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좌
1. 개요
이명좌는 덕흥대원군의 7대 사손으로,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으나 사후 신원 회복된 인물이다. 1681년에 태어나 1721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1722년 신임사화 당시 노론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역모 혐의를 받았다. 국청에서 고문을 받고 장세상에게 은화를 전달하여 환국을 도모했다는 자백을 하였고, 결국 참형에 처해졌다. 이후 영조 때 혐의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1724년 신원이 회복되었다. 1900년 고종은 그의 제사를 5대 종손에게 받들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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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궁 주인 -
덕흥대원군
덕흥대원군은 조선 중종의 아들이자 선조의 아버지로, 덕흥군 시절 사치와 노비 문제로 탄핵을 받았지만 선조 즉위 후 대원군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삶은 왕권과 신권의 관계 및 성리학적 이념을 보여주는 사례이고 문학적 업적도 남겼다. -
도정궁 주인 -
이해창 (조선귀족)
이해창은 조선 후기 왕족이자 대한제국 관료, 조선귀족으로, 창산군에 봉해졌으며 한일 병합 후 후작 작위를 받았으나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
1681년 출생 -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
게오르크 필리프 텔레만은 1681년에 태어나 1767년에 사망한 바로크 시대의 다작 작곡가이며, 4,000곡이 넘는 방대한 작품을 남기고 유럽 각국의 음악 양식을 융합하여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다. -
1681년 출생 -
비투스 베링
비투스 베링은 표트르 대제의 명령으로 캄차카 탐험대를 이끌고 시베리아 동부와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을 탐험하여 베링 해협 등 자신의 이름이 붙은 지명을 남긴 덴마크 출신 러시아 해군 장교이자 탐험가이다. -
조선의 문신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조선의 문신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2. 생애
이명좌는 1681년(숙종 7) 2월 22일에 태어나 1721년(경종 1) 식년시 생원에 급제하여 진사를 지냈다. 1722년(경종 2) 노론 우6인(又六人) 중 한 명으로 임인사화(壬寅士禍) 때 목호룡이 경종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는 이른바 삼급수(三急手)의 고변으로 종조(從祖) 충정공 이홍술과 연좌되어 8월 4일 옥에 하옥되었다.
1722년 8월 17일 국청에서 처음에는 사실을 숨겼으나, 형문(刑問)을 받자 다음과 같이 자복하였다.
> 조송이 처음에 종조(從祖)의 의막(依幕)에 가서 은화 3백 냥을 받았고, 제가 또 조송의 생질(甥姪) 이세복으로 하여금 종조의 집에 가서 4백 냥을 가져가게 하였으니, 전후에 낸 것이 합하여 700냥이 됩니다. 모두 조송에게 보내어 장세상에게 쓰도록 하여 환국(換局)을 도모하게 하였습니다. 제가 김시정과 정우관을 찾아가서 보고 그의 밀어(密語)를 따라 묻기를, ‘환국(換局)하는 일을 어떻게 도모하겠는가?’ 하니, 정우관이 이르기를, ‘장세상에게 들여 보낸 은화(銀貨)는 내전(內殿)에서 도모한 일이 있는데, 멀지 않아 일이 성사(成事)되면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상세하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김시태가 와서 말하기를, ‘시사(時事)에 좋은 기회가 있는 것이 명확하다. 오늘 저녁에 그대 집의 대감(大監)께서 마땅히 패초(牌招)받는 일이 있을 것이니, 요동(搖動)하지 말고 속에 융복(戎服)을 입고 소로(小路)를 따라 예궐(詣闕)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바야흐로 영상(領相)의 의막(依幕)에 도로 나가서 또한 이 일을 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벌써 종조(從祖)의 은화를 내어 장세상에게 전송(轉送)하고, 또 정우관을 보고 장세상이 도모하는 일을 물었으니, 궁금(宮禁)에 교통(交通)하며 환국(換局)을 도모하는 모의에 동참(同參)한 것이 적실(的實)합니다.”
이러한 자복을 하고 이날 참형으로 원통하게 향년 42세로 별세하였다.
