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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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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적료는 4세기 후반 중국에서 활동한 정령족 출신의 인물로, 후연에 대항하여 세력을 키우다 스스로 위천왕을 칭하고 적위를 건국했다. 그는 사촌 적빈이 후연에 의해 살해된 후 후연에 저항했으며, 려양을 근거지로 세력을 확장했다. 이후 위천왕을 칭하고 건광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국가를 운영했으나, 대외 관계에서 갈등을 겪으며 여러 차례 동진, 후연, 서연과 대립했다. 적료는 잔혹한 면모로 비판받기도 했지만, 정령족의 정체성을 지키려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적료 사후 아들 적조가 뒤를 이었으나 적위는 이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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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료
기본 정보
칭호천왕
왕조채위
재위 기간388년–391년
즉위388년
퇴위391년
이전 군주(없음)
후임 군주채조
인물 정보
채(翟)
이름요(遼)
출생일알 수 없음
사망일391년
통치
연호건광
연호 기간388년–391년

2. 건국 이전

서정 릉 왕족 출신인 적료는 무리와 함께 카자흐스탄에서 중국으로 이주했으며, 그의 사촌인 적빈은 383년 전진의 황제 부견과 전쟁을 벌였다.[1] 모용수가 전진에 반란을 일으켜 후연을 건국했을 때 적빈은 그를 지원했다. 그러나 384년, 모용수가 예성을 포위했을 때, 적빈은 모용수가 도시를 빨리 함락시키지 못하자 다른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용수에게 재상 칭호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대신 부비와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그의 계획이 발각되어, 그의 형제들과 함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이때 적료와 그의 사촌 적진은 일부 정령족 병력을 이끌고 도망쳐 후연에 저항했다.[1]

384년 말, 적료는 모용수의 아들 모용린모용농에게 패배하여 적진에게 도망쳤다. 385년, 적진의 부하 선우기가 그를 암살하고 지배권을 넘겨받으려 했지만, 적씨 가문이 반격하여 그를 죽였다. 적료의 또 다른 사촌인 적성이 적진의 뒤를 이었지만, 그들의 부하 중 다수가 후연에 항복했다. 385년 가을, 모용수는 적성을 공격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전투에서 우위를 잃었지만, 적성의 부하 선우덕이 적성을 암살하고 그의 군대를 항복시켰다. 항복한 정령 군대는 대부분 학살당했다.[1]

그러나 적료는 학살에서 탈출하여 진의 려양군 태수인 등념지에게 피신했다. 등념지는 적료를 매우 신뢰했고, 사냥에 과도하게 헌신하고 병사들의 필요를 무시했기 때문에, 적료는 병사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하여 그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었다. 386년, 등념지가 원정을 나갔을 때 적료에게 려양을 지키도록 위임했고, 대신 적료는 원정 중 등념지가 매복 공격을 받자 려양을 차지했다. 그 후 2년 동안, 적료는 잃어버린 정령 백성을 모으기 시작했고, 그의 무리는 서서히 재건되었으며, 동시에 그는 진을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서연의 황제 모용영과 동맹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387년, 모용수는 동맹을 배신하고 적료를 공격했으며, 적료의 부하 중 다수가 포위 기간 동안 식수 없이 한 달을 보낸 후 자살했다. 적료는 증원군을 이끌고 포위를 뚫고 연군을 격파했다. 화친 조약으로, 모용수는 그를 예공으로 봉했다.[1]

2. 1. 정령족의 이동과 초기 활동

적빈으로부터 이어지는 후연에서 독립한 정령족의 세력을 물려받은 적료는 무리와 함께 카자흐스탄에서 중국으로 이주했다.[1]

