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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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신통은 수나라 말기에 당나라에 귀순한 인물이다. 이연이 거병하자 호현을 평정하고 관중도행군총관을 자칭했으며, 당나라 건국 후 우익위대장군에 임명되었다. 우문화급 토벌에 참여했으나 실패하고 두건덕에게 사로잡히기도 했다. 이후 두건덕 멸망 후 하북행대좌복야를 거쳐 좌무위대장군, 개부의동삼사를 역임했다. 631년에 사망하여 사공으로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정(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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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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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휘 | 신통(神通) |
성 | 이(李) |
작위 | 범안왕(范安王) |
시호 | 효(孝) |
생몰 | |
생년 | 569년 |
몰년 | 627년 |
가계 | |
아버지 | 이고(李暠) |
어머니 | 달씨(達氏) |
형 | 이효기(李孝基) |
아들 | 이도종(李道宗) 이승장(李承將) 이만영(李萬盈) |
주요 활동 | |
기타 정보 | |
소속 세력 | 당나라 |
2. 생애
수나라 대업 말년, 이신통은 장안에 있었다. 대업 13년(617년), 이연이 태원에서 거병하자, 수나라 관료의 체포를 피해 호현 남쪽 산으로 들어갔다. 사만보, 배척, 유숭례 등과 호응하고, 사죽의 적 하반인과 결탁하여 평양 소공주의 군대와 합류하여 호현을 평정했다. 관중도행군총관을 자칭하고, 사만보를 부총관으로, 배척을 장사로, 유숭례를 사마로, 영호덕분을 기실로 삼았다. 이연이 이를 듣고 이신통을 광록대부에 임명하고, 조흥군공에 봉했으며, 식읍 2천 호를 받았다. 당군이 장안을 평정하자, 종정경에 임명되고, 식읍 5천 호가 추가되었다. 곧 좌령도독으로 전임되어 황성의 숙위를 맡았다.
무덕 원년 (618년), 당나라가 건국되자 우익위대장군에 임명되고, 영강군왕에 봉해졌다. 이후 회안군왕으로 개봉되었으며, 산동도안무대사에 임명되고, 황문시랑 최간을 부사로 삼아 위현에서 우문화급을 토벌했다. 우문화급이 요성으로 패주하자, 이신통은 북쪽으로 추격했고, 우문화급은 식량이 떨어져 항복을 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간은 항복을 받아들일 것을 권했지만, 이신통은 "우리 군은 오랫동안 비바람을 견뎌왔지만, 지금 적은 식량도 떨어져 조만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격파하면 옥백으로 전과에 보상받을 수도 있다. 만약 항복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어디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최간이 "우문화급을 평정하기 전에, 두건덕이 올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양쪽 적 사이에 갇혀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지금 옥백을 탐하려다가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이신통은 분노하여 최간을 군중에 가두었다. 우문사급이 제북에서 허군에 보급했으므로, 우문화급은 세력을 회복했다. 이신통은 군사를 진격시켜 성루에 다가갔고, 패주자사 조군덕을 선두로 하여 성벽에 접근하게 했지만, 조군덕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꺼려 전투를 중단시켰다. 조군덕은 분노하며 욕설을 퍼붓고 돌아갔고, 요성은 다시 굳게 지켜졌다. 이신통은 군사를 나누어 위주에 파견하여 공성 도구를 가져오게 했으나, 도중에 신현 사람들에게 패했다. 두건덕의 군대가 오자, 이신통은 군대를 물렸다. 이틀 후, 두건덕이 요성을 함락하자, 그 세력은 팽창했고, 산동의 주현은 두건덕에게 귀순했다. 이신통 휘하의 많은 병사들이 멸망했고, 이신통은 퇴각하여 려양을 지키고, 이적에게 의지했으나, 곧 두건덕에게 사로잡혔다. 이후 동안공주와 함께 당나라로 귀환했다.
