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군정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북로군정서는 1919년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부의 통합으로 결성된 독립군 부대이다. 김좌진을 총사령관으로, 서일을 총재로 하여 조직되었으며, 만주 북간도 지역에서 활동하며 독립군 훈련과 군자금 조달을 담당했다. 1920년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했으나, 간도 참변 이후 자유시 참변을 겪으며 해체되었다. 이후 북로군정서 간부들은 부대를 재건하려 했으나, 이전과 같은 규모의 독립군단을 조직하지는 못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무장투쟁 - 조선의용군
조선의용군은 1937년 중국 우한에서 조선민족전선연맹 산하 항일 무장단체로 창설되어 중국 공산당과 협력하여 항일 활동을 전개했으며, 해방 후 일부는 북한 인민군에 편입되어 한국 전쟁에 참여했다. - 무장투쟁 - 대한통의부
대한통의부는 1920년대 초 만주에서 결성된 항일 무장 독립 운동 단체이자 자치 정부로서, 여러 독립군 단체들의 통합을 통해 조직되었으며, 군사 및 자치 행정 체계를 갖추고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내부 갈등과 분열로 해체되었다. - 북로군정서 - 김좌진
김좌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한국독립당 회장을 역임했으며,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훈받았다. - 북로군정서 - 이범석
이범석은 조선 왕족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정치인으로, 청산리 대첩에서의 활약과 대한민국 건국 참여, 초대 국무총리 역임 등 뚜렷한 업적을 남겼으나, 과장된 서술 및 정치적 행보에 대한 논란으로 평가가 엇갈린다. - 이범석 (1900년) - 박흥식 (1903년)
박흥식은 1903년 출생하여 미곡상과 인쇄업으로 시작해 화신백화점을 설립하고 친일 활동과 부정축재 혐의를 거쳐 2002년 친일파 명단에 등재된 사업가이다. - 이범석 (1900년) - 김마리아 (광복군)
김마리아는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고려혁명군 정치공작대원으로 항일 투쟁에 참여하고 한국 광복군 대원 교육에 기여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여러 정당의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북로군정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북로군정서 |
한자 표기 | 北路軍政署 |
로마자 표기 | Bukrogunjeongseo |
종류 | 항일 무장 단체 |
결성 | 1919년 |
해체 | 1921년 |
이전 명칭 | 대한정의군단 |
후신 | 대한독립군단 |
본부 | 만주 지린 성 동간도 |
지휘관 | 서일 |
규모 | 1,600명 |
소속 | 대한민국 임시 정부 |
이념 | 한국 독립 운동 |
주요 전투 | 청산리 전투 자유시 참변 |
적 | 일본 제국 |
2. 역사적 배경
1919년 대한정의단과 그 산하의 대한군정회가 통합하여 대한군정부가 만들어졌다. 그 해 12월 상하이 임시정부의 지시로 대한군정서로 개명하였으며, 서로군정서군과 대비하여 일반적으로 북로군정서군으로 칭한다.[1] 서일, 현천묵 등이 주요 인물이었고, 김좌진을 총사령관으로 초빙하여 독립군 조직과 훈련을 담당하게 하였다.
