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홍려)
1. 개요
이(大鴻臚)는 전한 소제 때 대홍려로, 제북왕 유관을 소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후원 2년, 제북왕 유관이 폐위된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당시 대홍려 재임 시기가 전광명의 재임 시기와 겹쳐 논쟁이 있다. 왕선겸은 이가 전광명으로, 기록 오류로 인해 이름이 잘못 표기되었다고 주장했다. 관련 기록은 반고의 《한서》에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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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정치인 -
구독
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한나라의 정치인 -
석편
석편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내사에 임명되어 석경의 뒤를 이어 내사를 지냈으며, 정당시가 그의 후임자이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신도가
신도가는 전한 시대의 무관 출신으로, 항우와의 싸움과 영포의 난에 참여하고 혜제 때 회양태수를 거쳐 승상에 올랐으며, 청렴한 성품으로 황제의 총애를 받던 등통을 처벌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조조와의 갈등 끝에 죽음을 맞이하여 절후의 시호를 받았다. -
기원전 2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
기원전 1세기 중국 사람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기원전 1세기 중국 사람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2. 행적
후원 2년(기원전 87년), 제북왕 유관이 아버지 제북식왕의 왕후와 첩 등과 간통하고 황제를 저주하였다는 상주가 올라왔다. 소제는 대홍려 이를 보내 유관을 소환하였고, 유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북국은 폐지되어 북안현(北安縣)이 되었고 태산군에 흡수되었다.
이의 대홍려 재임 시기는 전광명의 재임 시기와 겹치는데, 자세한 정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왕선겸은 이가 곧 전광명이며, 원래 '광명(廣明)'으로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 '광(廣)' 자가 빠지고, '명(明)' 자가 잘못 기록되어 '이(利)'가 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2.1. 제북왕 유관 사건
후원 2년(기원전 87년), 제북왕 유관이 아버지 제북식왕의 왕후 광(光)·첩 효아(孝兒)와 간통하고 황제를 저주하였다는 상주가 올라왔다. 소제는 대홍려 이를 보내 유관을 소환하였고, 유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북국은 폐지되어 북안현(北安縣)이 되었고 태산군에 흡수되었다.
왕선겸은 이가 곧 전광명이며, 본래 '광명(廣明)'으로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 '광(廣)' 자가 빠진 데다가, '명(明)' 자가 전사 과정에서 '리(利)'로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2.2. 대홍려 재임 시기 논쟁
후원 2년(기원전 87년)은 전광명의 대홍려 재임 시기와 겹치는데, 정황은 알 수 없다. 왕선겸은 이가 곧 전광명이며, 본래 '廣明'으로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 廣이 빠진 데다가, 明이 전사 과정에서 利로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 관직 임명
후원 2년(기원전 87년), 제북왕 유관이 아버지 제북식왕의 왕후 등과 간통하고 황제를 저주하였다는 상주가 올라와, 소제는 대홍려 이 를 보내 유관을 소환하였다. 유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제북국은 북안현(北安縣)이 되어 태산군에 흡수되었다.
3.1. 전임자와 후임자
후원 2년(기원전 87년) 당시 대홍려는 이였으나, 같은 시기 전광명이 대홍려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정황은 알 수 없다. 왕선겸은 이가 곧 전광명으로, 본래 '廣明'으로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 廣이 빠진 데다가, 明이 전사 과정에서 利로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4. 출전
반고의 《한서》에 따르면, 왕선겸은 이가 곧 전광명이며, 본래 '廣明'으로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 廣(넓을 광) 자가 빠지고, 明(밝을 명) 자가 전사 과정에서 利(이로울 리) 자로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4.1. 사료
반고의 《한서》 권7 소제기(昭帝紀) · 권44 회남형산제북왕전(淮南衡山濟北王傳)에 이(대홍려)에 관한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