시기사건
384년 11월신도 서쪽에서 후연의 모용농이 적료를 노구에서 격파했고, 적료는 물러나 무극에 주둔했다.
384년 12월후연의 모용린과 모용농은 적료를 기습하여 크게 격파했고, 적료는 단기로 적진에게 달아났다.
385년 4월적진이 승영에서 행당으로 옮겨갔을 때, 적진의 부하 선우걸이 적진을 암살하고, 영인들이 적진의 사촌 동생인 적인을 세웠으나, 그 무리의 대부분은 후연에 투항했고, 적료는 려양으로 달아났다.
386년 1월려양으로 도망친 적료는 려양군 태수인 등념지에게 매우 총애를 받았지만, 등념지가 사졸들에게 신임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몰래 계략을 꾸몄다. 등념지가 남쪽의 녹명성을 공격했을 때, 후방에 있던 적료는 문을 닫아 등념지가 돌아오지 못하게 하고, 동쪽의 권성으로 도망치려던 등념지를 쫓아가 붙잡아 려양을 빼앗았다. 예주자사 주서는 장군 진응과 동빈을 보내 이를 토벌했다.
386년 3월태산군 태수 장원은 군 전체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켜 적료에게 항복했다.
386년 8월적료가 초에서 약탈을 감행했기 때문에, 주서에 의해 격퇴당했다.
387년 1월적료는 아들 적소에게 진·영을 약탈하게 했지만, 주서가 파견한 진응에 의해 격퇴당했다.
387년 4월고평의 적창은 태수 서함원을 사로잡아, 군 전체를 적료에게 항복했다.
387년 5월후연의 모용수는 적료를 공격했고, 적료는 항복을 청했다. 모용수는 이를 승낙하여, 적료를 서주자사·하남공에 봉하고 귀환했다.
387년 10월적료는 후연에 반역하여 청하군·평원군을 약탈했다.

[1]

2. 2. 적빈의 난과 후연 건국 가담

383년 적빈이 전진의 황제 부견과의 전쟁을 벌인 이후, 모용수가 전진에 반란을 일으켜 후연을 건국했을 때 그를 지원했다.[1] 그러나 384년, 모용수가 예성을 포위했을 때, 적빈은 모용수가 도시를 빨리 함락시키지 못하자 다른 방안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용수에게 재상 칭호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대신 부비와 동맹을 맺으려 했지만 그의 계획이 발각되어, 그의 형제들과 함께 매복 공격을 받았다. 이때 적료는 일부 정령 병력을 이끌고 도망쳐 후연에 저항했다.[1]

384년 11월, 신도 서쪽에서 후연의 모용농이 적료를 노구에서 격파했다. 적료는 무극에 주둔했고, 모용농은 괄성에 주둔하며 그를 압박했다. 12월, 후연의 모용린과 모용농은 적료를 기습하여 크게 격파했고, 적료는 단기로 적진에게 달아났다.

385년 4월, 적진이 행당으로 옮겨가자, 적진의 사마 선우걸이 적진 및 여러 적씨 사람들을 죽이고 스스로 조왕이 되었다. 영인들은 함께 선우걸을 죽이고, 적진의 사촌 동생인 적인을 세워 주군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무리의 대부분은 후연에 투항했고, 적료는 려양으로 달아났다.

2. 3. 적빈 사망 후, 적료의 후연에 대한 저항

적빈이 사망한 후, 정령족 출신인 적료는 후연에 대한 저항을 이어갔다.[1]

  • 384년 11월, 신도 서쪽에서 후연의 모용농이 적료를 노구에서 격파했고, 적료는 무극으로 물러나 주둔했다. 12월, 후연의 모용린과 모용농은 적료를 기습하여 크게 격파했고, 적료는 단기로 적진에게 달아났다.[1]
  • 385년 4월, 적진이 암살당하고 적인이 뒤를 이었으나, 정령족 무리의 대부분은 후연에 투항했다. 적료는 려양으로 도망쳤다.[1]
  • 386년 1월, 적료는 려양군 태수 등념지의 신임을 얻었으나, 등념지가 병사들의 신임을 얻지 못하는 것을 이용하여 려양을 차지했다. 예주자사 주서는 군대를 보내 적료를 토벌하려 했으나, 태산군 태수 장원이 적료에게 항복하는 등 저항이 계속되었다. 8월, 적료는 초에서 약탈을 감행하다가 주서에게 격퇴당했다.[1]
  • 387년 1월, 적료는 아들 적소를 시켜 진·영을 약탈하게 했으나, 주서가 파견한 진응에게 격퇴당했다. 4월, 고평의 적창이 태수 서함원을 사로잡아 적료에게 항복했다. 5월, 후연의 모용수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적료를 공격하자, 적료는 항복을 청했다. 모용수는 적료를 서주자사·하남공에 봉했으나, 10월에 적료는 다시 반역하여 청하군·평원군을 약탈했다.[1]

