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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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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적교는 391년 적료 사후 즉위하여 연호를 정정으로 정한 인물이다. 후연의 업성을 공격했으나 격퇴당했고, 관도를 침략했으나 모용수의 공격을 받아 패배했다. 서연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결국 후연과의 전투에서 패하여 서연으로 도주했다. 서연에서 거기대장군, 연주목, 동군왕에 봉해졌으나 반란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393년 모용영에게 살해당했다.

2. 역사

388년, 정령족(丁零族)의 수령 적료적위를 건국하고 활대를 점거한 뒤 스스로 대선우(大單于)라 칭하며 후연에 반기를 들었다. 적료는 부하 적조(翟釗)를 시켜 사주군현(四周郡縣)을 침략하게 하였다.

2. 1. 적조의 통치와 멸망

391년, 적료가 죽자 적조가 뒤를 이었고, 정정(定鼎)으로 개원하였다. 적조는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후연의 업성(허베이성 린장현)을 공격했으나, 모용농에게 격퇴당했다.

392년 2월, 적조는 부장인 적도(翟都)를 보내 후연의 관도(허베이성 관타오현)를 침략하게 하였고, 소강루(蘇康壘)에 주둔시켰다.

3월, 후연의 모용수적위로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왔고, 먼저 소강루(蘇康壘)를 압박하니 적도는 활대(滑台, 지금의 허난성 화현)로 달아났다. 적조는 이전에 서연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서연은 이를 거절하였다.

6월, 모용수가 여양(허난성 쉰현)에서 남쪽으로 황하를 건널 준비를 하자, 적조는 황하 남쪽 강가에 병사를 배치하여 이에 대응하였다. 모용수는 군영을 서진(西津)으로 옮기고, 여양 서쪽 40리 밖에서 수백 척의 소가죽을 씌운 배를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했다. 적조가 병사를 이끌고 서진으로 이동하자, 모용수는 이 틈을 타 모용진(慕容鎮)에게 밤에 황하를 건너도록 명령하였다. 그날 저녁 모용진은 황하 남쪽에 군영을 세웠고, 적조는 이 소식을 듣고 군사를 돌려 모용진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모용진이 굳게 방벽을 세우고 저항하였고, 적조의 군사는 행군과 공격으로 피로해져 공격에 실패하였다. 적조는 퇴각을 고려하였으나, 이때 모용진이 병사를 내어 서진에서 황하를 건넌 모용농과 연합하여 적조를 양쪽에서 공격하니 적조의 군사는 크게 패하였다. 적조는 활대로 물러나 처자식과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황하를 건너 험준한 백록산(白鹿山)을 근거지로 삼고 굳게 지켰다. 후연군은 이 때문에 공격하지 못하고 물러났으나, 기병을 산 아래에 남겨두어 적조가 내려오는 것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적조가 산을 내려오자 후연 기병이 기습하여 무리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적조는 서연으로 달아났고, 서연은 적조를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연주목(兗州牧)으로 임명하고, 동군왕(東郡王)에 봉하였다. 이로써 적위는 멸망했다.

393년, 적조는 반란을 모의하다 발각되어 서연의 황제 모용영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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