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센 공작부인 잉글랜드의 마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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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마틸다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딸로, 1168년 작센 공작 하인리히 사자공과 결혼했다. 그녀는 남편의 영지를 다스리며, 1172년부터 1173년까지 남편이 성지 순례를 떠난 동안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1182년 남편과 함께 독일에서 추방되어 노르망디로 갔고, 그곳에서 음유시인 베르트랑 드 보른의 시의 대상이 되었다. 마틸다는 1189년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사망했으며, 그녀의 자녀 중 오토 4세는 신성 로마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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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 헨리 1세의 딸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후였던 마틸다는 12세기 잉글랜드 왕위 계승 분쟁 시기에 왕위를 주장했으나, 비록 왕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아들 헨리 2세가 왕위를 계승하며 플랜태저넷 왕조를 열었다.
작센 공작부인 잉글랜드의 마틸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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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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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위 | 작센 공작부인과 바이에른 공작부인 |
배우자 | 하인리히 사자공 (1168년 결혼) |
자녀 | 마틸다, 페르슈 백작부인 하인리히 5세, 라인 궁중백 오토 4세 빌헬름, 뤼네부르크의 영주 |
가문 | 플랜태저넷 가 |
아버지 | 헨리 2세 |
어머니 | 엘레오노르 다키텐 |
출생일 | 1156년 6월 |
출생지 | 런던, 잉글랜드 왕국 |
사망일 | 1189년 6월/7월 (32–33세) |
사망지 | 브라운슈바이크, 작센 공국 |
매장지 | 브라운슈바이크 대성당, 니더작센 주 |
작위 | |
작센 공작 부인 및 바이에른 공작 부인 | 시작: 1168년 2월 1일 종료: 1180년 |
2. 생애 초기
마틸다는 1156년 6월경 잉글랜드의 런던 혹은 윈저 성에서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이의 셋째 아이이자 장녀로 태어났다.[1] 이름은 부계 조모인 황후 마틸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으며, 올드게이트의 성 삼위일체 수도원에서 캔터베리 대주교 베크의 테오발드에게 세례를 받았다. 1160년, 엘레오노르 여왕과 함께 노르망디에 있던 국왕과 합류하여 1163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1165년, 쾰른 대주교 라이날드 폰 다셀이 마틸다의 결혼 협상을 위해 독일측 대표로 루앙에 있는 헨리 2세의 궁에 도착했다. 그러나 레스터 백작 보몽의 로베르가 대주교는 대립교황 빅토르 4세를 지지하면서 교회를 분열시킨 혐의가 있다면서 만나기를 거부하자 문제가 발생했다. 헨리 2세는 원래 마틸다를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의 아들과 결혼시킬 생각이었으나, 이 결혼은 무산되었다. 대신 사자공 하인리히와 결혼하기로 하고 1167년 9월에 마틸다를 잉글랜드에서 출발시켰다.
1172년부터 1173년까지 하인리히가 십자군 성지를 방문하느라 자리를 비울 때 마틸다가 대신해서 광대한 영지를 다스렸다. 1174년 하인리히가 프리드리히 1세와의 분쟁에 말려들게 되었고, 몇 년 간의 다툼 끝에 위험에 처하게 되자 1182년에 둘은 독일 땅에서 도망쳐 장인 헨리 2세의 궁이 있는 노르망디로 갔다. 프랑스 북부 아르장탕의 왕궁에 머무는 동안 트루바두르 보른의 베르트랑을 만났고, 베르트랑은 그녀를 "Elena" 또는 "Lana"라 부르면서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두 개의 시를 썼다.
1174년 하인리히가 프리드리히 1세와의 분쟁에 말려들게 되었고, 몇 년 간의 다툼 끝에 위험에 처하게 되자 1182년에 둘은 독일 땅에서 도망쳐 장인 헨리 2세의 궁이 있는 노르망디로 갔다. 프랑스 북부 아르장탕의 왕궁에 머무는 동안 트루바두르 보른의 베르트랑을 만났고, 베르트랑은 그녀를 "Elena" 또는 "Lana"라 부르면서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두 개의 시를 썼다.
마틸다와 사자공 하인리히 사이의 자녀 수, 이름, 출생 순서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일치하지 않는다. 앨리슨 웨어는 10명, 델마 안나 리스는 5명, 케이트 노게이트와 제임스 팬턴은 6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159년 교황 선거 분쟁과 그 뒤의 분열 이후, 헨리 2세는 신성 로마 제국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1165년 초,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쾰른 대주교 라스의 라이날트가 이끄는 사절단을 잉글랜드 궁정에 파견하여 마틸다와 작센 공작 사자공 하인리히의 결혼을 성사시키려 했다. 그러나 협상 과정에서 레스터 백작 로버트 드 보몽 2세가 빅토르 4세의 지지자라고 주장하며 독일 대주교에게 인사를 거부하여 갈등이 발생했다.