북로군정서는 대종교 계열 민족주의자들과 신민회 계열 독립운동가들의 협력을 통해 설립된 무장 독립 단체로, 공화주의를 지지하는 독립 군사 조직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 기관으로 조직되어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5][6][8][2][7]
2. 1. 중광단 (1911)
북로군정서의 기원은 1911년 3월 서일 등 대종교 신자들이 조직한 중광단에서 찾을 수 있다. 단군을 숭배하는 민족 종교로 창시된 대종교 신자들은 1910년 일본의 식민 통치 이후 본부를 만주로 이전하려 하였고, 북간도에 지부를 설립했다. 이후 서일 등 애국적인 대종교 신자들은 독립운동 단체인 중광단을 결성하여 독립 정신과 애국 사상을 고취했다. 1919년 3·1 운동으로 고조된 독립 분위기의 영향으로 중광단은 다른 세력과 연합하여 독립운동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새로운 조직을 결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대한정의단이다.[2]
중광단(重光團)은 1911년 3월 북간도에서 대종교에 의해 결성된 무장 단체였다. 북간도로 피신한 대종교 신자들이 1911년 3월 왕청현에서 결성했다. 서일이 단장, 대종교 간부인 백순, 현천묵, 박찬익, 계화, 김병덕(김성), 채오, 양현, 이홍래 등이 간부였다.[3][4]
무장 투쟁을 목표로 했지만, 무기를 획득할 자원이 부족하여, 한인 사회 역량 강화에 집중했다. 1911년부터 1916년까지 25개의 학교를 설립, 운영하며 교장이나 교사로 활동하며 인재를 양성했다.[3][4]
1916년 대종교 2대 교주가 된 김교헌은 이듬해 북간도로 망명하여 본격적인 무장 투쟁을 준비하고 외교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왕청현을 대일 항쟁의 근거지로 삼고, 고평에는 블라디보스토크, 이민복은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백순은 북만주 밀산, 진학신은 북만주에 주둔시키며, 한국으로 파견하여 만주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계를 시도했다.[3] 백순과 이범윤은 러시아와 중국 국경 지역을 순회하며 의용군을 모집했다. 1918년 10월, 계화는 폭탄 제조 기술자를 고용하여 지린으로 갔다. 김성과 신정은 1차 사절단으로 파견되었으나 중도에 귀환했다. 북간도 지역에서 3·1 운동을 주도했으며, 1919년 5월 점차 해체되었다.[3]
2. 2. 대한정의단 (1919)
1919년 5월경 대종교 신자들과 유교 등 다른 종교 신자들이 연합하여 대한정의단을 조직하였다. 대한정의단은 독립 달성을 위해 비밀리에 무장 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단장은 서일이었다.[5][2] 대한정의단은 『일민보(一民報)』와 『신국보(新國報)』 등 순수 한글 잡지를 발간하여 항일 독립 투쟁의 필요성을 알리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5]1919년 8월, 대한정의단은 산하에 독립 투쟁을 위한 무장 단체인 군정부를 조직하고, 항일 독립 투쟁을 위해 한국 동포의 단결을 촉구하는 창의적인 성명을 배포했다.[5] 3·1 독립 선언 이후 1919년 6월 말에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민족 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국 독립 문제가 논의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성과가 없자 외교 노선보다 무력 노선을 중시하는 항일 무장 운동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대한정의단은 무장 투쟁을 위한 군정부를 조직했다.[5][2]
대한정의단의 기존 지도부는 군사 문제에 비전문가였기 때문에, 신민회 출신의 군사 교관 김좌진 등을 초빙하여 무장 단체를 지도하고 군사 훈련과 독립군 형성을 위임했다. 그러나 신민회 계열 민족주의자들이 군정부를 맡게 되자 유교 신자들의 반발을 샀다. 이는 신민회 계열이 공화주의를 지지한 반면, 유교 계열은 군주제를 지지하며 조선 왕조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결국 갈등 끝에 유교 신자들은 대한정의단에서 이탈했다.[5][6][2]
2. 3. 대한군정부 (1919)
