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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와 단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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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치카와 단쥬로는 가부키 배우의 명칭으로, 아라고토 양식을 창시한 초대 이치카와 단쥬로(1660년 ~ 1704년)부터 시작되어 13대까지 계승되었다. 이치카와 단쥬로는 이치카와 에비조와 함께 가부키에서 중요한 이름으로 여겨지며, 역대 단쥬로들은 여러 예명을 사용하고 가부키 쥬하치반을 창시하는 등 가부키 발전에 기여했다. 하지만 이 명칭을 이어받은 배우들 중 일부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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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카와 단쥬로

2. 역사

초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배우였던 호리코시 쥬조의 장남으로 1660년에 태어나 1704년에 사망했다. 아라고토 양식을 창시했으며, 단쥬로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전에는 이치카와 에비조 1세로 알려졌다.[1] 극작가로, 미마스야 효고/三升屋 兵庫일본어로도 알려져있다.[1]

2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초대의 장남으로 1688년에 태어나 1758년에 사망했다. 초대 이치카와 쿠조를 거쳐 '''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고, 이후 2대 이치카와 에비조로 이름을 바꾸었다.

3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2대의 양자로, 1721년에 태어나 1742년에 요절했다. 친아버지는 2대의 고제였던 미마스야 스케주로이며, 초대 이치카와 마스고로를 거쳐 '''3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4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2대의 양자로, 1711년에 태어나 1778년에 사망했다. 친아버지는 시바이쟈야의 이즈미야 칸쥬로 또는 2대 단쥬로로 추정된다. 초대 마츠모토 시치조, 2대 마츠모토 코시로를 거쳐 '''4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고, 이후 다시 2대 마츠모토 코시로와 3대 이치카와 에비조로 이름을 바꾸었다.

5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4대의 아들로, 1741년에 태어나 1804년에 사망했다. 3대 마츠모토 코시로를 거쳐 '''5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고, 이후 다시 3대 마츠모토 코시로, 이치카와 에비조(鰕蔵), 나리타야 시치자에몬(은거 이름), 초대 이치카와 하쿠엔(복귀 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모든 가부키 배우 중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한 명으로 알려져있다.

6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5대의 아들로, 1778년에 태어나 1799년에 요절했다. 4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6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7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5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손자이자 6대의 양자이다. 초대 이치카와 신노스케를 거쳐 5대 이치카와 에비조(ゑび蔵)를 거쳐 7대 이치카와 단쥬로를 습명했다.[2] 이후 5대 이치카와 에비조(海老蔵)로 개명했다가, 칩거 근신 당시에는 나리타야 시치자에몬, 지방 순회 시에는 하타야 쥬조, 이후 2대 이치카와 하쿠엔으로 개명했다. 가부키 쥬하치반을 창시했다.[3]

8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7대의 장남으로, 2대 이치카와 신노스케를 거쳐 6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8대 이치카와 단쥬로를 습명했다. 오사카에서 자살했다.[4]

9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1838년 7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5남으로 태어났다. 3대 카와라사키 쵸쥬로, 초대 카와라사키 곤쥬로, 7대 카와라사키 곤노스케, 카와라사키 산쇼를 거쳐 9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가부키 황금기를 이끈 스타였다.

증10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9대의 데릴사위로, 장녀 2대 이치카와 스이센의 남편이었다. 1880년 니혼바시의 신발가게 아들로 태어났으며, 후에 도쿄시의원이 되는 이나노부 리헤이의 아들이다. 호리코시 후쿠사부로, 5대 이치카와 산쇼를 거쳐 영결식에서 증10대 이치카와 단쥬로로 추증되었다. 가부키 쥬하치반의 많은 작품을 부활시켰지만, 주로 단역을 맡았다.

11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증10대의 양자이며, 친아버지는 7대 마츠모토 코시로이다. 1909년 태어나 초대 마츠모토 킨타로, 9대 이치카와 코마조, 9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11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12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11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장남으로 1946년에 태어났다. 이치카와 나츠오, 6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10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1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13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12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장남으로 1977년에 태어났다. 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11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이 되었다. 2020년 5월에 단쥬로 13세라는 이름을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가부키 공연이 취소되면서 이름 변경이 연기되었다.

2. 1. 초기 단쥬로 (1대 ~ 6대)

초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배우였던 호리코시 쥬조의 장남으로 1660년에 태어나 1704년에 사망했다. 아라고토 양식을 창시했으며, 단쥬로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전에는 이치카와 에비조 1세로 알려졌다.[1] 극작가로, 미마스야 효고/三升屋 兵庫일본어로도 알려져있다.[1]

2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초대의 장남으로 1688년에 태어나 1758년에 사망했다. 초대 이치카와 쿠조를 거쳐 '''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고, 이후 2대 이치카와 에비조로 이름을 바꾸었다.

