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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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마르 헌법은 1919년 독일 혁명 이후 제정된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이다.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 파울교회 헌법이 채택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했고, 비스마르크 헌법은 군주제를 명시하는 등 한계가 있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1919년 1월 선거를 통해 구성된 국회에서 제정되었으며, 여성에게도 동등한 투표권을 부여했다. 이 헌법은 1933년 나치 정권의 등장 이후에도 형식적으로 효력을 유지했으나, 다양한 수단을 통해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1945년 연합군에 의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대통령에게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고 비례대표제의 문제점을 안고 있었지만, 전후 독일 연방 공화국 기본법 제정에 영향을 미쳤으며, 대한민국의 헌법, 일본국 헌법 등 여러 국가의 헌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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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 헌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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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원어 명칭 | Die Verfassung des Deutschen Reichs (독일어) |
다른 이름 | 바이마르 헌법 (Weimarer Verfassung, 독일어) |
적용 지역 | 바이마르 공화국(1919년~1933년) 나치 독일(1933년~1945년, 법적으로만) 연합군 점령하 독일(1945년~1949년, 법적으로만) |
효력 | 일부 조항 제외하고 폐지종교 단체의 권리에 관한 조항 (제136조, 제137조, 제138조, 제139조 및 제141조)은 독일 연방 공화국 기본법 제140조에 따라 계속 유효 |
제정일 | 1919년 8월 11일 |
공표일 | 1919년 8월 14일 |
발효일 | 1919년 8월 14일 |
폐지일 | : 1949년 5월 23일 (제136조, 제137조, 제138조, 제139조 및 제141조 제외) : 1949년 10월 7일 |
이전 헌법 | 비스마르크 헌법(독일 제국 헌법) |
다음 헌법 | : 독일 연방 공화국 기본법 : 독일 민주 공화국 헌법 |
정치 체제 | |
정치 체제 | 연방제 반대통령제 공화국(1919년~1930년, 법적으로 1945년까지) 연방제 권위주의 대통령 중심제(1930년~1933년) 단일 국가] [[나치 일당제 파시즘 전체주의 독재(1933년~1945년, 사실상) |
정부 형태 | 의회 제도 |
국가 원수 | 독일국 대통령(1919년~1934년) 총통(1934년~1945년) |
입법부 | 상원: 국가 참의원 (1934년까지) 하원: 국가 의회(바이마르 공화국) |
행정부 | 독일국 총리 |
사법부 | 국가 법원 |
연방제 | 예 (나치 독일의 행정 구역 1933년 이후 무시됨) |
기타 정보 | |
서명자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독일국 대통령) |
2. 바이마르 헌법 헌정사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와 1918년-1919년 독일 혁명으로 독일 제국이 붕괴된 후, 독일 사회민주당(SPD)을 중심으로 한 온건 좌파 세력은 의회 공화국 수립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새로운 헌법을 제정할 바이마르 국회 구성을 위한 1919년 독일 연방 선거가 1919년 1월 19일 실시되었다. 이 선거는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선거권이 부여된 선거였다.[1] 당시 수도 베를린의 정세 불안으로 국회는 바이마르에서 소집되었는데, 이는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인본주의 정신을 강조하려는 의도도 있었다.[3]
헌법 초안은 자유주의 정치인 휴고 프뢰스가 주도하여 작성했으며,[4] 과거 1848년 독일 혁명 시기의 프랑크푸르트 헌법 등을 기반으로 했다.[4][5] 국회에서의 논의와 수정을 거쳐 헌법안은 1919년 7월 31일 가결되었고,[7]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8월 11일 서명함으로써 공포되어 8월 14일부터 효력을 발휘했다.[8] 헌법 제정 의회가 열린 도시 바이마르의 이름을 따 '바이마르 헌법'이라는 통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독일 역사상 최초로 공화제를 채택한 헌법이다. 20세 이상 남녀 모두에게 동등한 보통선거권을 부여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 의회 중심의 정치 시스템과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되는 대통령제를 도입했다. 특히, 노동자의 단결권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권을 세계 최초로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헌법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바이마르 헌법 체제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나치당이 권력을 장악한 후, 1933년 사실상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전권위임법이 제정되면서 바이마르 헌법은 유명무실해졌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스 독일이 패망하고 1949년 서독의 기본법과 동독 헌법이 각각 제정되면서 바이마르 헌법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독일의 새로운 헌정사가 시작되었다.
2. 1. 기원
1848년 3월 혁명의 결과로, 프랑크푸르트의 파울교회에서 1849년 3월 27일 독일제헌국민회의가 열렸고, 오랜 토론 끝에 '독일 (제)국 헌법'이 채택되어 다음 날 공표되었다. 이 헌법은 회의 장소의 이름을 따 '파울교회헌법' 또는 '프랑크푸르트 제국 헌법'으로도 불린다. 파울교회헌법은 입헌군주제를 지향했으며, 이를 위해 황제 선출단은 프로이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를 독일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빌헬름 4세는 왕권신수설을 내세우며 이를 거절했고, 결국 파울교회헌법은 실현되지 못했다.이후 1871년 4월 16일, 이른바 비스마르크 헌법이 새로운 독일 제국의 헌법으로 제정되었다. 이 헌법은 1866년의 북독일 연방 헌법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비스마르크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조항이 없었고, 국가 기관의 권한 규정도 제한적이었으며, 국가 형태로 군주제를 명시하고 있었다. 이 헌법은 1919년 바이마르 헌법으로 대체될 때까지 효력을 유지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1918년-1919년 독일 혁명이 발발하면서 독일 제국 정부는 붕괴했다. 이후 몇 달간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한 극좌 세력과 의회 공화국을 지지하는 온건 좌파 세력 간의 갈등 끝에 온건 좌파가 승리했다. 사회민주당(SPD)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이끄는 임시 정부는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기 위해 1919년 1월 19일 선거를 통해 국회를 소집했다. 이 선거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이 부여되었다.[1] 당시 베를린의 정세 불안으로 인해 국회는 바이마르에서 열렸는데, 에베르트는 바이마르 고전주의(괴테, 실러 등)의 정신을 상기시켜 베르사유 조약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고자 했다.[3]
1918년 독일 혁명으로 군주제가 폐지되고 공화제가 선포되자, 같은 해 11월 14일 인민대표위원회는 독일 민주당 소속의 변호사이자 자유주의 정치인인 후고 프로이스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하고 헌법 초안 작성을 맡겼다.[4][49] 프로이스는 과거 실현되지 못했던 파울교회헌법을 주요 기반으로 삼고, 군주 또는 국민이 주권자인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균형을 강조한 로베르트 레드슬롭의 의회주의 이론[5]의 영향을 받아 5주 만에 초안(프로이스 안)을 완성했다. 이 초안은 바이마르 국민의회 선거 다음 날인 1919년 1월 20일에 공표되었다. 초기 초안에는 막스 베버의 의견도 일부 반영되었으나,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했다.[50] 기본권 조항은 논의 장기화를 우려하여 최소한으로 규정되었으나, 정부는 추후 기본권을 충실히 보장할 것을 약속했다.[50]
프로이스 안 발표 이후, 독일 각 주 대표들과의 토론 과정에서 중앙 정부의 권한과 각 주의 자치권 범위를 둘러싸고 의견 대립이 격렬했다.[49] 특히 프로이센과 같이 강력한 주들의 분할을 포함한 주 개편안은 기득권 침해를 우려한 주 정부들의 큰 반발을 샀고, 결국 헌법안은 중앙집권적 성격이 완화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51]
1919년 2월부터는 바이마르 국민극장[52]에서 열린 헌법 제정 국민의회 헌법 기초 위원회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다. 2월 하순 수정된 헌법 초안이 제출되었고, 이후 4개월간의 심의와 수정을 거치며 당시 가장 민주적이라고 평가받는 조문들이 다수 추가되었다.[53] 헌법 초안은 총 5차례의 개정을 거쳤다.