1919년 대종교와 신민회의 지도하에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가 통합되어 대한군정부가 만들어졌다. 그 해 12월 상하이 임시정부의 지시로 대한군정서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를 서로군정서군과 대비하여 일반적으로 북로군정서군으로 부른다. 창립 당시 주요 인물은 서일, 현천묵 등이었으며, 김좌진을 총사령관으로 초빙하여 독립군의 조직과 훈련을 담당하게 하였다.[1]대한정의단은 1919년 5월경 대종교 신자들과 유교 등 다른 종교 신자들이 연합하여 조직되었다. 대한정의단은 독립을 위해 비밀리에 무장 투쟁을 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서일이 단장이었다. 대한정의단은 『일민보(一民報)』와 『신국보(新國報)』 등의 한글 잡지를 발간하여 항일 독립 투쟁의 필요성을 알리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데 기여했다. 1919년 8월, 대한정의단은 산하에 독립 투쟁을 위한 무장 단체인 군정부를 조직하고, 항일 독립 투쟁을 위해 한국 동포의 단결을 촉구하는 창의적인 성명을 배포했다.[5][2]
대한정의단의 기존 지도부는 군사 문제에 비전문가였기 때문에, 신민회 출신의 군사 교관 김좌진 등을 초빙하여 무장 단체를 지도하고 군사 훈련과 독립군 형성을 위임했다. 그러나 신민회 계열 민족주의자들이 군정부를 맡게 되자 유교 신자들의 반발을 샀다. 이는 신민회 계열이 공화주의를 지지한 반면, 유교 계열은 군주제를 지지하며 조선 왕조에 충성을 다했기 때문이다. 결국 갈등 끝에 유교 신자들은 대한정의단에서 이탈했다.[5][6][2]
1919년 10월, 대한정의단과 군정서가 통합하여 조직 전체를 대한군정서(大韓軍政府)라는 명칭으로 개편했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사령관은 김좌진이었다. 이후 새로운 대한군정서의 설립 사실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보고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 기관으로 인정을 신청했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군정서'라는 명칭을 '대한군정부'로 변경할 것을 요청했다. 그 이유는, 군정이라는 명칭이 암시하듯이, 군정이 아닌데 같은 동포 사회에 두 개의 정부가 있을 수 없다는 비판이 있었기 때문이다.[5][6][2]
1919년 12월, 북로군정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명칭을 '대한군정부'로 변경하고, 이를 임시정부에 보고하여 대한군정서를 공식적으로 설립했다. 당시 서간도 간도 지역에 설립된 서로군정서는 원래 '군정부'라는 명칭이었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청에 따라 '서로군정서'로 개칭되었고, 이에 따라 북간도 지역의 대한군정서가 서로군정서에 대비하여 준비되었다. 이로 인해 '북로군정서'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었다.[5][6][8][2][7]
3. 조직
북로군정서는 중앙 조직과 지방 조직으로 나뉘었고, 중앙 조직은 다시 사령부로 세분화되었다. 서일이 사령으로 있는 사령부는 북로군정서 관할 구역 내의 전반적인 사무를 지휘하고 군사 활동을 지원했으며, 본부는 북간도 왕청현 천명향 덕원리에 있었다. 김좌진이 총사령관을 맡은 사령부는 군사 활동 준비에 적합한 숲 지역인 왕청현 천명향 서대파(西大坡)에 본부를 두었다. 북로군정서의 사령부 본부는 숲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전략적 요충지에 건설되었으며, 병영과 연병장을 갖춘 기지였고 외부인의 접근을 완전히 차단한 훈련장이었다.[5][8][7]
3. 1. 지휘부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참모장에 이장녕, 사단장에 김규식, 여단장에 최해, 연대장 정훈, 연성대장 이범석, 길림분서고문 윤복영, 군기감독 양현 등으로 편성하였다.[9][10] 독립군은 소·중·대대로 편성하되 1개 소대를 50명으로 구성하였고, 2개 소대를 1개 중대로, 2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편성하였다.

3. 2. 부대 편성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을 총사령관, 이장녕을 참모장, 김규식을 사단장, 최해를 여단장, 정훈을 연대장, 이범석을 연성대장, 윤복영을 길림분서고문, 양현을 군기감독 등으로 편성하였다. 독립군 편제는 소·중·대대로 하되 1개 소대를 50명으로 구성하여, 2개 소대를 1개 중대로, 2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편성하였다. 초기에는 500여 명이었던 병력 규모는 1920년 8월에는 1,600명을 넘어섰다.[9][10]군자금은 관할 지역 주민이나 국내에서 징수되는 모금액으로 충당되었고, 주로 무기 구입에 쓰였다. 때마침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으로부터 최신 소총 1,800정과 기관총 7문, 대포 3문, 수류탄 등 신식무기들을 대거 확보했다.[9][10] 독립군 1인당 개인장비로는 소총 1정, 탄환 500발, 수류탄 1개, 비상식량용 조 6되, 짚신 1켤레 등이었다.
