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이국창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국창은 당나라 말기에 활약한 사타족 출신의 군인으로, 방훈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당나라 조정과의 갈등 속에서도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여 대북절도사에 봉해졌으나, 887년에 사망했다. 그의 손자 이존욱은 후당을 건국했으며, 이국창은 헌조 문경황제로 추존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당나라의 대동군절도사 - 이극용
    이극용은 당나라 말기 오대십국 시대의 사타족 출신 군벌로, 황소의 난 진압에 공을 세워 하동절도사에 임명되고 진왕에 봉해졌으며, 후량에 굴복하지 않고 독자 세력을 유지하다 그의 아들 이존욱이 후당을 건국했다.
  • 당나라의 진무군절도사 - 혼감
    혼감은 당나라 군인으로, 11세에 삭방군에 들어가 군공을 세우고 안사의 난과 주차의 난에서 활약하여 좌효위장군, 개부의동삼사, 태상경 등을 거쳐 염주성 수축 공로로 검교사도 겸 중서령이 되었으며, 799년에 사망했다.
이국창
인물 정보
이름이국창/주야적심
아버지주야지이
자녀이극용
이극양
이극공
이극녕
의녕공주
묘호헌조(獻祖)
시호문경황제(文景皇帝)
배우자진씨, 문경황후

2. 생애

의종 함통 10년(869년) 방훈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이국창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규절(旌節)을 하사받고 서주관찰사(徐州觀察使)에 봉해졌다. 또한 장안 친인리(親仁里)에 관저 한 채를 하사받았다.[7]

877년 10월, 소의절도사(昭義節度使) 이균(李鈞), 노룡절도사(盧龍節度使) 이가거(李可舉), 토욕혼(吐谷渾)도독(吐谷渾都督) 혁련택(赫連鐸), 백의성(白義誠) 등이 울주(蔚州)에서 이국창을 공격하였다. 이가거는 이극용을 약올령(藥儿岭)에서 격파하고 혁련택도 이국창을 쳐서 패배시켰다. 때문에 이국창 부자는 북쪽 달단(鞑靼) 땅으로 달아났다.[10]

이후 이극용이 황소의 난을 진압하는데 세운 공으로 이국창도 대북절도사(代北节度使)에 봉해졌으나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사망하였다.[1] 손자 이존욱(存勗)이 후당을 세운 뒤에 이국창은 헌조 문경황제(献祖文景皇帝)로 추존되었으며 능호는 장녕릉(长宁陵)이라 하였다.

2. 1. 배경

사타족 추장 주야적심(朱邪赤心)의 조상들은 대대로 토번의 지배를 받으며 당나라 통치 하의 감주(甘州, 현재 간쑤성 장예시)에서 토번의 선봉 부대로 복무했다. 808년경, 토번이 회흘에 양주(涼州, 현재 간쑤성 우웨이시)를 잃자 사타족이 회흘과 연합할 것을 우려한 토번은 이들을 황하 지역으로 이주시키려 했다. 이에 주야적심의 할아버지 주야진충(朱邪盡忠)은 아들 주야집의(朱邪執宜)와 함께 당나라로 망명했으나, 토번과의 전투에서 사망했다.[2][3]

주야집의는 당나라 영주(靈州, 현재 닝샤 회족 자치구 인촨시)에 정착했고, 이후 사타족은 황화퇴(黃花堆, 현재 산시성 숴저우시)에 거주했다.[2][3] 주야적심은 회흘 장군 굴라오우(掘羅勿)를 격파하고 무종의 고모 태화공주를 구출하는 데 공을 세웠다.[4][5] 847년, 토번 장군 론공열(論恐熱)이 당항과 회흘 잔당과 함께 오르도스 지역을 공격하자, 주야적심은 당나라 군 선봉장으로 참전해 론공열을 격파했다.[6]

2. 2. 방훈의 난 진압

의종 함통 10년(869년) 방훈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이국창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으며, 규절(旌節)을 하사받고 서주관찰사(徐州觀察使)에 봉해졌으며 장안 친인리(親仁里)에 관저 한 채를 하사받았다.[7]

868년, 당나라 의종 치세 동안, 남조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영남서도 (현재 광시 좡족 자치구 난닝)에 파견되었던 서사절도 (현재 장쑤성 쉬저우)의 군인들이 1년을 더 머물라는 통보를 받자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장교 방훈의 지휘 아래 서사의 수도인 쉬주(徐州)를 향해 진격했다. 방훈은 관찰사(觀察使) 최언증을 격파한 후 쉬저우를 점령하고 최언증을 체포했다. 그는 의종 황제가 거부할 경우 수도 장안을 공격하겠다고 위협하며 서사를 접수하는 것에 대한 황제의 공식적인 승인을 요구했다. 의종은 황궁 호위 장군 강승훈을 의성절도 (현재 허난성 안양)의 절도사로 임명하고 방훈에 대한 작전의 총사령관으로 삼았다. 강승훈은 자신의 군대에 주야 적심의 군대와 토욕혼 왕국, 타타르족, 그리고 기필(契苾) 부족의 추장들을 추가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의 요청은 승인되었다.

