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태
1. 개요
김도태는 평안북도 정주 출신의 교육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친일 행적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오산학교와 일본 유학을 거쳐 만주와 재령에서 교사로 활동했으며,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참여했다. 이후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장, 문영여자중학교 교장, 휘문중학교 교장, 조선지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으며, 1956년 사망했다. 저서로 《서재필 박사 자서전》, 《남강 이승훈 전》, 《세종대왕 전기》 등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훈장을 추서했으나, 친일인명사전 수록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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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48인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민족대표 48인 -
박인호 (1854년)
박인호는 천도교 제4대 교주이자 독립운동가로, 갑오농민전쟁에 참여, 3·1 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 《조선독립신문》 발간을 주도하는 등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였다. -
정주시 출신 -
방우영
방우영은 조선일보의 회장으로서 조선일보의 성장을 이끌었으며, '밤의 대통령'이라 불릴 정도로 영향력이 컸고, 언론 사업 확장과 사회 공헌 활동에도 참여한 언론인이다. -
정주시 출신 -
이기백
이기백은 한국 고대사 연구에 기여하고 민족사학을 개척하며 한국사 대중화에 힘쓴 역사학자이며, 주요 저서로 《한국사신론》 등이 있고, 발해를 한국사에 편입시키는 등 한국사 연구의 지평을 넓혔다. -
뇌출혈로 죽은 사람 -
한경선
1983년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한 배우 한경선은 드라마 《모래시계》, 《자이언트》, 영화 《전국구》 등에 출연하며 활발한 연기 활동을 펼쳤으나 2015년 뇌경색으로 사망했다. -
뇌출혈로 죽은 사람 -
천경자
천경자는 전라남도 고흥 출신의 대한민국 화가이자 수필가로, 독자적인 화풍을 개척하여 '길례언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등 다수의 대표작을 남겼으며, '미인도' 위작 사건 이후 절필 후 미국으로 떠났다가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을 기증했다.
2. 생애
김도태는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으로, 오산학교와 일본 정칙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활동했다. 3·1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기도 했으나, 이후 휘문고등보통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현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 대한지리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친일 논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1956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 및 교육 (1890-1919)
평안북도 정주군 출신으로,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2년 정칙영어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지리와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 만주의 신흥무관학교와 재령군의 기독교 계열 학교인 명신학교에서 근무했다.
1919년 3·1 운동에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으로 참가했다. 김도태는 기획 단계에서 최남선과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 사이의 연락책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이듬해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2.2. 3.1 운동 참여와 투옥 (1919-1920)
1919년 3·1 운동에는 민족대표 48인 중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김도태는 기획 단계에서 기독교 측과의 교섭을 원했던 최남선과 오산학교 설립자인 이승훈 사이의 연락책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지만 이듬해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2.3. 교육 활동과 친일 논란 (1921-1945)
1921년 휘문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되었다. 조선총독부 당국은 김도태에 대해 반일 사상을 가지고 이를 선전할 우려가 있는 자라고 기록했으나, 일제강점기 말기 전시하에는 친일 논설을 다수 발표하며 사상적으로 전향했다.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부(친일파 리스트)”에 김도태의 이름이 포함되었으나,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있어 수록은 보류되었다. 경주 김씨 문중에서는 김도태가 조국의 자유를 수호하고 광복(해방)을 위해 헌신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2.4. 해방 이후 활동 (1945-1956)
1945년 경성여자상업학교(現 서울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시작으로, 대한민국 건국 후 문영여자중학교(現 서울문영여자중학교)와 휘문중학교 교장을 지냈고, 조선지리학회(現 대한지리학회) 회장도 역임했다.
1949년 공군사관학교 교수가 되었다가 얼마 후 다시 경성여상 교장에 재임용되었다.
1956년 향년 66세로 사망했다.
3. 저서
* 서재필 박사 자서전: 한말사를 중심으로, 수선사, 1948년: 서재필의 전기. 1972년 을유문화사 「을유문고」판으로 재판.
* 남강 이승훈 전, 문교사, 1950년: 이승훈의 전기
* 세종대왕 전기, 교양문고간행회, 1956년: 세종대왕의 전기.
4. 사후 평가 및 논란
김도태는 1956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헌을 기려 여러 차례 서훈을 추서하였으나,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친일 행적 논란 때문에 보류되었다. 경주 김씨 문중에서는 김도태가 조국의 자유 수호와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