3. 3. 군자금 및 장비
북로군정서는 군자금을 주로 관할 지역 주민이나 국내에서 모금하여 충당했으며, 모금액은 대부분 무기 구입에 사용되었다.[9] 특히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으로부터 소총 1,800정, 기관총 7문, 대포 3문, 수류탄 등 최신 무기들을 대거 확보했다.[9][10]북로군정서는 체코 군단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면서 판매하는 무기를 구매하거나, 러시아와 러시아로 귀화한 한국인을 통해 대량의 무기를 확보했다. 서일은 직접 러시아 영토로 출장을 가서 무기 구매를 추진했고, 구매한 무기를 수송하기 위해 수송대를 조직하여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서대파 사령부로 수송했다.
확보한 무기는 소총 1,800정(군용 총기당 탄약 800발),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다수의 수류탄 등이었다. 1920년 8월에는 병력이 1,600명을 넘어섰고,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정으로 무장하여 동북 만주에서 가장 강력한 정예 부대가 되었다. 독립군 개인 장비는 소총 1정, 탄약 500발, 수류탄 1개, 비상 식량용 조 6되, 짚신 1켤레였다.
4. 군사 훈련
북로군정서는 왕칭에 사관 양성소를 설립하고 교포 교육에도 힘썼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벌어진 청산리 전투에서는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1]
북로군정서는 왕청현 서대파십리평 일대 약 30acre의 산림 지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8개의 병영을 건설하여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신흥무관학교에 도움을 요청하여 다양한 교재와 김좌진을 비롯해 이범석, 이장녕, 김규식, 김홍국, 최상운, 오상세 등 젊은 교관들을 지원받았으며, 국내에서 온 시민과 청년들을 선발하여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했다.[1]
총사령관 김좌진은 청년들을 모집하여 독립군을 편성하였으며, 독립군을 지휘할 간부 양성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군사 훈련 외에도 군정서는 노령 및 간도 지역의 독립 운동 단체들과 협력하는 한편, 북만주의 독립 운동가들의 연락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지방 행정에 힘쓰는 한편, 초등학교, 야간 학교, 훈련소 등을 설립하고, 지방 산업의 편의를 도모했다.[1]
북로군정서 독립군은 철저한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별도의 기관총 중대 창설 및 운영을 포함하여 이 시기 여러 독립군 부대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훈련이 잘 된 부대였다. 또한 북로군정서는 영향력 내에 세부적인 시스템으로 경찰 신탁 기구를 설치하고, 영향력 내에 지부를 설치했으며, 민정을 감시하고 자치를 시행하며 일본군의 동향을 파악하고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각 부대별 조직을 구성하여 즉시 보고할 수 있었다.[5][8][7]
4. 1. 사관양성소
1920년 2월 초, 북로군정서는 총사령관 김좌진의 주도로 사령부 본부에 간부 양성을 위한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였다. 김좌진은 연성소 소장을 맡았으며, 서간도 지역의 신흥무관학교에 도움을 요청하여 이범석을 비롯한 여러 훈련 교관을 초빙하고 교재를 지원받았다.[1]모집된 인원 중 체력과 애국심이 투철한 우수한 청년 300여 명을 선발하여 사관 훈련을 실시했다. 훈련은 시대적 긴급성을 고려하여 6개월 속성 과정으로 진행되었으며, 정신 교육, 역사, 군사학, 무술(무기 및 부대 지휘와 운용), 체조, 규율 등이 포함되었다. 특히 역사 교육은 세계 각국의 독립 역사와 일본 제국의 조선 침략사를 중점적으로 다루어 민족 정신을 함양하는 데 주력했다.[1]
군사 교육은 구 대한제국의 군사 방식을 기반으로 실시되었으며, 사령부 내 두 곳의 연병장에서 철저한 군사 훈련이 이루어졌다. 일본 제국 육군 모형을 상대로 실탄 사격 훈련이 진행되었으며, 중국군 또는 러시아군 사관학교 출신들을 교관으로 초빙하기도 했다. 1920년 6월, 기초 훈련을 마친 600명 중 300명만이 회색 군복을 착용하고 본격적인 군사 훈련에 들어갔다.[1]
