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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건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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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건덕은 수나라 말기에 활동한 농민 출신의 군벌로, 고사달에게 투항하여 세력을 키웠다. 그는 스스로 장락왕, 하왕을 칭하며 하(夏)나라를 건국했으나, 당나라와의 호뢰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그의 사후 유흑달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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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건덕
기본 정보
두건덕 (설당연의전)
두건덕 (설당연의전)
출생 연도573년
사망 날짜621년 8월 3일
배우자조씨 (曹氏)
통치 시작617년 2월 15일
통치 종료621년 5월 28일
왕조하 (夏)
연호
연호정축(丁丑) 617년–618년
연호오봉(五鳳) 618년–621년
시호없음
묘호없음
인물 정보
두 (竇)
이름건덕 (建德)
로마자 표기Du Geondeok
하왕 (夏王) 두건덕
재위 기간617년 - 621년
도읍낙수 (樂壽) → 명주 (洺州)
두건덕 (竇建德)
정보 없음
정보 없음
황후조씨 (曹氏)
능묘정보 없음
연호정축(丁丑) : 617년 - 618년
연호오봉(五鳳) : 618년 - 621년

2. 생애

두건덕은 농민 출신으로, 젊어서는 마을의 이장(里長)을 지냈다. 611년, 수 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위해 군인을 징집했을 때 200인 대장으로 선발되었다. 손안조의 반란에 연루되어 일족이 처형당하자, 고사달에게 의탁했다. 고사달이 죽은 후에는 그의 군세를 이끌었다.

617년 낙수(현재 허베이성 창저우시 셴현)에서 장락왕을 자칭하고, 618년 하왕으로 칭하며 국호를 하(夏)라 하고 연호를 오봉이라 하였다.

621년 당나라 장수 이세민(훗날의 당 태종)이 정나라 황제 왕세충을 공격했을 때, 왕세충을 구원하려다 호뢰 전투에서 패배하여 당 고조 치세 하의 당나라 조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두건덕 사후, 유흑달이 당나라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623년까지 당나라에 지속적으로 대항했다.

호뢰 전투

2. 1. 초기 생애와 봉기

두건덕은 농민 출신으로, 젊어서는 마을의 이장(里長)을 지냈다. 611년, 수 양제고구려 원정을 위해 군인을 징집했을 때, 두건덕도 징집되어 200명의 지휘관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태항산 동쪽 지역에는 큰 홍수가 발생했는데, 두건덕의 고향 출신인 손안조(孫安祖)는 집이 파괴되고 아내가 굶어 죽었음에도 징집되었다. 손안조는 징집 면제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하고 채찍질을 당하자, 현 치안 판관을 암살하고 두건덕에게 도망쳤다. 두건덕은 그를 숨겨주고, 기근이 든 상황에서 손안조에게 산적이 될 것을 권했다.[1]

두건덕은 수백 명을 모아 손안조에게 이끌게 하여 고계포(高雞泊)에서 산적이 되도록 했다. 한편, 청하(清河)에는 장금칭(張金稱)과 고사달(高士達)이 이끄는 다른 산적 집단이 있었다. 산적들은 두건덕의 명성을 알고 그의 집을 약탈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건덕과 인근 현의 치안 판관들은 두건덕이 산적과 공모했다고 의심하여 그의 가족을 몰살했다.[2]

616년, 두건덕은 2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사달에게 도망쳤고, 고사달은 그를 장군으로 임명했다. 얼마 후 장금칭이 손안조를 죽이자, 손안조의 군사들은 대부분 두건덕에게 도망쳤다. 두건덕은 1만 명이 넘는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2] 이때 두건덕은 다른 의견에도 열려 있었고, 병사들과 전리품과 노고를 함께 나누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그를 위해 기꺼이 싸우고 죽으려 했다고 전해진다.[2]

617년, 낙수(현재 허베이성 창저우시 셴현)에서 장락왕을 자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로 정축을 사용했다. 618년에는 하왕을 칭하고 오봉으로 개원했으며, 8월에는 명주(현재 허베이성 한단시 융녠구)로 천도했다.

619년, 왕세충이 양동을 폐하고 황제를 자칭하자, 두건덕도 조정 체제를 정비해나갔다 (다만 하왕의 칭호를 사용). 621년, 당의 이세민이 왕세충의 거점인 낙양을 공격하자, 왕세충의 요청을 받아들여 출병했으나, 호뢰 전투에서 이세민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장안에서 처형되었다.

