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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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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나라는 581년 양견(수 문제)이 건국한 중국의 왕조로, 남북조 시대를 통일하고 중국을 재통일했다. 수 문제는 북주의 제도를 개혁하고, 과거제를 시행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했으며, 만리장성 보수, 대운하 건설 등 대규모 토목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양제의 과도한 토목 사업과 고구려 원정 실패로 인해 백성들의 불만이 커졌고, 결국 618년 양제가 살해당하며 멸망했다. 수나라는 3대 39년의 짧은 존속 기간 동안 율령 체제 정비, 삼성육부, 과거제 도입 등 당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제도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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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지도
수나라 (581년경)
기본 정보
국호
일반 명칭수나라
시대후고전 시대
국가 유형제국
정부 형태군주제
건국일581년 3월 4일
멸망일618년 5월 23일
수도대흥(581–618)
공용어중세 중국어
종교불교
도교
유교
중국 민간 신앙
조로아스터교
통화중국 동전
중국 엽전
주요 사건
건국북주에서 양견이 제위 찬탈
멸망이연에 의해 폐지
이전 국가
이전 국가북주

서량
다음 국가
다음 국가당나라
역대 황제
황제문제
재위 기간581년–604년
황제양제
재위 기간604년–617년
황제공제
재위 기간617년–618년
면적 및 인구
면적 (589년)3,000,000 제곱킬로미터
인구 (581년)29,016,484명
면적 (593년)4,670,000 제곱킬로미터
면적 (609년)5,040,000 제곱킬로미터
인구 (609년)46,019,956명
기타
현재 국가중국
베트남

2. 역사

북위가 멸망하고 북주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북주의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인 양견은 아버지 양충의 지위를 계승하여 권력을 장악했다.[36] 580년 양견은 섭정으로서 북주의 실권을 장악했고, 581년 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했다.[36]

문제는 중국 통일을 위해 진나라 정벌을 준비했다. 장성을 보수하고 한구를 개착하여 보급로를 확보했으며, 후량을 병합하고 함대를 건설하여 50만 군대를 양성했다. 588년 문제는 차남 양광(훗날 양제)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진나라를 공격, 589년 진나라 수도 건강을 함락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40]

문제는 내정 개혁에도 힘써 개황율령을 제정하고, 3성 6부의 중앙 관제를 확립했다. 또한 과거를 실시하여 귀족 세력을 견제하고 황제 중심의 통치 체제를 강화했다. 이러한 문제의 치세를 '''개황의 치'''라고 부른다.

604년 문제가 사망하고 양제가 즉위했다. 양제는 대운하(大運河) 건설, 동도 낙양(洛陽)성 건설 등 대규모 토목 사업을 추진했으나, 과도한 토목공사와 고구려 원정 실패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결국 616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618년 양제는 근위군에게 살해당했다.[29]

양제의 죽음 이후 이연양유로부터 선양을 받아 당나라를 건국했고, 619년 양동왕세충에게 찬탈당하면서 수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29]

사건날짜
양제의 사망618년 4월 11일[29]
공제 양유가 이연에게 선양618년 6월 12일[29]
공제 양동이 왕세충에게 선양619년 5월 23일[29]



수나라 시대의 관세음보살(관음) 석상


불교는 수나라 이전의 남북조 시대에 중국에 전파되어 널리 퍼졌으며, 수나라 건국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문제는 불교를 통해 황실 권위를 확보하려 했으며,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불교 유물을 전국 사찰에 분배했다.[30]

2. 1. 건국 배경

북위 초기, 선비족 무사들이 주둔했던 무천진(武川鎭) 출신인 양견의 가문은 대대로 북조의 유력 귀족이었다.[56][57][58][59] 양견의 아버지 양충은 서위 건국에 공을 세워 대장군과 수국공(隨國公) 작위를 받았다.[36] 568년 양충이 사망하자 양견이 그 지위를 계승하였다.

무제 사후, 선제는 기행을 일삼다 재위 8개월 만에 퇴위하고 아들 정제에게 양위했다. 선제는 스스로 천원황제(天元皇帝)라 칭하며 정사를 돌보지 않아, 정제를 보필하던 양견의 명성이 높아졌다. 580년 선제가 사망하자 양견은 섭정으로서 권력을 장악했다.[36]

이에 무천진 군벌 내 유력자들이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양견은 이들을 각개격파하고 북주 내 패권을 확고히 했다. 그해 말 양견은 수국공에서 수왕(隋王)으로 승진했고, 581년 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했다.[36]

