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림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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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림도정은 조선 선조 시대에 태어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충절을 지킨 인물이다. 1575년에 태어나 13세에 장림령에 봉작되었으며,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하려 했으나 제지당하자 맨발로 따르며 수행했다. 광해군 시대에는 간언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관악산에 은둔하여 학문을 가르쳤고, 인조 시대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1638년에 64세로 사망했으며, 묘소는 현재의 서초동에 위치해 있다.
하원군 5남으로 을해(乙亥) 1575년(선조 8) 8월 16일 탄생하였다. 13세에 장림령(長臨令)에 봉작받고, 그 후 장림수(長臨守)를 거쳐 장림부정(長臨副正)으로 승진되었다.[1]
2. 생애
1592년 18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이복형 익성군이 아버지 하원군을 모시고 임금을 호종하며 거가를 따르자, 장림도정도 분연히 거가를 뒤 따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이 나이가 어리다고 제지하자 울면서 "군부(君父)가 난을 만났는데 신하의 몸으로 어찌 감히 편안함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맨발로 보호하며 수행하였다.[1]
선조가 도성으로 환도함에 이르러 장림정(長臨正)으로 승진되었다.[1] 광해군이 왕위를 물려받고 혼란함이 날로 심해지자 여러 번 충언을 하였으나 듣지 않음으로 종국(宗國)이 혼란하고 망하는 꼴을 참아 볼 수 없다하여 중국 은나라 미자가 은둔하듯이 관악산에 은둔하여 기둥 몇 개로 얽어 집을 짓고 살며, 장차 생을 마치려 하였다.[1] 그러나 경향 각지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원근에서 찾아 온 학도들이 날로 늘어났음으로 나아가 공손하고, 검소하며 마음을 화평하고 기쁘게 대해주었으며 접대는 후하게 하고 재능에 따라 가르쳤으니 모두 문예(文藝)의 경지에 나가게 되었다.[1]
1626년(인조 4) 창선대부(彰善大夫)에 가자 되었으나 선비의 절개를 고집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1]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청나라와 강화(講和)를 하자 근심하고 분하여 질병까지 들었으니, 인조가 듣고 매우 걱정하며 장림도정(長臨都正)에 제수하고, 명선대부(明善大夫)로 가자하고 어의(御醫)를 보내 치료받게 하였으나, 마침내 1638년(인조 16) 10월 2일 향년 64세로 별세하였다.[1]
묘소는 시흥군 신동면 상초리 마랑동(현 서초동)에 예장하였다. 1969년 4월 5일 후손에 의해 전북 순창군 유등면 화탄리 갑좌에 이장하였다. 묘하에 영모재(永慕齋)가 있다.[1]
2. 1. 유년 시절과 임진왜란
1575년(선조 8) 8월 16일 하원군의 5남으로 출생하였다. 13세에 장림령(長臨令)에 봉작받고, 그 후 장림수(長臨守)를 거쳐 장림부정(長臨副正)으로 승진되었다.[1]
1592년 18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이복형 익성군이 아버지 하원군을 모시고 임금을 호종하며 거가를 따랐다. 이때 장림도정은 나이가 어리다고 제지받았으나, "군부(君父)가 난을 만났는데 신하의 몸으로 어찌 감히 편안함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맨발로 보호하며 수행하였다.[1]
선조가 도성으로 환도함에 이르러 장림정(長臨正)으로 승진되었다.[1]
2. 2. 관직 생활과 광해군 시대
1592년 18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가 의주로 몽진할 때 이복형 익성군이 아버지 하원군을 모시고 임금을 호종하며 거가를 따랐다. 이때 장림도정은 나이가 어리다고 제지받았으나, "군부(君父)가 난을 만났는데 신하의 몸으로 어찌 감히 편안함을 취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맨발로 보호하며 수행하였다.[1] 선조가 도성으로 환도함에 이르러 장림정(長臨正)으로 승진되었다.[1]
광해군이 왕위를 물려받고 혼란함이 날로 심해지자 여러 번 충언을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이에 종국(宗國)이 혼란하고 망하는 꼴을 참아 볼 수 없어, 중국 은나라 미자가 은둔하듯이 관악산에 은둔하여 기둥 몇 개로 얽어 집을 짓고 살았다.[1] 그러나 경향 각지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원근에서 찾아 온 학도들이 날로 늘어났으므로, 공손하고 검소하며 마음을 화평하고 기쁘게 대해주었으며 접대는 후하게 하고 재능에 따라 가르쳤으니 모두 문예(文藝)의 경지에 나가게 되었다.[1]
2. 3. 인조 시대와 병자호란
1626년(인조 4) 창선대부(彰善大夫)에 가자 되었으나 선비의 절개를 고집하며,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1]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청나라와 강화(講和)를 하자 근심하고 분하여 질병까지 들었으니 인조가 듣고 매우 걱정하며 장림도정(長臨都正)에 제수하고, 명선대부(明善大夫)로 가자하고 어의(御醫)를 보내 치료받게 하였으나 마침내 1638년(인조 16) 10월 2일 향년 64세로 별세하였다.[1]
2. 4. 사망과 후손
1638년(인조 16년) 10월 2일 향년 64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시흥군 신동면 상초리 마랑동(현 서초동)에 예장하였다가 1969년 4월 5일 후손에 의해 전북 순창군 유등면 화탄리 갑좌로 이장되었다. 묘하에 영모재(永慕齋)가 있다.[1]
3. 가계
하원군 이정(1545년 - 1597년)과 생모 장월당 수원 백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원군은 남양군부인 홍씨(1544년 - 1569년), 신안군부인 이씨(1556년 - 1616년)와 3명의 첩실을 두었다.