869년 강승훈의 황실 군대가 형태를 갖추고 방훈과 교전할 준비를 하면서, 그는 주야를 선봉 지휘관으로 삼았는데, 10개의 서로 다른 절도에서 온 강승훈 휘하의 군인들은 모두 사타(沙陀) 병사들의 용맹함에 감탄했다고 한다. 그는 이후 방훈과의 전투에서 큰 기여를 했으며, 특히 방훈이 사망한 박주 (현재 안후이성 보저우)에서의 마지막 전투가 그 예이다. 의종 황제는 주야에게 황실 성인 씨를 하사하고, 국창(國昌, "제국 번영"을 의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내렸으며,[7] 정왕의 방계 가문에 입양시켰다.[3] 이후 하동(河東)에서 새로운 대동절도 (大同)를 떼어내 윈저우(雲州, 현재 산시성 다퉁)에 그 본부를 두고, 이국창이 절도사로 봉사하도록 했지만, 이후 이국창을 일정 기간 동안 장안에 머물게 하여 황실 호위 장군으로 근무하게 했다.[7]

2. 3. 당나라와의 갈등

870년, 당 의종은 이국창을 진무(振武) 절도사(본부는 오늘날 후허하오터, 내몽골 자치구)로 임명했다. 그러나 그는 황제의 명령에 불복하고 황제의 승인 없이 자신의 참모들을 살해하여 곧 황실의 분노를 샀다. 872년, 당 의종은 그를 방어사(防禦使)라는 낮은 직함으로 대동 절도로 전임시키려 했다. 이국창은 병을 핑계로 대동으로 부임하는 것을 거부했다.[8] 그는 그 후 진무에 머무르는 것이 허용되었고, 그 후 농민 반란군 왕선지를 토벌하는 황실의 군사 작전에 군사를 파견했다.[3]

878년, 희종당 의종의 어린 아들이었고, 이국창의 장남 이극용은 대동절도에서 사타 군의 부사령관으로 위주(蔚州, 현재의 장자커우, 허베이성)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제국 대부분은 농민 반란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고, 사타 장교 이진충, 엄밀히 말하면 대동의 사타 군 사령관으로서 이극용의 상관이자 그의 부하인 강준리, 설지근(薛志勤), 정회신(程懷信), 그리고 이존장 또한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특히 대동절도 방어사인 단문초(段文楚)가 병사들에게 가혹하고 보급품을 삭감했기 때문이었다. 이진충은 이극용에게 반란에 동의하도록 설득한 후 단문초를 공격하여 체포했다. 이극용은 그 후 운주에 도착하여 대동 본부를 장악하고 단문초와 단문초의 여러 참모들을 잔혹하게 처형했다.[9]

이국창은 처음에는 황실 정부에 계속 충성을 맹세하며, 이극용이 따르지 않을 경우 그를 공격하겠다고 제안하며 대동의 새로운 방어사를 임명해 달라고 요청했다. 희종은 이에 따라 노간방(盧簡方)을 대동의 새로운 방어사로 임명하고, 이국창에게 이극용에게 노간방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편지를 쓰도록 요청했지만, 그 후 노간방을 진무절도사로 임명하고 이국창을 대신 대동으로 (절도사로) 이동시켰는데, 이는 이극용이 그의 아버지를 감히 거스르지 못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국창은 실제로는 자신과 이극용이 각각 한 절도를 통제하는 것을 허용하는 방안을 원했고, 따라서 칙령을 받자 분노하여 칙령을 찢고 군대의 환관 감시관을 죽였다. 그 후 그는 이극용과 힘을 합쳐 이 지역의 다른 절도를 약탈했다. 희종은 그 후 최계강(崔季康)을 하동절도사로 임명하여 이국창과 이극용에 대한 작전을 감독하는 한편, 이극거의 노룡절도사(盧龍, 현재 베이징에 위치), 이균의 조의절도사(昭義, 현재 산시성 창즈에 위치), 그리고 토욕혼 추장 흘련다와 백의성(白義誠), 그리고 삭(薩葛) 추장 미해만(米海萬)에게 공격에 참여하도록 명령했다.[9]

이극용과 이국창은 처음에는 인근 절도에 대한 약탈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하동 군은 여러 차례 위협을 받아 스스로 소란을 일으켜 여러 하동 절도사의 축출 또는 사망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탁(李涿)이 결국 전체 작전을 지휘하게 된 후, 사타에 불리한 상황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880년 여름, 이극용의 부관 고문기(高文集)는 당시 이극용을 위해 삭주(朔州, 현재의 삭저우)를 방어하고 있었는데, 이국창의 사촌 이우금(李友金) 및 다른 여러 추장들과 함께 이탁에게 항복했다. 이극용은 이에 대응하여 삭주를 탈환하기 위해 고문기를 공격했다. 그러나 이극거는 이극용이 삭주를 탈환하기 전에 요아령(藥兒嶺, 현재 허베이성 청더)에서 이극용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이진충과 정을 죽였다. 이극거는 그 후 웅무군(雄武軍, 현재 청더)에서 다시 이극용을 격파했다. 한편, 이탁과 흘련은 이국창이 당시 주둔하고 있던 위주를 공격하여 이국창을 격파했다. 이국창, 이극용, 그리고 그들의 가족은 다다(達靼) 부족으로 도망쳐야 했는데, 당시 그들은 음산산맥 지역에 있었다.[9]

