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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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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반룡은 명나라 중기의 문인으로, 의고주의 문학을 주도했다. 그는 관료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은거하여 어머니를 봉양하다가 사망했다. 이몽양, 하경명 등 전칠자의 의고주의를 계승하여 "글은 전한보다, 시는 천보보다 아래는 볼 가치가 없다"고 주장하며 왕세정과 함께 "이왕"으로 불렸다. 그의 작품은 진·한 문체나 당나라 시를 모방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격조 높은 문체를 추구한 시를 남겼다. 작품집으로 『이창명집』, 『고금시산』 등이 있으며, 『당시선』 편찬에 관여했고, 일본 에도 시대의 오규 소라이 등 고문사학파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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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룡
기본 정보
이반룡
이반룡
우린 (于鱗)
창명 (滄溟)
시호안간 (安簡)
출생1514년
사망1570년
국적중국 명나라
민족한족
활동
직업시인, 문학가
시대명나라
분야문학
학문
사상전한 시대의 작품 숭상
문체고문
대표 작품
저서창명집 (滄溟集)

2. 생애

이반룡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가정 23년(1544년) 진사가 되었으며, 섬서 제학부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고, 하남 안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호방하면서도 자부심이 강한 성격이었기에 관료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더 이상 출세하지 못했다.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 역성의 교외에 은거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잠겨 건강을 해쳐 다음 해 융경 4년(1570년)에 사망했다.[1]

2. 1. 초기 생애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가정 23년(1544년) 진사가 되었다. 그 후, 섬서 제학부사 등 지방관을 역임하고, 하남 안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호방하면서도 자부심이 강한 성격이었기에 관료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더 이상 출세하지 못했다.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향리 역성의 교외에 은거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잠겨 건강을 해쳐 다음 해 융경 4년(1570년)에 사망했다.

2. 2. 관직 생활과 은거

가정 23년(1544년) 진사가 되었다. 그 후, 섬서 제학부사 등 지방 관직을 역임하고, 하남 안찰사가 되었다. 그러나 호방하면서도 자부심이 강한 성격이었기에 관료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더 이상 출세하지 못했다. 후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역성의 교외에 은거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잠겨 건강을 해쳐 다음 해 융경 4년(1570년)에 사망했다.

3. 문학 활동

명나라 중기 이동양 등 차릉파의 복고주의적 경향을 이어받아, 이몽양, 하경명 등 전칠자가 "격조설"이라는 문학 이론을 전개하며 의고주의를 더욱 발전시켰다.

작품집으로는 『이창명집』 16권, 고시를 모아 편찬한 『고금시산』 34권 등이 있다. 일본에서 대중적인 책인 『당시선』( 당나라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시집)도 이반룡이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다른 주장도 존재한다. 이반룡의 문학은 일본 에도 시대 오규 소라이의 고문사학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3. 1. 후칠자의 영수

이반룡은 의고주의를 더욱 추진하여, "글은 전한보다, 시는 천보보다 아래는, 모두 볼 가치가 없다[1]"라는 지론을 펼쳤다. 맹우인 왕세정 또한 "글은 반드시 서한(西漢), 시는 반드시 성당, 대력 이후의 글은 읽지 말라[2]"라고 칭하며, 다소 교조주의적으로 의고 문체를 추구해 나갔다. 두 사람은 이왕(李王)이라고 칭해졌으며, 더 나아가 비슷한 복고주의적인 시인인 사진, 종신, 양유예, 서중행, 오국륜 등을 합쳐, 전칠자에 대해 "후칠자"라고 칭했다.

