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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인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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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인민당(DVP)은 1918년 독일 혁명 이후 국민자유당에서 분리되어 창당된 정당이다.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이 초대 당 의장을 맡았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는 공화국 체제에 반대했으나 이후 참여하며 공화국 체제에 순응했다. '실업계의 수장의 정당'으로 불리며, 기업가들의 이익을 대변했다. 슈트레제만 사후 우경화되었고, 나치당의 집권 이후 1933년 해산되었다. 주요 인물로는 슈트레제만, 율리우스 쿠르티우스 등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자유민주당, 독일당, 기독교민주연합 창당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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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인민당 - [정당]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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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인민당 로고
약칭DVP
창립1918년 12월 15일
해산1933년 7월 4일
전신국민자유당
자유보수당 (온건파)
후신자유민주당 (법적 계승 정당 아님)
본부베를린
당원 수800,000명 (1920년)
색상검은색, 흰색, 빨간색 (제국 색상)
지도부
지도자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이념 및 정치적 위치
이념국민자유주의
시민 민족주의
보수 자유주의
입헌 군주제
경제 자유주의
정치적 위치1929년 이전: 중도우파
1929년 이후: 우익
관련 정보
기타대자본가 이익 대변, 반마르크스주의, 반바이마르 헌법, 복고주의

2. 역사

제1차 세계 대전국민자유당이 해산되자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을 중심으로 신당 결성이 추진되었다. 1918년 12월, 독일 인민당(DVP)이 창당되었고, 슈트레제만이 초대 당 의장을 맡았다.[12] 초기에는 공화국 체제에 반대했으나, 1922년 빌헬름 쿠노 내각에 참여하면서 공화국 체제에 순응하기 시작했다.

1920년 독일 연방 선거에서 DVP는 13.9%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약진했다.[14] 이후 DVP는 콘스탄틴 페렌바흐 내각과 빌헬름 쿠노 내각에 참여하여 법무부, 경제부, 재무부 장관을 배출했다.

1923년 프랑스와 벨기에의 루르 점령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쿠노 내각이 붕괴된 후, 슈트레제만은 DVP, 독일 사회 민주당(SPD), 중앙당, 독일 민주당(DDP)의 대연정을 구성하여 총리에 취임했다. 슈트레제만 내각은 렌텐마르크 도입으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는 등 바이마르 공화국 안정에 기여했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DVP는 8.7%에서 10.1% 사이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슈트레제만은 1929년 10월 사망할 때까지 모든 후속 내각에서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1924년 도스 계획과 1926년 독일의 국제 연맹 가입에 기여한 1925년 로카르노 조약 체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슈트레제만은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로카르노 조약에 대한 공로로 192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증가하는 가운데, DVP는 기업의 부담 증가를 요구하는 SPD와 대립했다. 슈트레제만은 당에 타협을 호소했지만 인민당은 이를 거부했다.

1929년 10월 슈트레제만의 사망 이후, DVP는 우경화되었고, 하인리히 브뤼닝의 제1차 브뤼닝 내각에 참여했지만, 당의 쇠퇴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1930년 독일 연방 의회 선거에서 DVP는 큰 타격을 입었고, 1930년 11월 에두아르트 딩겔데이가 당 의장에 취임하여 당의 정치적 재기를 위해 노력했다.

1932년 7월 독일 연방 의회 선거와 1932년 11월 독일 연방 의회 선거에서 DVP는 미미한 존재로 전락했다. 이후 자유주의적 성향의 많은 대표들과 회원들이 당을 떠났다.

1933년 봄, DVP 부의장 오토 후고는 당을 나치당(NSDAP)에 완전히 합병할 것을 요구했지만, 딩겔데이는 거부했다. 결국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위협으로 1933년 6월 27일 전국 집행위원회는 당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3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DVP 출신 정치인들은 독일당(DP), 자유민주당(FDP), 기독교민주연합(CDU) 창당에 참여했다.