2. 4. 동진으로의 망명과 세력 회복

384년, 사촌 형인 적빈이 후연에 의해 살해된 후, 후연의 장수 모용농이 적료가 있는 노구(현재의 하남성 랴오양)로 진격하였다. 적료는 패배하고 물러나 무극(현재의 하북성 우지 현)에 주둔하였고, 모용농은 고성(현재의 하북성 가오청)에 주둔하며 계속 적료를 압박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용린이 모용농과 연합해 적료를 공격하자 적료는 크게 패배하였고, 홀로 달아나 정령족의 수령인 적진에게 갔다.[1]

385년, 적진이 부하인 선우기(鮮于乞)에게 살해되자, 적료는 동진의 여양(현재의 허난성 쉰 현)으로 달아났다. 그는 여양태수 등념(滕恬)의 총애와 믿음을 받았는데, 등념이 사냥을 좋아하고 병사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는 것을 알고 그들에게 이익을 주어 환심을 얻었다.

386년, 적료는 등념이 남쪽으로 녹오성(현재의 허난성 화 현 동북쪽)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성문을 닫아걸었다. 등념은 들어오지 못하고 동쪽으로 견성(현재의 산동성 쥐안청)으로 도망갔으나 적료에게 사로잡혔다. 적료는 여양을 근거지로 삼고 동진에 반기를 들었다. 당시 동진의 예주자사 주서(朱序)는 진응(秦膺)과 동빈(童斌)을 보내 회사(淮泗)의 여러 군과 연합해 적료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산태수 장원(張願) 또한 반기를 들고 적료에게 귀부하였다. 이후 적료는 여러 차례 동진으로 침입하여 동요를 일으켰다.

387년, 후연의 위군태수 제섭(齊涉)이 후연에 반기를 들었고, 장원이 제섭과 연합해서 적료를 불러들였다. 후연이 병사를 내어 장원을 격퇴하고 제섭을 죽였다. 후연의 모용수는 이를 보고 적료가 세 나라를 배반하였으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고, 이에 여양으로 직접 군사를 이끌고 갔다. 이때 모용수가 모용해(慕容楷)를 전봉도독(前鋒都督)으로 삼았는데, 적료의 무리들은 모두 후연과 후조 일대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므로 모용해가 온 것을 알고 서로 이어서 귀부해 갔다. 적료는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후연은 적료를 서주목(徐州牧)에 임명하였고, 하남공(河南公)에 봉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적료가 다시 배반하였고, 청하(清河), 평원(平原) 2군을 약탈했다.

3. 적위의 건국

384년, 정령족 수령 적빈이 후연에 의해 살해되자, 적료는 후연의 장수 모용농에게 패하여 무극(無極, 현재 하북성 무극현)으로 물러났다. 이후 모용린의 공격을 받아 정령의 수령 적진에게 의탁하였다.[2]

385년, 적진이 부하에게 살해되자 적료는 동진의 여양(黎陽, 현재 하남성 준현)으로 달아나 태수 등념(滕恬)의 신임을 얻었다. 그는 등념이 사냥을 좋아하고 병사들에게 잘 대해주는 점을 이용하여, 병사들에게 이익을 주어 환심을 샀다.[2]

386년, 적료는 등념이 녹오성(鹿鳴城, 하남성 활현 동북)을 공격하러 간 틈을 타 성문을 닫고 여양을 점거했다. 등념은 견성(鄄城, 산동성 견성)으로 도망쳤으나 적료에게 사로잡혔다. 이로써 적료는 여양을 근거지로 삼고 동진에 반기를 들었다.[2] 동진은 군사를 보내 적료를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태산태수(泰山太守) 장원(張願)마저 적료에게 귀부하면서 적료는 여러 차례 동진을 침입하여 동요를 일으켰다.[2]