1919년 7월 31일, 국회 본회의에서 최종 표결이 이루어져 찬성 262표, 반대 75표, 기권 1표로 바이마르 헌법 초안이 가결되었다.[54] 하지만 83명의 의원이 표결에 불참하여, 절차상 문제는 없었으나 국민 전체의 합의라고 보기에는 다소 미흡한 측면이 있었다.[49] 찬성표는 주로 바이마르 연립 정부(사회민주당, 중앙당, 독일민주당) 소속 의원들이 던졌고, 반대표는 독립사회민주당 의원들과 우익 정당(독일국가인민당, 독일인민당) 의원들 다수가 던졌다.[55] 독일 공산당으로 상당수 합류하게 되는 독립사회민주당은 폭력혁명 노선을 추구하며 의회 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했기에 헌법에 반대했고,[55] 우익 의원들은 프로이스가 승전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헌법이 '비독일적'이라고 주장하며 반대했다.[55]
헌법을 지지한 의원들 사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55] 일부는 중앙집권적 성격이 약하다고 비판했고, 다른 일부는 오히려 각 주의 독립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55] 특히 주목할 점은, 이 시점부터 이미 헌법 제48조(대통령 긴급사태 조항)의 위험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일부 의원들은 대통령에게 부여된 과도한 권한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했는데,[55] 이는 훗날 현실로 드러났다.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1919년 8월 11일 바이마르 헌법에 서명했으며, 헌법은 8월 14일에 공포되어 효력을 발생했다. 이후 1920년 6월 6일 새로운 헌법에 따른 첫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8]
2. 2. 입헌 과정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독일 제국 정부는 1918년-1919년 독일 혁명 초기에 붕괴되었다. 이후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한 극좌 세력은 의회 공화국을 지향하는 온건 좌파 정당들에게 패배했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이끄는 승리 정당들은 독일의 임시 의회 역할을 하고 새로운 헌법 초안을 마련하기 위해 국회 구성을 위한 선거를 1919년 1월 19일에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주어졌으며, 의석은 비례대표제로 배분되었다.[1] 선거 결과, 독일 사민당이 제1당이 되었고, 중앙당, 독일 민주당과 연합하여 소위 '바이마르 연정'을 구성했다.1919년 2월 6일, 국민의회는 첫 회의를 바이마르에서 개최했다. 당시 수도 베를린에서는 스파르타쿠스단 봉기 등 소요 사태가 계속되어 의원들의 안전과 독립성을 보장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바이마르가 회의 장소로 선택된 이유는 바이마르 고전주의로 대표되는 인본주의적 이상주의의 상징성 때문이기도 했지만[3], 애초에 고려되었던 에르푸르트가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어렵다고 판단된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에베르트는 또한 베르사유 조약 협상 과정에서 승전국들에게 괴테와 실러로 대표되는 바이마르 고전주의의 정신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3]
헌법 초안 작성은 1918년 11월 14일, 인민대표위원회가 내무행정장관으로 임명한 자유주의 정치인이자 변호사인 후고 프로이스에게 위임되었다.[49][4] 프로이스는 명문화되었으나 시행되지 못했던 1848년 독일 혁명 시기의 1849년 프랑크푸르트 헌법을 상당 부분 기초로 삼아 5주 만에 초안(프로이스 안)을 작성했다.[4] 그는 또한 행정부와 입법부 간의 균형을 강조한 로베르트 레드슬롭의 의회주의 이론에서도 영향을 받았다.[5] 프로이스 안은 국민의회 선거 다음 날인 1919년 1월 20일에 공표되었다. 이 초기 초안 작성에는 막스 베버가 소위원회 위원으로 참여하여 그의 의견이 일부 반영되었으나[50], 전반적으로는 중앙집권적 성격이 강했다. 기본권 조항은 논의 장기화를 우려하여 최소한만 포함되었고, 정부는 추후 기본권을 충실히 할 것을 약속했다.[50] 이후 독일 각 주 대표들과의 토론 과정에서 연방 정부의 중앙집권과 각 주의 자치권 사이의 균형을 둘러싸고 격렬한 의견 대립이 발생했다.[49] 특히 프로이센 주의 분할 등 주의 재편 계획은 기득권을 잃을 것을 우려한 주 정부들의 강한 반발을 사, 결국 헌법안은 중앙집권적 성격이 완화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51]
1919년 2월부터는 논의의 장이 바이마르 국립극장[52]에서 열린 국민의회 헌법 기초 위원회로 옮겨졌다. 2월 하순 수정된 헌법 초안이 국민의회에 제출되었고, 이후 4개월간 위원회에서 각 조항에 대한 심의와 수정이 이루어졌다.[53] 당시 가장 민주적이라고 평가받은 조문 대부분이 이 위원회 논의 과정에서 추가되었다.[53] 왕정옹호파와 공화파 간의 논쟁도 있었으며, 1871년의 독일 제국 헌법의 많은 요소들이 폐지되거나 유명무실화되었다.