이반룡의 작품은 그의 주장대로 진·의 문체나 성당의 시를 짜깁기한 것이 많아, 후에 이지·원굉도 등이 나와 비판하게 되자, 그의 시문은 선인의 모방에 지나지 않으며 문학을 타락시켰다고 격렬하게 공격받게 된다. 그러나 격조 높은 문체를 추구하는 데 전념한 점도 있어, 성당의 시에 뒤지지 않는 격조를 가진 시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묘추 태화산의 절정에 오르다, 그 첫 번째
창룡이 반쯤 걸린 진천의 비창룡이 반쯤 걸려 있는 진천의 비
석마가 길게 우는 한원의 바람돌말이 길게 울부짖는 한원의 바람
땅은 중원을 열어 가을빛 다하고땅은 중원을 열어 가을빛 다하고
하늘은 만 리를 열어 석양이 비어있네하늘은 만 리를 열어 석양이 비어있네



세모 방가
한 해 내내 책을 저술해도 한 글자도 없어한 해 내내 책을 저술해도 한 글자도 없어
중년에 도를 배워도 여전히 미친 사내중년에 도를 배워도 여전히 미친 사내
그대에게 권하노니 높은 베개 베고 스스로 아끼라그대에게 권하노니 높은 베개 베고 스스로 아끼라
그대에게 권하노니 탁주를 스스로 사 마시라그대에게 권하노니 탁주를 스스로 사 마시라
어떤 사람이 벼슬살이 즐거움을 말하지 않으리어떤 사람이 벼슬살이 즐거움을 말하지 않으리
그대처럼 벼슬을 버려도 다시 나쁘지 않네그대처럼 벼슬을 버려도 다시 나쁘지 않네
어느 곳에서나 세상의 차가움과 더움을 말하지 않으리어느 곳에서나 세상의 차가움과 더움을 말하지 않으리
그대처럼 문을 닫아도 다시 방해되지 않네그대처럼 문을 닫아도 다시 방해되지 않네
비록 졸렬하고 서툴러도 시대의 조류에 맞지 않더라도비록 졸렬하고 서툴러도 시대의 조류에 맞지 않더라도
바로 이것이 유유자적하며 또한 장점이라바로 이것이 유유자적하며 또한 장점이라


3. 2. 문학적 평가와 영향

이반룡은 명나라 중기 의고주의 문학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 왕세정과 함께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그는 "글은 전한보다, 시는 천보보다 아래는, 모두 볼 가치가 없다[1]"라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며, 진·의 문체나 성당의 시를 모방하는 데 집중했다. 이러한 그의 문학관은 이몽양, 하경명 등 전칠자의 "격조설"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2]

이반룡의 이러한 주장은 이지, 원굉도 등에게 "선인의 모방에 지나지 않으며, 문학을 타락시켰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격조 높은 문체를 추구한 그의 노력은 성당의 시에 뒤지지 않는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는 평가도 있다.

다음은 이반룡의 시 "묘추 태화산의 절정에 오르다, 그 첫 번째"와 "세모 방가"의 일부이다.

묘추 태화산의 절정에 오르다, 그 첫 번째



세모 방가



이반룡의 작품집으로는 『이창명집』 16권이 있으며, 고시를 모아 편찬한 『고금시산』 34권 등이 있다. 또한, 당대 시인들의 작품을 모은 시집인 『당시선』도 이반룡이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다(다른 주장도 존재한다). 이반룡의 문학은 일본 에도 시대 오규 소라이의 고문사학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3. 3. 작품

이반룡은 의고주의를 추진하여, "글은 전한보다, 시는 천보보다 아래는, 모두 볼 가치가 없다[1]"라는 지론을 펼쳤다. 맹우인 왕세정 또한 "글은 반드시 서한(西漢), 시는 반드시 성당, 대력 이후의 글은 읽지 말라[2]"라고 칭하며, 다소 교조주의적으로 의고 문체를 추구했다.