3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2대의 양자로, 1721년에 태어나 1742년에 요절했다. 친아버지는 2대의 고제였던 미마스야 스케주로이며, 초대 이치카와 마스고로를 거쳐 '''3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4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2대의 양자로, 1711년에 태어나 1778년에 사망했다. 친아버지는 시바이쟈야의 이즈미야 칸쥬로 또는 2대 단쥬로로 추정된다. 초대 마츠모토 시치조, 2대 마츠모토 코시로를 거쳐 '''4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고, 이후 다시 2대 마츠모토 코시로와 3대 이치카와 에비조로 이름을 바꾸었다.

5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4대의 아들로, 1741년에 태어나 1804년에 사망했다. 3대 마츠모토 코시로를 거쳐 '''5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고, 이후 다시 3대 마츠모토 코시로, 이치카와 에비조(鰕蔵), 나리타야 시치자에몬(은거 이름), 초대 이치카와 하쿠엔(복귀 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모든 가부키 배우 중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한 명으로 알려져있다.

6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5대의 아들로, 1778년에 태어나 1799년에 요절했다. 4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6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2. 2. 중기 단쥬로 (7대 ~ 9대)

7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5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손자이자 6대의 양자이다. 초대 이치카와 신노스케를 거쳐 5대 이치카와 에비조(ゑび蔵)를 거쳐 7대 이치카와 단쥬로를 습명했다.[2] 이후 5대 이치카와 에비조(海老蔵)로 개명했다가, 칩거 근신 당시에는 나리타야 시치자에몬, 지방 순회 시에는 하타야 쥬조, 이후 2대 이치카와 하쿠엔으로 개명했다. 가부키 쥬하치반을 창시했다.[3]

8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7대의 장남으로, 2대 이치카와 신노스케를 거쳐 6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8대 이치카와 단쥬로를 습명했다. 오사카에서 자살했다.[4]

9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7대의 5남이다. 3대 카와라사키 쵸쥬로를 거쳐 초대 카와라사키 곤쥬로, 7대 카와라사키 곤노스케, 카와라사키 산쇼를 거쳐 9대 이치카와 단쥬로를 습명했다. 메이지 시대 가부키 황금기의 스타였다.

2. 3. 근현대 단쥬로 (10대 ~ 13대)

9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1838년 7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5남으로 태어났다. 3대 카와라사키 쵸쥬로, 초대 카와라사키 곤쥬로, 7대 카와라사키 곤노스케, 카와라사키 산쇼를 거쳐 9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메이지 시대의 가부키 황금기를 이끈 스타였다.

증10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9대의 데릴사위로, 장녀 2대 이치카와 스이센의 남편이었다. 1880년 니혼바시의 신발가게 아들로 태어났으며, 후에 도쿄시의원이 되는 이나노부 리헤이의 아들이다. 호리코시 후쿠사부로, 5대 이치카와 산쇼를 거쳐 영결식에서 증10대 이치카와 단쥬로로 추증되었다. 가부키 쥬하치반의 많은 작품을 부활시켰지만, 주로 단역을 맡았다.

11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증10대의 양자이며, 친아버지는 7대 마츠모토 코시로이다. 1909년 태어나 초대 마츠모토 킨타로, 9대 이치카와 코마조, 9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11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12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11대의 장남으로 1946년에 태어났다. 이치카와 나츠오, 6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10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1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13대 이치카와 단쥬로는 12대의 장남으로 1977년에 태어났다. 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11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이 되었다. 2020년 5월에 단쥬로 13세라는 이름을 사용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가부키 공연이 취소되면서 이름 변경이 연기되었다.

3. 역대 이치카와 단쥬로 목록

이치카와 단쥬로가부키 배우 이름 중 하나로, 나리타야의 야호를 사용한다. 아라고토를 창시한 초대 이치카와 단쥬로 이후, 이치카와 에비조와 함께 가부키에서 중요한 이름으로 여겨진다.


  • '''초대 이치카와 단쥬로''' (1660년 - 1704년): 배우였던 호리코시 주조의 장남으로, 초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초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아라고토 양식을 창시했다.[1] 이쿠시마 한로쿠에게 암살당했다.