2. 1. 창당 배경 (1918년)

독일 11월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붕괴된 후,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을 중심으로 국민자유당 잔여 세력이 신당 결성을 추진했다. 1918년 12월, 국민자유당원들과 진보인민당 일부 구성원들이 합류하여 독일 인민당이 창당되었고, 슈트레제만이 초대 당 의장을 맡았다.[12]

당초 진보 인민당(FVP)과 국민 자유당(NLP) 양당은 "민주주의자"(FVP와 같이 더 좌파 자유주의적)와 "자유주의자"(NLP와 같이 더 우파적) 사이의 역사적 분열을 극복하고 대규모 중산층 민주당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얄마르 샤흐트, 알프레트 베버, 테오도어 볼프 등이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했다.[12]

1918년 11월 15일, 양당은 협상을 시작하여 공화국을 미래 정부 형태로 약속하는 등 국민자유당의 상당한 양보를 요구하는 프로그램에 합의했다. 11월 16일에는 ''독일 민주당 결성을 위한 호소''를 발표하며 독일 중산층 비종파 세력 통합 가능성을 제시했다.[12]

그러나 슈트레제만이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영토 합병을 주장한 전력 때문에 알프레트 베버 등은 슈트레제만의 새 정당 참여에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12] 히야르마르 샤흐트와 알프레트 베버가 슈트레제만의 신당 참여에 반대했다.[29]

결국 11월 18일과 19일에 열린 합병 협상은 국민자유당 이사회의 반대로 실패했다. 이에 슈트레제만 등은 11월 20일 독일 인민당 결성을 위한 호소를 작성, 12월 15일 옛 국민자유당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의를 통해 독일 인민당을 창당했다.[12] 국민자유당 중심부와 우익 대부분이 DVP에 합류했고, 슈트레제만은 1929년 사망할 때까지 DVP 의장직을 유지했다.[12]

1918년 12월 15일 국민자유당 중앙위원회에서 필요한 다수의 지지를 얻어 국민자유당을 '독일 인민당'(Deutsche Volkspartei, 약칭 DVP)으로 개편하면서 자유주의 세력의 분열은 결정되었다. 자유주의 우파는 인민당, 자유주의 좌파는 독일 민주당(DDP)에 참여하게 되었다.[30]

2. 2.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1919년 ~ 1923년)

제1차 세계 대전국민자유당이 해산되자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을 중심으로 독일 인민당(DVP)이 결성되었다. 초기에는 바이마르 헌법을 거부하며 공화국 체제에 반대했지만, 1920년부터 연립 정부에 참여하며 변화를 보였다.[13]

1919년 4월 당 대회에서 슈트레제만은 "국내 평화로 가는 길은 공화국 정부 형태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당의 노선을 전환했다.[13] 1920년 카프 폭동 당시에는 초기에는 폭동을 용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으나, 폭동 실패 후에는 중재를 시도하는 등 유동적인 모습을 보였다.

1920년 독일 연방 선거에서 DVP는 13.9%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약진했다.[14] 독일 사회 민주당(SPD), 중앙당, 독일 민주당(DDP)으로 구성된 바이마르 연합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다. 이후 DVP는 콘스탄틴 페렌바흐 내각에 처음으로 참여하여 법무부, 경제부, 재무부 장관을 배출했다. 1922년에는 빌헬름 쿠노 내각에 참여하여 법무부 장관과 경제부 장관을 배출했다.

1923년 프랑스와 벨기에의 루르 점령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하이퍼인플레이션으로 쿠노 내각이 붕괴된 후, 슈트레제만은 DVP, SPD, 중앙당, DDP의 대연정을 구성하여 총리에 취임했다. 슈트레제만 내각은 루르 점령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포기하고 렌텐마르크 도입으로 인플레이션을 해결하는 등 바이마르 공화국 안정에 기여했다.

DVP 참여 정부
총리정당시작일종료일
콘스탄틴 페렌바흐중앙당–DDP–DVP1920년 6월 25일1921년 5월 4일
빌헬름 쿠노 (무소속)무소속–DVP–DDP–중앙당–BVP1922년 11월 22일1923년 8월 12일
구스타프 슈트레제만DVP–SPD–중앙당–DDP1923년 8월 13일1923년 11월 30일


  • 범례: Z=중앙당, BVP=바이에른 인민당

2. 3. 슈트레제만 시대 (1923년 ~ 1929년)

1920년 독일 연방 선거에서 독일 인민당(DVP)은 득표율을 거의 10% 포인트 향상시켜 13.9%를 기록했다. 바이마르 연합(독일 사회 민주당(SPD), 중앙당, 독일 민주당(DDP))은 1919년 선거에서 얻었던 압도적인 다수(76%에서 44%로 감소)를 잃었다. 선거 당시 DVP는 약 8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었다.[14]

