을 경계하여 조조에게 그를 죽이라고 조언했으나, 조조는 천하의 인재를 얻기 위해 이를 거절했다.[222]
  • 주유는 유비를 용맹하고 영웅적인 인물로 평가하며, 관우장비처럼 곰과 호랑이 같은 용맹한 장수를 거느리고 있어 결코 남의 밑에 있을 인물이 아니라고 경계했다. 그는 손권에게 유비를 에 머물게 하고 미녀와 보물로 환심을 사면서 관우와 장비를 떼어놓아야 한다고 건의했다.[223]
  • 육손은 유비를 교활하고 경험 많은 강적으로 평가했다. 이릉 전투 당시 유비 군대의 문제점을 파악하고 화공으로 승리했지만, 동시에 "유비는 천하에 이름이 알려졌으며 조조도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언급하며 그의 위상을 인정했다.
  • 조비는 이릉 전투에서 유비가 700리에 걸쳐 목책(樹冊)을 세워 진영을 구축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법을 모른다"고 평가하며 그의 패배를 예견했다.[224]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가 인의를 지나치게 중시하여 결단력이 부족한 인물로 묘사되기도 한다. 중국의 작가 루쉰은 이러한 묘사가 유비의 진면목을 가리고 이상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이는 남을 포용하고 덕을 베푸는 인물을 영웅으로 여기던 당시 중국의 관념을 반영한 결과로 해석될 수 있다. 작가 이문열은 그의 평역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유비를 왕으로 여기지 않았을 수 있다는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현대 역사가 래프 드 크레스피니(Rafe de Crespigny)는 유비를 다소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유비가 역사상 과대평가된 인물 중 하나일 수 있으며, 여러 차례 패배하고 조조유표 등에게 의탁했으며, 적벽대전의 승리도 주로 주유의 공이었다고 주장한다. 또한 유장에게서 익주를 빼앗은 행위 등을 지적하며 유비를 "놀라울 정도로 운이 좋은 군인 이상은 아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148] 그러나 다른 저술에서는 유비를 "매우 성공적인 용병 대장"으로 평가하며, 뛰어난 전투 지휘관이자 좋은 참모들을 두었으며, 서쪽의 지리적 이점과 행운이 따랐다고 분석했다. 익주 장악과 같은 배신 행위를 지적하면서도, 그가 부하들에게 큰 충성심과 존경심을 받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계속 재기했으며, 미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성격의 소유자였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는 유비를 "분명히 용감했고, 상관과 라이벌에게는 분명히 신뢰할 수 없었지만, 부하들에게는 분명히 충성스러웠다"고 묘사하며, 개인의 역량이 중요했던 시대의 이상적인 영웅상에 부합하는 면모가 있었다고 평가했다.[149]

종합적으로 유비는 의리가 두텁고 성실하며 겸손한 성품으로 평가받는다. 젊은 시절에는 학문보다 음악, 사냥, 화려한 옷차림 등을 좋아했지만, 말수가 적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을 공손히 대하는 태도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리더십과 인품은 촉한 건국의 바탕이 되었으며, 후세에도 많은 논쟁과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야시마 가쿠테이(Yashima Gakutei)가 그린 유비(劉備)의 그림(체스터 비티 도서관(Chester Beatty Library) 소장)

6. 대중문화 속 유비

유비는 역사적 인물로서뿐만 아니라, 소설, 민담 등을 통해 형성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재창조되고 있다.

1900년경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소장된 ''명인 초상화'' 앨범에 묘사된 모습


현대에 와서는 특정 직업군의 수호신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중국 청두에서는 유비가 젊은 시절 짚신을 만들어 팔았던 일화 때문에 구두장이들의 수호신으로 여겨진다. 1845년 청나라 도광제 시기, 청두의 구두장이 조합은 스스로를 "유비의 제자"라 칭하며 유비를 기리는 삼의사당(三義廟) 건립을 후원하기도 했다. 이 사당은 여러 차례 이전되어 현재 청두시 무후구에 위치해 있다.

최근 중국 정부의 종교 활동 규제 완화와 함께 청두 구두장이들 사이에서 유비 숭배가 다시 활성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2005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처음으로 삼의사당 앞에서 유비를 기리는 대규모 행렬이 열리기도 했다.[152]

하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해 ''양자만보(揚子晚報)''와 같은 언론에서는 유비의 명성을 이용한 상업적 행위일 뿐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해당 논평은 유비가 생계를 위해 신발을 판 것은 사실이나 신발 자체의 발명가는 아니며, 전설에 따르면 황제(黃帝) 시대의 여제(禹則)가 최초로 신발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153]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 당시 청두 무후구에 건설 중이던 서중국 구두센터 산업구역(西中國鞋中心工業區)에 유비 동상을 세우기로 하는 등 관련 업계의 열정은 계속되었다.

유비는 소설 외에도 영화, 드라마, 게임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재해석되고 있다.