양견은 한족 출신임을 강조하며, 선비족 성씨인 보육여(普六茹)를 버리고 한족식 성씨인 양(楊)씨로 복성하였다.[2] 또한 한족 중심의 정책을 펼쳤다.[2]

2. 2. 중국 통일

576년 무제가 숙적인 북제를 멸망시키고 남쪽의 진나라 정벌을 준비하던 중 병사하였다. 무제의 뒤를 이은 선제는 기괴한 인물로 5명의 황후를 거느렸는데, 그중 한 명이 양견의 장녀인 천원대황후 양씨 여화였다. 선제의 또 다른 황후인 천대황후 주씨가 우문천을 낳았고, 이 우문천이 정제가 되었다. 선제는 재위 8개월 만에 퇴위하여 정제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스스로 천원황제(天元皇帝)를 칭하며 정무를 내팽개쳐 정제를 보살피던 양견의 명성을 높였다. 580년 선제가 죽자 양견은 섭정으로 전권을 장악했다. 이에 반발한 무천진 군벌 내 실력자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양견은 이를 각개격파하여 북주 내 패권을 확고히 했다. 그 해 말 수국공에서 수왕(隋王)의 자리에 오른 뒤, 다음 해 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수나라를 건국하였다. 양견은 사후 문제라는 시호를 받았다.[36] 이후 동돌궐이 수나라 수도까지 쳐들어와 수나라는 동돌궐에 신하국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양견의 딸을 공녀로 보냈다.

문제무제의 중국 통일 사업을 이어받아, 진나라 정벌을 위한 준비를 철저히 진행했다. 장성을 보수하여 북쪽 돌궐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으며, 한구(邗溝)를 개착하여 회수장강을 연결함으로서 보급로를 확보하였다. 뒤이어, 곧바로 북조 괴뢰 정권인 후량을 병합하여 전초기지로 삼고, 함대를 건설하고 50만 군대를 양성했다. 588년 문제는 차남인 진왕 양광(훗날 양제)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진나라 원정을 시작했다. 수나라 군대는 다음해(589년) 진나라 수도 건강을 손쉽게 함락시켰다.[40] 진나라 황제 진숙보는 우물에 숨었으나 체포되었다. 진나라 멸망 이후, 184년 황건적의 난에서 시작되어 약 405년 동안 지속된 기나긴 분열 시대가 종결되고 중국이 통일되었다.

2. 3. 개황의 치

문제는 즉위한 직후부터 내정 개혁을 진행했다.

북주의 『주례』와 선비 회귀 정책을 중지하고, 북제의 제도를 참고하여 개혁을 단행했다. 581년 새로운 율령인 개황율령을 제정하였는데, 이 율령은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간소화해서 알기 쉽게 고친 것이다. 이후 이 개황율령은 당나라 율령에서도 답습했다.

관리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했는데, 최고기관으로써 상서성, 문하성, 내사성(당나라중서성)의 3성을 설치하고, 상서성 아래 문서행정기관인 6부, 즉 인사담당인 이부, 재정담당인 호부(탁지부), 의례담당인 예부, 군사담당인 병부, 사법담당인 형부(도관부), 토목담당인 공부를 두었다. 그 아래 실무기관인 9시(寺)와 이들 관청을 별도로 감찰하고 감독하는 기관인 어사대를 설치했다. 이때까지 지방에서 사용하던 주(州)-군(郡)-현(縣)이라는 3단계 구분을 없애고, 주와 현의 2단계로 지방 행정구역을 재편하였다.

그리고 문제 치적 가운데 가장 뛰어난 치적인 과거(정식 명칭은 貢擧)를 실행했다. 남북조 시대 때 구품관인법에 따라 관리 임명권이 귀족 세력의 손에 있었다. 과거는 지방호족의 세습적인 임관이 아니고 실력시험의 결과로 관리의 임용을 결정한다는 매우 개방적인 수단으로 이것을 이용하여 관리 임명권을 황제의 손으로 돌려받을 수 있는 이점도 노렸다.

이렇게 문제에 의해 정비된 여러 제도는 거의 대부분이 후에 당나라가 물려받아, 당나라 역사를 지탱하는 기초가 되었다. 이러한 문제의 치세를 당시 연호에 의거해 '''개황의 치'''라고 불렀다.

2. 4. 양제의 치세와 멸망

안배의 묘 패널에 나타난 수나라의 연회 모습. 소그드 춤과 음악이 등장하며, 589년 작이다.