1920년 6월, DVP는 처음으로 페렌바흐 내각에 참여했다. 공화국 창설을 주도한 SPD는 선거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고, 제국 의회에서 여전히 22%(38%에서 감소)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야당으로 물러났다. 이전 연립 파트너였던 중앙당과 좌파 자유주의 DDP는 우익 정당에 상당한 표를 잃었으며, DVP와 함께 소수 정부를 구성했다. SPD는 DVP가 공화국을 보호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1923년 8월, 구스타프 슈트레제만과 DVP는 SPD, 중앙당 및 DDP와 함께 첫 번째 대연정을 구성했다. 이는 독일 인민당이 이끈 유일한 제국 정부였다. 슈트레제만은 루르 점령 위기로 인해 해임되어 단 3개월 동안만 정부를 이끌 수 있었지만, 짧은 기간 동안 바이마르 공화국을 통합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가 수행되었다. 반대당 독일 국가인민당(DNVP)의 격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루르 점령에 대한 소극적 저항은 포기되었고, 1923년 11월 15일 렌텐마르크 도입으로 1914년부터 1923년까지의 인플레이션이 성공적으로 해결되었다.

DVP는 1924년부터 1928년까지 3번의 제국 의회 선거에서 8.7%에서 10.1% 사이를 얻었다. 슈트레제만이 짧은 기간 동안 재임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인민당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완전한 일원이 되었고, 주요 지지 세력이 되었다. 슈트레제만은 1929년 10월 사망할 때까지 모든 후속 내각에서 외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독일의 외교 정책 고립을 끝내고 베르사유 조약을 평화적인 수단으로 수정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참여는 단기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배상금 지급 문제를 해결한 1924년 도스 계획과 1926년 독일의 국제 연맹 가입에 기여한 1925년 로카르노 조약의 실현에 핵심적이었다. 슈트레제만은 프랑스의 상대인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로카르노 조약에 대한 공로로 192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DVP가 참여했던 초기 내각은 DVP 외에도 중앙당, DDP, 바이에른 인민당(BVP)이 포함된 중산층 내각이었으며, 때로는 DNVP도 대표되었지만, 독일 인민당은 또한 1928년부터 1930년까지 헤르만 뮐러의 제2차 뮐러 내각에도 참여했다. 외교 정책에서 DVP는 서방 강대국과의 이해를 지지했으며, 전형적인 공화국 외교 정책을 지지했다.[15]

슈트레제만은 국내적으로 사민당을 포함한 대연정 정권을 중시했지만, 사민당과의 연합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USPD)과의 합병으로 좌파색을 강화하고 있던 사민당이 연합의 파트너로서의 안정을 잃는다면, 그 대신 국가인민당을 입각시키는 것도 고려했다.

1929년 세계 대공황으로 실업자가 증가하는 가운데, 직업 안정소의 보조금과 실업 보험의 재원을 둘러싸고 경제계를 대변하는 인민당은 기업의 부담 증가를 요구하는 사민당과 대립을 심화시켰다. 슈트레제만은 내각을 붕괴시키지 않기 위해 당에 타협을 호소했지만 인민당은 이를 거부했다. 이 사이에 중병을 앓은 슈트레제만은 더 이상 인민당이 자신의 당이 아니게 되었음을 깨닫고 "인민당은 순전한 자본가의 앞잡이가 되어버렸다"고 한탄했다.

2. 4. 쇠퇴와 해산 (1929년 ~ 1933년)

1929년 10월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의 사망 이후, 에른스트 숄츠가 당 의장이 되었으나, 당내 우파를 억제하지 못하고 당은 우경화되었다. 독일 인민당(DVP)은 하인리히 브뤼닝의 제1차 브뤼닝 내각에 참여했지만, 이미 당의 쇠퇴는 시작되고 있었다. 예를 들어, 튀링겐에서는 나치당(NSDAP)이 참여한 최초의 주 정부인 바움-프리크 정부에 참여했다.

1930년 독일 연방 의회 선거에서 DVP는 4.5%의 득표율과 15석을 잃는 큰 타격을 입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던 온건파 지도자 숄츠는 사임하고, 1930년 11월 에두아르트 딩겔데이가 당 의장에 취임했다. 딩겔데이는 젊은 세대의 대표로서 당내 여러 세력 사이에서 중재하며 당의 정치적 재기를 위해 노력했다.

1932년 7월 독일 연방 의회 선거에서 DVP는 독일 국가인민당(DNVP)과 NSDAP에 비해 경쟁력이 없음을 드러내며 1.2%의 득표율과 7석을 얻는 데 그쳐 미미한 존재로 전락했다. 1932년 11월 독일 연방 의회 선거에서는 DNVP와 연합하여 4석을 얻었으나, 자유주의적 성향의 많은 대표들과 독일 전국 상업 종업원 협회(Deutschnationaler Handlungsgehilfen-Verband)의 다수 회원들이 당을 떠났다.