6. 1. 소설

삼국지연의는 14세기 중국 삼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 소설로,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낭만적으로 묘사한다. 이 소설은 나관중(羅貫中)이 집필했으며, 오랜 시간 동안 전해 내려온 민담이나 희곡 내용을 바탕으로 유비를 카리스마 넘치는 덕(德)을 갖춘 자비롭고 의로운 지도자로 그린다.[150] 소설 속 유비는 유교적 가치관에 따라 나라를 세우려 하며, 이는 소설이 쓰여진 시대의 역사적 배경과도 일치한다. 또한 한나라 황실과의 혈연 관계(비록 멀지만)를 강조하여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유비의 외모를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하는데, 키는 7척 5촌이며, 귀는 어깨에 닿을 정도로 크고 스스로 자신의 귀를 볼 수 있다고 한다. 팔은 무릎 아래까지 닿을 정도로 길고, 얼굴은 맑고 옥 같으며, 입술은 마치 연지를 바른 듯 붉다고 묘사된다.[151] 사서 삼국지에서도 키가 7척 5촌(약 1.74m)이고 팔이 무릎까지 내려오며 귀가 커서 스스로 볼 수 있었다는 묘사가 있는데,[5] 이는 삼국시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민중의 바람이 만들어낸 영웅의 모습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소설 속 유비는 인덕(仁德)으로 주변의 존경과 경계를 동시에 받지만, 이러한 특징이 더욱 강조된다. 무예는 관우, 장비 등에게, 지략은 제갈량 등에게 맡기고, 자신은 다양한 인물들을 끌어모으는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젊은 시절 어머니와 짚신을 만들어 팔았던 이야기나,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삼국지』에서 어머니에게 차를 사드리기 위해 돈을 모으는 모습 등 고생하는 인물로 그려지기도 한다. 이를 통해 유교에서 이상적으로 여기는 '''군자'''의 면모를 부각하며, 간웅 조조와 대립 구도를 형성한다.

소설에서 유비는 '쌍고검(雙股劍)'이라는 양날 검과 명마 '적로(的盧)'를 애용하는 것으로 나온다.[210] 쌍고검은 도원결의 후 얻은 자금으로 만든 두 자루의 검이다.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유비와 관련된 대표적인 허구적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 도원결의
  • 활로관 전투
  • 삼고초려
  • 유비의 말이 단계를 뛰어넘다
  • 손부인과의 결혼 이야기
  • 적벽대전에서의 활약 (소설 내용)


소설에서는 여포에게 쫓겨 피신했을 때, 유비를 대접할 음식이 없던 집주인 유안(劉安)이 아내를 죽여 늑대 고기라 속이고 대접하는 일화가 나온다. 유비는 나중에 진실을 알고 슬퍼했다고 묘사된다. (이 이야기는 문화적 차이로 인해 일본어 번역본 등에서는 삭제되거나 주석이 달리기도 한다).

소설 후반부, 특히 의형제 관우의 협공으로 사망하고 후한이 멸망한 후에는 유비가 감정적으로 변하고 독단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그려진다.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황제 즉위를 거부하다가 결국 오르지만, 이후 장비마저 부하에게 살해당하자 복수를 위해 오나라 정벌을 강행한다. 이때 자신의 대군을 믿고 교만해져 육손에게 대패하고 백제성으로 물러나 후회 속에 병사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또한 박망파 전투와 같이 실제 역사에서는 유비가 직접 지휘하여 하후돈을 격파한 전투를[213] 소설에서는 제갈량의 지략으로 묘사하는 등,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존재한다.

6. 2. 영화와 드라마

유비 역을 연기한 주목할 만한 배우는 다음과 같다.

  • 1994년 드라마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의 손연준(Sun Yanjun)
  • 1996년 드라마 《관공》(Guan Gong)의 장풍건(Chang Fu-chien)
  • 2008년 영화 《삼국지: 용의 부활》(Three Kingdoms: Resurrection of the Dragon)의 오경(Elliot Ngok)
  • 2008~2009년 영화 《적벽대전》(Red Cliff)의 유용(You Yong)
  • 2010년 드라마 《삼국》(Three Kingdoms)의 우혁위(Yu Hewei)
  • 2011년 영화 《잃어버린 검객》(The Lost Bladesman)의 방중신(Alex Fong)
  • 2016년 드라마 《무신 조자룡》(God of War, Zhao Yun)의 언익관(Yan Yikuan)
  • 2019년 영화 《삼국지: 명장 관우》(Dynasty Warriors)의 양우녕(Tony Yang)

6. 3. 게임

수집형 카드 게임 매직: 더 개더링에는 포털 삼국지 세트에 "유비, 촉의 군주(Liu Bei, Lord of Shueng)"라는 카드가 있다. 중국 카드 게임 삼국살의 영웅 카드 선택지에도 플레이어가 게임 시작 시 선택할 수 있는 "유비(刘备|류베이zho)" 카드가 있다. 주사위 굴리고 적는 게임 촉의 전술에서는 3장에 유비(Liu Beieng)라는 영웅이 등장한다.

유비는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삼국무쌍'' 시리즈 전 작품과 ''삼국무쌍''과 ''전국무쌍''의 크로스오버 작품인 ''무쌍OROCHI''에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한다. 또한, 코에이의 다른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삼국지'' 시리즈와 ''결전 II''에도 등장한다.

유비는 NES용 RPG 게임인 ''황제의 운명''의 주인공이다. 1989년 캡콤에 의해 미국에서 출시된 이 게임은 소설 ''삼국지연의''의 줄거리를 느슨하게 따르고 있다.

삼국무쌍 시리즈에 등장하는 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유비의 갑옷은 MMORPG ''메이플스토리''에서 이용 가능하다. 조조, 관우, 제갈량, 손권, 그리고 초선의 디자인도 등장한다.

유비는 레벨5의 게임이자 애니메이션인 ''이나즈마 일레븐 GO''의 속편인 크로노 스톤에도 조조, 제갈량, 관우, 장비와 함께 등장한다.

또한,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의 게임 ''토탈 워: 삼국''과 넷플릭스 게임 ''Reigns: Three Kingdoms''에서 플레이어가 선택할 수 있는 군주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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