수나라 비파 연주자상


604년, 문제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즉위한 차남 양광(양제)은 즉위 직후 폐태자 양용을 찾아내 살해하고,[43] 동생 양량(楊諒)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41] 형제들을 음모로 살해하여 경쟁자들을 제거했다. 양제는 검소함을 추구했던 문제와는 달리 사치를 즐겼고, 아버지가 시작했던 대규모 토목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주요 업적으로는 동도 낙양(洛陽)성 건설과 대운하(大運河)를 대폭 연장하여 하북에서 강남까지 연결한 것이 있다. 이러한 대규모 토목공사에는 하남의 여러 군에서 100만 명이 넘는 남녀가 동원되어 고된 노역에 시달렸다.[44] 대운하 공사 역시 양제 자신의 행차와 수도를 위한 수출입, 군대 수송 등에 사용되었을 뿐 민간에 대한 편익은 매우 적었다.[44] 양제의 사치스러운 생활은 신하들에게까지 퍼져[45] 풍기를 해이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양제는 당시 속국이었던 돌궐에 대비하기 위해 100만 명이 넘는 남녀를 동원하여 장성을 수축하였고, 이 고된 노역으로 많은 남녀가 목숨을 잃었다.[46]

양제는 베트남으로 군사 원정을 보내, 북베트남의 안남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중앙 베트남의 참파 왕국은 북쪽 중국 침략에 대한 주요 대응 세력이 되었다.[23] 수나라 군대는 참파 군대와 전투에서 승리했지만, 많은 병사들이 질병으로 사망했다.[23]

611년, 양제는 문제가 시작했던 고구려 원정을 세 차례에 걸쳐 실시했다.[48] 612년부터 시작된 고구려 원정은 113만 명의 병사가 징병되는 대규모 작전이었으며, 래호아(來護兒)와 우문술(宇文述) 등이 지휘관으로서 고구려를 공격했다.[48] 그러나 1차 원정은 대패하였고, 군량 부족으로 인해 후퇴했다.[49] 613년에는 양제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614년에 실시된 3차 원정에서는 고구려 측도 쇠약해져 양제에게 순종의 뜻을 보였으나, 양제가 조건으로 내건 고구려 왕의 입조는 무시되었고, 양제는 4차 원정을 계획했다.[49]

양제의 과도한 토목공사와 고구려 원정 실패는 백성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결국 제2차 고구려 원정에서 철군하는 도중에 양제의 측근이었던 양소의 아들 양현감이 려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50] 이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 반란을 계기로 중국 전역에서 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50]

616년에는 반란이 각지에서 최고조에 달했다.[51] 이밀, 두건덕, 이연(후의 당나라 고조) 등이 독립 세력이 되었다(수말당초의 군웅 일람).

양제는 반란 진압에 힘썼으나, 가혹한 살육 정책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왔다.[51] 격렬해지는 반란 속에서 양제는 강도로 행차하여 머물면서 반란 진압의 지휘를 맡았으나, 실질적으로 북방을 버리고 도망친 것과 같았고, 북방의 반란은 더욱 격렬해져, 마침내 이연에 의해 수도 대흥성마저 함락당했다. 대흥성을 장악한 이연은 양제의 퇴위를 선언하고, 양제의 손자인 양유(공제유)를 즉위시켰다.[52]

강남에 자리를 잡은 양제는 점차 술과 연회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 간언이나 제언하는 신하들에게 살육으로 대하여 완전히 민심을 잃었다.[52] 618년, 양제를 따라 강도로 간 수군은 대부분 북방 출신이었고,[52] 중신인 우문화급은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침내 양제를 버리고, 반양제 세력을 결집하여 반란을 일으켰다.[53] 그리고 양제를 교살했다.[53]

2. 5. 수나라 멸망 이후

618년 우문화급의 주도로 근위군이 양제를 살해했다.[29] 양제의 죽음을 들은 이연양유로부터 선양을 받아 당나라를 건국했다.[29] 같은 시기 낙양에 있던 양동은 양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618년 왕세충에 의해 황제가 되었으나,[29] 619년 왕세충에게 찬탈당했다.[29]

수나라의 멸망 연도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당나라가 편찬한 정사인 《수서》 등에서는 당나라가 수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은 618년을 멸망 시점으로 보기도 하고, 양동이 왕세충에게 찬탈당한 619년을 멸망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29]

사건날짜
양제의 사망618년 4월 11일[29]
공제 양유가 이연에게 선양618년 6월 12일[29]
공제 양동이 왕세충에게 선양619년 5월 23일[29]


3. 정치

수나라는 북주의 제도를 계승하면서도 북제의 제도를 참조하여 중앙 관제를 개혁했다. 상서성, 문하성, 내사성의 3성,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의 6부 체제를 확립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다.[54] 개황율령에서 이미 3성 6부제가 완성되었으며, 이후 당나라의 율령 관제에도 영향을 주었다.[54]

수 문제는 남북조 시대 구품관인법에 따라 귀족 세력이 가지고 있던 관리 임명권을 황제에게 귀속시키기 위해 과거를 시행했다.[54] 또한 주(州)-군(郡)-현(縣)의 3단계 지방 행정 구역을 주(州)와 현(縣)의 2단계로 개편하였다.[54]

610년의 수나라-개황의 치 사이에 행정구역이 재편되었다.