1933년 봄, DVP 부의장 오토 후고는 당을 NSDAP에 완전히 합병할 것을 요구했지만, 딩겔데이는 거부했다. 결국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위협으로 1933년 6월 27일 전국 집행위원회는 당을 해산하기로 결정했다.[35]

2. 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DVP 출신 정치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당(DP), 자유민주당(FDP), 기독교민주연합(CDU) 창당에 참여했다.

3. 이념 및 정책

독일 인민당(DVP)은 대체로 독일 산업가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인식되었다. DVP의 강령은 기독교적 가족 가치, 세속 교육, 낮은 관세, 복지 지출 및 농업 보조금에 대한 반대, 그리고 사회주의(공산주의 및 사회 민주주의)에 대한 적대감을 강조했다.[19]

DVP의 정치적 사고는 낭만주의관념론(교양 시민 참조)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적 인민 개념에 기반을 두었다. 독일 제국의 국민 자유당처럼, DVP는 스스로를 민주주의 정당보다는 자유주의 정당으로 간주했다. 이는 개인의 자유가 다수결의 강제보다 더 중요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 DVP는 교육과 재산을 통해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개인이, 단순한 대중보다 자신과 사회 전체에 무엇이 중요한지 더 잘 안다고 보았다. 동시에, 지적, 경제적 엘리트에게는 도덕적 기준에 따라 행동하고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것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DVP는 초기에는 헌법 군주제를 지지하며 바이마르 헌법을 거부했지만, 카프 쿠데타의 실패 이후 공화국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전환했다.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1923년 10월 25일 연설에서 하이퍼인플레이션과 루르 투쟁에 직면하여, "수레가 진흙에 빠졌을 때 그것을 꺼내기 위해 손을 빌려주는 사람"이 진정으로 '국민적'이라고 강조하며 이러한 변화를 명확히 했다.[19]

DVP의 당원과 대표는 주로 중산층과 상류층 출신의 학자 및 공무원들이었다. 이들은 제국 시대에 국민자유당에 결집했던 부유하고 교육받은 중산층을 대표했다. 1922년 이후에는 당 산하 학생 단체인 독일인민당 대학 그룹 전국 위원회(Reichsausschuss der Hochschulgruppen der Deutschen Volksparteide)가 있었지만, 우익 성향이 강했던 학생 단체 내에서 DVP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DVP의 지지 기반은 주로 대도시와 중소도시에 있었다. 1920년 국회 선거에서 인구 10,000명 이상인 도시에서는 평균 13.2%의 득표율을 기록한 반면, 인구 2,000명 미만의 소규모 지역에서는 7.2%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또한 DVP는 주로 개신교 정당이었다. 가톨릭교 신자 비율이 높은 지역에서는 DVP의 득표율이 전국 평균보다 훨씬 낮았고, 반대로 가톨릭 신자 비율이 낮을수록 DVP의 득표율은 더 높았다. 이러한 유권자 구조는 종교 분포와 도시 대 농촌의 분포 면에서 이전 국민자유당과 유사했다.

DVP는 포시셰 차이퉁과 베를리너 타게블라트와 같은 베를린의 주요 자유주의 신문들의 공개적인 지지를 받지 못했다. 대신 ''쾰니셰 차이퉁''(쾰른), ''마그데부르크 차이퉁'',[19] 베를린의 ''테글리히에 룬드샤우'', ''쾨니히스베르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지원을 받았다. SPD는 자체 신문을, 중앙당은 가톨릭 신문을, DNVP알프레트 후겐베르크의 언론 제국을 통해 여론을 형성했기에, DVP는 다른 주요 정당들에 비해 언론 환경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알베르트 푀글러


DVP는 거대 산업 자본의 정당으로 여겨졌지만, 재정적으로는 어려움을 겪었다. DDP는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 베를린과 함부르크의 기업에 의존했고, DNVP는 주로 라인-베스트팔렌 중공업의 지원을 받았다. 후고 슈티네스와 알베르트 푀글러는 DVP를 지지한 대표적인 기업 거물이었다. 그러나 1924년 슈티네스의 사망과 푀글러의 탈당은 DVP의 재정 기반을 크게 약화시켰다. 소액의 기부금은 칼리-소사이어티(Kali-Society)와 DVP 정치인 리에서(Rießer)가 이끄는 반독점 경제 정치 단체인 한자 동맹(Hansabund)의 기업에서 나왔다.

