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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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우석은 1896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나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투신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만주로 건너가 서로군정서에 들어가 북로군정서에 편입되었으며, 1920년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다. 자유시 참변을 겪고 만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다가 1947년 귀국하여 어려운 생활을 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으며, 1994년 사망하여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수기는 청산리 전투 등 만주 독립운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된다.

이우석
기본 정보
이름이우석
출생일1896년 9월 17일
출생지조선 충청북도 충주군
사망일1994년 6월 26일
사망지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앙보훈병원
국적조선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직업독립운동가, 군인
배우자
자녀슬하 1남 1녀
부모이창규(부)
군사 정보
복무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
복무 기간1920년 ~ 1930년
최종 계급북로군정서 4소대 4분대장
주요 참전 전투/전쟁청산리 전투
서훈 내역
서훈 내역1980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
기타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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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자 - 김도태
    김도태는 3·1 운동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신흥무관학교 등에서 교육 활동을 펼쳤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논설 발표로 논란이 있으며 독립운동 공헌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2. 생애

이우석은 1896년 조선 충청도 충주군(지금의 대한민국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경성부에 있는 아버지 이창규를 찾아가 경성에 있는 약국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재회하였다.

1919년 항일의 뜻을 품고 압록강을 건넜으나, 신분이 확인되지 않으면 일제 밀정으로 보고 죽임을 당하던 예민한 시기였기에 밀정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이때 이장녕을 만났으며, 이장녕이상룡의 도움으로 서로군정서에 편입되었다. 이후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간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는데, 1920년 이장녕과 함께 병서 약 30권을 가지고 약 700리 떨어진 북로군정서군 본부로 갔다. 이듬해 7월 연해주로 가서 무기를 인수해 오는데, 무기 운반 경비대의 분대장이 되었고,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4소대 4분대장으로 참전하였다.

1920년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배하자, 일본군은 간도 참변을 일으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피해 독립군을 지원하겠다는 소비에트 연방의 약속을 믿고 이동했으나,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면서 포로수용소 등에 수용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우석은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만주에서 다시 독립운동을 재개했으나, 1930년대부터 해방될 때까지 만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

1947년 귀국한 이우석은 생계를 겨우 유지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행상도 할 수 없어 부인이 식모살이를 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8평짜리 무허가 집에서 거주하였다. 한일협정 찬성에 도장을 찍는 것은 나라를 다시 팔아먹는 일이라 하여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가, 다른 독립운동가의 주선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1994년 6월 26일 오전 5시 20분 서울보훈병원에서 99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6월 28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2.1. 출생과 성장

1896년 조선 충청도 충주군(지금의 대한민국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경성부에 있는 아버지 이창규를 찾아가 경성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아버지와 재회하였다.

2.2. 독립운동 투신

1919년 항일의 뜻을 품고 압록강을 건넜다. 그러나 신분이 확인되지 않으면 일제 밀정으로 보고 죽임을 당하던 예민한 시기였기에 밀정으로 오해받기도 했다. 이때 이장녕을 만났으며, 이장녕이상룡의 도움으로 서로군정서에 편입되었다. 이후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간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았는데, 1920년 이장녕과 함께 병서 약 30권을 가지고 약 700리 떨어진 북로군정서군 본부로 갔다. 북로군정서에 편입된 이우석은 이듬해 7월 연해주로 가서 무기를 인수해 오는데, 무기 운반 경비대의 분대장이 되었다. 10월에는 청산리 전투에 4소대 4분대장으로 참전하였다.

2.3. 시련과 극복

1920년 봉오동 전투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이 패배하자, 일본군은 간도 참변을 일으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피해 독립군을 지원하겠다는 소비에트 연방의 약속을 믿고 이동했으나,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면서 포로수용소 등에 수용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이우석은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하여 만주에서 다시 독립운동을 재개했으나, 1930년대부터 해방될 때까지 만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활했다.

2.4. 해방 이후

1947년 귀국한 이우석은 생계를 겨우 유지했으며, 1970년대부터는 행상도 할 수 없어 부인이 식모살이를 하는 등 어려운 생활을 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8평짜리 무허가 집에서 거주하였다. 한일협정 찬성에 도장을 찍는 것은 나라를 다시 팔아먹는 일이라 하여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고 있다가, 다른 독립운동가의 주선으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1994년 6월 26일 오전 5시 20분 서울보훈병원에서 99세를 일기로 사망했으며, 6월 28일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3. 평가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김좌진 장군과 같은 지도자도 있지만, 이우석처럼 병사로서 자유시 참변 등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시종일관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우석이 남긴 수기는 청산리 전투 등 만주 독립운동 상황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참고되고 있다.

3.1. 긍정적 평가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김좌진 장군과 같은 지도자도 있지만, 이우석처럼 끝까지 병사로서 이탈하지 않고 만주 자유시 참변 등 여러 어려운 역경을 겪고도 다시 독립운동을 병사로서 시종일관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우석이 남긴 수기는 청산리 전투 등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상황을 파악하는 데 참고 자료로 활용되기도 한다.

3.2. 사료적 가치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김좌진 장군과 같은 지도자도 있지만, 이우석처럼 병사로서 이탈하지 않고 만주 자유시 참변까지 겪으며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독립운동을 시종일관 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이우석이 남긴 수기는 청산리 전투 등 만주 독립운동 상황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참고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