2. 2. 고사달 휘하에서의 활약

611년, 수 양제고구려 정벌을 위해 군인을 징집했을 때, 두건덕도 징집되어 200명의 지휘관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태항산 동쪽 지역에는 홍수가 발생했다. 두건덕의 고향 출신인 손안조(孫安祖)는 홍수로 집이 파괴되고 아내가 굶어 죽었음에도 징집되었다. 손안조는 징집 면제를 받으려 했으나, 현 치안 판관이 화가 나서 그를 채찍질했다. 손안조는 현 치안 판관을 암살하고 두건덕의 집으로 도망쳤고, 두건덕은 그를 숨겨주었다. 홍수 이후 지역에 기근이 들자, 두건덕은 손안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제 재위 시절에는 제국이 번영하고 부유하여 백만 명을 징집하여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결국 패배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홍수와 빈곤에 직면했고, 사람들은 거듭된 징집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제는 이러한 일들을 신경 쓰지 않고, 대신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제국은 곧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죽음을 면한 자는 큰 일을 해야 합니다. 어찌 여기 머물러 도망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두건덕은 지역의 수백 명을 모아 손안조에게 이끌게 하여 인근 고계포(高雞泊)에서 산적이 되도록 했다. 한편, 같은 청하(清河, 대략 현대의 싱타이시, 허베이성)에는 장금칭(張金稱)과 고사달(高士達)이 이끄는 다른 산적 집단이 있었다. 산적들은 두건덕의 명성을 알고 그의 집을 약탈하지 않았다. 이에 두건덕과 인근 현의 치안 판관들은 두건덕이 산적과 공모했다고 의심하여, 두건덕이 집에 없을 때 그의 집을 습격하여 그의 가족을 몰살했다. 두건덕은 2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사달에게 도망쳤고, 고사달은 동해공(東海公)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두건덕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금칭이 손안조를 죽였고, 손안조의 군사들은 대부분 두건덕에게 도망쳤다. 이후 두건덕은 1만 명이 넘는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이때 두건덕은 다른 의견에도 열려 있었고, 병사들과 전리품과 노고를 함께 나누었기 때문에 병사들은 그를 위해 기꺼이 싸우고 죽으려 했다고 전해진다.

616년, 탁군의 태수였던 곽현(郭絢)은 수나라 군대를 이끌고 고사달을 공격했다. 고사달은 자신이 두건덕만큼 유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두건덕을 자신의 군대의 지도자로 승진시켰다. 두건덕은 고사달에게 자신의 근거지를 지키도록 요청한 다음, 7,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곽현을 공격하며, 고사달을 배신하고 항복하는 척했다. 특히, 고사달이 두건덕의 아내라고 주장하는 여자를 공개적으로 처형하도록 했다. 곽현은 두건덕을 의심하지 않고 즉시 두건덕에게 합류하여 함께 고사달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두건덕은 그를 매복하여 살해하고 그의 군대와 말을 빼앗았다. 그 후, 두건덕은 더욱 유명해졌다.

그해 말, 수나라 장군 양의신이 장금칭을 격파하고 그의 군대를 몰살했다. 생존자들은 두건덕에게 도망쳤다. 양의신은 고사달을 공격했다. 두건덕은 고사달에게 양의신과 직접 교전하지 말라고 충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수나라 장군 중 양의신보다 더 유능한 자는 없습니다. 그는 막 장금칭을 격파했고 지금 우리를 공격하고 있으며, 지금은 저항하기 어렵습니다. 그를 피하고 그가 우리를 공격할 수 없도록 기다리십시오. 그의 군대가 지치면, 우리가 그를 매복하여 큰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지금 그와 싸우면, 공께서는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고사달은 동의하지 않고, 두건덕에게 기지를 맡긴 채 양의신과 교전했다. 고사달은 양의신을 상대로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만하여 전장에서 잔치를 벌였다. 이를 들은 두건덕은 "동해공은 아직 적을 물리치지 못했는데 자만해졌습니다. 곧 재앙이 닥칠 것입니다. 수나라가 승리하면, 그들은 또한 이곳을 공격할 것이고, 우리도 무사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며칠 후, 양의신은 고사달을 격파하고 전장에서 그를 죽였다. 그는 이어서 두건덕을 공격했고, 두건덕의 군대는 붕괴되었다. 두건덕은 도망쳤고, 양의신은 그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믿고 철수했다. 두건덕은 돌아와 고사달의 잔여 군대를 모았고, 공개적으로 고사달을 위한 조문 기간을 가졌다. 그의 군대가 어느 정도 회복된 후, 그는 장군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며 주변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반란군들은 수나라 관료들을 매우 증오하여, 그들을 발견하면 대개 살해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두건덕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수나라 관료와 학자들을 친절하게 대했기 때문에, 때때로 수나라 관료들이 그에게 도시를 항복하기도 했다. 그는 곧 10만 명 이상의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다.