헌법 초안은 총 5차례의 개정을 거쳐 1919년 7월 31일 국민의회 본회의 최종 표결에 부쳐졌다. 표결 결과, 찬성 262표, 반대 75표, 기권 1표로 가결되었다.[7][54] 그러나 83명의 의원이 표결에 불참하여, 절차상 문제는 없었으나 국민적 합의가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는 평가도 있다.[49] 찬성표는 주로 바이마르 연정을 구성한 독일 사민당, 중앙당, 독일 민주당 의원들에게서 나왔다. 반대표는 독일 독립사회민주당(USPD)과 다수의 우익 정당 의원들이 던졌다.[55] 독립사회민주당은 폭력 혁명 노선을 지지하며 민주주의 자체에 반대했기 때문에 헌법에 반대했다 (이들 중 다수는 후에 독일 공산당에 합류했다).[55] 우익 의원들은 프로이스가 승전국의 앞잡이이며 그의 헌법은 비독일적이므로 독일인을 구속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55] 헌법을 지지한 의원들 사이에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일부는 중앙집권적 성격이 너무 약하다고 비판했고, 다른 일부는 각 주의 독립성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55] 특히 주목할 점은, 이 단계에서 이미 헌법 제48조(소위 긴급사태 조항)의 강력한 대통령 권한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는 것이다.[55] 이 우려는 훗날 현실이 되었다.
1919년 8월 11일, 초대 국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슈바르츠부르크에서 헌법에 서명하여 제정되었고,[8] 8월 14일에 공포되어 효력을 발휘했다. 8월 11일은 독일 민주주의의 시작을 기념하는 날로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새로운 헌법에 따른 첫 국회의원 선거는 1920년 6월 6일에 실시되었다.[8]
2. 3. 나치 시대의 헌법 효력
아돌프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바이마르 헌법은 형식적으로 효력을 유지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양한 수단에 의해 그 효력을 점차 잃어갔다.1933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발생한 국회의사당 화재를 빌미로, 국회의사당 방화령(정식 명칭: 국민과 국가를 보호하기 위한 대통령령)이 공포되었다. 이 명령은 제48조(긴급조치권)를 발동하여 시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여러 헌법 조항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영향을 받은 주요 조항은 114조(인신 보호), 115조(주거 불가침), 117조(통신 비밀 보장), 118조(표현의 자유 및 검열 금지), 123조(집회의 자유), 124조(결사의 자유), 153조(재산권 보장 및 수용 제한) 등이었다.[10]
이후 1933년 3월 23일, 나치당은 권한 강화 법(정식 명칭: 국민과 국가의 위난 제거를 위한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기존의 의회 입법 절차 외에 행정부(총리와 내각)가 직접 법률을 제정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는 사실상 입법권을 행정부에 넘기는 전권위임법이었다. 이 법은 의회, 국가평의회, 대통령의 권한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명시했지만, 헌법 제68조부터 제77조까지 규정된 일반적인 입법 절차는 행정부가 제정한 법률에 적용되지 않도록 했다.[31]
권한 강화 법은 표면적으로는 헌법 개정에 필요한 요건(의원 2/3 출석 및 출석 의원 2/3 찬성)을 충족하여 441 대 94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는 독일 공산당 소속 의원 81명이 체포되거나 도피하여 강제로 투표에 참여하지 못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 법은 바이마르 헌법을 명시적으로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헌법의 다른 모든 조항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32]
나치 정권은 권한 강화 법의 조항마저 위반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권한 강화 법 제2조는 행정부가 제정한 법률이 의회와 국가평의회의 제도 및 대통령의 권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헌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1934년 2월 14일 제정된 "제국평의회 폐지 법률"은 법률로 명시적인 보호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국가평의회를 완전히 폐지했다.[33] 또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1934년 8월 2일 사망하자, 히틀러는 사망 전날 통과시킨 법률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총리직에 통합하여 스스로 국가 원수(Führer und Reichskanzler|퓌러 운트 라이히스칸츨러de)가 되었다.[34]
이처럼 바이마르 헌법은 나치 시대 동안 형식적으로는 존재했지만, 핵심적인 기본권 보장 조항과 권력 분립 원칙이 무력화되어 사실상 그 기능을 상실했다. 최종적으로 바이마르 헌법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망한 후, 1945년 6월 5일 연합군이 독일 통치권을 인수하면서 공식적으로 폐기되었다. 이후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 헌법(동독)이 제정되면서 독일의 새로운 헌법 체제가 시작되었다.
3. 헌법의 내용
이 헌법은 독일 헌법의 전통에 따라 국가와 연방주의 권한, 국가 조직, 그리고 국가와 시민 간의 관계라는 세 가지 기능적 부분으로 구성된다. 특히 이전의 비스마르크 헌법과 달리 시민의 기본권에 관한 많은 조항을 제2부에 포함시킨 것이 특징이다.
이 헌법에는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한 정치 상황과 나치 독일의 등장 과정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 조항들도 포함되어 있다.
3. 1. 헌법의 구조
바이마르 헌법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며, 각 부분은 다시 여러 절로 구성되어 총 181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독일 헌법의 전통적인 기능적 분류 방식(국가 권한, 국가 조직, 국가와 시민 관계)을 따르면서도, 이전의 비스마르크 헌법과 달리 제2부에서 시민의 기본권을 폭넓게 보장한 점이 특징이다.[20]
헌법의 서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모든 면에서 통합된 독일 국민은 자유와 정의 속에서 국가를 회복하고 확립하며, 국내외 평화에 봉사하고 사회적 진보를 증진하려는 결의를 다지며, 이 헌법을 제정하였다.
혹은 다른 번역에 따르면,
독일 국민은 여러 부족의 일치 아래, 라이히를 자유와 정의로 새롭게 하고 굳건히 하며, 국내외 평화에 헌신하고 사회 발전을 증진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이 헌법을 스스로 제정하였다.
'''제1편: 독일 라이히의 조직과 과제'''
제1편은 총 7개의 장(제1조~제108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국가의 조직과 권한, 운영 방식 등을 규정한다.
- '''제1장 라이히와 주'''(제1조~제19조): 독일이 공화국이며 국가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옴을 명시한다(제1조).
- '''제2장 라이히 국회'''(제20조~제40조): 라이히 국회 의원은 국민의 대표로서(제21조), 보통, 평등, 직접, 비밀선거 원칙에 따라 비례대표제로 선출됨을 규정한다(제22조).
- '''제3장 라이히 대통령과 라이히 정부'''(제41조~제59조): 라이히 대통령과 라이히 정부의 구성과 권한을 다룬다. 특히 제48조는 공공 안전과 질서 유지를 위해 대통령이 비상조치를 취하고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불안정성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되었다.[56]
- '''제4장 라이히 참의원'''(제60조~제67조): 각 주의 대표로 구성되는 라이히 참의원에 대해 규정한다.
- '''제5장 라이히 입법'''(제68조~제77조): 라이히 입법 절차를 다룬다.
- '''제6장 라이히 행정'''(제78조~제101조): 라이히 행정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다.
- '''제7장 라이히 사법'''(제102조~제108조): 라이히 사법 체계를 설명한다.