수 문제는 581년에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간소화한 새로운 율령인 개황율령을 제정했다. 이 율령은 당나라 율령에서도 답습되었다.[54] 양제가 즉위하자 '''대업률령'''을 제정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54]

3. 1. 중앙 관제

수나라는 북주의 제도를 계승하면서도 북제의 제도를 참조하여 중앙 관제를 개혁했다. 3성 6부제를 확립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했는데, 3성은 상서성, 문하성, 내사성을 말한다. 상서성은 정책 집행을, 문하성은 정책 심의를, 내사성은 황명 출납을 담당했다.[54]

6부는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를 말하며, 각각 인사, 재정, 의례, 군사, 사법, 토목을 담당했다. 이들 관청을 감찰하고 감독하는 기관으로 어사대를 설치했다. 수나라에서는 "형부"를 "도관", "호부"를 "도지"라고 하는 등 관명이 일부 달랐다.[54]

이러한 3성 6부제는 개황률령에서 이미 완성되었으며, 이후 당나라의 율령 관제에도 영향을 주었다.[54]

3. 2. 지방 제도

수 문제는 남북조 시대 때 구품관인법에 따라 귀족 세력이 가지고 있던 관리 임명권을, 실력 시험을 보는 과거를 실행하여 황제가 가져올 수 있었다.[54] 수 문제는 지방에서 사용하던 주(州)-군(郡)-현(縣)의 3단계 행정 구역 구분을 없애고, 주(州)와 현(縣)의 2단계로 지방 행정 구역을 개편하였다.[54] 이는 지방 장관이 임명하던 주현관을 중앙에서 파견하고 병권을 빼앗음으로써, 문벌 귀족을 억압하고 중앙 집권화를 추진한 것이다.

3. 3. 과거 제도

남북조 시대 구품관인법에 따라 관리 임명권이 귀족 세력의 손에 있었다. 과거는 실력시험을 통해 관리를 임용하는 제도로, 지방 호족의 세습적인 임관 방식과 달리 매우 개방적인 수단이었다. 수 문제는 과거제를 통해 관리 임명권을 황제에게 귀속시켜 황제권을 강화하고자 했다.[55]

3. 4. 법률

수 문제는 581년에 새로운 율령인 개황율령을 제정했는데, 이는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간소화하여 알기 쉽게 고친 것이다. 이 율령은 당나라 율령에서도 답습되었다.[54] 율·령을 보충하는 법제로서 각·식도 수나라 시대에 완성되었다. 잔혹한 형벌의 폐지와 율의 간소화 등의 개혁이 이루어졌다. 양제가 즉위하자 '''대업률령'''을 제정했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54]

4. 군사

수나라는 부병제를 기반으로 군사 제도를 운영했다. 군사 제도 측면에서 여러 위(衛)를 분할 배치하였고, 군부 숙위 제도는 서위(西魏)와 북주(北周)의 십이대장군제(十二大将軍制)에서 유래하였다. 사위(司衛), 사무관(司武官)을 설치하여 부병은 궁전 경비를, 무후부(武侯府)는 경성(京城)의 경비를 담당하였고, 각지에 상대부(上大夫)를 배치하였다.[1]

수나라는 주변 국가들과 잦은 전쟁을 벌였다. 특히 고구려-수나라 전쟁은 수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24] 베트남으로의 군사 원정 또한 이루어졌는데, 안남은 한나라 시대에 중국에 편입되었고, 참파 왕국은 중국의 침략에 대응하였다. 하노이 지역은 초대 리 왕조 통치자로부터 쉽게 탈환되었으나, 수나라 군대는 참파 군대의 전투 코끼리 공격을 받았다. 수나라 군대는 함정을 파 코끼리를 잡고, 석궁으로 공격하여 승리했지만, 많은 병사들이 열대병(예: 말라리아)으로 사망했다.[23]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은 여러 차례 실패로 끝났고, 수나라는 이로 인해 재정적, 인적 손실을 입어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4. 1. 군사 제도

수나라는 부병제를 기반으로 한 군사 제도를 운영했다. 부병제는 농민에게 토지를 지급하고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제도로, 병농일치를 통해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1]