무덕 4년 (621년), 두건덕이 멸망하자, 하북행대좌복야로 다시 기용되었다. 무덕 5년 (622년), 이세민을 따라 유흑척을 토벌하고, 좌무위대장군으로 전임했다. 정관 원년 (627년), 개부의동삼사로 임명되고, 익주에 별봉 5백 호를 받았다.
정관 4년 12월 21일 (631년 1월 28일)에 장안 연복리 저택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사공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靖)이었다. 정관 5년 12월 11일 (632년 1월 8일), 옹주 삼원현의 만수원에 묻혔다.
2. 1. 초기 생애 및 거병
수나라 대업 말년, 이신통은 장안에 있었다. 대업 13년(617년), 이연이 태원에서 거병하자, 수나라 관료의 체포를 피해 호현 남쪽 산으로 들어갔다. 사만보, 배척, 유숭례 등과 호응하고, 사죽의 적 하반인과 결탁하여 평양 소공주의 군대와 합류하여 호현을 평정했다. 관중도행군총관을 자칭하고, 사만보를 부총관으로, 배척을 장사로, 유숭례를 사마로, 영호덕분을 기실로 삼았다. 이연이 이를 듣고 이신통을 광록대부에 임명하고, 조흥군공에 봉했으며, 식읍 2천 호를 받았다. 당군이 장안을 평정하자, 종정경에 임명되고, 식읍 5천 호가 추가되었다. 곧 좌령도독으로 전임되어 황성의 숙위를 맡았다.무덕 원년 (618년), 당나라가 건국되자 우익위대장군에 임명되고, 영강군왕에 봉해졌다. 이후 회안군왕으로 개봉되었으며, 산동도안무대사에 임명되고, 황문시랑 최간을 부사로 삼아 위현에서 우문화급을 토벌했다. 우문화급이 요성으로 패주하자, 이신통은 북쪽으로 추격했고, 우문화급은 식량이 떨어져 항복을 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간은 항복을 받아들일 것을 권했지만, 이신통은 "우리 군은 오랫동안 비바람을 견뎌왔지만, 지금 적은 식량도 떨어져 조만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격파하면 옥백으로 전과에 보상받을 수도 있다. 만약 항복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어디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최간이 "우문화급을 평정하기 전에, 두건덕이 올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양쪽 적 사이에 갇혀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지금 옥백을 탐하려다가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이신통은 분노하여 최간을 군중에 가두었다. 우문사급이 제북에서 허군에 보급했으므로, 우문화급은 세력을 회복했다. 이신통은 군사를 진격시켜 성루에 다가갔고, 패주자사 조군덕을 선두로 하여 성벽에 접근하게 했지만, 조군덕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꺼려 전투를 중단시켰다. 조군덕은 분노하며 욕설을 퍼붓고 돌아갔고, 요성은 다시 굳게 지켜졌다. 이신통은 군사를 나누어 위주에 파견하여 공성 도구를 가져오게 했으나, 도중에 신현 사람들에게 패했다. 두건덕의 군대가 오자, 이신통은 군대를 물렸다. 이틀 후, 두건덕이 요성을 함락하자, 그 세력은 팽창했고, 산동의 주현은 두건덕에게 귀순했다. 이신통 휘하의 많은 병사들이 멸망했고, 이신통은 퇴각하여 려양을 지키고, 이적에게 의지했으나, 곧 두건덕에게 사로잡혔다. 이후 동안공주와 함께 당나라로 귀환했다.