387년, 후연의 위군태수(魏郡太守) 제섭(齊涉)이 후연에 반기를 들고 장원과 연합하여 적료를 불러들였다. 후연이 이들을 격파하자, 모용수는 적료를 토벌하기 위해 여양으로 친정하였다. 적료의 무리들은 대부분 후연과 후조 출신이었기 때문에 모용수가 온 것을 알고 귀부해 갔다. 적료는 두려워 항복을 청했고, 후연은 적료를 서주목(徐州牧)에 임명하고 하남공(河南公)에 봉했다. 그러나 적료는 다시 배반하여 청하(清河), 평원(平原) 2군을 약탈했다.[2]

388년, 적료는 다시 후연에 사죄를 청하였으나, 모용수는 그가 여러 번 배반한 것을 이유로 관계를 단절하였다.

3. 1. 위천왕 즉위와 연호 제정

388년, 적료는 스스로 위천왕(魏天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건광(建光)으로 정했으며, 문무백관을 두었다. 이는 적위 정권의 수립을 의미한다.[2] 그는 활대(현재의 안양, 허난성)로 근거지를 옮겼다.

3. 2. 행정 조직 정비

388년, 적료는 스스로 위천왕(魏天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건광(建光)으로 정했으며, 문무백관(百官)을 두는 등 행정 조직을 정비하였다.[2] 이는 후연에 여러 차례 배반한 끝에 이루어진 것으로, 중국 전통을 받아들여 황위에 오르고, 군대의 지지를 받아 정령족 최초의 국가인 위(魏)를 건국한 것이다.[2] 또한 고대 시베리아 통치 구조를 중국식 구조로 대체하였다.[2]

4. 적위의 대외 관계 및 전쟁

384년, 적빈이 후연에게 살해되자, 적료는 후연의 공격을 피해 정령족 수령 적진에게 의탁했다. 385년 적진이 살해된 후, 적료는 동진의 여양(현재의 허난성 준현)으로 달아나 여양태수 등념의 신임을 얻었다.[1]

386년, 적료는 등념을 배신하고 여양을 장악하여 동진에 반기를 들었다. 동진의 주서가 토벌군을 보냈으나 실패했고, 태산태수 장원도 적료에게 귀부했다.

387년, 후연의 위군태수 제섭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원이 적료를 끌어들였다. 후연의 모용수가 이들을 격파하고 적료를 토벌하려 하자, 적료는 항복했다. 후연은 적료를 서주목, 하남공에 봉했으나, 적료는 다시 배반하여 청하군, 평원군 2군을 약탈했다.[2]

388년, 적료는 후연에 사죄했으나 거절당하고, 위천왕(魏天王)을 자칭하며 건광(建光)으로 개원하고 적위(翟魏)를 건국했다. 389년에는 동진형양을 약탈하고, 390년에는 서연과의 교전 틈을 타 낙양을 공격하려 했으나 동진의 유뢰지에게 패배했다.[2]

4. 1. 후연과의 관계

384년, 사촌 형인 적빈이 후연에 의해 살해된 후, 후연의 장수 모용농이 적료가 있는 노구(현재의 하남성 요양)로 진격하였다. 적료는 패배하고 물러나 무극(현재의 하북성 무극현)에 주둔하였고, 모용농은 고성(현재의 하북성 고성)에 주둔하며 계속 적료를 압박했다.[1] 얼마 지나지 않아 모용린이 모용농과 연합해 적료를 공격하자 적료는 대패하였고, 홀로 달아나 정령족 수령 적진에게로 갔다.

