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에 1세 (노르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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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에 1세는 1136년부터 1161년까지 노르웨이 국왕이었다. 하랄 4세의 아들로, 부친 사후 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며, 척추측만증으로 추정되는 신체적 장애를 가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의 재위 기간은 형제들과의 권력 다툼으로 점철되었으며, 시구르 2세, 에위스테인 2세와의 갈등 끝에 1161년 오슬로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 잉에 사후에는 지지자들이 망누스 5세를 따랐으며, 잉에 1세에 대한 평가는 '헤임스크링글라' 등 사가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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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에 1세 (노르웨이)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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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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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잉에 하랄손 |
다른 이름 | 잉에 크로크뤼그 |
로마자 표기 | Inge Krokrygg |
통치 | |
국가 | 노르웨이 |
군주 칭호 | 노르웨이 국왕 |
재위 기간 | 1136년 – 1161년 2월 3일 |
이전 군주 | 하랄 4세 |
다음 군주 | 호콘 2세와 망누스 5세 |
출생과 사망 | |
출생 | 1135년경 |
사망일 | 1161년 2월 3일 |
사망지 | 오슬로 |
매장지 | 성 할바르 대성당 (철거됨) |
가문 | |
왕가 | 길레 가 |
왕조 | 홀파그레 왕조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하랄 길레 |
어머니 | 잉리드 랑발스도테르 |
자녀 | 욘 쿠블룽 (주장됨) |
2. 어린 시절과 즉위
잉에 1세는 노르웨이 왕 하랄 4세와 그의 아내 잉그리드 랑발스도테르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친생자였다. 그러나 당시 노르웨이에서는 왕위 계승에 있어 적법한 출생 여부가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었다. 잉에는 어린 시절 노르웨이 동부 지역('비켄')에서 '외그문드'(Ögmund) 혹은 '아문드 기르다르손'(Ámund Gyrðarson, 또는 옴문데 기들드손)이라는 인물에게 양육되었다.[7]
노르웨이 왕국의 분할은 영토를 나누는 방식이 아니었으며, 모든 형제는 나라 전체에 대해 동등한 왕의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사가에 따르면, 형제들의 후견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관계가 평화로웠다. 이들의 재위 기간 중인 1152년에는 니다로스(트론헤임)에 독립적인 노르웨이 대주교구가 설립되었다. 그러나 후견인들이 죽고 형제들이 성장하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잉에 1세와 그의 형제들이 미성년자였던 1129년부터 1155년까지의 시기는 1240년까지 이어진 노르웨이 내전 시대 중 가장 긴 평화 기간이었다.
『헤임스크링글라』에는[11] 잉에 1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잉에 재위에 대한 주요 자료들은 왕들의 사가인 헤임스크링글라, 파그르스킨나, 모르킨스킨나, 아우그리프 등이다. 이들 중 앞의 세 가지 사가들은 1150년과 1170년 사이 어느 시기에 쓰여, 좀 더 동시대 사료로 여겨지는 더 오래된 사가 흐리갸르스티키를 일부 기반으로 하고 있다. 흐리갸르스티키 자체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1]
서적
Inge Haraldsson Krokrygg
1934
1136년, 아버지 하랄 4세는 베르겐에서 자신을 마그누스 3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시구르 슬렘베에게 살해당했다. 당시 겨우 한두 살이었던 잉에는 사릅스보르그 근처의 '보르가르팅'(Borgarting)이라는 팅그(의회)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동시에 그의 미성년자 이복형제들인 망누스와 시구르 역시 다른 팅그에서 왕으로 지명되었다.[8] 아직 어린 왕들을 대신하여 그들의 후견인들이 나라를 다스렸는데, 이들 중에는 잉에의 어머니인 왕비 잉그리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후견인들은 힘을 합쳐 하랄 4세를 살해한 시구르 슬렘베와 그와 동맹을 맺은 전 왕 '장님왕' 망누스에 맞섰다. 1139년, 홀멘그로 전투에서 시구르 슬렘베와 망누스 4세는 패배하고 죽임을 당했다.
잉에는 '크로크뤼그'(Krokrygg, 굽은 등)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그가 신체적 장애를 가졌기 때문이다. 아이슬란드 사가인 《모르킨스킨나》와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잉에는 1137년 미네(Minne) 전투 당시 그의 후견인 중 한 명(초스트로프 올레손)이 그를 자루에 넣어 업고 참전했다가 화살을 맞아 장애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들은 "그의 등은 굽었고, 발 한쪽은 다른 쪽보다 짧았으며, 몹시 연약해서 평생 거의 걸어 다니지 못했다"고 전한다.[5] 척추측만증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반면, 덴마크의 역사가 삭소 그라마티쿠스는 잉에가 어렸을 때 유모의 부주의로 바닥에 떨어져 등을 다쳐 곱추가 되었다고 다르게 설명한다.[6]
초기의 혼란이 진정된 후, 왕국은 몇 년간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를 보냈다. 이복형제 중 한 명인 망누스 하랄손은 어린 나이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이 1140년대 어느 시점에 사망했다. 1142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성장한 또 다른 이복형제 외위스테인이 노르웨이로 건너왔다. 하랄 4세가 생전에 외위스테인을 자신의 아들로 인정했었기 때문에, 그 역시 왕국의 일부를 다스리는 공동 왕이 되었다.
