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봉 (후한)
1. 개요
응봉은 후한 시대의 인물로, 무릉태수를 지낸 응침의 아들이다. 총명함으로 어려서부터 경서를 암기했으며, 여남군 결조사, 무재로 추천받아 무릉태수를 역임했다. 무릉태수 재임 시 반란을 진압하고 한화 정책을 펼쳤으나 면직되었으며, 이후 사례교위가 되어 엄정한 면모를 보였다. 등황후 폐위 후 전귀인의 황후 책봉을 반대했으며, 당고의 금으로 인해 벼슬에서 물러난 후 사망했다. 아들 응소를 두었으며, 저서로는 「감소」, 『한서후서』, 『한사』, 『동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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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의 태수 -
사마준 (후한)
후한 말기의 관료 사마준은 거구로 낙양령 시절 '와호'라 불렸고 영천태수를 지냈으며 사후 추증, 추존되었고, 그의 가계는 손자 사마의를 거쳐 현손 사마염이 서진을 건국하는 데 영향을 주었다. -
샹청시 출신 -
응순 (후한)
응순은 후한 시대의 관리로, 청렴함과 뛰어난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기주 자사, 하남윤, 장작대장 등을 역임하고 잉여 경비를 절감하는 등 업적을 남겼다. -
여남 응씨 -
응창
응창은 후한 말기에서 삼국시대 초기에 활동한 문장가이자 건안칠자의 일원으로, 조조에게 발탁되어 관직 생활을 했으며 조비의 총애를 받았으나 역병으로 요절하여 조비의 안타까움을 샀고, 그의 문학적 재능은 조비와 조식에게 인정받았으며 동생 응거와 아들 응정 또한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
여남 응씨 -
응소
후한 말기의 관료이자 학자인 응소는 명문가 출신으로 효렴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태산태수를 거쳐 원소에게 의탁, 헌제를 위해 《한관의》를 편찬하는 등 제도 정비에 기여했으며, 《풍속통의》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2. 경력
응봉은 무릉군 태수를 지낸 응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성장하면서 읽은 경서의 내용을 모두 암기했다. 여남군의 결조사가 되어 소속 42개 현을 순찰하며 죄수의 수를 기록했다. 군으로 돌아와 태수가 그 일에 대해 묻자, 응봉은 죄인의 성명과 죄상을 빠짐없이 설명해 보였다. 대장군 양기에 의해 무재로 추천되었다.
이후 무릉태수, 사례교위 등을 역임하였다. 당고의 금이 일어나자, 응봉은 분개하여 병을 칭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여러 공경들이 응봉을 관직에 복귀시키려 추천했지만, 병으로 사망했다. 아들로 응소가 있었다.
2.1. 무릉태수 시절
153년(영흥 원년), 응봉은 무릉군 태수로 임명되었다. 이에 앞서 무릉군의 소수 민족인 첨산 등 4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현령을 붙잡아 수년 동안 할거하고 있었다. 태위, 사도, 사공, 대장군의 사부는 공경들의 회의를 통해 응봉을 반란 토벌의 장수로 추천했다. 응봉이 부임하여 교섭하자, 첨산 등은 항복하여 점령지를 넘겨주었다. 응봉은 학교를 일으키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추천하며, 현지 풍속의 한화(漢化)를 목표로 하는 예교 정치를 펼치려 했다. 그러나 응봉은 공적인 사건으로 죄를 물어 면관되었다.
2.2. 사례교위 시절
연희 연간, 무릉군의 소수 민족이 다시 형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차기장군 풍군이 반란을 토벌하게 되었다. 풍군은 응봉이 여러 민족에게 숭앙받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원정에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응봉은 종사중랑에 임명되어 종군했다. 풍군이 반란 진압에 성공하자, 풍군은 응봉을 사례교위로 추천했다. 응봉은 사례교위가 되자, 호족이나 귀척에 대해서도 꺼림 없이 그 비위를 규탄했기 때문에, 엄정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등황후가 폐위되고, 전귀인이 환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전귀인을 황후로 세우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응봉은 전씨가 신분이 낮은 출신이므로, 황후의 자리에 올리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반대론을 상소했다. 환제는 응봉의 의견을 받아들여, 두황후를 세웠다.
2.3. 환제의 황후 책봉 논의
등황후가 폐위되고, 전귀인이 환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전귀인을 황후로 세우자는 논의가 있었다. 응봉은 전씨가 신분이 낮은 출신이므로 황후의 자리에 올리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반론을 상서했다. 환제는 응봉의 의견을 받아들여, 두황후를 세웠다.
2.4. 당고의 금과 죽음
연희 연간, 무릉군의 소수 민족이 다시 형주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차기장군 풍군이 반란을 토벌하게 되었다. 풍군은 응봉이 여러 민족에게 숭앙받는다는 점을 고려하여, 원정에 동행할 것을 요청했다. 응봉은 종사중랑에 임명되어 종군했다. 풍군이 반란 진압에 성공하자, 풍군은 응봉을 사례교위로 추천했다. 응봉은 사례교위가 되자, 호족이나 귀척에 대해서도 꺼림 없이 그 비위를 규탄했기 때문에, 엄정함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등황후가 폐위되고, 전귀인이 환제의 총애를 받게 되자, 전귀인을 황후로 세우자는 논의가 일어났다. 응봉은 전씨가 신분이 낮은 출신이므로, 황후의 자리에 올리는 것은 마땅치 않다는 반대론을 상서했다. 환제는 응봉의 의견을 받아들여, 두황후를 세웠다.
당고의 금이 일어나자, 응봉은 분개하여 병을 칭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여러 공경들이 응봉을 관직에 복귀시키려 추천했지만, 응봉은 병으로 사망했다.
3. 가족
| 관계 | 이름 |
|---|---|
| 증조부 | 응순 |
| 조부 | 응첩 |
| 부 | 응침 |
3.1. 부계
--|]]
* 증조부: 응순
* 조부: 응첩
* 부: 응침
3.3. 손자
* 응양
* 응거
5. 전기 자료
후한서 권48 열전 제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