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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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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도언은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에 활약한 인물로, 이신통의 아들이다. 이연이 거병하자 수나라 관리를 피해 호현으로 피신했으며, 당나라 건국 후 의흥군공에 봉해졌다. 교동왕으로 진봉되고 롱주 자사, 상주 도독 등을 역임했으며, 부친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하기도 했다. 이후 민주도독으로 다시 임명되었고, 당항 제부를 복속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토욕혼 정벌에 참여했으나 패전하여 처벌받았고, 양주대도독으로 기용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여 예부상서로 추증되었다. 이도언에 대한 전기는 구당서와 신당서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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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언
기본 정보
이름이도언
한자李道彦
로마자 표기I Do-eon
생애
출생몰년 미상
사망684년
활동 시기당나라
직위안동도호
활동
주요 활동684년 신라 공격 계획
가족 관계
아버지이적

2. 생애

이도언은 당 고조 이연의 사촌인 이신통의 아들로, 당나라의 황족이자 장수이다. 수나라 말기 혼란기에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했으며, 617년 이연이 거병하자 이에 합류하여 당나라 건국에 공을 세웠다. 618년 당나라 건국 후 의흥군공(義興郡公)에 봉해졌고, 이후 교동왕(膠東王)으로 진봉되었으며 농주자사(隴州刺史), 상주도독(相州都督), 민주도독(岷州都督)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다. 민주도독 재직 시에는 당항(宕項) 부족을 당나라에 귀순시키는 등 서쪽 변경 안정에 기여하였다. 정관 4년(630년) 아버지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나 시묘살이를 하였고, 그의 효심에 감탄한 태종의 위로를 받고 민주도독으로 복직했다.

정관 9년(635년), 이정(李靖)을 따라 토욕혼(吐谷渾) 정벌에 참여하여 적수도행군총관(赤水道行軍總管)을 맡았으나, 곽수(闊水) 전투에서 강족(羌族)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고 일개 병사로 강등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이후 다시 능력을 인정받아 양주대도독(涼州大都督)으로 복귀하였다. 양주대도독으로 재직하던 중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예부상서(禮部尙書)로 추증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당나라 건국

대업 13년(617년), 이연에 대항하여 거병하자, 이도언의 아버지 이신통은 수나라 관리에게 체포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호현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신통은 산골짜기에서 병을 얻었고, 수십 일이 지나자 식량마저 떨어지는 곤경에 처했다. 이때 이도언은 낡은 옷을 입고 산과 들을 헤매며 열매를 구해 와, 자신은 이미 먹었다고 아버지를 안심시키며 극진히 봉양하였다. 무덕 원년(618년), 이 건국되자 이도언은 그 공을 인정받아 의흥군공에 봉해졌다.

2. 2. 관직 생활과 서쪽 변경 안정

무덕 원년(618년), 당나라가 건국되자 의흥군공(義興郡公)에 봉해졌다. 무덕 5년(622년), 교동왕(膠東王)으로 진봉되었고, 농주자사(隴州刺史)로 임명되었다. 정관 초년에는 상주도독(相州都督)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작위가 공(公)으로 강등되었고, 민주도독(岷州都督)으로 전임되었다.

정관 4년(630년), 아버지 이신통(李神通)의 상(喪)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아버지 묘소 옆에 암자를 짓고 직접 흙을 날라 봉분을 쌓았으며,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심었다. 시묘살이로 인해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가까운 친구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태종은 그의 효심에 감탄하여 시중 왕규(王珪)에게 칙서를 보내 위로하고, 이도언을 다시 민주도독으로 임명하였다.

민주도독으로 재직하며 이도언은 당항(宕項)의 여러 부족에게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복속시키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는 서쪽 변경 지역 안정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정관 9년(635년), 이정(李靖)을 따라 토욕혼(吐谷渾) 정벌에 참여하여 적수도행군총관(赤水道行軍總管)을 맡았다. 곽수(闊水)에서 탁발적사(拓拔赤辭)를 기습 공격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제강(諸羌)의 분노를 사 큰 반격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당군은 수만 명의 사상자를 내는 대패를 당했고, 이도언은 송주(松州)로 퇴각해야 했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일개 병사 신분으로 강등되어 변방 수비에 투입되었다.

이후 다시 기용되어 양주대도독(涼州大都督)을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예부상서(禮部尙書)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2. 3. 토욕혼 정벌과 패전

정관 9년(635년), 이정을 따라 토욕혼 정벌에 참여하여 적수도행군총관(赤水道行軍總管)을 맡았다. 이도언은 곽수(郭水)에서 토욕혼의 탁발적사(託跋赤辭)를 기습 공격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오히려 여러 강족 부족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고, 이들의 반격으로 당군은 크게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수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이도언은 남은 군대를 이끌고 송주(松州)로 퇴각해야 했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아 일개 병사 신분으로 강등되어 변방을 지키는 임무에 투입되었다.

2. 4. 복귀와 죽음

정관 9년(635년), 이정을 따라 토욕혼 정벌에 참여하여 적수도행군총관(赤水道行軍總管)을 맡았다. 그러나 곽수(闊水)에서 탁발적사(拓拔赤辭)를 기습 공격하려다 강족(羌族)의 반격을 받아 크게 패배하였다. 이 전투에서 수만 명의 병사를 잃고 송주(松州)로 후퇴해야 했다.

패전의 책임을 지고 일개 병사로 강등되어 변방 수비에 투입되는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 다시 기용되어 양주대도독(涼州大都督)에 임명되었다. 양주대도독으로 임명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사후 예부상서(禮部尚書)의 벼슬이 추증되었다.

3. 전기 자료


  • 구당서』 권60 열전 제10 「종실전」
  • 신당서』 권78 열전 제3 「종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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