'''제2편: 독일인의 기본 권리와 의무'''
제2편은 총 5개의 장(제109조~제181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독일 국민의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를 상세히 규정한다. 이는 1848년 프랑크푸르트 헌법의 정신을 이어받아 언론, 집회의 자유 등 개인의 자유권을 보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20] 이 조항들은 기존의 독일 민법전(Bürgerliches Gesetzbuch)과 함께 독일 시민의 법적 지위를 규정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19]
3. 2. 1부: 국가의 권한
독일 국민은 여러 부족의 일치 아래, 라이히를 자유와 정의로 새롭게 하고 굳건히 하며, 국내외 평화에 헌신하고 사회 발전을 증진하려는 의지로 가득 차 이 헌법을 스스로 제정하였다.헌법의 첫 번째 부분은 연방 정부의 여러 부분의 조직을 명시했으며, 총 7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 '''제1장 라이히와 주''' (제1조~제19조)
- 제1조는 독일 라이히를 공화국으로 규정하고, 국가 권력이 국민에게서 나온다는 국민 주권 원칙을 명시한다.
- 제국과 각 주(란트)의 관계, 제국의 배타적 관할권(외교, 국방, 통화, 관세, 우편 등)을 규정한다.[9] 제국법은 주법에 우선하며, 분쟁은 최고 사법 재판소에서 다룬다.
- 각 주는 공화국 헌법을 가져야 하며, 주 의회(란트타크)는 비례대표제 원칙에 따라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로 선출된다.
- '''제2장 라이히 국회''' (제20조~제40조)
- 국회의사당(라이히스타크)의 구성과 선거 방식을 규정한다. 의원은 20세 이상 남녀의 보통, 평등, 직접, 비밀 선거를 통해 비례대표제 원칙에 따라 선출되며(제22조), 오직 양심에 따라 전 국민을 대표한다(제21조).
- 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대통령에 의해 해산될 수 있다. 의원은 면책 특권을 가진다.
- '''제3장 라이히 대통령과 라이히 정부''' (제41조~제59조)
- 국가 대통령의 선출(국민 직접 선거), 임기(7년, 1회 중임 가능), 권한 등을 규정한다.
- 대통령은 최고 군 통수권을 가지며, 총리와 장관을 임명 및 해임한다.
- 제48조는 대통령에게 공공 안전과 질서 유지를 위해 무력 사용 및 기본권 제한 등 비상대권을 부여했다.[56][10]
- 총리는 정부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국회에 책임을 지며, 국회는 불신임 투표를 통해 총리와 장관을 사퇴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는 건설적 불신임 투표가 아니어서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하기도 했다.[11][12]
- '''제4장 라이히 참의원''' (제60조~제67조)
- 제국 평의회(라이히스라트)의 설립과 구성을 규정한다. 각 주가 국가 입법에 참여하는 기구로, 의원 수는 인구 비례에 따라 정해지지만 특정 주의 과도한 영향력을 제한하는 조항(프로이센 견제)이 포함되었다.[13][14][15][16]
- 제61조는 독일 오스트리아(German Austria)가 독일에 통합될 경우 제국 평의회에 참여할 권리를 명시했으나,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실현되지 못했다.[17]
- '''제5장 라이히 입법''' (제68조~제77조)
- 법률안 제출(국회의원 또는 정부), 국회 의결, 제국 평의회의 이의 제기권, 대통령의 국민투표 회부권 등 법률 제정 절차를 규정한다.
- 헌법 개정은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 출석과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하다.
- '''제6장 라이히 행정''' (제78조~제101조)
- 제국 정부가 외교, 국방, 조세, 철도 등 독점적 관할권을 가지는 분야에서 헌법과 법률을 집행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 '''제7장 라이히 사법''' (제102조~제108조)
- 사법부의 독립 원칙(제102조)과 특별 법원 금지(제105조) 등을 규정한다. 행정 법원과 최고 사법 재판소 설립 근거를 마련했다(제108조).
3. 2. 1. 국가 조직
바이마르 헌법에 따른 독일의 국가 기관은 국가 대통령, 국가 정부, 국가 하원(라이히스타크), 국가 상원(라이히스라트), 국가 법원으로 구성되었다. 헌법 제1조는 독일이 공화국이며 국가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온다고 명시하여 국민 주권 원칙을 분명히 했다. 국가 하원과 국가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했으며, 국민 발의와 국민 투표를 통해 입법에 참여할 수 있어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가 혼합된 형태의 국가 권력 구조를 가졌다.헌법 제1장은 독일 제국(라이히)과 각 주(란트)의 관계를 규정했다. 제국은 독일 각 주로 구성되며,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국제법 원칙은 독일에 구속력을 가졌다. 제국 정부는 외교, 식민지, 시민권, 국방, 통화, 관세, 우편·통신 등 특정 분야에 대한 배타적 관할권을 가졌다(제4조). 그 외의 사항에 대해서는 각 주가 자체적으로 법률을 제정할 수 있었으나, 제국법이 주법에 우선했다(제13조). 주와 제국 정부 간의 분쟁은 최고 사법 재판소에서 판결했다.
각 주는 공화국 헌법을 가져야 했으며(제17조), 주 의회(란트타크)는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 원칙과 비례대표제에 따라 남녀 모두에게 선거권이 주어져 선출되었다. 주 정부는 해당 주 의회의 신임을 받아야 했다.
'''국가 하원 (Reichstag)'''
국회의사당(Reichstag)은 헌법 제2장(제20조~제40조)에 규정된 국가 하원으로, 수도 베를린에 위치했다. 20세 이상의 모든 독일 국민이 비밀 직접 투표를 통해 비례대표제 원칙에 따라 선출한 의원들로 구성되었다(제22조). 의원들은 특정 지역구나 명령에 구속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양심에 따라 전 국민을 대표했다(제21조). 임기는 4년이었으며, 국가 대통령에 의해 해산될 수 있었고, 해산 시 60일 이내에 새로운 선거가 치러져야 했다(제25조). 국회의원과 주 의회 의원은 소속 의회의 승인 없이 체포되거나 형사 수사를 받지 않는 면책 특권을 가졌다(제37조).

'''국가 대통령과 국가 정부'''
헌법 제3장(제41조~제59조)은 국가 대통령과 국가 정부(내각)에 대해 규정했다.