1920년 9월 9일에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식이 거행되었으며, 298명의 사관이 졸업했다. 이 중 80명은 소위로 임명되었고, 나머지 200명 중심으로 교성대(敎聲隊, 또는 연성대)가 조직되었다. 이 부대는 가장 정예 부대였으며, 훗날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5][8][7]
5. 주요 활동
왕칭에 사관 양성소를 설립하고 교포 교육에도 힘썼다. 1920년 만주 지역에 수십 개의 무장 독립운동 단체가 등장하자, 일본은 반일 독립 세력을 대규모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지자 만주에 대규모 정규군을 투입하는 '간도 지방 불령선인 토벌 계획'을 수립했다. 1920년 10월, 일본은 중국 영토인 만주에 파병한다는 명목으로 중국인 산적들을 매수하여 홍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했다. 그 후, 만주에 있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조선 주둔군 제19사단과 제20사단, 시베리아 출병군 제11사단, 제13사단, 제14사단, 만주 파견군, 그리고 관동군 등 약 2만 명의 병력을 만주에 투입했다. 이때 독립군은 이미 안전한 산악 지대로 근거지를 옮겨 놓은 상태였다. 1920년 9월, 북로군정서 또한 중국군 연길 부대장 맹부덕의 권유로 서부 근거지를 떠나 병력을 북쪽으로 이동했다. 사관연성소의 첫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기지 이동이 이루어졌다.[2]
5. 1. 청산리 전투 (1920)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일본군을 상대로 청산리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1] 일본은 만주에서 반일 독립 세력을 탄압하고자 '간도 지방 불령선인 토벌 계획'을 수립하고, 1920년 10월 홍춘 사건을 일으켜 만주에 병력을 투입할 명분을 만들었다.[2] 이후 일본은 만주에 있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약 2만 명의 병력을 만주에 투입했다.[2]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로, 북로군정서는 10월 12일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부근에 도착했다.[2] 일본군은 대한독립군을 추격하여 약 5,000명의 이즈마 부대가 삼도구 청산리의 북로군정서와 이도구의 홍범도 연합 부대를 포위했다.[2] 이에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는 결전을 결심,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다.[2]
청산리 전투는 약 10차례의 전투로 구성되며, 백운평 전투, 천수평 전투, 맹개골 전투, 만구 전투는 북로군정서가 단독으로 승리했고, 어랑촌 전투와 천보산 전투는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이 연합하여 승리했다.[2] 독립군은 일본군 연대장을 포함 약 1,200명을 사살하는 큰 성과를 올렸고, 독립군 측 사상자는 미미했다.[2] 청산리 전투는 독립군이 간도에 출병한 이후 일본군을 상대로 치른 최대 규모의 전투였으며, 이 승리는 주로 북로군정서의 정예 부대가 이룬 성과였다.[2]
6. 시련과 해체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간도 참변을 일으켜 간도의 양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북로군정서는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와 소련의 경계 지대인 밀산에 집결하여 다른 독립군들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소련 자유시로 향했다.[5][8][7]
그러나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단은 큰 타격을 입었고, 서일, 김좌진 등은 북만주로 돌아와 독립군 부대를 재조직했지만, 이전과 같은 대규모 독립군단은 재건되지 못했다.[5][8][7]
6. 1. 간도 참변 (1920)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제는 간도 참변을 일으켜 간도의 양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는 다른 만주의 항일독립군들과 함께 일제의 감시를 피해 만주와 소련의 경계지대인 밀산에 집결하였다. 여기서 독립군들이 통합하여 서일을 총재로 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고, 일단 소련의 자유시로 향했다.[5][8][7]그러나 1921년 6월에 발생한 흑하사변(黑河事變, 또는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단은 무장 해제를 당하였으며 큰 타격을 입고 다수가 살상되었으며 부대를 이탈하였다. 서일, 김좌진 등 북로군정서 간부들은 사전에 소련 공산당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탈출해서 북만주로 돌아와 1922년 8월 다시 통합 독립군 부대를 재조직했지만, 전에 조직되었던 것과 같은 대규모의 독립군단은 다시 편성되지 못하였다.[5][8][7]
