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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학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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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청년학우회는 1909년 신민회의 주도로 결성된 청년 계몽 단체이다. 신민회의 외곽단체로 출범하여, 인격 수양과 실력 양성을 통해 국권 회복을 목표로 활동했다. 윤치호, 안창호, 최남선 등이 참여했으며, 《소년》지 발간, 강연회 개최, 신학교 설립 등을 추진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불법화되었고, 1910년 105인 사건을 계기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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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학우회

2. 출범 배경

1907년(광무 10년)에 설립된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는 청년층이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운동의 주체임을 인식하고, 청년운동을 담당할 합법적인 단체의 창립을 추진했다. 1909년 2월 안창호서재필독립협회 예하 협성회와 같은 청년 계몽 조직의 필요성을 제창하였고, 1909년 8월 윤치호, 최남선, 차이석, 이승훈 등 신민회 간부 12명과 유길준, 김윤식 등의 발의로 청년학우회가 조직되었다. 청년학우회는 처음에 신민회의 외곽단체로서 출범했지만, 유길준, 김윤식 등의 외부 인사들도 참여하였다.

안창호윤치호, 유길준은 청년들을 조직하고 훈련하여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국가 건설을 위한 근본이라 생각하고 청년학우회 운영은 신민회와는 별개의 비정치적 순수 청년운동 단체로서 운영할 것을 계획하였지만, 결국 신민회의 요원을 양성하려는 의도대로 따라가게 됐다.

3. 활동 목적

신민회의 합법적 외곽 단체로 창립, 신고하였으나 표면적으로는 비정치적 수양 단체임을 내세웠다. 운동 목표는 크게 개인의 인격 수양론과 선실력 양성론(先實力養成論)을 제시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성과 침략성을 규탄하는 한편 열강의 야욕을 경계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조선은 실력으로 보나 민도로 보나 아직 독립할 역량이 없으므로, 일단 실력 양성과 국민적 인식 개선이 급선무라고 생각하고 '선실력 양성 후독립'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안창호가 제창한 국권 회복 운동에서의 지도자들의 단결과 국민의 자강력 배양을 위해 인격 수양이 필요하다는 점을 비전으로 강조하고, 민족 전체를 근대 시민으로 만드는 것을 최종 목표로 했다. 이어 민족 전체가 근대적인 국민 자격을 갖추어 민족 갱생 사업이 완수되면 그제서야 독립 운동이 성공할 것이라 믿었다.

4. 활동

청년학우회는 비정치적인 인격 수양을 표방했으나, 실력 양성과 국민 계몽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목표로 한 구국청년단체였다. 무실, 역행, 자강, 충실, 근면, 정제(整齊), 용감 등을 행동 강령으로 삼고, 지육(智育), 덕육(德育), 체육(體育)을 실천 방안으로 제시했다.

주요 활동으로는 강연회, 강습회, 토론회, 순회 강연, 기관지 및 서적 발행 등이 있었다. 최남선 등이 주관하는 학우회 기관지 《소년》지를 발간하였고, 각종 신학교 설립과 신식 병원 유치 등을 추진했으며, 기독교 선교사들과도 교류하였다.

그러나 1910년 10월 한일 병합 조약으로 불법화되었고, 1910년 11월 105인 사건을 계기로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4. 1. 조직

1909년(융희 3년) 8월 윤치호, 최남선, 차이석, 이승훈신민회 간부 12명과 유길준, 김윤식 등의 발의로 청년학우회가 조직되었다. 초기 설립위원장은 윤치호가 맡고, 총무원 안태국, 서기원 옥관빈 등이 선출되었다. 1910년 3월 윤치호가 선교 문제로 미국으로 건너가자 박중화를 임시 위원장 대리로 선출했다.

조직은 중앙의 학우회 총회와 지방의 연회(聯會)로 구성되었다. 1909년 11월 한성연회를 시작으로, 개성연회, 해주연회, 1910년(융희 4년) 6월 평양연회, 의주연회, 안주연회가 조직되었고, 정주, 곽산, 선천, 용천, 진남포 등에서도 연회 설립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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