- 국가 대통령: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되었으며 임기는 7년이고 1회 중임이 가능했다(제41조, 제43조). 국가 하원의 3분의 2 찬성에 따른 국민투표로 파면될 수 있었다(제43조). 최고 군 통수권을 가졌으며(제47조), 총리와 장관을 임명하고 해임했다(제53조). 주가 헌법이나 제국법에 따른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무력을 사용하여 강제할 수 있는 권한(라이히스엑제쿠티온, Reichsexekution)을 가졌다(제48조). 특히 제48조는 공공 안전과 질서에 심각한 위협이 발생했을 때, 대통령에게 무력 사용 및 기본권 제한 등 비상대권을 부여했다. 대통령의 모든 법령은 총리 또는 해당 주무 장관의 서명이 필요했으므로(제50조), 이 조항은 남용 방지를 의도했으나 실제로는 1933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과 아돌프 히틀러 총리가 이 조항을 근거로 라이히스타크 방화령을 발표하여 시민의 자유를 박탈하고 독재 체제를 구축하는 데 악용되는 결과를 낳았다.[10]
- 국가 정부 (내각): 총리와 각 부 장관으로 구성되었다. 총리는 정부 정책의 방향을 결정하고 국가 하원에 책임을 졌다(제56조). 국가 하원은 불신임 투표를 통해 총리나 장관을 사퇴시킬 수 있었으나(제54조), 후임자를 선출해야만 불신임이 가능한 건설적 불신임 투표 제도가 아니었기 때문에 잦은 내각 교체와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했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이 불안정한 연립 내각으로 운영되면서 정국 혼란을 심화시키는 요인이 되었고, 결국 공화국 붕괴의 한 원인이 되었다.[11][12] 정부는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했으며, 가부 동수일 경우 대통령의 결정이 우선했다(제58조).
'''국가 상원 (Reichsrat)'''
헌법 제4장(제60조~제67조)은 국가 상원인 제국 평의회(Reichsrat)를 설립했다. 이는 각 주가 국가 차원의 입법 과정에 참여하는 기구였다. 의원 수는 각 주의 인구에 비례했으나, 특정 주가 전체 의석의 5분의 2를 넘지 못하도록 제한하여(제61조) 당시 가장 큰 주였던 프로이센의 영향력을 견제했다.[13][14][15] 프로이센을 제외한 주의 의원은 해당 주 정부의 구성원이었으며, 소속 주 정부의 지시에 따라 활동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16] 제국 평의회는 정부가 제안한 법률안이나 행정 규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다(제69조).
'''국가 법원'''
헌법 제7장(제102조~제108조)은 사법 제도를 규정했다. 핵심 내용은 사법부의 독립으로, 판사는 오직 법에만 구속된다고 명시했다(제102조). 특별 법원은 금지되었으며(제105조), 군사 법원은 전시 및 군함 내에서만 허용되었다. 또한 시민과 국가 행정 기관 간의 분쟁을 다루는 행정 법원과, 헌법 및 주와 제국 간 분쟁을 다루는 최고 사법 재판소( Staatsgerichtshof für das Deutsche Reichde ) 설립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제108조). 최고 사법 재판소 설립법은 1921년 7월에 제정되었다.[18]
3. 3. 2부: 독일인의 기본 권리와 의무
바이마르 헌법의 제2부는 독일인의 기본적 권리와 의무를 상세히 규정하였다. 이는 기존의 독일 민법전(Bürgerliches Gesetzbuch|뷔르겔리헤스 게제츠부흐de) 중 개인의 권리와 가정 관계에 관한 조항들과 함께 효력을 유지했다.[19] 헌법은 언론의 자유나 집회의 자유와 같은 개인의 기본권을 모든 시민에게 보장했는데, 이는 1848년 프랑크푸르트 헌법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었다.[20]제2부는 총 5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독일인의 삶의 다양한 영역을 다루었다.
- 제1장 개인 (제109조~제118조): 법 앞의 평등, 성별에 따른 차별 금지 원칙, 신분제 폐지, 개인의 자유, 주거 불가침, 통신의 비밀, 표현의 자유 등 기본적인 인권을 보장했다.
- 제2장 공동체 생활 (제119조~제134조): 결혼과 가족 보호, 평화적 집회 및 결사의 자유, 자유롭고 비밀스러운 선거권, 능력에 따른 공직 임명 자격,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및 봉사 의무, 병역 의무 등을 규정했다.
- 제3장 종교 및 종교단체 (제135조~제141조): 신앙과 양심의 자유, 종교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고 국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종교단체의 법적 지위와 교회세 징수권 등도 명시했다. 이 중 일부 조항은 현행 독일 연방 공화국 기본법에도 포함되어 있다.[21]
- 제4장 교육 및 학교 (제142조~제150조): 국가 주도의 공교육 시스템, 의무교육 시행, 무상 고등 교육 기회 제공, 사립학교 규제 등을 다루었다.
- 제5장 경제 생활 (제151조~제165조): 경제 활동이 정의의 원칙에 부합해야 함을 명시하고, 재산권 보장 및 공공 필요에 의한 수용 조건, 노동권, 노동조합 결성 및 활동의 자유, 노동자의 경영 참여권, 사회 보험 제도 등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사회권 조항들을 포함했다.
특히 바이마르 헌법의 기본권 규정은 단순한 자유권 보장을 넘어, 교육과 노동 등 사회권 보장을 지향했다는 점에서 큰 특징을 지닌다. 이는 현대 복지국가 헌법의 중요한 모델이 되었으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헌법 중 하나로 평가받는 이유가 되었다.
3. 3. 1. 개인
바이마르 헌법 제2편 제1장(제109조~제118조)은 독일인의 개인적 권리를 상세히 규정한다.제109조는 모든 독일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을 천명한다. 남성과 여성은 기본적으로 동등한 시민적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출생이나 신분에 따른 공법상의 특권 또는 불이익은 폐지되었다. 특히 귀족 계급은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고, 귀족 칭호는 성명의 일부로만 사용될 수 있으며 새롭게 수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칭호는 직책이나 직업을 나타내는 경우에 한해 부여될 수 있었고, 국가가 훈장이나 훈표를 수여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또한, 독일 국민은 외국 정부로부터 칭호나 훈장을 받을 수 없었다.
모든 독일인은 어느 주에 거주하든 독일 라이히의 국민으로서 동등한 지위를 가졌다. 이들은 독일 내에서 자유롭게 거주지를 옮길 수 있었고(거주 이전의 자유), 재산을 소유하고 직업 활동을 할 권리가 있었다. 또한 독일 밖으로 이주할 권리와 외국 당국으로부터 국가의 보호를 받을 권리도 보장되었다.
독일 내 외국어 사용 공동체의 "고유한 발전"(volkstümliche Entwicklungde) 역시 보호받았다. 이들은 교육, 행정, 사법 절차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권리가 있었다.
개인의 기본권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은 다음과 같다.