6. 2. 자유시 참변 (1921)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간도 참변을 일으켜 간도의 양민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때 북로군정서는 다른 만주의 항일독립군들과 함께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와 소련의 경계 지대인 밀산에 집결하였다. 여기서 독립군들이 통합, 서일을 총재로 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고, 일단 소련의 자유시로 향했다.[5][8][7]그러나 1921년 6월에 발생한 흑하사변(黑河事變, 또는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단은 무장 해제를 당하였으며 큰 타격을 입고 다수가 살상되었으며 부대를 이탈하였다. 서일, 김좌진 등 북로군정서 간부들은 사전에 소련 공산당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탈출해서 북만주로 돌아와 1922년 8월 다시 통합 독립군 부대를 재조직했지만, 전에 조직되었던 것과 같은 대규모의 독립군단은 다시 편성되지 못하였다.[5][8][7]
6. 3. 해체 이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패배한 일본군은 간도 참변을 일으켜 간도 지역의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이 시기에 북로군정서는 만주와 소련의 국경 지역인 밀산에 다른 항일 독립군과 함께 일본의 감시를 피해 집결했다. 여기서 독립군들은 서일을 중심으로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여 소련의 자유시로 향했다.[5][8][7]하지만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독립군단은 무장 해제되었고, 큰 피해를 입었으며, 많은 사상자와 탈영자가 발생했다. 서일, 김좌진 등 북로군정서의 고위 간부들은 사전에 소련 공산당의 이상한 징후를 감지하고 탈출하여 북만주로 돌아왔고, 1922년 8월 다시 통일된 독립군 부대를 재조직했지만, 이전과 같은 대규모 독립군단은 재건되지 못했다.[5][8][7]
참조
[1]
웹사이트
Northern Military Administration Office
http://encykorea.aks[...]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02-04
[2]
웹사이트
기일:기억의 날(당신을 기억합니다) 79편 _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https://ncms.ncultur[...]
ncms.nculture.org
2023-09-23
[3]
웹사이트
중광단 (重光團)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23-10-11
[4]
웹사이트
중광단
http://www.okpedia.k[...]
Encyclopedia of Overseas Korean Culture
2023-10-12
[5]
웹사이트
Northern Military Administration Office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2023-02-04
[6]
웹사이트
북로 군정서
http://www.okpedia.k[...]
Academy of Korean Studies
2023-02-04
[7]
뉴스
청산리대첩의 실질적 지휘자 북로군정서 총재
https://www.ikoreans[...]
Korean Spirit
2023-09-23
[8]
웹사이트
기일:기억의 날(당신을 기억합니다) 79편 _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
https://m.blog.naver[...]
Naver Blog
2023-02-04
[9]
뉴스
"[장창일 기자의 미션 라떼] 독립운동가 최재형 선생과 ‘오징어 게임’"
http://news.kmib.co.[...]
2021-10-08
[10]
뉴스
"[이덕일의 칼날 위의 歷史] #14. “제군에게 주는 무기는 동포의 피와 땀이다”"
http://www.sisajourn[...]
2014-11-27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