적모 남양군부인 홍씨는 영의정 홍섬의 딸이며, 슬하에 당은군 이인령, 익성군 이향령, 영제군 이석령, 이희령을 두었다. 이희령은 기자헌에게 출가하였다.
적모 신안군부인 이씨는 선전관 증 이조판서 이의로의 딸이다.
첩모 풍천 임씨는 임중신의 딸로, 성해부정 이종령과 이계령을 낳았으며, 이계령은 김극가에게 출가하였다.
첩모 안산 안씨는 연성수 이복령을 낳았다. 첩모 진산 이씨는 참판 이영의 딸로, 진산군 이유령, 진성군 이해령, 진양군 이담령, 이옥령을 두었으며, 이옥령은 남영립에게 출가하였다.
생모 장월당은 생원 백관의 딸이며, 이경령, 이숙령, 이영령을 낳았다. 이경령은 강극유에게, 이숙령은 김정립에게, 이영령은 유철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장림도정의 부인은 신부인(愼夫人) 어씨(魚氏, 1578년 - 1632년)로, 충주인(忠州人) 어복원(魚復元)의 딸이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충양수 이흥길(1608년(1596년) - 1660년), 2남은 충성령 이중길(1601년(1605년) - 1630년), 3남은 충흥령 이득길(1615년(1608년) - 1662년), 4남은 충릉령 이명길(1617년(1615년) - 1683년)이다. 장녀 이예영(李禮英, 1592년 - ?년)은 청주인(淸州人) 한충후(韓忠後)에게, 차녀 이예신(李禮信, 1599년 - ?년)은 죽산인(竹山人) 안유도(安有道)에게 출가하였다. 5녀 이사예(李四禮, 1612년 - ?년)가 있다.
후실 인수(仁壽)에게서는 2녀를 두었다. 3녀 이예옥(李禮玉, 1601년 - ?년)은 면천인(沔川人) 복귀길(卜龜吉)에게, 4녀 이예향(李禮香, 1611년 - ?년)은 청주인(淸州人) 한진(韓璡)에게 출가하였다.
3. 1. 부모와 형제
하원군 이정(1545년 - 1597년)과 생모 장월당 수원 백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하원군은 남양군부인 홍씨(1544년 - 1569년), 신안군부인 이씨(1556년 - 1616년)와 3명의 첩실을 두었다.
적모 남양군부인 홍씨는 영의정 홍섬의 딸이며, 슬하에 당은군 이인령, 익성군 이향령, 영제군 이석령, 이희령을 두었다. 이희령은 기자헌에게 출가하였다.
적모 신안군부인 이씨는 선전관 증 이조판서 이의로의 딸이다.
첩모 풍천 임씨는 임중신의 딸로, 성해부정 이종령과 이계령을 낳았으며, 이계령은 김극가에게 출가하였다.
첩모 안산 안씨는 연성수 이복령을 낳았다. 첩모 진산 이씨는 참판 이영의 딸로, 진산군 이유령, 진성군 이해령, 진양군 이담령, 이옥령을 두었으며, 이옥령은 남영립에게 출가하였다.
생모 장월당은 생원 백관의 딸이며, 이경령, 이숙령, 이영령을 낳았다. 이경령은 강극유에게, 이숙령은 김정립에게, 이영령은 유철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3. 2. 배우자와 자녀
장림도정의 부인은 신부인(愼夫人) 어씨(魚氏, 1578년 - 1632년)로, 충주인(忠州人) 어복원(魚復元)의 딸이다. 슬하에 4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충양수 이흥길(1608년(1596년) - 1660년), 2남은 충성령 이중길(1601년(1605년) - 1630년), 3남은 충흥령 이득길(1615년(1608년) - 1662년), 4남은 충릉령 이명길(1617년(1615년) - 1683년)이다. 장녀 이예영(李禮英, 1592년 - ?년)은 청주인(淸州人) 한충후(韓忠後)에게, 차녀 이예신(李禮信, 1599년 - ?년)은 죽산인(竹山人) 안유도(安有道)에게 출가하였다. 5녀 이사예(李四禮, 1612년 - ?년)가 있다.
후실 인수(仁壽)에게서는 2녀를 두었다. 3녀 이예옥(李禮玉, 1601년 - ?년)은 면천인(沔川人) 복귀길(卜龜吉)에게, 4녀 이예향(李禮香, 1611년 - ?년)은 청주인(淸州人) 한진(韓璡)에게 출가하였다.
4. 평가
4. 1. 학문적 업적
4. 2. 충절과 절개
4. 3. 더불어민주당의 관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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