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기 브뤼닝 내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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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기 브뤼닝 내각은 1930년 3월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 보험 비용 문제로 붕괴된 제2차 뮐러 내각을 이어받아 하인리히 브뤼닝이 총리로 임명되면서 출범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브뤼닝에게 연립 관계와 관계없이 내각을 구성할 것을 명시했으며, 긴축 재정과 디플레이션 정책을 추진했다. 브뤼닝은 국회 거부로 대통령 긴급 명령을 통해 통치하려 했으나, 의회 해산을 막기 위해 사회민주당이 정부를 용인했다. 오스트리아-독일 관세 동맹 시도 실패와 외무 장관 사임 이후, 브뤼닝은 우경화 압박을 받았고, 1931년 10월 내각이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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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기 뮐러 내각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 헤르만 뮐러 총리가 바이마르 연합, 독일 인민당, 바이에른 인민당으로 구성된 대연정을 이끌었으나, 여러 정책적 난관과 정치적 위기, 재정 문제와 실업 보험 위기에 대한 이견으로 1930년 3월 붕괴되었다.
제1기 브뤼닝 내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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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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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속 기간 | 1930년 3월 30일 ~ 1931년 10월 10일 |
정부 수반 직함 | 총리 |
정부 수반 | 하인리히 브뤼닝 |
부총리 직함 | 부총리 |
부총리 | 헤르만 디트리히 |
국가 원수 직함 | 대통령 |
국가 원수 | 파울 폰 힌덴부르크 |
참여 정당 | 중앙당 독일 국가인민당 독일 민주당 독일 인민당 바이에른 인민당 독일 중산층 제국당 보수 인민당 |
의회 상황 | 소수 대통령 내각 |
이전 내각 | 제2차 뮐러 내각 |
다음 내각 | 제2차 브뤼닝 내각 |
선거 | 1928년 연방 선거 |
의회 임기 | 바이마르 공화국 제4대 국회 |
내각 구성 | |
총리 | 하인리히 브뤼닝 (중앙당) |
외무부 장관 | 율리우스 커티우스 (독일 인민당) |
내무부 장관 | 요제프 비르트 (중앙당) |
법무부 장관 | 요한 빅토르 브렘 (바이에른 인민당) |
재무부 장관 | 폴 몰 (독일 민주당) |
경제부 장관 | 헤르만 디트리히 (독일 민주당) |
노동부 장관 | 아담 슈테거발트 (중앙당) |
국방부 장관 | 빌헬름 그뢰너 (무소속) |
우편부 장관 | 게오르크 섀첼 (바이에른 인민당) |
교통부 장관 | 테오도어 폰 게라르트 (중앙당) |
영토부 장관 | 고트프리트 트레비라누스 (보수 인민당) |
2. 배경
대공황 발발 이후 실업 보험 비용 증가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에 대한 이견으로 제2차 뮐러 내각이 붕괴되었다. 이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1930년 3월 중앙당 정치인 하인리히 브뤼닝을 사회민주당의 헤르만 뮐러를 잇는 총리로 임명했다.
힌덴부르크는 하인리히 브뤼닝을 총리로 임명하면서 "그의 내각이 연립 관계와 관계없이 구성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시했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뤼닝은 뮐러의 제2차 내각을 단 세 가지 변경만으로 물려받았다. 힌덴부르크는 직접 두 명의 새로운 구성원의 임명을 주장했는데, 농업부 장관에는 국가인민당의 마르틴 쉴레가, 점령지부 장관에는 보수 인민당의 고트프리트 라인홀트 트레비라누스가 임명되었다.[2] 결과적으로 구성된 내각은 7개 정당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다. 즉, 4명의 중앙당, 2명의 독일 민주당, 2명의 독일 인민당, 1명의 독일 중산층 제국당, 1명의 바이에른 인민당, 1명의 국가인민당, 2명의 보수 인민당, 그리고 한 명의 무소속이었다.[2]
하인리히 브뤼닝 총리는 대공황과 의회주의의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집권했다.[4] 그는 긴축 재정과 디플레이션 정책을 통해 재정 구조조정을 추진했으며, 이는 사회적 혜택 감소, 세금 인상 및 수입 억제를 수반했다.
하인리히 브뤼닝(중앙당)이 1930년 3월 30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총리직을 수행했다.[3] 브뤼닝은 1930년 6월 20일부터 1930년 6월 26일까지 재무장관을 겸임하기도 했다.[3]
3. 내각 구성
4. 주요 정책 및 활동
1930년 4월 1일 정부 선언에서 브뤼닝은 어떠한 연합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국회가 국가의 가장 시급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의 비상 권한을 사용하여 대통령 긴급 명령으로 통치할 계획임을 밝혔다.[2] 이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지지를 받고 있음을 의미했다.