4. 주요 인물


  • 빌헬름 뷔르거 (1870–1937): 작센주 총리이자 국회의사당 방화 재판의 판사였다.
  • 율리우스 쿠르티우스 (1877–1948): 국가 외무부 장관 겸 경제부 장관을 역임했다.
  • 루돌프 하인체 (1865–1928): 국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 게르하르트 그라프 폰 카니츠 (1885–1949): 국가 경제부 장관을 역임했다.
  • 카타리나 폰 카르도르프-오하임 (1879–1962): 국가 의회 의원이었다.
  • 한스 폰 라우머 (1870–1965): 국가 경제부 장관을 역임했다.
  • 카를 자크 (1896–1945): 국가 사회주의에 저항한 레지스탕스 운동가였다.
  • 에밀 게오르크 폰 슈타우스 (1877–1942): 은행가였다.
  • 후고 슈티네스 (1870–1924): 기업가였다.
  • 알베르트 푀글러 (1877–1945): 기업가였다.
  • 아르투어 자르덴 (1885–1944): 국무차관이었다.


당 의장(Vorsitzender)은 다음과 같다.

}

|-

| 1930년 11월 30일 - 1933년 7월 4일 || Eduard Dingeldey|에두아르트 딩겔데이|de

|}

5. 역대 선거 결과

재임 기간이름
1918년 11월 23일 - 1929년 10월 5일구스타프 슈트레제만
1929년 11월 14일 - 1930년 11월 30일{{lang|de|Ernst Scholz (Politiker, 1874)|에른스트 숄츠|}
선거득표수득표율 (%)의석 수 (전체 의석 수)순위당 대표
1919년1,345,6384.419 (423)6위루돌프 하인츠
1920년3,919,44613.965 (459)4위구스타프 슈트레제만
1924년 5월2,694,3819.245 (472)5위
1924년 12월3,049,06410.151 (493)4위
1928년2,679,7038.745 (491)5위
1930년1,577,3654.530 (577)6위에른스트 슐츠
1932년 7월436,0021.27 (608)7위에두아르트 딩겔디
1932년 11월660,8891.911 (584)7위
1933년 3월432,3121.12 (647)9위


참조

[1] 웹사이트 Die Deutsche Volkspartei (DVP) https://www.dhm.de/l[...]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2011-06-08
[2] 간행물 Sozialer Liberalismus: Ein Plädoyer Logos
[3] 간행물 Handbuch der Preussischen Geschichte de Gruyter
[4] 간행물 Securing the Communist State: The Reconstruction of Coercive Institutions in the Soviet Zone of Germany and Romania, 1944–48 Lexington Books
[5] 서적 A History of Fascism, 1914–1945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 1996-01-01
[6] 간행물 The Rise and Fall of Weimar Democracy Propyläen Verlag
[7] 뉴스 "27.6.1933: DVP und DNVP lösen sich auf" http://www.kalenderb[...] Deutsche Welle
[8] 간행물 The Weimar Republic Routledge
[9] 서적 Germany, 1914-1933: Politics, Society and Culture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3
[10] 서적 The Oxford Handbook of the Weimar Republic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22
[11] 서적 The Coming of the Third Reich Penguin Press 2003
[12] 서적 Kleine Geschichte der deutschen Parteien Kohlhammer
[13] 논문 Braunschweiger Werkstücke, Vol. 30: Die Deutsche Volkspartei im Lande Braunschweig [The German People's Party in Braunschweig] Universität Hamburg 1964
[14] 웹사이트 DVP – Die Positionierung in der Parteienlandschaft https://www.dhm.de/l[...]
[15] 서적 Enzyklopädie deutscher Geschichte 53: Die Außenpolitik der Weimarer Republik Oldenbourg
[16] 웹사이트 Das Deutsche Reich Reichstagswahlen 1919–1933 https://www.gonschio[...] 2022-10-12
[17] 웹사이트 Verhandlungen des Deutschen Reichstags https://www.reichsta[...]
[18] 서적 Geschichte der Weimarer Republik Rentsch
[19] 서적 Handbuch des Wissens Verlag F. A. Brockhaus
[20] 간행물 Sozialer Liberalismus: Ein Plädoyer Logos
[21] 간행물 Handbuch der Preussischen Geschichte de Gruyter
[22] 간행물 Securing the Communist State: The Reconstruction of Coercive Institutions in the Soviet Zone of Germany and Romania, 1944-48 Lexington Books
[23] 서적 A History of Fascism, 1914–1945 https://books.googl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 1996-01-01
[24] 인용
[25] 인용
[26]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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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서적
[29] 서적
[30] 서적
[31] 서적
[32] 서적
[33]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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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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