마틸다는 당시 노르망디에서 어머니와 함께 머물고 있었고 1166년 가을에야 잉글랜드로 돌아왔는데, 그녀와 작센 공작 사이의 동맹에 대한 결정이 내려졌다. 결혼 준비는 마틸다가 돌아오고 사절단이 떠난 직후 시작되었으며, 국왕이 딸의 결혼을 위해 징수한 원조를 평가하기 위해 작성된 재무부 기록에 남아있다. 1167년 초, 작센 공작은 신부를 인도하기 위해 사절단을 보냈다. 마틸다는 미카엘 축일 (9월 29일)에 어머니와 함께 도버에서 노르망디로 항해했고, 크리스마스 이후에 독일로 떠났다. 사자공 하인리히는 민덴에서 신부를 만났고, 그들은 1168년 2월 1일 현지 민덴 대성당에서 베르너 주교의 집례로 결혼했다.[1]
마틸다의 남편은 그녀보다 27살이나 많았고, 그녀가 태어나기 오래 전에 이미 결혼했었다. 바이에른, 작센, 브라운슈바이크의 통치 공작으로서 그는 "엘베강에서 라인강까지, 하르츠 산맥에서 바다까지"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한다. 공작의 공식 거주지는 브라운슈바이크에 있었고, 신혼 부부는 그곳에서 결혼 축제를 열었다. 마틸다와 사자공 하인리히의 첫 아이는 1172년, 아버지가 성지로 순례를 떠난 동안 브라운슈바이크에서 태어났다. 그 딸은 부계 조모인 노르트하임의 리헨자의 이름을 따서 리헨자라고 지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마틸다는 적어도 네 명의 자녀를 더 낳았다. 제임스 팬톤은 결혼 초기에 마틸다가 젊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부재한 동안 그의 광대한 영지를 다스렸다고 썼다.
3. 결혼
독일에 도착한 마틸다는 1168년 2월 1일 민덴 성당에서 작센 공작이자 바이에른 공작인 사자공 하인리히와 결혼했다. 둘의 결혼 생활에서 네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태어났는데, 그 중 한 명이 오토 4세이다. 몇몇 자료에서는 그 외에 3명의 아이들이 더 있다고 나타난다.
마틸다의 남편은 그녀보다 27살이나 많았고, 그녀가 태어나기 오래 전에 이미 결혼했었다. 사자공 하인리히는 1162년에 첫 번째 아내인 체링겐의 클레멘티아와 이혼했다. 바이에른, 작센, 브라운슈바이크의 통치 공작으로서 그는 "엘베강에서 라인강까지, 하르츠 산맥에서 바다까지"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한다. 공작의 공식 거주지는 브라운슈바이크에 있었고, 신혼 부부는 그곳에서 결혼 축제를 열었다.
4. 독일에서의 생활과 섭정
마틸다의 가족들은 헨리 2세의 강력한 보호 아래 노르망디에 머물고 있다가 1185년이 되어서 작센 영지로 되돌아갈 수 있었으나, 1189년 초반에 황제는 하인리히에게 다시금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때 마틸다는 브라운슈바이크에 남아서 남편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3개월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5. 추방과 귀환
마틸다의 가족들은 헨리 2세의 강력한 보호 아래 노르망디에 머물고 있다가 1185년이 되어서 작센 영지로 되돌아갈 수 있었으나, 1189년 초반에 황제는 하인리히에게 다시금 추방 명령을 내렸다. 이때 마틸다는 브라운슈바이크에 남아서 남편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3개월 후에 사망하고 말았다.
6. 자녀
《아르놀디 크로니카 슬라보룸》, 《크로니콘 몬티스 세레니》, 《크로니콘 산크티 미카엘리스 루네부르겐시스》 등 당대 기록에 따르면, 마틸다와 사자공 하인리히의 자녀는 5명으로 기록되어 있다.이름 출생-사망 기타 리헨차 1172년 – 1209/10년 1월 13일 장녀. 부모와 함께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마틸다로 알려졌다. 1184년에 스코틀랜드 왕인 사자 윌리엄과 약혼했으나 파기되었다. 1189년에 페르슈 백작 제프리 3세와 결혼, 1204년에 쿠시 영주 앙게랑 3세와 재혼했다. 하인리히 1173/1174년 – 1227년 4월 28일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190년 이탈리아 원정 중 탈주하여 추방당했으나, 1194년 결혼 후 복권되었다. 1195년 아버지 사후 브라운슈바이크를 상속받고, 라인 궁정백이 되었다. 1193년 12월/1194년 1월, 호엔슈타우펜의 아그네스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로타르 1174/1175년 – 1190년 10월 15일 1182년 부모 망명 당시 작센에 남았다. 로마 왕 하인리히 6세의 인질이 되었다가 청소년기에 사망.[1] 오토 1175/1176년 – 1218년 5월 19일 푸아티에 백작, 요크 백작, 독일 왕, 신성 로마 황제. 1212년 슈바벤의 베아트리스와 결혼, 1214년 브라반트의 마리아와 재혼했다. 윌리엄 1184년 7월 – 1213년 12월 12일 뤼네부르크 영주. 덴마크의 헬레나와 결혼했다. 후손은 브라운슈바이크와 뤼네부르크의 모든 공작, 현재의 영국 왕가와 덴마크 국왕 프레데릭 10세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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