수나라는 여러 위(衛)를 분할 배치하였고, 군부 숙위 제도는 서위와 북주의 십이대장군제에서 유래하였다. 사위, 사무관을 설치하여 부병은 궁전 경비를, 무후부는 경성의 경비를 담당하였다. 각지에는 상대부를 배치하였다.[1]

수 문제는 북주의 제도를 계승하여 중앙 관리 기관으로 십이위를 설치했는데, 이는 후에 십육위의 전신이 된다. 십이위는 좌우익위, 좌우효기위, 좌우무위, 좌우둔위, 좌우후위, 좌우어위로 나뉘어 수비와 정벌 임무를 맡았다. 수비는 내위와 외위로 나뉘었고, 전시에는 황제의 명령으로 행군원수나 행군총관이 전시 지휘관이 되어 작전 조직을 편성했다.[1]

예를 들어, 수나라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전투에서는 행군원수로 양광, 양준, 양소가 임명되었고, 양광이 조정을 맡았다. 수나라와 돌궐의 전투에서는 이황이, 수나라와 토욕혼의 전투에서는 양원이 행군총관에 임명되었다. 전투 후, 총관은 직무를 마치고 군대를 지방 총관에게 반환했다.[1]

양제는 607년에 십이위를 확대하여 위통부 제도를 설치하여 군사력과 중앙 시위력을 강화하고 장군의 권한을 분산시켰다. 위통부는 십이위와 사부를 합쳐 십육위(혹은 십육부)라고 불렸고, 새로 설치된 사부는 좌우비신부와 좌우감문부였다. 십이위는 부병 지도와 경성 숙위를, 사부는 부병을 통괄하지 않고 좌우비신부는 황제 시위를, 좌우감문부는 궁전 문금을 담당했다. 십이위는 외군을 지휘했고, 좌우익위의 효기위군, 좌우효위의 표기군, 좌우무위의 웅거군, 좌우둔위의 우림군, 좌우어위의 사성군, 좌우후위의 사비군이 포함되었다. 좌우익위는 내군도 지휘했는데, 내군은 친, 훈, 익의 삼위가 통괄하는 오군부나 동궁에 소속하는 삼위삼부의 병으로 이루어졌고, 이들은 모두 달관의 자제들이 담당했다.[1]

문제는 전국을 여러 군사 구역으로 나누고, 각각에 총관을 임명하여 지역 군사를 담당하게 했다. 평시에는 변방에 대비하고, 전시에는 출정하게 했다. 총관에는 총관부가 설치되었고, 상중하 삼등으로 나뉘었다. 또한, 사대총관이 설치되어 진왕 양광이 병주를, 진왕 양준이 양주를, 촉왕 양수가 익주를, 위세강이 형주를 담당했다. 수나라에는 30~50개의 총관이 설치되었고, 장안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대군구가 편성되어 각 주를 수비하여 외적으로부터 방어했다. 특히 북부 변경 지대가 중요시되었고, 요해를 지키기 위한 배치가 이루어졌다.[1]

군구는 북부와 북서부의 팔부(돌궐 방어), 동북부의 칠부(돌궐과 거란 방어), 중서부의 팔부(기보 수호, 강원 억수), 동남부의 구부(남방 요소), 토욕혼을 방어하는 첩주, 진번족을 방어하는 남녕 등이 포함되었다. 후에 당나라도 비슷한 제도를 채용하여, 이를 “도”의 군구나 감찰구로 발전시켰다.[1]

문제는 부병제에도 개혁을 가하여, 북주의 관직품급제도와 문관, 무장을 하나의 등급 체계로 통합하였다. 590년에는 장군호를 민호에 편입하는 명령을 내려, 군인은 자신의 군적에 더하여 가족도 현지 호적에 등록되고, 균전제에 기초하여 토지가 주어지고, 조용조가 면제되었다. 또한, 규정에 따라 군인은 순서대로 경성 숙위를 하거나 다른 임무에 종사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이 명령으로 중앙 정부의 경제적 부담이 경감되었고, 군인은 가족과 함께 살 수 있게 되었으며, 병원이 확대되었다. 이러한 체계는 병농합일이라 칭해지며, 수나라의 큰 개혁 중 하나가 되었다.[1]

4. 2. 대외 관계

수나라는 돌궐, 고구려, 토욕혼 등 주변 국가들과 잦은 전쟁을 벌였다. 특히 고구려-수나라 전쟁은 수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24]