385년, 적진이 부하인 선우기(鮮于乞)에게 살해되자, 적료는 동진의 여양(현재의 허난성 준현)으로 달아났고, 여양태수(黎陽太守) 등념(滕恬)의 총애와 믿음을 받았다. 적료는 등념이 사냥을 좋아하고 사졸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는 것을 알자 그들에게 이익을 줌으로써 환심을 얻었다.

386년, 적료는 등념이 남쪽으로 녹오성(현재의 허난성 활현 동북)을 공격한 틈을 타서 성문을 닫아걸었다. 등념이 들어오지 못하고 동쪽으로 견성(현재의 산둥성 견성)으로 도망갔으나 적료에게 사로잡혔다. 적료는 여양을 근거지로 삼고 동진에 반기를 들었다. 당시 동진의 예주자사(豫州刺史) 주서(朱序)는 진응(秦膺)과 동빈(童斌)을 보내 회사(淮泗)의 여러 군과 연합해 적료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산태수(泰山太守) 장원(張願) 또한 반기를 들고 적료에게 귀부하였다. 이후 적료는 여러 차례 동진으로 침입하여 동요를 일으켰다.

387년, 후연의 위군태수(魏郡太守) 제섭(齊涉)이 후연에 반기를 들었고, 장원이 제섭과 연합해서 적료를 불러들였다. 후연이 병사를 내어 장원을 격퇴하고 제섭을 죽였다. 후연의 모용수는 이를 보고 적료가 세 나라를 배반하였으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고, 이에 여양으로 친정하였다. 이때 모용수가 모용해(慕容楷)를 전봉도독(前鋒都督)으로 삼았는데, 적료의 무리들은 모두 후연과 후조 일대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므로 모용해가 온 것을 알고 서로 이어서 귀부해 갔다. 적료는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후연은 적료를 서주목(徐州牧)에 임명하였고, 하남공(河南公)에 봉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적료가 다시 배반하였고, 청하(淸河)와 평원(平原) 2군을 약탈했다.[2]

388년, 적료가 다시 후연에 사죄를 청하였으나, 모용수는 그가 여러 번 배반한 것을 이유로 관계를 단절하였다. 적료는 마침내 위천왕(魏天王)이라 자칭하였고, 연호를 건광(建光)으로 개원하였으며, 문무백관을 두고 활대(현재의 허난성 활현)로 옮겨갔다. 역사에서는 이 정권을 적위(翟魏)라고 한다.

4. 2. 동진과의 관계

384년, 적료는 후연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고, 정령족 수령 적진에게 의탁했다. 385년, 적진이 살해된 후, 적료는 동진의 여양 (현재 허난성 준현)으로 달아나 여양태수 등념의 신임을 얻었다.[2]

386년, 적료는 등념이 사냥을 나간 틈을 타 성문을 닫고 여양을 장악, 동진에 반기를 들었다. 동진의 예주자사 주서는 군사를 보내 적료를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태산태수 장원 또한 적료에게 귀부했다.[2]

387년, 후연의 위군태수 제섭이 반란을 일으키고 장원과 연합하여 적료를 불러들였다. 후연이 이들을 격퇴하자, 모용수는 적료를 토벌하기 위해 여양으로 친정했다. 적료의 무리들은 후연 출신이 많았으므로, 모용수가 오자 귀순하는 자들이 많았다. 적료는 항복을 청했고, 후연은 적료를 서주목, 하남공에 봉했다. 그러나 적료는 다시 배반하여 청하군, 평원군 2군을 약탈했다.[2]

388년, 적료는 후연에 사죄를 청했으나, 모용수는 이를 거부하고 관계를 단절했다. 적료는 위천왕(魏天王)을 자칭하고, 활현 (현재 허난성 활현)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 정권을 적위라고 한다.)[2]

390년, 적료는 동진의 주서서연이 교전하는 틈을 타 낙양을 공격하려 했으나, 동진의 유뢰지가 견성과 활대에서 적쇠와 적료를 공격하여 패배시켰다. 장원은 다시 동진에 투항했다.[2]

4. 3. 서연과의 관계

384년, 적료는 후연에 의해 살해된 적빈의 사촌이었다. 적료는 모용농에게 패하고 정령의 수령 적진에게 의탁했다.[1] 385년, 적진이 살해되자 적료는 동진의 여양으로 달아나 태수 등념의 신임을 얻었다. 386년, 적료는 등념을 배신하고 여양을 근거지로 동진에 반기를 들었다.

