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대홍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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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大鴻臚)는 전한 소제 때 대홍려로, 제북왕 유관을 소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후원 2년, 제북왕 유관이 폐위된 사건에 연루되었으며, 당시 대홍려 재임 시기가 전광명의 재임 시기와 겹쳐 논쟁이 있다. 왕선겸은 이가 전광명으로, 기록 오류로 인해 이름이 잘못 표기되었다고 주장했다. 관련 기록은 반고의 《한서》에 수록되어 있다.
후원 2년(기원전 87년), 제북왕 유관이 아버지 제북식왕의 왕후와 첩 등과 간통하고 황제를 저주하였다는 상주가 올라왔다. 소제는 대홍려 이를 보내 유관을 소환하였고, 유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북국은 폐지되어 북안현(北安縣)이 되었고 태산군에 흡수되었다.
후원 2년(기원전 87년), 제북왕 유관이 아버지 제북식왕의 왕후 등과 간통하고 황제를 저주하였다는 상주가 올라와, 소제는 대홍려 이 를 보내 유관을 소환하였다. 유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제북국은 북안현(北安縣)이 되어 태산군에 흡수되었다.
2. 행적
이의 대홍려 재임 시기는 전광명의 재임 시기와 겹치는데, 자세한 정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왕선겸은 이가 곧 전광명이며, 원래 '광명(廣明)'으로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 '광(廣)' 자가 빠지고, '명(明)' 자가 잘못 기록되어 '이(利)'가 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2. 1. 제북왕 유관 사건
후원 2년(기원전 87년), 제북왕 유관이 아버지 제북식왕의 왕후 광(光)·첩 효아(孝兒)와 간통하고 황제를 저주하였다는 상주가 올라왔다. 소제는 대홍려 이를 보내 유관을 소환하였고, 유관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제북국은 폐지되어 북안현(北安縣)이 되었고 태산군에 흡수되었다.
왕선겸은 이가 곧 전광명이며, 본래 '광명(廣明)'으로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 '광(廣)' 자가 빠진 데다가, '명(明)' 자가 전사 과정에서 '리(利)'로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2. 2. 대홍려 재임 시기 논쟁
후원 2년(기원전 87년)은 전광명의 대홍려 재임 시기와 겹치는데, 정황은 알 수 없다. 왕선겸은 이가 곧 전광명이며, 본래 '廣明'으로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 廣이 빠진 데다가, 明이 전사 과정에서 利로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3. 관직 임명
3. 1. 전임자와 후임자
후원 2년(기원전 87년) 당시 대홍려는 이였으나, 같은 시기 전광명이 대홍려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어 정황은 알 수 없다. 왕선겸은 이가 곧 전광명으로, 본래 '廣明'으로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 廣이 빠진 데다가, 明이 전사 과정에서 利로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4. 출전
반고의 《한서》에 따르면, 왕선겸은 이가 곧 전광명이며, 본래 '廣明'으로 기록되었어야 할 것이 廣(넓을 광) 자가 빠지고, 明(밝을 명) 자가 전사 과정에서 利(이로울 리) 자로 잘못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4. 1. 사료
반고의 《한서》 권7 소제기(昭帝紀) · 권44 회남형산제북왕전(淮南衡山濟北王傳)에 이(대홍려)에 관한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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