양제와 문제 모두 베트남으로 군사 원정을 보냈다. 북베트남의 안남은 600년 전 한나라(기원전 202년 ~ 기원후 220년) 시대에 중국 제국에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앙 베트남의 참파 왕국은 북쪽 중국 침략에 대한 주요 대응 세력이 되었다. 하노이 지역은 602년 초대 리 왕조 통치자 리 Phật Tử로부터 쉽게 탈환되었으나, 수나라 군대는 더 남쪽으로 진격했다가 참파 군대의 전투 코끼리 공격을 받았다. 수나라 군대는 함정을 파 코끼리를 잡고, 석궁으로 공격하여 승리했지만, 많은 병사들이 열대병(예: 말라리아)으로 사망했다.[23]

수나라는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을 여러 차례 감행했다. 양제는 이 원정을 위해 많은 병사들을 징집했다. 이 군대는 규모가 매우 커서, 마지막 집결지인 산해관 부근에서 고구려를 침략하기 시작하여 모든 군대가 통과하는 데 30일이나 걸렸다. 징집된 병사와 유급 병사를 포함한 병력은 3,000척이 넘는 군선, 최대 115만 명의 보병, 5만 명의 기병, 5,000명의 포병 등을 포함하여 매우 많았다. 군대의 행렬은 강과 계곡, 산과 언덕을 넘어 1,000리(약 410km)에 달했다. 네 차례의 군사 원정은 모두 실패로 끝났고, 수나라는 이로 인해 재정적, 인적 손실을 입어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5. 경제

수나라는 북조의 균전제를 계승하고 조용조제를 확립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했다. 또한, 문제양제대운하를 건설하여 남북 간의 물자 수송을 원활하게 했다.[24]

5. 1. 균전제와 조용조

수나라는 북조의 균전제를 계승하고 조용조제를 확립하여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했다.

5. 2. 대운하 건설

문제와는 대조적으로 양제는 사치를 좋아하여 아버지가 기피하던 대규모 토목 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진행하여 완성했다. 주요 업적으로는 수도 대흥성 건설과 대운하를 대폭으로 연장하여 하북에서 강남까지 서로 연결한 것이다. 이는 장강 이남에서 재배한 쌀을 북부의 번성하는 도시들로 실어나르기 위해서였다.[24]

6. 문화

위진남북조를 통일한 수나라는 남북조의 문화를 융합하여 당나라 문화의 기반을 다졌다.

수나라 초기에는 유교, 불교, 도교가 조화를 이루는 경향을 보였다. 수 문제는 유학을 장려하고 학교 건설을 지원했으나, 통일된 경전이 없어 과거 제도의 명경 시험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문제 말년에는 형벌을 중시하고 불교를 지원하며 유학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수 양제 시대에는 학교가 부활했으나 유생의 지위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왕통은 유불도 삼교가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그의 사상은 송대 성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31][32]

불교는 십육국과 남북조 시대쿠샨 제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었으며, 특히 후한 시대에 널리 퍼졌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혼란기에 백성들에게 통합적인 문화적 힘을 제공하여 수나라 건국의 기반이 되었다. 문제와 그의 황후는 불교에 귀의하여 황실 권위를 확보하려 했다. 황제는 자신을 전륜성왕으로 내세웠으며, 601년 불교 유물을 중국 전역의 사찰에 분배하고 칙령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천명했다.[30] 문제는 유학을 배척하고 불교를 국교화하였으며, 581년에는 은거하고 있는 승려들을 불러 불교도들에게 “나라를 위해 도를 행하라”고 촉구하며 출가를 허용했다. 양제 시대에도 조정은 불교에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펼쳤고, 양제는 천태종지자대사에게 계를 받았다.

수나라에서는 사원과 탑이 5000여 개 건립되었고, 불상이 수만 구 조성되었으며, 수만 권의 불경이 번역되어 유교 경전보다 훨씬 많이 유포되었다. 문제는 불교를 열렬히 숭배하여 처음 두 차례에만 각 주에 세운 불탑이 83개에 달했고, 그중 대흥선사가 가장 유명했다. 또한, 금전을 사용하여 불상을 만들고, 경사와 대도시의 불사에 46개의 장경을 만들고 13만 권의 경전을 사경했으며, 400부의 고경을 수리했다. 수 양제는 구경 수리를 612장, 2만 9천여 부를 수행하고, 번경관을 설립하여 번경학사를 임명하여 경전 수리와 새로운 책을 만들도록 명령하여 90부, 515권의 경전을 번역했다.