387년, 장원이 후연에 반기를 들고 적료와 연합했다. 모용수는 적료를 토벌하려 했으나, 적료의 부하들이 후연 출신이라 귀순해오자 항복을 받아들여 서주목, 하남공에 봉했다. 그러나 적료는 다시 배반하여 청하, 평원 2군을 약탈했다.

388년, 적료는 다시 후연에 사죄했으나, 모용수는 관계를 단절했다. 적료는 '''위천왕'''을 자칭하고 건광으로 개원, 적위를 건국했다. 이후 동진서연 사이의 갈등을 틈타 낙양을 공격하려 했으나, 동진의 유뢰지에게 패했다.[2]

5. 적료의 죽음과 적위의 멸망

387년, 후연에 항복했던 적료는 다시 배반하여 후연의 청하(淸河, 현재의 싱타이, 허베이성)와 평원(平原, 현재의 더저우, 산둥성)을 공격했다.[2] 388년 봄, 적료는 부하를 보내 모용수에게 사죄했지만, 모용수는 여러 차례 배반한 전력이 있는 적료를 믿지 않고 사신을 참수하여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2]

같은 해, 적료는 스스로 '''위천왕'''(魏天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건광(建光)으로 정했으며, 문무백관을 두는 등 황제 체제를 갖추었다. 또한 근거지를 활대(滑臺, 현재의 안양, 허난성)로 옮겼다. 역사에서는 이 정권을 적위(翟魏)라고 부른다.[2]

389년, 적료는 동진의 형양(滎陽, 현재의 정저우, 허난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태수를 사로잡았다. 또한 후연의 낙랑왕 모용온을 암살하려 했으나 모용농에게 저지되어 실패했다.[2]

390년, 서연이 동진의 주서와 교전하는 틈을 타 낙양 진공을 시도했으나, 동진의 유뢰지가 적쇠와 적료를 공격하여 견성(鄄城, 현재의 푸양, 허난성)과 활대에서 격파하였다. 이로 인해 적료에게 귀부했던 장원이 다시 동진에 투항했다.[2]

391년, 적료는 사망하였고, 아들 적교(적조)가 뒤를 이었다.[2]

5. 1. 적조의 즉위와 통치

384년, 당형(堂兄)인 적빈이 후연에 의해 살해된 후, 적료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무극(無極)으로 물러났다. 이후 모용린의 공격을 받아 정령의 수령 적진에게 의탁했다.[2]

385년, 적진이 살해되자 적료는 동진의 여양(黎陽)으로 달아나 태수 등념의 신임을 얻었다. 386년, 등념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여양을 점거하고 동진에 반기를 들었다. 동진의 주서가 군사를 보내 토벌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태산태수 장원 또한 적료에게 귀부했다.[2]

387년, 후연의 위군태수 제섭이 반기를 들고 장원과 연합하여 적료를 불러들였다. 후연의 모용수가 여양으로 친정하자, 적료의 무리들이 후연에 귀부해 갔다. 적료는 후연에 항복하고 서주목 하남공에 봉해졌으나, 곧 다시 배반하여 청하, 평원 2군을 약탈했다.[2]

388년, 적료는 다시 후연에 사죄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스스로 위천왕(魏天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건광(建光)으로 정하며 문무백관을 두고 활대(滑臺)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 정권을 적위(翟魏)라 한다.[2]

389년, 형양을 약탈하고 태수를 사로잡았다. 또한 후연의 낙랑왕 모용온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2]

390년, 동진의 주서와 서연의 교전 틈을 타 낙양 진공을 도모했으나, 동진의 유뢰지가 견성과 활대에서 적쇠와 적료를 공격해 격파했다. 장원은 다시 동진에 투항했다.[2]

391년, 적료가 사망하고 아들 적교(적조)가 뒤를 이었다.[2]

