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준 (1883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태준은 1883년 경상남도 함안 출생으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안창호의 권유로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국권 상실 후 몽골로 망명하여 의료 활동을 펼치며 몽골인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독립운동 자금 지원 등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1921년 러시아 백위파에 의해 피살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을 추서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몽골의 외교관 - 산자깅 바야르
산자깅 바야르는 1956년 몽골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국립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몽골 총리, 러시아 주재 몽골 대사 등을 역임했으며, 총리 재임 중 타반톨고이 광산 국유화 등을 추진했으나 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 복드 칸국 - 스벤 헤딘
스벤 헤딘은 중앙아시아 탐험과 고대 도시 유적 발굴에 기여한 스웨덴의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이지만, 나치 독일과의 협력 관계로 비판을 받기도 하는 인물이다. - 복드 칸국 - 로만 폰 웅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
로만 폰 웅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내전에 참전하여 백군으로 활동하며 군주제 복고를 시도했으나 붉은 군대에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이태준 (1883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이태준 |
원래 이름 | 李泰俊 |
직책 | 몽골 복드 칸국 어의관 |
임기 | 1918년 12월 1일 ~ 1921년 2월 10일 |
군주 | 복드 칸 몽골국 군주 |
출생지 | 조선 경상도 함안 |
사망지 | 몽골 복드 칸국 울란 바토르 |
출생일 | 1883년 11월 21일 |
학력 |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
경력 | 대한제국 독립운동가 출신 의사 |
사망일 | 1921년 2월 10일 (37세) |
정당 | 무소속 |
2. 생애 및 주요 경력
이태준은 1883년 11월 21일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6월 21일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사 학위를 받았다. 재학 시절 안창호의 권유로 비밀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담하였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나온 후 국권 상실로 인해 청나라 장쑤 성 난징으로 망명하였다가, 1914년 김규식의 권유로 인하여 중화민국 장쑤 성 난징을 떠나 몽골로 가게 된다. 몽골인 대다수가 감염되었던 화류병(花柳病)을 치료하면서 몽골인들로부터 신처럼 추앙받는다.
1919년 7월 몽골 군주(복드 칸)로부터 제1급 관리등급의 국가훈장‘에르데니-인 오치르’(금강석이란 뜻)를 수여받았다.
그런 가운데 러시아와 중국을 잇는 독립자금 운송에 가담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했으나, 불행히도 1921년 2월초 몽골을 침범하여 폭압정치를 실시한 러시아 백위파 대장 미친 남작(Mad baron)이란 별명으로도 잘 알려진 로만 스테른(Roman von Ungern-Sternberg, 1886년 ~ 1921년) 부대에게 학살된다. 향년 39세의 아까운 삶이었다.
생전 그는 의사(醫師)로 몽골(蒙古) 수도 울란바토르(庫倫)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중, 1918년 9월 김규식(金奎植) 선생이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 참석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키 위해 몽골로 잠시 오자 그에게 독립운동 관련 자금 2천원을 제공하여 활동을 도왔다.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80년 8월 15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대통령 표창장을, 1990년 3월 1일을 기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하였다.
2. 1. 출생과 성장
이태준은 1883년 11월 21일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6월 21일에 세브란스의학교에서 의학사 학위를 받았다. 재학 시절 안창호의 권유로 비밀청년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담하였다.2. 2. 의학 공부와 청년학우회 활동
이태준은 1883년 11월 21일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출생하였다. 1911년 6월 21일 세브란스의학교를 졸업하고 의학사 학위를 받았다. 재학 중 안창호의 권유로 비밀 청년 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2. 3. 몽골 망명과 의료 활동
이태준은 1911년 세브란스의학교에서 의학사 학위를 받고, 안창호의 권유로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국권 상실 후 청나라 난징으로 망명하였으며, 1914년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로 이주했다.몽골에서 이태준은 몽골인 대다수가 감염되었던 화류병을 치료하여 몽골인들에게 '신의'(神醫)로 추앙받았다. 1919년 7월에는 몽골 군주로부터 1급 관리등급의 국가 훈장인 '에르데니-인 오치르'를 받았다.
이태준은 러시아와 중국을 잇는 독립자금 운송에 가담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1918년 9월에는 김규식이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몽골에 오자, 독립운동 자금 2천 원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1921년 2월, 몽골을 침략한 러시아 백위파 대장 로만 스테른 부대에 의해 39세의 나이로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태준의 공훈을 기려 1980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2. 4. 독립운동 참여와 최후
이태준은 1919년 7월 몽골 군주(Bogd Khan)로부터 1급 관리등급의 국가훈장인 '에르데니-인 오치르'(금강석이란 뜻)를 수여받았다. 1918년 9월, 김규식이 프랑스 파리 강화회의 참석에 필요한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몽골에 잠시 오자, 이태준은 그에게 독립운동 자금 2천원을 제공하였다. 또한, 러시아와 중국을 잇는 독립자금 운송에도 참여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그러나 1921년 2월 초, '미친 남작'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진 로만 스테른이 이끄는 러시아 백위파 부대가 몽골을 침범하여 폭압정치를 실시하면서, 이태준은 그들에게 학살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태준의 공훈을 기려 1980년 8월 15일 대통령 표창을, 1990년 3월 1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3. 대한민국 정부의 추서
4. 평가
5. 이태준을 기리는 기념 사업
6. 대중문화 속 이태준
7. 같이 보기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