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응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응소는 후한 시대의 학자이자 관료로, 젊은 시절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효렴으로 천거되어 하묘의 속관이 되었다. 강족 반란 진압 과정에서 선비족 징병 대신 강족 징병을 주장하여 받아들여졌고, 태산태수로 임명되어 황건적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다. 조조의 아버지 조숭이 피살된 사건 이후 조조를 두려워하여 원소에게 의탁했으며, 헌제에게 《한관의》를 바쳐 제도를 복원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상인기》, 《중한집서》, 《풍속통의》 등을 저술했으며, 《한서》의 집해를 저술하여 안사고의 주석에 인용되기도 했다. 조조가 업을 점령하기 전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응창과 응거 역시 문재로 이름을 날렸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중국의 사전 편찬자 - 린위탕
    린위탕은 중국 문화와 철학을 서구에 소개하고 유머와 풍자가 담긴 수필로 인기를 얻은 작가이자 사상가, 언어학자로, 영어 저서와 중국어 타자기 개발을 통해 동서양 문화 교류에 기여했으며 노벨 문학상 후보에 지명되기도 했다.
  • 여남 응씨 - 응창
    응창은 후한 말기에서 삼국시대 초기에 활동한 문장가이자 건안칠자의 일원으로, 조조에게 발탁되어 관직 생활을 했으며 조비의 총애를 받았으나 역병으로 요절하여 조비의 안타까움을 샀고, 그의 문학적 재능은 조비와 조식에게 인정받았으며 동생 응거와 아들 응정 또한 문장으로 이름을 알렸다.
  • 여남 응씨 - 응거
    응거는 위나라의 관료이자 문장가로, 조비와 조예 시대에 산기상시를 지냈으며 조상의 전횡을 풍자하는 시를 통해 이름을 알렸고, 사후 위위로 추증된 인물이다.
  • 한나라의 작가 - 조조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시인이었던 조조는 뛰어난 능력으로 위나라의 기반을 다졌으나, 잔혹한 행위와 권력욕으로 인해 후대 평가에서 논쟁적인 인물이다.
  • 한나라의 작가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응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응소
원어 이름應劭
중원 (仲瑗, 仲援, 仲遠)
출생기원후 144년경
출생지샹청, 허난 성
사망204년
사망지한단, 허베이 성
아버지응봉
친척응순 (應珣; 동생)
응양 (應瑒; 조카)
응거 (應璩; 조카, 응양의 동생)
응정 (應貞; 응거의 아들, 종손)
응순 (應純; 응정의 동생, 종손)
직업정치가, 작가, 역사가
관직 경력
군모교위 (軍謀校尉)원소 휘하
임기 시작알 수 없음
임기 종료203년
임기 시작189년
임기 종료194년
군주영제 / 헌제
임기 시작177년
임기 종료184년
군주영제
임기 시작173년
임기 종료177년
군주영제
임기 시작알 수 없음
임기 종료알 수 없음
군주영제
임기 시작178년
임기 종료알 수 없음
군주영제

2. 생애

응소는 학문적 소양이 깊었으며, 관직 생활 동안 여러 중요한 사건들을 겪었다. 헌제 때 효렴으로 천거되어 거기장군 하묘의 속관이 되었다. 196년 한관의(漢官儀)를 완성하여 헌제에게 바쳤는데, 이는 허(許)로 도읍을 옮긴 후 혼란 속에서 유실된 제도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상인기》(狀人紀), 《중한집서》(中漢輯序), 《풍속통의》, 《한서》 집해 등 총 136편에 달하는 저술을 남겼다. 특히 《풍속통의》는 당시의 사물과 풍속 등을 기록한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에서 생을 마감했다.[17] 동생 응순의 아들인 응창응거는 문재(文才)로 이름을 떨쳤으며, 응창은 건안칠자 중 한 명으로 꼽힌다.

2. 1. 초기 생애와 관직 생활

응소는 여남군 남돈현(현재의 샹청시 서쪽, 허난성에 속함) 출신으로, 대대로 태수 등을 역임한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응봉은 무릉군 태수와 사예교위를 지냈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써 박학다식한 인물로 성장했다. 후한 영제효렴으로 천거되었고, 거기장군 하묘의 부름을 받아 그의 속관이 되었다.[14]

중평 2년(185년), 한양한수 등이 강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황보숭이 오환족 병사 3,000명을 요구했다. 이때 추정은 오환족 대신 선비족에서 징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응소는 선비족은 통제하기 어렵다며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강족에서 징병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채택되었다.

그 후 태산태수에 임명되었다.[15] 초평 2년(191년), 황건적 30만 명이 태산군을 침입하자 군의 문·무관들을 통솔하여 격퇴하고 수천 명의 수급을 베고 1만 명 가량의 포로를 잡았으며, 2천 량의 치중(輜重)을 빼앗는 큰 전과를 올렸다.[16]

흥평 원년(194년), 연주 조조의 부친 조숭낭야에서 태산으로 이주하려 하자 군대를 파견하여 맞이하려 했다. 그러나 서주목 도겸이 파견한 장개가 조숭을 공격하여, 응소의 군세가 합류하기 전에 조숭을 죽였다. 응소는 조조에게 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군을 버리고 기주원소에게 의탁했다.[17]

2. 2. 태산태수 시절과 황건적 토벌

중평 2년(185년), 한양한수 등이 강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 토벌에 나선 황보숭이 오환족 병사 3,000명을 요구하자, 북군중후(北軍中侯) 추정은 오환족은 약하니 선비족에서 더 많은 병력을 징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논의하던 중, 응소는 선비족은 한나라에 복종하지 않을뿐더러 억제하기가 어려운 종족이니, 차라리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강족에서 징병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받아들여졌다.[14]