2. 3. 세력 확장과 하(夏) 건국

611년 수나라 양제가 고구려 원정을 위해 징발했을 때 200인 대장으로 선발되었다. 손안조의 반란에 연루되어 일족이 처형당하자, 고사달에게 의탁했다. 고사달이 죽은 후 그의 군세를 이끌고 요양(현재 허베이성 헝수이 시 야오양 현)을 공격하여 평원(현재 산둥 성 더저우 시 링청 구)을 점령했다. 부하들을 소중히 여기고, 전투 후에도 학살을 하지 않아 민중의 지지를 얻었으며, 그의 군대는 10만 명에 달했다.

617년, 낙수(현재 허베이 성 창저우 시 셴 현)에서 장락왕을 자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로 정축을 세웠다. 양제는 설세웅에게 명하여 3만 명의 군세로 토벌하려 했으나, 두건덕 군의 매복에 걸려 괴멸했다. 이로써 허베이의 대부분 지역이 두건덕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618년, 하왕을 칭하고 오봉으로 개원했으며, 8월에는 명주 (현재 허베이 성 한단 시 융녠 구)로 천도했다.

619년, 왕세충이 양동을 폐하고 황제를 자칭하자, 두건덕 또한 조정 체제를 정비해나갔다 (다만 하왕의 칭호를 사용). 621년, 당나라 이세민이 왕세충의 거점인 낙양을 공격하자, 왕세충의 요청을 받아들여 출병했으나, 호뢰 전투 (호뢰관, 현재 허난 성 정저우 시 싱양 시)에서 이세민의 군에게 패배하여 포로로 잡혀 장안에서 처형되었다.

2. 4. 하(夏) 통치와 몰락

621년 당나라 장수 이세민(훗날의 당 태종)이 하남 일대를 지배하던 정나라 황제 왕세충을 공격하자, 당나라가 정나라를 멸망시키면 자신도 같은 처지에 놓일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아내 조씨와 모사 능경(凌敬)의 충고를 무시하고 왕세충을 구원하러 나섰다가, 호뢰 전투에서 이세민에게 패배하여 사로잡혔다. 이후 당 고조 치세 하의 당나라 조정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두건덕 사후, 하나라 영토는 일시적으로 당나라에 탈취되었으나, 두건덕의 장수였던 유흑달이 당나라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영토를 다시 점거했고, 623년까지 당나라에 지속적으로 대항했다.

당시 당나라 장수 이세민은 정나라 수도 낙양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이끌고 있었다. 왕세충은 혼자서 공격을 막을 수 없어 두건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두건덕의 측근 유빈(劉彬)은 당나라가 정나라를 멸망시키면 하 나라도 위협받을 것이며, 승리한다면 정나라 영토를 차지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두건덕은 이에 동의하여 왕세충에게 지원을 약속하고, 측근 이대사를 이세민에게 보내 낙양 공격 중단을 요청했으나, 이세민은 이대사를 억류하고 응답하지 않았다.

두건덕은 맹해공과 서원랑의 군대를 합쳐 조주(현 하쩌)에서 낙양으로 향했고, 정나라 장수 곽사형(郭士衡)과 합류하여 당나라가 점령한 여러 도시를 격파했다. 그는 왕세충에게 하 군대가 오고 있다고 알리고, 이세민에게 철수 및 점령지 반환을 요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이세민은 장군들과 논의했으나, 대부분 두건덕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곽효각(郭孝恪)은 왕세충과 두건덕 모두를 멸망시킬 기회라며 낙양 동쪽 호뢰관으로 진격하여 두건덕의 공격을 방어할 것을 제안했고, 이세민은 동의했다. 이세민은 동생 이원길과 장군 굴돌통(屈突通)을 낙양에 남겨 포위를 계속하게 하고, 자신은 호뢰관으로 향했다. 왕세충은 이세민의 군대 이동을 보았지만, 의도를 확신하지 못하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세민 군대는 곧 두건덕의 선봉 부대와 교전했고, 초반에 우세를 점했다. 이세민은 두건덕에게 왕세충 구원 시도를 포기하도록 설득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두건덕은 굴하지 않고 호뢰관으로 향했다. 양 군대는 호뢰관에서 대치했다. 두건덕의 책사 령경은 낙양 대신 당나라 분주(汾州, 현 뤼량, 산시)와 진주(晉州, 현 린펀, 산시)를 공격하여 당나라 영토를 확보하고 이세민에게 낙양 포위를 풀도록 압박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왕세충의 사자 왕완과 장손안세(長孫安世)는 낙양이 곧 함락될 것이며 도움이 절실하다고 설득했고, 두건덕은 낙양으로 향했다. 조 황후는 령경의 계획을 받아들일 것을 설득했다.