- 개인의 자유 (제114조): 개인의 자유는 침해될 수 없으며, 오직 법률에 근거해서만 제한될 수 있다. 체포되거나 구금된 사람은 다음 날까지 구금 이유와 근거를 통지받고, 구금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기회를 보장받았다. 이는 영미법의 ''habeas corpus'' 원칙과 유사하다. 다만, 이 권리는 제48조에 따른 대통령 비상대권 발동 시 정지될 수 있었다.[56]
- 주거의 불가침 (제115조): 모든 독일인의 가정은 불가침의 영역으로 보호받았다. 단, 이 권리 역시 제48조 발동 시 제한될 수 있었다.[56]
- 통신의 비밀 (제117조): 우편, 전신, 전화 등 통신의 비밀은 보장되며 침해될 수 없었다. 단, 이 권리 역시 제48조 발동 시 제한될 수 있었다.[56]
- 표현의 자유 (제118조): 독일인은 말, 글, 인쇄물, 이미지 등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를 가졌다. 이러한 권리 행사를 이유로 고용 관계에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되었다. 검열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었으나, 영화나 음란물에 대해서는 법률로 예외를 둘 수 있었다. 단, 이 권리 역시 제48조 발동 시 제한될 수 있었다.[56]
3. 3. 2. 공동체 생활
바이마르 헌법 제2편 제2장(제119조~제134조)은 독일인의 공동체 생활에 관한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다.- 결혼과 가족: 결혼은 남녀의 평등을 기초로 하며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다. 혼외에서 태어난 자녀에게도 동등한 권리가 부여되었다.
- 집회와 결사:
- 모든 독일인은 사전 허가 없이 평화롭고 비무장 상태로 집회를 열 권리를 가졌다(제123조). 다만, 이 권리는 대통령 비상대권(제48조) 발동 시 제한될 수 있었다.[56]
- 독일인은 단체나 결사를 조직할 권리가 있었으며, 이 단체들은 법적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단체의 정치적, 사회정치적, 종교적 목표를 이유로 법적 지위를 거부당하지 않았다(제124조). 이 권리 역시 대통령 비상대권 발동 시 제한될 수 있었다.[56]
- 선거: 자유롭고 비밀스러운 선거가 보장되었다(제125조).
- 공직 참여: 모든 시민은 능력에 따라 차별 없이 공직에 임명될 자격이 있었다. 특히 여성 공무원에 대한 성차별이 폐지되었다(제128조).
- 공무원: 공무원은 특정 정당이 아닌 국가 전체를 위해 봉사해야 했으며, 정치적 의견 표현의 자유를 누렸다(제130조). 이 권리 또한 대통령 비상대권 발동 시 제한될 수 있었다.[56]
- 병역 의무: 시민들은 법률에 따라 병역을 포함하여 국가와 공동체를 위해 봉사할 의무를 졌다.
3. 3. 3. 종교와 종교 공동체
바이마르 헌법은 제135조부터 제141조까지 독일인의 종교에 관한 권리를 상세히 규정했다. 모든 독일 거주민에게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었으며, 종교 활동의 자유는 헌법에 의해 보장되고 국가의 보호를 받았다. 국가가 특정 종교를 공인하는 국교는 인정되지 않았다.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행사하거나 공무원으로 임용되는 데 있어 개인의 종교적 신념은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누구도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공개적으로 밝히거나, 특정 종교적 행위에 참여하거나 종교적인 맹세를 하도록 강요받지 않았다.
또한, 헌법은 종교단체의 지위에 대해서도 규정했다. 기존에 공법상 단체로 인정받았던 종교단체는 교회세를 징수할 권리를 가졌으며(제137조 6항), 공동체적 세계관을 추구하는 결사 역시 종교단체와 동등하게 취급되었다(제137조 7항). 법률이나 조약 등에 따라 국가가 종교단체에 지급해야 할 의무는 각 주의 의회가 승계하도록 했다(제138조 1항).
이러한 종교 관련 조항들 중 제136조, 제137조, 제138조, 제139조, 제141조는 이후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에 통합되어[21] 오늘날 독일 헌법의 일부로 남아 있다.
3. 3. 4. 교육과 학교
바이마르 헌법 제4장(제142조~제150조)은 교육 및 학교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공교육은 국가 기관이 담당하고 라이히 정부의 규제를 받았으며, 연방, 주, 지방 자치 단체 간의 협력을 통해 운영되었다. 초등학교 교육은 8년 과정의 의무 교육으로 규정되었고, 시민들은 18세까지 고등 교육을 무료로 받을 권리를 가졌다. 이는 교육 기회를 넓히려는 목적을 가졌다.
또한, 헌법은 사립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규정도 마련했는데, 이 역시 정부의 규제 대상이었다. 특히 종교 단체가 운영하는 사립학교에서는 해당 종교의 원칙에 따른 종교 교육이 허용되었다.
3. 3. 5. 경제 생활
바이마르 헌법 제5장(제151조~제165조)은 경제 생활에 관한 규정을 담고 있다. 기본 원칙은 경제 생활이 정의의 원칙에 부합해야 하며,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의 존엄하고 교양 있는 삶을 보장하고 개인의 경제적 자유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제153조는 재산권을 보장했다. 재산의 수용(징발, 징수)은 오직 법률에 근거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만 가능했으며, 반드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했다.
국가는 노동력뿐만 아니라 지식인의 창작 활동, 작가, 발명가, 예술가의 저작권을 보호할 의무를 가졌다. 모든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근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교섭할 권리가 보장되었으며, 자영업자에 대한 보호 규정도 마련되었다. 노동자와 직원은 사용자와 동등한 입장에서 임금 및 근로 조건을 결정하고, 나아가 경제 발전에 참여할 권리를 가졌다. 이는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보장하는 진일보한 규정이었다.
또한 국가는 "사회화에 적합한" 사적 경제 기업을 공유 재산으로 이전할 권한을 가졌으며, 국민의 건강, 모성 보호, 노령에 대비한 포괄적인 사회 보험 제도를 마련할 의무를 지녔다. 노동자들은 공장 근로자 평의회를 통해 법적인 대표성을 보장받았다. 이러한 조항들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사회권 보장 내용을 담고 있어, 이후 여러 나라 헌법 제정에 영향을 주었다.
4. 노동권
바이마르 헌법에서는 노동삼권, 즉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노동자의 기본적인 권리인 노동인권으로 존중하고 있다. 이는 과거 독일제국 시기 노동자 탄압법을 통해 단체행동권을 억압했던 노동인권 탄압의 역사를 헌법 제정을 통해 개혁한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받는다. 이러한 바이마르 헌법의 노동권 보장 정신은 이후 대한민국의 헌법에도 영향을 미쳐, 대한민국 헌법 역시 노동삼권을 국민의 기본권으로 존중하고 있다.