  • '''2대 이치카와 단쥬로''' (1688년 - 1758년): 초대의 장남으로, 초대 이치카와 쿠조를 거쳐 2대 이치카와 단쥬로, 그리고 2대 이치카와 에비조가 되었다.[2]

  • '''3대 이치카와 단쥬로''' (1721년 - 1742년): 2대의 양자로, 친아버지는 2대의 고제였던 미마스야 스케주로이다. 초대 이치카와 마스고로를 거쳐 3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으나 요절했다.[3]

  • '''4대 이치카와 단쥬로''' (1711년 - 1778년): 2대의 양자로, 친아버지는 시바이쟈야의 이즈미야 칸쥬로 또는 2대 단쥬로로 추정된다. 초대 마츠모토 시치조, 2대 마츠모토 코시로를 거쳐 4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고, 이후 다시 2대 마츠모토 코시로, 3대 이치카와 에비조가 되었다.[4]

  • '''5대 이치카와 단쥬로''' (1741년 - 1804년): 4대의 아들로, 3대 마츠모토 코시로를 거쳐 5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이후 다시 3대 마츠모토 코시로,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나리타야 시치자에몬으로 은거했다가 초대 이치카와 하쿠엔으로 복귀했다. 모든 가부키 배우 중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한 명이었다.[5]

5대 이치카와 단쥬로

  • '''6대 이치카와 단쥬로''' (1778년 - 1799년): 5대의 아들로, 4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6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으나 요절했다.

  • '''7대 이치카와 단쥬로''' (1791년 - 1859년): 5대의 손자이자 6대의 양자로, 초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5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7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이후 다시 5대 이치카와 에비조가 되었고, 칩거 근신 당시에는 나리타야 시치자에몬, 지방 순회 시에는 하타야 쥬조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대 이치카와 하쿠엔으로 복귀했다. 가부키 쥬하치반을 창시했다.[3]

  • '''8대 이치카와 단쥬로''' (1823년 - 1854년): 7대의 장남으로, 2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6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8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오사카에서 자살했다.[4]

  • '''9대 이치카와 단쥬로''' (1838년 - 1903년): 7대의 5남으로, 3대 카와라사키 쵸쥬로, 초대 카와라사키 곤쥬로, 7대 카와라사키 곤노스케, 카와라사키 산쇼를 거쳐 9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메이지 시대 가부키 황금기의 스타였다.

  • '''증10대 이치카와 단쥬로''' (1880년 - 1956년): 9대의 데릴사위(장녀 2대 이치카와 스이센의 남편)로, 친아버지는 니혼바시의 신발가게 주인이자 훗날 도쿄시의원이 되는 이나노부 리헤이이다. 호리코시 후쿠사부로, 5대 이치카와 산쇼를 거쳐 증10대 이치카와 단쥬로로 추증되었다. 단역만 맡았지만, 가부키 쥬하치반의 많은 작품을 부활시켰다.

  • '''11대 이치카와 단쥬로''' (1909년 - 1965년): 증10대의 양자로, 친아버지는 7대 마츠모토 코시로이다. 초대 마츠모토 킨타로, 9대 이치카와 코마조, 9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11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 '''12대 이치카와 단쥬로''' (1946년 - 2013년): 11대의 장남으로, 이치카와 나츠오, 6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10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1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5]

  •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 (1977년 - ): 12대의 장남으로, 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11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이 되었다. 2020년 5월에 습명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연기되었다.[6]


4. 습명과 계승

이치카와 단쥬로는 가부키 배우 가문 중 하나인 이치카와 가문의 명적이다.[1] 이 가문은 아라고토 양식을 창시한 초대 이치카와 단쥬로(1660년 ~ 1704년)로부터 시작되었다.[1] 초대는 배우였던 호리코시 쥬조의 장남으로, 초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초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2대 이치카와 단쥬로(1688년 ~ 1758년)는 초대의 장남으로, 초대 이치카와 쿠조를 거쳐 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고, 이후 2대 이치카와 에비조로 이름을 바꾸었다. 3대 이치카와 단쥬로(1721년 ~ 1742년)는 2대의 양자로, 친아버지는 2대의 고제였던 미마스야 스케주로이며, 초대 이치카와 마스고로를 거쳐 3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으나 요절하였다.

4대 이치카와 단쥬로(1711년 ~ 1778년)는 2대의 양자였으며, 친아버지는 시바이쟈야의 이즈미야 칸쥬로 또는 2대 단쥬로로 추정된다. 그는 초대 마츠모토 시치조, 2대 마츠모토 코시로를 거쳐 4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고, 이후 다시 2대 마츠모토 코시로, 3대 이치카와 에비조로 이름을 바꾸었다.