수나라의 회화는 인물과 신선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려졌으며, 돈황 막고굴 벽화 예술은 황실의 불교 지원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11] 전자건은 동백인과 함께 이름을 날렸고, 동진고개지, 남조 제의 육탐미, 남조 양의 장승조와 함께 전당 사대 화가로 명성을 떨쳤다.[11] 원나라 『화감』에서는 전자건을 당나라 회화의 시조로 여기고 있다.[11] 우전(于闐)의 화가 우전발질나는 서역의 인물화에 능해 “대위지”라 불렸으며, 음영을 교묘하게 사용한 “오돌법”에 능해 후대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11] 수나라의 서예는 정교하고 힘이 있었으며, 규칙을 벗어나지 않았다.[11]

6. 1. 학술 사상

수나라 초기에는 유교, 불교, 도교 사상이 조화를 이루는 경향을 보였다. 수 문제는 유학을 장려하고 유가의 학설을 국가 통치에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 학교 건설을 장려했다. 관동 지방에는 학자가 많아 유학이 한때 번성하기도 했다.[30] 그러나 수나라 시대에는 통일된 경전이 없어 과거 제도의 명경 시험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문제 말년에는 형벌을 중시하고 불교를 지원하는 한편, 유학에 반대하는 태도를 보였다. 601년에는 학교가 너무 많아 질이 낮다는 이유로 모든 학교를 폐지하고 경사의 국자학만 남겨 그 정원을 70명으로 제한하기도 했다. 수 양제 시대에는 학교가 부활했으나 유생의 지위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왕통은 수나라 말기의 유학자이자 사상가로, 집권자는 덕을 우선하고 형벌을 뒤로하여 백성의 마음을 얻어야 하며, 유불도 삼교가 공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은 훗날 송대 성리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31][32]

6. 2. 불교

불교는 십육국과 남북조 시대쿠샨 제국을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었으며, 특히 후한 시대에 널리 퍼졌다.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된 혼란기에 백성들에게 통합적인 문화적 힘을 제공하여 수나라 건국의 기반이 되었다.

초기 불교 경전은 산스크리트어 경전에서 유래하였으나, 남북조 시대 말기와 수나라 시대에 이르러 중국 고유의 불교 사상 학파가 번성하기 시작했다. 특히 지의천태종을 창시하고 지관론을 완성하여, ''법화경''에 제시된 불교 가르침의 핵심으로서 "일생일념 삼천대천세계"의 원리를 설파하였다.[30]

문제(文帝)와 그의 황후는 불교에 귀의하여 중국에 대한 황실 권위와 진(陳)나라 정복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했다. 황제는 자신을 전륜성왕 즉, 불교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는 불교 군주로 내세웠다. 601년, 문제는 불교 유물을 중국 전역의 사찰에 분배하고, 다음과 같은 내용의 칙령을 통해 자신의 목표를 천명했다.

"사해(四海) 안의 모든 백성은 예외 없이 깨달음을 얻고 함께 복된 업을 닦아, 현재의 삶이 행복한 미래의 삶으로 이어지도록 하고, 선업의 지속적인 창조를 통해 모두가 놀라운 깨달음에 이르게 하라."[30]

이러한 행위는 아소카 왕(인도)의 행위를 모방한 것이었다.[30] 문제는 유학을 배척하고 불교를 국교화하였으며, 581년에는 은거하고 있는 승려들을 불러 불교도들에게 “나라를 위해 도를 행하라”고 촉구하며 출가를 허용했다. 양제(煬帝) 시대에도 조정은 불교에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펼쳤고, 양제는 천태종의 개조 중 한 명인 지자대사(智者大師, 智顗)에게 계를 받고 불문에 들어갔다. 하지만 황제는 불교를 엄격하게 통제하여 강남(江南) 불교에 영향력 있는 인물들을 양주(揚州)에 집결시켜 통제하고 “사문(沙門)은 왕에게 경례하라”고 명령했다.

당시 주류 불교 종파에는 천태종, 삼론종(三論宗), 삼계교(三階教)가 있었다. 천태종은 ‘교(敎)’와 ‘관(觀)’ 두 가지를 극한까지 발휘하여 원만하게 통합하는 것을 중요시하며, 법계는 무상(無相)이고 만물은 일체(一體)라고 생각했다. 주요 수행법은 지관(止觀)이었다. 삼론종은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 『백론(百論)』을 연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모든 법은 많은 인연의 집합이며, 다양한 요인과 조건이 결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수나라에서는 사원과 탑이 5000여 개 건립되었고, 불상이 수만 구 조성되었으며, 수만 권의 불경이 번역되어 유교 경전보다 훨씬 많이 유포되었다. 문제는 불교를 열렬히 숭배하여 처음 두 차례에만 각 주에 세운 불탑이 83개에 달했고, 그중 대흥선사(大興善寺)가 가장 유명했다. 또한, 금전을 사용하여 불상을 만들고, 경사(京師)와 대도시의 불사에 46개의 장경(藏經)을 만들고 13만 권의 경전을 사경(寫經)했으며, 400부의 고경(古經)을 수리했다. 수 양제는 구경(舊經) 수리를 612장, 2만 9천여 부를 수행하고, 번경관(翻經館)을 설립하여 번경학사(翻經學士)를 임명하여 경전 수리와 새로운 책을 만들도록 명령하여 90부, 515권의 경전을 번역했다.