영조 때 임인년 옥안에 대한 재논의에서 민진원은 “이명좌는 은(銀)을 내어 궁궐 안과 내통했다는 것으로 승복했는데, 이것은 역모했다고 자복한 사람과는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영조는 “무고라고 하는 것은 문목 이외에 잡언(雜言)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고와는 다르다.”라고 하며, 적몰된 가산을 돌려주도록 하였다.
1724년(영조 1년) 영조의 명으로 신원(伸寃)이 회복되고 적몰된 가산도 돌려받았다.
2.1. 가계와 초기 생애
이명좌는 덕흥대원군의 7대손으로, 아버지는 도정궁 사손 증 참판 이세정(李世禎)이며, 어머니는 부제학 심유(沈攸)의 딸인 증 정부인 청송 심씨이다. 부인은 감찰 박대수(朴大需)의 딸이다.
1681년(숙종 7) 2월 22일에 태어나 1721년(경종 1) 식년시 생원에 급제하여 진사를 지냈다.
2.2. 신임사화 연루와 처형
1722년(경종 2) 노론 우6인(又六人) 중 한 명으로 임인사화(壬寅士禍) 때 목호룡이 경종을 시해하려는 모의가 있었다는 이른바 삼급수(三急手)의 고변으로 종조(從祖) 충정공 이홍술과 연좌되어 이해 8월 4일 국청(鞫廳)에서 옥에 하옥되었다.
1722년 8월 17일 국청에서 문목(問目)을 내었으나, 처음에는 사실을 숨기고 바른 대로 고하지 않았다. 김시태와 대질시켜 서로 쟁변(爭辨)할 즈음에 의심할만한 단서가 있어 형문(刑問)을 하였다. 한 차례 형문(刑問)하자 거의 다 실토(實吐)하였지만, 아직도 숨기고 있어 두 차례 형문(刑問)하니, 바른대로 공초(供招)하였다.
그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조송이 처음에 종조(從祖)의 의막(依幕)에 가서 은화 3백 냥을 받았고, 제가 또 조송의 생질(甥姪) 이세복으로 하여금 종조의 집에 가서 4백 냥을 가져가게 하였으니, 전후에 낸 것이 합하여 700냥이 됩니다. 모두 조송에게 보내어 장세상에게 쓰도록 하여 환국(換局)을 도모하게 하였습니다. 제가 김시정과 정우관을 찾아가서 보고 그의 밀어(密語)를 따라 묻기를, ‘환국(換局)하는 일을 어떻게 도모하겠는가?’ 하니, 정우관이 이르기를, ‘장세상에게 들여 보낸 은화(銀貨)는 내전(內殿)에서 도모한 일이 있는데, 멀지 않아 일이 성사(成事)되면 마땅히 스스로 알 것이니, 상세하게 물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김시태가 와서 말하기를, ‘시사(時事)에 좋은 기회가 있는 것이 명확하다. 오늘 저녁에 그대 집의 대감(大監)께서 마땅히 패초(牌招)받는 일이 있을 것이니, 요동(搖動)하지 말고 속에 융복(戎服)을 입고 소로(小路)를 따라 예궐(詣闕)하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바야흐로 영상(領相)의 의막(依幕)에 도로 나가서 또한 이 일을 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벌써 종조(從祖)의 은화를 내어 장세상에게 전송(轉送)하고, 또 정우관을 보고 장세상이 도모하는 일을 물었으니, 궁금(宮禁)에 교통(交通)하며 환국(換局)을 도모하는 모의에 동참(同參)한 것이 적실(的實)합니다.”하였다.
이러한 자복을 하고 이날 참형으로 원통하게 향년 42세로 별세하였다.
영조 때 임인년 옥안에 대한 재논의에서 민진원은 “이명좌는 은(銀)을 내어 궁궐 안과 내통했다는 것으로 승복했는데, 이것은 역모했다고 자복한 사람과는 다릅니다.”라고 하였다. 영조는 “무고라고 하는 것은 문목 이외에 잡언(雜言)이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무고와는 다르다.”라고 하며, 적몰된 가산을 돌려주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