몇 달 후, 대동의 방어사가 된 흘련은 몰래 다다를 설득하여 그들에게 도망쳐온 사타를 학살하려 했다. 이극용은 이 소문을 듣고 다다 귀족들과의 연회에서 사격 솜씨를 보여주며, 다다와 함께 머무를 의사가 없고 결국 당 황실 정부를 도와 농민 반란군 황소를 공격하기를 원한다고 선언했다. 이극용이 그렇게 선언하자, 다다는 그가 머물며 그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고, 따라서 사타를 학살하지 않았다. 그 후, 이국창과 이극용은 얼마 동안 다다와 함께 머물렀다.[9]

2. 4. 유배와 재기

877년 10월, 소의절도사(昭義節度使) 이균(李鈞), 노룡절도사(盧龍節度使) 이가거(李可舉), 토욕혼도독(吐谷渾都督) 혁련택(赫連鐸), 백의성(白義誠) 등이 울주(蔚州)에서 이국창을 공격하였다. 이가거는 이극용을 약올령(藥儿岭)에서 격파하고 혁련택도 이국창을 쳐서 패배시켰다. 때문에 이국창 부자는 북쪽 달단(鞑靼) 땅으로 달아났다.[10]

881년, 황소가 장안을 점령하고 희종을 피신시킨 후, 스스로 제(齊)나라를 세워 황제가 되었을 때, 이우진은 그의 군대의 환관 감군인 진경사(陳景思)를 설득하여 희종에게 이국창과 이극용을 사면하고 그들을 불러 황실을 돕도록 제안하게 했다. 진경사는 이에 동의했고, 이후 이극용은 군대를 이끌고 남쪽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당시 하동 절도사였던 정종당은 그의 군대에 보급을 거부했다. 이에 이극용은 하동의 여러 주를 약탈했고, 정종당은 그의 군대를 몰아냈으며, 이들은 북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신주(忻州, 현재의 산시성 신저우시)와 대주(代州, 현재의 신저우시)를 점령했다.[10] 882년, 당시 다다에 머물고 있던 이국창은 가족을 이끌고 대주에 정착했다.[11]

그해 말, 희종은 다시 이극용을 불러 황소의 제나라를 공격하는 데 도움을 요청했고, 이번에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정종당은 이극용을 다시 가로막지 않았다. 이극용은 이후 장안을 탈환하기 위한 당나라의 주요 장수가 되었다. 883년, 희종은 이극용을 하동 절도사로, 이국창을 대주에 본부를 둔 새로 창설된 대북(代北) 절도사로 임명했다.[11]

2. 5. 사망과 추존

자치통감》에 따르면, 이국창은 887년 대북 절도사로 재임 중 사망했다.[1]구오대사》 주석에 따르면, 그는 사후에 칭호가 추서되었다.[12] 손자 이존욱이 923년 후당을 건국하고 장종으로 즉위한 후,[13] 이국창은 문경황제로 추존되었으며, 묘호는 헌조였다.[14]

3.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주야집의923년 소열황제(昭烈皇帝)로 추존, 묘호는 의조(懿祖)
어머니최씨(崔氏)923년 소열황후(昭烈皇后)로 추존
아내진씨(秦氏)923년 문정황후(文靖皇后)로 추존[16]
형제이덕성본명 주야덕성(朱邪德成)
장남이극용856년 출생, 908년 사망. 884년 농서공(隴西公), 895년 진왕(晉王), 923년 무황제(武皇帝)로 추존, 묘호는 태조(太祖)
차남이극양(李克让)금오위장군(金吾卫将军) 역임, 880년경 황소군과의 전투에서 사망[16]
3남이극공(李克恭)890년 소의절도사(昭义节度使) 역임, 병란으로 피살[16]
4남이극녕진무군절도사(振武军节度使) 역임, 908년 이존욱에게 주살[16]
5남이극근(李克勤)[16]
후진(后晋) 갈충광원좌국공신(竭忠匡运佐国功臣)·횡해군절도사(橫海军节度使) 왕정윤의 어머니[16]
셋째 딸의녕대장공주(义宁大长公主), 송씨(宋氏)에게 출가[17]


참조

[1]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https://zh.wikisourc[...]
[1]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https://zh.wikisourc[...]
[2]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3] 서적 New Book of Tang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6]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7]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8]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9]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0]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2]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https://zh.wikisourc[...]
[13]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14] 서적 New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https://zh.wikisourc[...]
[15] 서적 팽문기란
[16] 문서 大晋故竭忠匡运佐国功臣橫海军节度……王公(廷胤)墓志铭
[17] 서적 旧五代史 卷三十三(唐书) 庄宗纪七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