5. 문제점
빌리엄 쉬러(William L. Shirer)는 그의 저서 『제3제국의 흥망』에서 바이마르 헌법을 "종이 위에서는 20세기가 보아온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문서… 거의 완벽한 민주주의의 작동을 보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독창적이고 훌륭한 장치들로 가득 차 있다"고 평가했다.[22] 그러나 바이마르 헌법에는 심각한 문제점들이 있었는데, 특히 독일 국민들이 보기에 그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점이 지적된다. 역사학자 한스-울리히 벨러(Hans-Ulrich Wehler)는 에베르트(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마지막 제국 수상인 바덴 공(Prince Max of Baden)으로부터 수상직을 넘겨받은 방식이 쿠데타와 유사하며, 에베르트가 국민의회 소집까지 이끌었던 인민대표평의회는 "혁명적 법에 의해" 기능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장기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국민의회의 결정 과정에서 공개적인 논의가 부족했고, 이는 주권을 가진 국민이 실제로는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이용되는 허구에 불과했음을 보여주었다.
헌법 자체에서 대통령에게 부여된 권한 범위는 매우 문제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 구조는 준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가 혼합된 형태였다. 이는 정당을 초월하고 라이히스타크(Reichstag)와 프뢰스가 우려했던 "의회 독재" 가능성에 대한 균형추 역할을 할 강력한 대통령, 즉 '대체 군주'를 염두에 둔 설계였다.[23] 헌법은 대통령이 라이히스타크의 신임을 받는 수상이더라도 해임할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반대로 라이히스타크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수상을 임명할 수도 있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긴급 명령 조항인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였다. 이 조항은 대통령에게 시민의 자유를 정지시킬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했지만, 이를 견제하고 균형을 맞출 장치는 실제로는 매우 부족했다. 제48조는 또한 대통령이 지방 정부를 해산할 수 있도록 허용했는데, 이 권한은 네 차례 사용되었으며 모두 좌파 장관들을 대상으로 했다(국가집행 참조).[24] 원래 제48조는 국가 비상사태 시 헌법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신중하게 사용될 목적이었으나,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이 되기 전까지 무려 205번이나 발동되었다.[25] 따라서 히틀러가 임명된 지 한 달 만에 이 권한을 이용하여 독재 체제를 강화하기 시작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비례대표제를 별도의 최저 득표율 제한 없이 사용한 것도 중요한 약점으로 지적된다. 사표를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이 제도는 수많은 소수 정당의 난립을 초래하여, 어떤 정당도 안정적인 의회 과반수를 확보하고 유지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열은 잦은 내각 교체의 주요 원인이었다.[26] 예를 들어, 1932년 7월 독일 연방 총선에서는 총 62개 정당 중 14개 정당이 최소 한 석 이상을 얻을 만큼의 표를 얻었다. 심지어 0.1%의 득표율만으로도 의석을 얻을 수 있었는데, 같은 선거에서 인민정의당은 3700만 표 이상 중 약 4만 표를 얻어 한 석을 차지했다.[27] 물론 1932년 선거에서 나치당(NSDAP)이 제1당으로 부상한 것은 근본적으로 유권자들의 정서 변화 때문이었다. 최저 득표율 제한이 없었던 점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1920년대 라이히스타크에서 나치당의 미미한 존재감이 오히려 그들의 집권에 발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반면, 바이마르 헌법에 최저 득표율 제한이 있었다 하더라도 히틀러의 야심을 막지는 못했을 것이며, 오히려 나치당이 기준을 넘어선 후에는 다른 소수 정당들을 더 빠르게 흡수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반론도 존재한다.
대통령 선거 방식 역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대통령이 "전 독일 국민에 의해 선출된다"고만 명시하고 세부 사항은 법률에 위임했다. 1920년 제정된 라이히 대통령 선거법은 결선투표제를 도입했지만, 1차 투표에서 과반수 득표자가 없을 경우 치러지는 2차 투표에서 상위 2명의 후보로 제한하지 않았다. 대신, 2차 투표에 출마하기로 결정한 모든 후보 중 가장 많은 표를 얻은 사람이 당선되는 방식이었다.[28] 이 때문에 1925년 독일 대통령 선거의 2차 투표는 독일 인민당의 칼 야레스(1차 1위)와 독일 사회민주당의 오토 브라운(1차 2위) 간의 대결이 아니었다. 두 후보는 모두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를 지지하는 정당 소속이었지만, 2차 투표에는 중앙당의 빌헬름 마르크스(1차 3위, 바이마르 연정 후보), 독일 공산당 지도자 에른스트 텔만,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사령관이었으며 군주제를 지지하는 극우파 후보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새로 출마했다. 힌덴부르크는 1차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48%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29] 그의 당선은 공화국의 안정에 큰 위협이 되었다.
독일 혁명 초기, 인민대표평의회의 온건파 지도부는 안정을 위해 제국 시절의 방대한 관료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수천 명의 경험 많은 관리를 교체하는 혼란을 피하기 위함이었지만, 이들 관리 대다수는 여전히 군주제에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바이마르 헌법 제정 당시, 강력한 독일 공무원 연맹( Deutscher Beamtenbund|도이처 베암텐분트de )은 프뢰스의 의도와 달리 제128조부터 제131조까지 공무원의 권리를 특별히 보호하는 조항을 삽입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 조항들은 정치적 의견의 자유 보장과 더불어 공무원에게 종신직, 노령 연금, 유족 연금을 보장했다. 헌법에 이러한 특별 조항이 포함된 것은 공화국에 큰 부담이 되었는데, 특히 사법부 등에서 공화국에 비협조적이거나 반감을 가진 인사들을 제거하기 위한 관료 개혁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이 없었다 하더라도, 바이마르 헌법은 매우 어려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혼란 속에서 만들어지고 시행되었다. 역사학자 리처드 J. 에반스(Richard J. Evans)는 그의 저서 『제3제국의 도래』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 전반적으로 바이마르 헌법은 1920년대 다른 대부분의 국가 헌법보다 나쁘지 않았고, 많은 헌법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었다. 상황이 달랐다면 문제가 될 만한 조항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화국이 겪었던 치명적인 정통성 부족은 헌법의 결함을 여러 배로 증폭시켰다.[30]
바이마르 헌법은 국민을 주권자로 명시하고, 재산에 따른 제한 없이 20세 이상 남녀 모두에게 평등한 보통선거권을 부여했으며, 국민의 사회권을 인정하는 등 혁신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권자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에게 수상 임명 및 해임권, 의회 해산권, 헌법 효력 정지 긴급 명령권[57], 국군 통수권 등 과거 독일 제국의 황제에 버금가는 강력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러한 권한은 공화국 수립 초기의 혼란기에 여러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제로 사용되기도 했다.