5. 2. 적위의 멸망

384년, 당형(堂兄)인 적빈이 후연에 의해 살해된 후, 후연의 장수 모용농이 적료가 있는 노구(魯口, 현재의 하북성 요양)로 진격하였다. 적료는 패배하고 물러나 무극(無極, 현재의 하북성 무극현)에 주둔했고, 모용농은 고성(稾城, 하북성 고성)에 주둔한 뒤 계속 적료에게 압박을 가했다. 모용린이 모용농과 연합해 적료를 공격하자 적료는 대패하였고, 홀로 달아나 정령족 수령 적진에게로 갔다.[2]

385년, 적진이 부하에게 살해되자 적료는 동진의 여양(黎陽, 현재의 하남성 준현)으로 달아났고, 여양태수(黎陽太守) 등념(滕恬)의 총애를 받았다. 적료는 등념이 사냥을 좋아하고 사졸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는 것을 알자 그들에게 이익을 주어 환심을 얻었다.[2]

386년, 적료는 등념이 남쪽으로 녹오성(鹿鳴城, 하남성 활현 동북)을 공격한 틈을 타 성문을 닫아걸었다. 등념은 동쪽으로 견성(鄄城, 산동성 견성)으로 도망갔으나 적료에게 사로잡혔다. 적료는 여양을 근거지로 삼고 동진에 반기를 들었다. 당시 동진의 예주자사(豫州刺史) 주서(朱序)는 진응(秦膺)과 동빈(童斌)을 보내 회사(淮泗)의 여러 군과 연합해 적료를 토벌하게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태산태수(泰山太守) 장원(張願) 또한 반기를 들고 적료에게 귀부하였다. 이후 적료는 여러 차례 동진으로 침입하여 동요를 일으켰다.[2]

387년, 후연의 위군태수(魏郡太守) 제섭(齊涉)이 후연에 반기를 들었고, 장원이 제섭과 연합해서 적료를 불러들였다. 후연이 병사를 내어 장원을 격퇴하고 제섭을 죽였다. 후연의 모용수는 적료가 세 나라를 배반하였으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고, 이에 여양으로 친정하였다. 이때 모용수가 모용해(慕容楷)를 전봉도독(前鋒都督)으로 삼았는데, 적료의 무리들은 모두 후연과 후조 일대에서 온 사람들이었으므로 모용해가 온 것을 알고 서로 이어서 귀부해 갔다. 적료는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후연은 적료를 서주목(徐州牧)에 임명하였고, 하남공(河南公)에 봉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적료가 다시 배반하였고, 청하(清河), 평원(平原) 2군을 약탈했다.[2]

388년, 적료가 다시 후연에 사죄를 청하였으나, 모용수가 그가 여러 번 배반한 것을 이유로 관계를 단절하였다. 적료는 마침내 위천왕(魏天王)이라 자칭하였고, 연호를 건광(建光)으로 개원하였으며, 문무백관을 두었다. 활대(滑臺, 하남성 활현)로 옮겨갔다. 역사에서는 이 정권을 적위(翟魏)라고 한다. 적료는 동진의 낙양(洛陽)과 형양(滎陽)을 공격하였고, 390년에는 동진의 주서(朱序)와 서연이 교전하는 때를 틈타 낙양으로 진공할 것을 도모하였으며, 주서를 핍박하여 군사를 돌리게 만들었다. 동진이 적료를 치기 위해 병사를 내었고, 유뢰지가 8월에 견성(鄄城)과 활대에서 적쇠와 적료를 공격해 패배시켰다. 이에 장원은 다시 동진에 투항하였다.[2]

391년, 적료가 죽었고, 아들 적조가 뒤를 이었다.[2]

6. 역대 군주

적위의 역대 군주
이름재위 기간
적료388년 ~ 391년
적조391년 ~ 392년


참조

[1] 웹사이트 Chinese History - Later Yan Dynasty http://www.chinaknow[...] null
[2] 서적 『資治通鑑』「晋紀」巻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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