2. 2. 당나라 건국 이후
수나라 대업 말년, 이신통은 장안에 있었다. 617년(대업 13년), 이연이 태원에서 거병하자, 호현 남쪽 산으로 들어가 사만보, 배척, 유숭례 등과 호응하고, 사죽의 적 하반인과 결탁하여 평양공주의 군대와 합류하여 호현을 평정했다. 관중도행군총관을 자칭하고, 사만보를 부총관으로, 배척을 장사로, 유숭례를 사마로, 영호덕분을 기실로 삼았다. 이연은 이신통을 광록대부에 임명하고 조흥군공에 봉했으며, 식읍 2천 호를 내렸다. 당군이 장안을 평정하자, 종정경에 임명되고 식읍 5천 호가 더해졌다. 곧 좌령도독으로 전임하여 황성의 숙위를 맡았다.618년(무덕 원년), 당나라가 건국되자 우익위대장군에 임명되고 영강군왕에 봉해졌으며, 이후 회안군왕으로 개봉되었다. 산동도안무대사에 임명되고, 황문시랑 최간을 부사로 삼아 위현에서 우문화급을 토벌했다. 우문화급이 요성으로 패주하자, 북쪽으로 추격했고, 우문화급은 식량이 떨어져 항복을 청했지만, 이신통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간은 항복을 권했지만, 이신통은 "우리 군은 오랫동안 비바람을 견뎌왔지만, 지금 적은 식량도 떨어져 조만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격파하면 옥백으로 전과에 보상받을 수도 있다"며 거절했다. 최간은 두건덕이 올 가능성을 언급하며 항복을 받아들일 것을 재차 권했지만, 이신통은 분노하여 최간을 가두었다. 우문사급이 허군에 보급하면서 우문화급은 세력을 회복했다. 이신통은 조군덕을 선두로 성벽에 접근하게 했지만, 조군덕이 공을 세우는 것을 꺼려 전투를 중단시켰고, 조군덕은 욕설을 퍼붓고 돌아갔다. 이신통은 군사를 나누어 위주에 파견하여 공성 도구를 가져오게 했으나, 도중에 신현 사람들에게 패했다. 두건덕의 군대가 오자, 이신통은 군대를 물렸다. 이틀 후, 두건덕이 요성을 함락하자, 산동의 주현은 두건덕에게 귀순했다. 이신통은 여양을 지키고, 이적에게 의지했으나, 두건덕에게 사로잡혔다. 이후 동안공주와 함께 당나라로 귀환했다.
621년(무덕 4년), 두건덕이 멸망하자 하북행대좌복야로 다시 기용되었다. 622년(무덕 5년), 이세민을 따라 유흑척을 토벌하고, 좌무위대장군으로 전임했다. 627년(정관 원년), 개부의동삼사로 임명되고, 익주에 별봉 5백 호를 받았다.
631년 1월 28일 (정관 4년 12월 21일)에 장안 연복리 저택에서 사망했으며, 사공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靖)이었다. 632년 1월 8일 (정관 5년 12월 11일), 옹주 삼원현의 만수원에 묻혔다.
2. 3. 우문화급 토벌과 두건덕과의 대립
수나라 대업 말년, 이신통은 장안에 있었다. 617년(대업 13년), 이연이 태원에서 거병하자, 수나라 관료의 체포를 피해 호현 남쪽 산으로 들어갔다. 사만보, 배척, 유숭례 등과 호응하고 사죽의 적 하반인과 결탁하여 평양공주의 군대와 합류하여 호현을 평정했다. 관중도행군총관을 자칭하고, 사만보를 부총관으로, 배척을 장사로, 유숭례를 사마로, 영호덕분을 기실로 삼았다. 이연이 이를 듣고 이신통을 광록대부에 임명하고 조흥군공에 봉했으며, 식읍 2천 호를 내렸다. 당군이 장안을 평정하자, 이신통은 종정경에 임명되고 식읍 5천 호가 더해졌다. 곧 좌령도독으로 전임하여 황성의 숙위를 맡았다.618년(무덕 원년), 당나라가 건국되자 우익위대장군에 임명되고 영강군왕에 봉해졌으며, 나아가 회안군왕으로 개봉되었다. 산동도안무대사에 임명되고, 황문시랑 최간을 부사로 삼아 위현에서 우문화급을 토벌했다. 우문화급이 요성으로 패주하자, 이신통은 북쪽으로 추격했고, 우문화급은 식량이 떨어져 항복을 청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간은 항복을 받아들일 것을 권했지만, 이신통은 "우리 군은 오랫동안 비바람을 견뎌왔지만, 지금 적은 식량도 떨어져 조만간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격파하면 옥백으로 전과에 보상받을 수도 있다. 만약 항복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어디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가"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최간은 "우문화급을 평정하기 전에, 두건덕이 올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게 되면 우리는 양쪽 적 사이에 갇혀 위험에 빠질 것입니다. 지금 옥백을 탐하려다가 패배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지만, 이신통은 분노하여 최간을 군중에 가두었다.