잉에 1세의 생애에 대한 주요 자료로는 《헤임스크링글라》(특히 〈하랄드의 아들들의 사가〉, 〈호콘 넓적다리 왕의 사가〉, 〈마그누스 맹인왕과 하랄 기예의 사가〉), 《파글르스킨나》, 《모르킨스킨나》 등이 있으며[2][3], 스칼드 시인 《''Nóregs konungatal''》에서도 언급된다.[4]
3. 성인 시절과 재위 기간
1155년 베르겐에서 형제들 간의 회의가 열렸는데, 이 과정에서 잉에 측과 시구르 측의 군대 사이에 싸움이 벌어져 시구르가 살해되었다. 외인스테인은 회의에 늦게 도착하여 시구르가 죽은 뒤에야 베르겐에 도착했다. 이후 잉에와 외인스테인 사이에는 불안정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베르겐에서의 싸움 원인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사가에서는 외인스테인과 시구르가 잉에의 왕위를 빼앗고 왕국을 나누려 모의했다고 전하지만, 일부 현대 역사가들은 이를 잉에의 공격적인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으로 보기도 한다. 1155년 사건 이후 잉에와 외인스테인 사이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1157년, 양측은 충돌을 준비하며 군대를 모았다. 잉에의 군대가 수적으로 우세했고, 모스테르 인근 서쪽 해안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외인스테인의 군대는 패배했다. 외인스테인은 도망쳤으나 그해 말 보후슬렌에서 붙잡혀 살해되었다.
잉에는 이제 유일하게 남은 형제가 되었다. 하지만 시구르와 외인스테인의 지지자들은 시구르의 아들인 어깨 넓은 호콘을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며 결집했다. 이들은 잉에에 맞서 싸움을 계속했다. '헤임스크링글라'에 따르면 잉에는 족장들(렌드만)에게 왕국 운영에 대한 큰 발언권을 허용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잉에의 주요 조언자로는 '렌트만' 그레고리우스 닥손과 엘링 스카케가 있었으며, 그의 어머니 잉기리드 라그발스도티르 역시 아들의 통치 기간 동안 영향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1161년 1월 7일, 그레고리우스 닥손은 호콘 왕의 군대와의 소규모 전투 중에 전사했다. 같은 해 2월 3일, 잉에는 오슬로 근처에서 호콘 왕과의 전투를 지휘하던 중 패배하고 전사했다. 그의 봉신이었던 구뢰르 올라프손이 이끌던 잉에 측 병력 다수는 군도 왕국으로 도망치거나 호콘 왕에게 귀순했다. 잉에는 오슬로의 성 할바르 교회에 묻혔다.[9]
4. 잉에 1세 사후의 영향
잉에가 사망한 후, 그의 지지자들은 렌트만 엘링 스카케와 그의 아들 망누스 엘링손을 중심으로 결집했다. 이 세력은 때때로 '렌트만 세력'(lendmannspartiet|렌만스파르티에트no) 또는 '렌트만 파'로 불렸다. 잉에 왕에 대한 사가 기록에는 자녀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훗날 스베레 국왕에 대항하여 왕위를 주장했던 욘 쿠블룽(1188년 사망)은 자신이 잉에 1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5. 평가
: "잉에 왕은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하고 있었고, 금발이었다. 그는 상당히 마르고 주름이 많았다. 키가 작았고, 거의 혼자 걸을 수 없었으며, 다리 하나가 위축되었고, 등과 가슴에 혹이 있었다. 그는 온화하고 친구들에게 친절했으며, 관대했고, 나라를 다스리는 문제에 대해 족장들에게 많은 조언을 했다. 그는 백성들에게 사랑받았고, 이 모든 것이 그에게 권력과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6. 참고 문헌
잉에 1세의 생애에 관해서는 특히 《헤임스크링글라》 중 《하랄드의 아들들의 사가》 및 《호콘 넓적다리 왕의 사가》가 주요 자료이다. 《마그누스 맹인왕과 하랄 기예의 사가》에서도 잉에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헤임스크링글라》는 잉에 1세의 전 생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유일한 문헌 자료로 평가받는다. 《파글르스킨나》의 저자도 잉에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이 사가에서는 잉에의 생애 마지막 부분에 대한 기록은 누락되어 있다.[2] 《모르킨스킨나》의 경우, 마지막 사가인 《잉에와 그의 형제들의 사가》는 잉에의 형제 에위스테인 2세가 살해된 후 이야기가 중간에 끝난다.[3] 잉에는 또한 스칼드 시의 《''Nóregs konungatal''》에서도 언급되고 있다.[4]
참조
[2]
문서
Fagerskinna, ch. 102. この章は未完である。
[3]
서적
Saga Inga ok broædra hans
[4]
문서
Norges konungatal, str. 65-66
[5]
서적
Haraldssønnenes saga
[6]
서적
Fjortende bog (Valdemar den store)
[7]
서적
Aschehougs Norgeshistorie. Bd 3. Under kirke og kongemakt
1995
[8]
서적
Sigurd 2 Haraldsson Munn
2004
[9]
서적
Håkon Herdebrei's saga
[10]
서적
Inge I Haraldsson Krokrygg
2002
[11]
문서
Haraldssønnenes saga, ch.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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