이후 응소는 태산태수에 임명되었다. 초평 2년(191년), 황건적 30만 명이 태산군 경계를 침입하자, 응소는 군의 문관과 무관들을 통솔하여 황건적을 무찔렀다. 이 전투에서 수천 명의 적군을 죽이고, 1만 명 가량의 포로를 잡았으며, 2천 량의 군수물자를 획득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16]

2. 3. 조숭 피살 사건과 원소에게 의탁

흥평 원년(194년), 조조의 부친 조숭낭야에서 태산으로 이주하려 하자, 당시 태산태수였던 응소는 군대를 파견하여 이를 맞이하려 하였다. 그러나 서주목 도겸이 파견한 장개가 조숭을 공격하여, 응소의 군세가 합류하기 전에 군의 경계에서 조숭을 죽였다.[14] 응소는 조조에게 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여, 군을 버리고 기주원소에게 몸을 의탁하였다.[17]

2. 4. 학문적 업적과 한관의 편찬

응소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헌제 대에 효렴으로 천거되었다. 185년에는 강족에서 징병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 받아들여졌다.[1] 191년에는 황건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웠다.[1]

196년, 한관의(漢官儀)를 완성하여 헌제에게 바쳤다.[1] 한관의는 헌제가 도읍을 허(許)로 옮긴 후 혼란 속에서 유실된 제도를 복원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1]

응소는 《상인기》(狀人紀), 《중한집서》(中漢輯序), 《풍속통의》를 저술하였다.[1] 특히 《풍속통의》는 당시의 사물과 풍속 등에 대해 기록한 책이다.[1] 또한, 《한서》의 집해를 저술하였는데, 이는 훗날 안사고의 주석에 다수 인용되었다.[1] 응소가 저술한 분량은 총 136편이었다.[1]

2. 5. 죽음

조조가 을 점령하기 전에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17] 동생 응순의 아들인 응창(건안칠자의 한 사람)·응거 등도 문재(文才)로 이름을 날렸다.

3. 가계

應劭|응소중국어의 친족관계는 아래와 같다.

여남 응씨

3. 1. 응소의 친족관계


참조

[1] 서적 Ying Shao'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recorded that he fled from his post in Taishan in the 1st year of the Xingping era of Emperor Xian's reign.
[2] 문서 There are two pronunciations of the character "瑒": "chàng" and "yáng".
[3] 서적 Zhu Jianping's biography in vol. 29 of Sanguozhi recorded that Ying Qu was 63 (by East Asian reckoning) when he died.
[4] 간행물 "《文章叙錄》曰:璩字休運...嘉平四年卒" Wenzhang Xulu
[5] 서적 (应贞,字吉甫,汝南南顿人,魏侍中璩之子也。....泰始五年卒,....。) Jin Shu
[6] 서적 (弟純。) Jin Shu
[7] 서적 Sima Biao, Xu Hanshu: "劭又著中漢輯敘、漢官儀及禮儀故事,凡十一種,百三十六卷。朝廷制度,百官儀式,所以不亡者,由劭記之。官至泰山太守。劭弟珣,字季瑜,司空掾,即瑒之父."
[8] 간행물 "瑒弟璩,璩子貞"
[9] 간행물 Hua Jiao, Hanhou shu: "瑒祖奉,字世叔。才敏善諷誦,故世稱「應世叔讀書,五行俱下」。著後序十餘篇,爲世儒者。延熹中,至司隷校尉。子劭字仲遠{{sic}},亦博學多識,尤好事。諸所撰述風俗通等,凡百餘篇,辭雖不典,世服其博聞."
[10] 서적 A Biographical Dictionary of Later Han to the Three Kingdoms Brill 2007
[11] 서적 Ancient and Early Medieval Chinese Literature: A Reference Guide, Part Three & Four Brill 2014
[12] 서적 Ying Shao's biography in Book of the Later Han did not mention that he served as Prefect of Xiao (County) or Managing Military Scribe; these positions were recorded by Yan Shigu in his Hanshu Xuli (漢書叙例). (应劭字仲瑗,〈一字仲援,一字仲远。〉汝南南顿人,后汉萧令,御史营令,泰山太守。) In his Fengsu Tongyi, Ying Shao wrote about his various appointments. (俗云:“五月到官,至免〈佀“死”字,或“老”字。〉不迁。”今年有茂才除萧令,五月到官,破日入舍,视事五月,四府所表,迁武陵令。余为营陵令,正触太岁。主簿令余东北上,余不从。在事五月,迁太山守。)
[13] 서적 Hou Hanshu
[14] 서적 (灵帝时举孝廉,辟车骑将军何苗掾。) Hou Hanshu
[15] 서적 ([中平]六年,拜太山太守。) Hou Hanshu
[16] 서적 ([初平]二年...十一月,青州黄巾寇太山,太山太守应劭击破之。) Hou Hanshu
[17] 서적 (後卒于鄴。) Hou Hanshu
[18] 문서 《한관례의고사(漢官禮儀故事)》 · 《태위유관비(太尉劉寬碑)》
[19] 문서 《속한서(續漢書)》 문사전(文士傳)에서는 '''중원'''(仲援), 《후한서(後漢書)》에서는 '''중원'''(仲遠)이라 하나, '仲瑗'이 옳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