이반룡의 작품은 그의 주장대로 진·의 문체나 성당의 시를 짜깁기한 것이 많아, 후에 이지·원굉도 등에게 선인의 모방에 지나지 않으며 문학을 타락시켰다고 비판받았다. 그러나 격조 높은 문체를 추구하는 데 전념한 점도 있어, 성당의 시에 뒤지지 않는 격조를 가진 시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묘추 태화산의 절정에 오르다, 그 첫 번째
창룡이 반쯤 걸려 있는 진천의 비
돌말이 길게 울부짖는 한원의 바람
땅은 중원을 열어 가을빛 다하고
하늘은 만 리를 열어 석양이 비어있네



세모 방가
한 해 내내 책을 저술해도 한 글자도 없어
중년에 도를 배워도 여전히 미친 사내
그대에게 권하노니 높은 베개 베고 스스로 아끼라
그대에게 권하노니 탁주를 스스로 사 마시라
어떤 사람이 벼슬살이 즐거움을 말하지 않으리
그대처럼 벼슬을 버려도 다시 나쁘지 않네
어느 곳에서나 세상의 차가움과 더움을 말하지 않으리
그대처럼 문을 닫아도 다시 방해되지 않네
비록 졸렬하고 서툴러도 시대의 조류에 맞지 않더라도
바로 이것이 유유자적하며 또한 장점이라



작품집으로는 『이창명집』 16권이 있다. 또한 고시를 골라 편찬한 『고금시산』 34권 등이 있다. 당대 시인의 작품을 모은 시집으로 일본에서도 대중적인 책인 『당시선』도 이반룡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전해진다 (이설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당시선』 항목 참조). 일본의 에도 시대, 오규 소라이로 시작하는 고문사학파에 끼친 영향도 크다.

4. 대표작

이반룡의 작품집으로는 『이창명집』 16권, 고시를 골라 편찬한 『고금시산』 34권 등이 있다. 일본에서도 대중적인 시집 『당시선』도 이반룡이 편찬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다른 설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당시선』 항목 참조). 이반룡은 에도 시대 오규 소라이를 필두로 하는 고문사학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1]

4. 1. 묘추등태화절정(藐登太華絕頂)

이반룡은 의고주의를 더욱 추진하여, "글은 전한보다, 시는 천보보다 아래는, 모두 볼 가치가 없다[1]"라는 지론을 펼쳤다. 맹우인 왕세정 또한 "글은 반드시 서한(西漢), 시는 반드시 성당, 대력 이후의 글은 읽지 말라[2]"라고 칭하며, 다소 교조주의적으로 의고 문체를 추구해 나갔다.

이반룡의 작품은 그의 주장대로 진·의 문체나 성당의 시를 짜깁기한 것이 많아, 후에 이지·원굉도 등이 나와 비판하게 되자, 그의 시문은 선인의 모방에 지나지 않으며 문학을 타락시켰다고 격렬하게 공격받게 된다. 그러나 격조 높은 문체를 추구하는 데 전념한 점도 있어, 성당의 시에 뒤지지 않는 격조를 가진 시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묘추 태화산의 절정에 오르다, 그 첫 번째
창룡이 반쯤 걸려 있는 진천의 비
돌말이 길게 울부짖는 한원의 바람
땅은 중원을 열어 가을빛 다하고
하늘은 만 리를 열어 석양이 비어있네


4. 2. 세모방가(歲暮訪賈)

세모방가(歲暮訪賈)
한 해 내내 책을 저술해도 한 글자도 없어중년에 도를 배워도 여전히 미친 사내
그대에게 권하노니 높은 베개 베고 스스로 아끼라그대에게 권하노니 탁주를 스스로 사 마시라
어떤 사람이 벼슬살이 즐거움을 말하지 않으리그대처럼 벼슬을 버려도 다시 나쁘지 않네
어느 곳에서나 세상의 차가움과 더움을 말하지 않으리그대처럼 문을 닫아도 다시 방해되지 않네
비록 졸렬하고 서툴러도 시대의 조류에 맞지 않더라도바로 이것이 유유자적하며 또한 장점이라


참조

[1] 서적 李攀竜伝 明史
[2] 서적 王世貞伝 明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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