6. 3. 예술

수나라의 회화는 인물과 신선 이야기를 중심으로 그려졌으며, 돈황 막고굴 벽화 예술은 황실의 불교 지원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11] 전자건은 동백인과 함께 이름을 날렸고, 동진(東晉)의 고개지, 남조 제(南朝齊)의 육탐미, 남조 양(南朝梁)의 장승조와 함께 전당(前唐) 사대 화가로 명성을 떨쳤다.[11] 전자건은 북제, 북주, 수나라를 거쳐 수나라에서 조산대부, 장내도독을 역임했다.[11] 불교화 『법화경변』, 풍속화 『장안차마인물도』를 그렸으나, 모두 전하지 않는다.[11] 원나라 『화감』에서는 전자건을 당나라 회화의 시조로 여기고 있다.[11] 그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산수화 『유춘도』는 윤곽을 그리고 청록을 많이 사용했으며, 투시법이 합리적으로 사용되어 원근 관계와 산과 나무, 인물의 비율에 배려되었고, 제한된 공간 안에서 천리의 풍경을 표현했다고 전해진다.[11] 우전(于闐)의 화가 우전발질나는 서역의 인물화에 능해 “대위지”라 불렸으며, 음영을 교묘하게 사용한 “오돌법”에 능해 후대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11] 수나라의 서예는 정교하고 힘이 있었으며, 규칙을 벗어나지 않았다.[11] 초당(初唐) 서예가들의 풍격이 이 시기에 이미 형성되었다.[11] 저명한 서예가로는 정도호, 사릉, 지영이 있다.[11] 묵적(墨跡)으로는 『천자문』과 사경(寫經)이 있으며, 수나라 시대의 서예는 비각(碑刻)이 주류였고, 『용장사비』, 『계법사비』, 『동미인지』 등의 비각이 그 서법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11] 수말당초에는 서예가 우세남이 등장하여, 오양순, 저수량, 설적과 함께 “당초사대가”로 불렸다.[11]

7. 국제 관계

고구려는 수나라의 통일에 위협을 느끼고 돌궐과 연합하여 수나라에 대항했다. 수 문제는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실패했고, 양제 역시 세 차례나 원정을 감행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24] 백제신라는 수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문물을 수입했다.

야마토 왕권의 추고 천황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는 견수사를 5회 이상 수나라에 파견하여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54] 수서에 실린 수나라 사절의 말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는 양제를 “해서의 보살 천자”라고 칭하며 수십 명의 유학 승려를 파견했다. 오노 이모코는 양제의 신하였던 배세청을 데리고 귀국했다.

수나라는 서역에 대한 지배를 확립했다. 이전 왕조들이 내전으로 인해 서역 지배를 소홀히 하여 많은 나라들이 독립하였으나, 수나라는 그 대부분을 탈환하였고, 돌궐에 대해서도 서역의 일부를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수나라 황족의 딸인 의성공주는 돌궐에 시집가 군주의 비가 되었다.

7. 1. 한반도

고구려는 수나라의 통일에 위협을 느끼고 돌궐과 연합하여 수나라에 대항했다. 수 문제는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실패했고, 양제 역시 세 차례나 원정을 감행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24] 이 원정으로 수나라는 재정적, 인적 손실을 크게 입어 회복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백제신라는 수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고 문물을 수입했다.

7. 2. 일본

야마토 왕권의 추고 천황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는 수나라에 사절(견수사)을 5회 이상 파견하여 수나라의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54] 수서에 실린 수나라 사절의 말에 따르면, 쇼토쿠 태자는 양제를 “해서의 보살 천자”라고 칭하며 수십 명의 유학 승려를 파견했다. 오노 이모코는 양제의 신하였던 배세청을 데리고 귀국했다.

7. 3. 서역

수나라는 서역에 대한 지배를 확립했다. 이전 왕조들이 내전으로 인해 서역 지배를 소홀히 하여 많은 나라들이 독립하였으나, 수나라는 그 대부분을 탈환하였고, 돌궐에 대해서도 서역의 일부를 탈취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후대의 국제적인 문화 발전으로 이어진다.

7. 4. 돌궐

수나라 황족의 딸인 의성공주가 돌궐에 시집와 군주의 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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