브뤼닝은 보수 세력과 사회민주당 (SPD)의 도움을 받아 긴축 조치를 국회를 통해 통과시키려 했으나, 1930년 국회는 그의 예산을 거부했다.[4] 7월 16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브뤼닝의 요청에 따라 "경제와 재정 보호"를 위해 예산안을 긴급 칙령으로 전환했다. SPD의 요청에 따라 국회는 긴급 칙령을 거부했는데, 이는 SPD, 독일 공산당 (KPD), 나치당 (NSDAP), 독일 국가인민당 (DNVP)의 256표로 결정되었다.[4][5] 브뤼닝은 힌덴부르크에게 국회 해산과 새로운 선거를 요청했다.[4]
의회 해산을 막기 위해 SPD는 브뤼닝 정부를 용인하기로 결정했다.[2] SPD는 브뤼닝과 집중적인 회담을 가졌으며, 다음 선거가 1930년 9월 선거보다 독일 민주주의에 더 큰 재앙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산주의자나 국가 사회주의자들은 항상 긴급 칙령을 폐지하려는 동의안을 제출했지만, 집권 정당과 SPD의 표결로 부결되었다.
1930년 5개였던 긴급 칙령의 수는 1931년 40개 이상으로 증가했다. 국회는 1930년 94차례 회의를 열었지만, 1931년에는 절반으로 줄었다.
1931년 9월 5일, 오스트리아-독일 관세 동맹 시도가 실패하고, 외무 장관 율리우스 쿠르티우스가 사임했다.[6] 힌덴부르크와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브뤼닝에게 더욱 우익으로 이동할 것을 압박했다.[7] 힌덴부르크는 브뤼닝 내각의 사임을 수락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도록 지시했다.[8]
5. 내각 명단
헤르만 디트리히(민주당)가 1930년 7월 27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부총리 직을 수행했다.[3] 그 이전에는 1930년 3월 30일부터 7월 26일까지는 부총리직이 공석으로 있었다.[3] 디트리히는 부총리직 외에도 1930년 3월 30일부터 6월 26일까지 경제장관을, 1930년 6월 26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재무장관을 겸임했다.[3]
제1기 브뤼닝 내각의 외무장관은 인민당 소속의 율리우스 쿠르티우스이다.[3]
요제프 비르트 (중앙당)가 1930년 3월 30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내무장관을 역임하였다.[3] 비르트는 1929년 4월 13일부터 점령지역장관을 겸임하기도 했다.
1930년 3월 30일, 요한 빅토르 브레트 (중산층 제국당)가 법무장관에 임명되었다.[3] 그는 1930년 12월 5일까지 재직했고,[3] 이후 쿠르트 요엘이 임시직을 맡아 1931년 10월 10일까지 수행했다.[3]
아담 슈테거발트 (중앙당)가 1930년 3월 30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노동장관을 역임하였다.[3]
빌헬름 그뢰너(무소속)가 국방장관을 맡았다.[3]
제1기 브뤼닝 내각의 경제장관은 1930년 3월 30일부터 6월 26일까지 헤르만 디트리히가 맡았으며,[3] 이후 에른스트 트렌델렌부르크/Ernst Trendelenburgde가 임시직을 수행했다.[3]
1929년 11월 11일까지는 율리우스 쿠르티우스가 경제장관직을 수행했다. 이후 파울 몰덴하워가 1929년 12월 23일까지, 로베르트 슈미트가 1929년 12월 23일부터 경제장관을 맡았다.
파울 몰덴하우어(인민당)가 1930년 6월 20일까지 재무장관을 역임했다.[3] 이후 하인리히 브뤼닝(중앙당)이 1930년 6월 20일부터 6월 26일까지 임시로 재무장관직을 수행했다.[3] 1930년 6월 26일부터는 헤르만 디트리히(민주당)가 재무장관직을 맡았다.[3]
독일 국가인민당 소속의 마르틴 쉴레가 1930년 3월 30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식품 및 농업장관을 역임하였다.[3]
테오도어 폰 게라르트 (중앙당)가 1930년 3월 30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교통장관을 역임했다.[3] 그는 이전에 법무장관과 점령지역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3]
게오르크 셰첼(바이에른 인민당)이 1930년 3월 30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우정장관을 역임했다.[3]
고트프리트 트레비라누스(보수 인민당)는 1930년 3월 30일부터 1930년 9월 30일까지 점령지부 장관을 역임했다.[3] 이후 1930년 10월 1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는 점령지부 장관직은 공석이었다.[3]
고트프리트 라이놀트 트레비라누스(보수 인민당)는 1930년 9월 30일부터 무임소 장관을 맡았다.[3]
5. 1. 총리
하인리히 브뤼닝(중앙당)이 1930년 3월 30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총리직을 수행했다.[3] 브뤼닝은 1930년 6월 20일부터 1930년 6월 26일까지 재무장관을 겸임하기도 했다.[3]
직책 | 초상 | 성명 | 정당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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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 bgcolor= | | 하인리히 브뤼닝 (1885~1970) | bgcolor= | 중앙당 | ||
재무장관 | bgcolor= | | 100px | 하인리히 브뤼닝 (1885~1970) | bgcolor= | 중앙당 | 1930년 6월 20일부터 1930년 6월 26일까지 |
5. 2. 부총리