5대 이치카와 단쥬로(1741년 ~ 1804년)는 4대의 아들로, 3대 마츠모토 코시로를 거쳐 5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이후 3대 마츠모토 코시로, 이치카와 에비조(鰕蔵), 나리타야 시치자에몬(은거 이름), 초대 이치카와 하쿠엔(복귀 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모든 가부키 배우 중 가장 유명한 배우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6대 이치카와 단쥬로(1778년 ~ 1799년)는 5대의 아들로, 4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6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으나 요절하였다. 7대 이치카와 단쥬로(1791년 ~ 1859년)는 5대의 손자이자 6대의 양자로, 초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5대) 이치카와 에비조(ゑび蔵)를 거쳐 7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이후 5대 이치카와 에비조(海老蔵), 나리타야 시치자에몬(칩거 근신 당시), 하타야 쥬조(지방 순회), 2대 이치카와 하쿠엔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는 가부키 쥬하치반을 창시하였다.[3]

8대 이치카와 단쥬로(1823년 ~ 1854년)는 7대의 장남으로, 2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6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8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으나, 오사카에서 자살하였다.[4] 9대 이치카와 단쥬로(1838년 ~ 1903년)는 7대의 5남으로, 3대 카와라사키 쵸쥬로, 초대 카와라사키 곤쥬로, 7대 카와라사키 곤노스케, 카와라사키 산쇼를 거쳐 9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그는 메이지 시대 가부키 황금기의 스타였다.

증10대 이치카와 단쥬로(1880년 ~ 1956년)는 9대의 데릴사위(장녀 2대 이치카와 스이센의 남편)로, 친아버지는 니혼바시의 신발가게 주인이자 훗날 도쿄시의원이 되는 이나노부 리헤이였다. 그는 호리코시 후쿠사부로, 5대 이치카와 산쇼를 거쳐 증10대 이치카와 단쥬로(영결식에서 추증)가 되었다. 그는 단역만 맡았지만, 가부키 쥬하치반의 많은 작품을 부활시켰다.

11대 이치카와 단쥬로(1909년 ~ 1965년)는 증10대의 양자로, 친아버지는 7대 마츠모토 코시로였다. 그는 초대 마츠모토 킨타로, 9대 이치카와 코마조, 9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11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

12대 이치카와 단쥬로(1946년 ~ 2013년)는 11대의 장남으로, 이치카와 나츠오, 6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10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12대 이치카와 단쥬로가 되었다.[5] 13대 이치카와 단쥬로(1977년 ~ )는 12대의 장남으로, 7대 이치카와 신노스케, 11대 이치카와 에비조를 거쳐 13대 이치카와 단쥬로 하쿠엔이 되었다. 그는 2020년 5월에 단쥬로 13세라는 이름을 사용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범유행으로 인해 가부키 공연이 취소되면서 이름 변경이 연기되었다.[6]

4. 1. 이치카와 에비조와의 관계

4. 2. 이치카와 신노스케와의 관계

5. 비극적인 최후

이치카와 단쥬로라는 명칭은 대대로 그 절반이 어떤 형태로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초대 단쥬로는 무대 위에서 함께 출연한 배우에게 찔려 살해되었고(44세), 3대 단쥬로는 공연지 오사카에서 병을 얻어 에도로 돌아왔지만 2개월 후에 사망했다(21세). 6대 단쥬로는 감기가 악화되어 급사(21세)하였고, 8대 단쥬로는 공연지 오사카에서 의문의 자살을 하였다(31세). 11대 단쥬로는 단쥬로 습명 후 불과 3년 반 만에 병사(56세)하였고, 12대 단쥬로는 백혈병을 앓아 9년간 투병 끝에 사망했다(66세). 역대 단쥬로의 무덤은 아오야마 영원에 있다.

참조

[1] 문서
[2] 문서
[3] 웹사이트 contemporary image of Danjūrō VII (1819) http://www.fitzmuseu[...] 2008-09-30
[4] 웹사이트 contemporary image of Danjūrō VIII (c. 1836) http://www.fitzmuseu[...] 2007-01-29
[5] 뉴스 Popular Kabuki actor Ichikawa Danjuro dies at 66 http://mainichi.jp/e[...] Mainichi Shinbun 2013-11-24
[6] 웹사이트 十三代目市川團十郎白猿襲名披露興行が延期 海老蔵「忍耐強くウイルスに立ち向かうしかない」 https://www.sponichi[...] Sports Nippon 2020-04-07
[7] 뉴스 團十郎 歌舞伎復興にらみ/襲名公演2年■40代役者主力 読売新聞 2022-11-06
[8]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第5版 三省堂
[9] 서적 コンサイス日本人名事典 第5版 三省堂
[10] 뉴스 團十郎 歌舞伎復興にらみ/襲名公演2年■40代役者主力 読売新聞 2022-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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