그러나 두건덕은 "여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곧 함락될 낙양을 구하러 왔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버리고 떠난다면, 우리는 적을 두려워하고 신의와 정의를 배신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라고 답했다.

621년 여름, 두건덕은 호뢰관에 전면 공격을 감행했지만, 이세민은 그를 지치게 하려고 도전을 거절했고, 하 군인들이 지쳤을 때 반격을 시작했다. 하 군대는 공황 상태에 빠져 붕괴되었다. 두건덕은 창에 찔려 부상당했지만 도주했다. 그러나 황하에 도착하여 건너려 할 때 말에서 떨어졌다. 추격하던 당나라 장수 백사랑(白士讓)과 양무위(楊武威)가 그를 사로잡아 이세민에게 데려갔다. 이세민은 "나는 왕세충을 공격했을 뿐인데, 왜 너의 영토에서 나와 나를 방해하는가?"라고 꾸짖었고, 두건덕은 "내가 오지 않았다면 당신의 공격을 연장해야 했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조 황후와 하 관리 제선행(齊善行)은 명주로 도망쳤다.

이세민은 두건덕, 왕완, 장손안세를 낙양으로 데려와 왕세충에게 보여주었다. 왕세충은 포위망을 뚫고 상양(현 샹판, 후베이)으로 도주하는 것을 고려했지만, 장군들은 두건덕의 지원이 필요했고, 두건덕이 사로잡혔으므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지적했다. 왕세충은 낙양을 이세민에게 항복했고, 정나라와 하나라 영토의 도시들은 대부분 당나라에 항복했다.

이세민은 두건덕과 왕세충을 수도 장안으로 데려가 아버지 고조에게 바쳤다. 고조는 왕세충은 살려두었지만, 두건덕을 공개 처형했다. 두건덕의 장군들은 이미 항복했거나 숨어 있었는데, 두건덕의 죽음 소식을 듣고 유흑달의 지도 아래 반란을 일으켰다. 유흑달은 공개적으로 두건덕을 애도했고 처음에는 모든 하 나라 영토를 되찾았지만, 결국 이세민과 그의 형 이건성에게 패배하여 623년에 사망했다.

3. 연호

연호기간
정축(丁丑)617년 ~ 618년
오봉(五鳳)618년 ~ 621년


4. 가족 관계


  • 아내: 조씨

5. 평가

두건덕에 대한 평가는 주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 등 그의 통치 기간과 관련된 역사서에 나타나 있다. 이러한 사료들은 두건덕이 수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하북성 지역을 장악하고 백성들을 비교적 잘 다스렸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결국 당나라에 패배하여 그의 세력이 멸망했다는 역사적 사실 또한 기록하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db1x.sinica.e[...] Academia Sinica 2010-05-22
[2] 서적 Zizhi Tongjian vol. 189 ':zh:s:資治通鑑/卷189'
[3] 서적 Zizhi Tongjian vol. 183 ':zh:s:資治通鑑/卷183'
[4] 문서 It might be notable, however, that Dingchou happened to be the designation for 617 in the sexagenary cycle, and thus might properly not be considered a true era name, although traditional historians treated it as one.
[5] 문서 Emperor Yang had, in 607, abolished provinces (州, zhou) and turned them into commanderies (郡, jun); Dou, as well as many other rebel generals, reversed the process and restored zhou, abolishing jun, although English sources generally referred to zhou as "prefectures" from this point on. See [[Zhou (administrative division)]] for more information.
[6] 문서 Tang forces, because of [[naming taboo]], referred to Hulao as Wulao (武牢), because Emperor Gaozu's grandfather was named Li Hu (李虎).
[7] 문서 Li Gai was originally known as Xu Gai, but both he and his son Li Shiji were granted the imperial surname of Li by Emperor Gaozu as a reward of their faithfulness to Li Mi, and therefore Liu referred to him as Xu Gai.
[8] 웹사이트 중국력(中國曆) ↔ 서력(西曆) 변환기 http://sinocal.sinic[...] 타이완 중앙연구원
[9] 서적 자치통감 권 189 ':zh:s:資治通鑑/卷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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