헤르만 디트리히(민주당)가 1930년 7월 27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부총리 직을 수행했다.[3] 그 이전에는 1930년 3월 30일부터 7월 26일까지는 부총리직이 공석으로 있었다.[3] 디트리히는 부총리직 외에도 1930년 3월 30일부터 6월 26일까지 경제장관을, 1930년 6월 26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재무장관을 겸임했다.[3]5. 3. 외무장관
[3]제1기 브뤼닝 내각의 외무장관은 인민당 소속의 율리우스 쿠르티우스이다.[3]
5. 4. 내무장관
요제프 비르트 (중앙당)가 1930년 3월 30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내무장관을 역임하였다.[3] 비르트는 1929년 4월 13일부터 점령지역장관을 겸임하기도 했다.5. 5. 법무장관
1930년 3월 30일, 요한 빅토르 브레트 (중산층 제국당)가 법무장관에 임명되었다.[3] 그는 1930년 12월 5일까지 재직했고,[3] 이후 쿠르트 요엘이 임시직을 맡아 1931년 10월 10일까지 수행했다.[3]5. 6. 노동장관
아담 슈테거발트 (중앙당)가 1930년 3월 30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노동장관을 역임하였다.[3]5. 7. 국방장관
빌헬름 그뢰너(무소속)가 국방장관을 맡았다.[3]
5. 8. 경제장관
제1기 브뤼닝 내각의 경제장관은 1930년 3월 30일부터 6월 26일까지 헤르만 디트리히가 맡았으며,[3] 이후 가 임시직을 수행했다.[3]1929년 11월 11일까지는 율리우스 쿠르티우스가 경제장관직을 수행했다.[3] 이후 파울 몰덴하워가 1929년 12월 23일까지, 로베르트 슈미트가 1929년 12월 23일부터 경제장관을 맡았다.[3]
5. 9. 재무장관
파울 몰덴하우어(인민당)가 1930년 6월 20일까지 재무장관을 역임했다.[3] 이후 하인리히 브뤼닝(중앙당)이 1930년 6월 20일부터 6월 26일까지 임시로 재무장관직을 수행했다.[3] 1930년 6월 26일부터는 헤르만 디트리히(민주당)가 재무장관직을 맡았다.[3]직책 | 초상 | 성명 | 정당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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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장관 | bgcolor= | | ![]() | 파울 몰덴하워 | bgcolor= | 인민당 | 1930년 6월 20일부터 |
bgcolor= | | 100px | 하인리히 브뤼닝 (1885~1970) | bgcolor= | 중앙당 | 1930년 6월 20일부터 1930년 6월 26일까지 | |
bgcolor= | | 100px | 헤르만 디트리히 (1879~1954) | bgcolor= | 민주당 | 1930년 6월 26일부터 |
5. 10. 식량 및 농업장관
독일 국가인민당 소속의 마르틴 쉴레가 1930년 3월 30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식품 및 농업장관을 역임하였다.[3]
5. 11. 교통장관
테오도어 폰 게라르트 (중앙당)가 1930년 3월 30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교통장관을 역임했다.[3] 그는 이전에 법무장관과 점령지역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3]5. 12. 우정장관
게오르크 셰첼(바이에른 인민당)이 1930년 3월 30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 우정장관을 역임했다.[3]5. 13. 점령지부 장관
고트프리트 트레비라누스(보수 인민당)는 1930년 3월 30일부터 1930년 9월 30일까지 점령지부 장관을 역임했다.[3] 이후 1930년 10월 1일부터 1931년 10월 10일까지는 점령지부 장관직은 공석이었다.[3]5. 14. 무임소 장관
고트프리트 라이놀트 트레비라누스(보수 인민당)는 1930년 9월 30일부터 무임소 장관을 맡았다.[3]6. 내각의 종말
1931년 9월 5일, 오스트리아-독일 관세 동맹 수립 시도가 실패하고, 율리우스 쿠르티우스 외무 장관이 사임했다.[6]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그의 측근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 소장은 브뤼닝에게 우경화를 압박했다.[7] 힌덴부르크는 브뤼닝에게 일부 장관들과의 관계를 끊고, 당파에 얽매이지 않는 보수적인 장관을 임명하라고 요구했다. 브뤼닝은 이를 약속했고, 힌덴부르크는 내각의 사임을 수락한 뒤 새 정부 구성을 지시했다.[8]
참조
[1]
서적
Deutsche Geschichte des 19. und 20. Jahrhunderts
Fischer Taschenbuch
[2]
웹사이트
Heinrich Brüning
https://www.lwl.org/[...]
2023-06-25
[3]
웹사이트
Das Kabinett Brüning I 30. März 1930–10. Oktober 1931
https://www.bundesar[...]
2023-08-05
[4]
웹사이트
Heinrich Brüning
https://www.konrad-a[...]
2024-07-08
[5]
뉴스
Eine verhängnisvolle Neuwahl führte zum Durchbruch der Nazis
https://www.welt.de/[...]
2023-06-28
[6]
웹사이트
Julius Curtius
https://www.britanni[...]
2023-06-28
[7]
서적
Der lange Weg nach Westen. Deutsche Geschichte I
C.H. Beck
[8]
서적
Weimar 1918–1933. Die Geschichte der ersten deutschen Demokratie
Be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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