제정 당시에는 비스마르크 제국 헌법에 비해 훨씬 민주적인 헌법으로 평가받았다. 바이마르 헌법에서 수상 임명은 대통령의 권한이었지만, 의회는 수상에 대한 불신임 결의를 할 수 있었다. 당시 헌법 해석에서는 수상 임명에 있어 의회의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의회 우위설'이 우세했으며, 초대 대통령 에베르트는 의회의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인물을 수상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완전 비례대표제의 문제점인 소수 정당 난립을 막기 위한 최저 득표율 제한[58]이 없었기 때문에,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여러 정당이 참여하는 연립 내각이 일반적이었고, 정당 간의 이견으로 연정이 붕괴하며 정국 혼란이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선거 제도 개혁 논의는 여러 차례 있었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점차 수상 임명에 있어 대통령의 권한이 우선한다는 '대통령 우위설'이 힘을 얻게 되었다. 본래 우익 성향이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는 에베르트의 전례를 따라 의회 다수파의 지지를 받는 인물을 수상으로 임명했지만, 계속되는 정치·경제적 혼란 속에서 의회와 정당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결국 1930년 제2차 헤르만 뮐러 내각이 붕괴하자, 의회에 기반을 두지 않은 하인리히 브뤼닝을 후임 수상으로 임명했다. 이후 힌덴부르크가 사망할 때까지 의회의 지지 없이 대통령의 임명만으로 유지되는 소위 '대통령 내각' 시대가 이어졌다. 대통령 내각의 수상들은 의회 다수파의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법안 제정을 대통령 긴급 명령에 의존하는 경우가 잦았다. 나치당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나치당이 제1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돌프 히틀러가 즉시 수상으로 임명되지 못하고 1933년 1월 30일에야 임명된 것도, 히틀러를 개인적으로 싫어했던 힌덴부르크가 그의 수상 임명을 계속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6. 나치스 독일기의 바이마르 헌법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된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발생한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은 바이마르 헌법의 종말을 고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사건 직후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에 의거하여 이른바 국회의사당 방화령을 공포했다.[10] 이 긴급명령은 헌법에 보장된 인신 보호(114조), 주거 불가침(115조), 통신의 비밀(117조), 표현의 자유 및 검열 금지(118조), 집회의 자유(123조), 결사의 자유(124조), 재산권 보장(153조) 등 기본적인 시민권을 무기한 정지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0] 이는 사실상 나치 독재의 법적 토대를 마련한 조치였다.
이어 1933년 3월 23일, 나치당은 국회에서 권한 강화 법(전권위임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입법권을 국회에서 행정부인 제국 정부(총리 히틀러와 내각)로 넘기는 것을 골자로 했다. 법안은 국회, 제국평의회, 대통령의 권한은 침해하지 않는다고 명시했지만[31], 이는 나치당의 권력 장악을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기존의 헌법상 입법 절차(헌법 68조~77조)는 이 법에 의해 완전히 무력화되었다.[31]
권한 강화 법은 헌법 개정에 준하는 법률이었기에 재적 의원 2/3 출석과 출석 의원 2/3 찬성이라는 가중된 요건을 충족해야 했다. 나치당은 반대가 예상되는 공산당 의원 81명의 의원 자격을 박탈하고 의회 출입을 막는 등 폭력적인 방법을 동원하여[32] 찬성 441표, 반대 94표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바이마르 헌법을 명시적으로 폐기하지는 않았으나, 헌법 개정 절차를 따랐다고 명시함으로써[32] 사실상 헌법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히틀러는 권한 강화 법의 조항마저 무시하며 권력을 집중시켰다. 권한 강화 법 제2조는 제국 정부가 제정한 법률이 국회, 제국평의회, 대통령의 권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헌법 규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나치 정부는 1934년 2월 14일, 법률로써 명백히 보호되었던 제국평의회를 폐지하는 법률을 제정하여[33] 권한 강화 법 자체를 위반했다. 또한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히틀러는 사망 하루 전 통과시킨 법률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총리인 자신에게 통합시켜 총통(Führer und Reichskanzler|퓌러 운트 라이히스칸츨러de)의 지위에 올랐다.[34] 이로써 바이마르 헌법은 완전히 형해화되었고, 나치 독일은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와 지도자 원리(Führerprinzip)에 기반한 전체주의 독재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제2차 세계 대전 패망 시점까지 공식적으로 폐지되지는 않았으나, 나치 시대 동안 이름만 남은 빈껍데기에 불과했다.
7. 영향
권한법 통과 이후 바이마르 헌법은 사실상 효력을 잃었으나, 히틀러는 이를 자신의 독재 체제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도구로 이용했다.[35][36][37]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열린 세 차례의 국회 선거(1933년 11월, 1936년 3월, 1938년 4월)는 나치당과 그 동조자들의 단일 명단만 제시되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으며, 비밀 투표는 나치의 위협으로 사실상 불가능했다. 히틀러의 수많은 법령은 명시적으로 국회 의사당 방화령과 제48조에 근거를 두었다.[38]
1945년 히틀러는 정치 유서를 통해 되니츠 제독을 후계자로 지명하고 대통령으로 임명했으나, 이는 바이마르 헌법상 국가원수 선출 절차를 무시한 것이었다.[39] 되니츠가 이끈 플렌스부르크 정부는 연합군에 의해 해산되었고, 베를린 선언을 통해 연합 4개국이 독일에 대한 최고 권한을 장악했다.[40]
나치스 독일 패망 후, 연합군 통제 위원회 법령 제1호에 의해 권한법이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41] 이론적으로 바이마르 헌법이 복원되었으나, 연합군의 점령 통치 하에서는 실질적인 효력을 갖지 못했다.
전후 분단된 독일에서 바이마르 헌법은 새로운 헌법 제정에 영향을 미쳤다. 1949년 제정된 독일 민주 공화국 헌법(동독)은 바이마르 헌법의 여러 조항을 포함했으나,[42] 1968년 공산주의적 헌법으로 대체되었고 1990년 독일 통일까지 유지되었다. 같은 해 제정된 독일 연방 공화국 기본법(서독, 소위 본 기본법)은 바이마르 헌법의 일부 조항을 계승했다. 특히 국가와 종교의 관계를 다룬 제136조, 137조, 138조, 139조, 141조는 기본법의 일부로 편입되어 현재까지 효력을 유지하고 있다.[21] 또한 귀족 작위를 이름의 일부로 간주하고 더 이상 수여하지 않는다는 규정(제109조 III항)도 유효하게 남아 있다.[43]
바이마르 헌법은 다른 여러 나라의 헌법 제정에도 영향을 주었다. 대한민국의 제헌 헌법[44]과 라트비아 헌법[45][46] 제정에 영향을 미쳤으며, 인도 헌법은 비상 사태 시 기본권 정지에 관한 규정을 바이마르 헌법에서 가져왔다.[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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