마침 우문사급이 제북에서 허군에 보급했으므로, 우문화급은 세력을 회복했다. 이신통은 군사를 진격시켜 성루에 다가갔고, 패주자사 조군덕을 선두로 하여 성벽에 접근하게 했지만, 조군덕이 공적을 세우는 것을 꺼려 전투를 중단시켰다. 조군덕은 분노하며 욕설을 퍼붓고 돌아갔고, 요성은 다시 굳게 지켜졌다. 이신통은 군사를 나누어 위주에 파견하여 공성 도구를 가져오게 했으나, 도중에 신현 사람들에게 패했다. 두건덕의 군대가 오자, 이신통은 군대를 물렸다. 이틀 후, 두건덕이 요성을 함락하자 그 세력은 팽창했고, 산동의 주현은 두건덕에게 귀순했다. 이신통 휘하의 많은 병사들이 멸망했고, 이신통은 퇴각하여 려양을 지키고, 이적에게 의지했으나, 곧 두건덕에게 사로잡혔다. 이후 동안공주와 함께 당나라로 귀환했다.
2. 4. 두건덕 멸망 이후
수나라 대업 13년(617년), 이연이 태원에서 거병하자, 이신통은 수나라 관료의 체포를 피하기 위해 호현 남쪽 산으로 들어갔다. 평양공주의 군대와 합류하여 호현을 평정하고 관중도행군총관을 자칭했다. 무덕 원년 (618년), 당나라가 건국되자 우익위대장군에 임명되고 영강군왕에 봉해졌으며, 회안군왕으로 개봉되었다. 산동도안무대사에 임명되어 우문화급을 토벌하려 했으나, 우문화급이 요성으로 패주하자 추격하여 항복을 권유받았지만 거절하였다.이후, 두건덕의 군대가 오자 이신통은 군대를 물렸고, 두건덕이 요성을 함락하면서 세력이 팽창, 산동의 주현은 두건덕에게 귀순했다. 이신통은 퇴각하여 려양을 지키고, 이적에게 의지했으나, 두건덕에게 사로잡혔다가 당나라로 귀환했다.
무덕 4년 (621년), 두건덕이 멸망하자, 하북행대좌복야로 다시 기용되었다. 무덕 5년 (622년), 이세민을 따라 유흑척을 토벌하고, 좌무위대장군으로 전임했다. 정관 원년 (627년), 개부의동삼사로 임명되고, 익주에 별봉 5백 호를 받았다.
2. 5. 사망
이신통은 정관 4년 12월 21일 (631년 1월 28일)에 장안 연복리 저택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사공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시호는 정(靖)이었다. 정관 5년 12월 11일 (632년 1월 8일), 옹주 삼원현의 만수원에 묻혔다.3. 가족 관계
wikitext
- 이도언(교동군공)
- 이효찰 (고밀군공)
- 이효동 (자천군공)
- 이효자 (광평군공)
- 이효우 (하간군공, 상서좌승)
- 이효절 (청하군공, 영주도독)
- 이효의 (교서군공, 사농경)
- 이효예 (염주자사)
- 이효일 (양군공, 급사중)
- 이효렴 (월주도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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