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 인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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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이에른 인민당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바이에른 지역에서 창당된 보수 가톨릭 정당이다. 국민투표제, 여성 참정권 도입, 지방 분권화를 주장하며, 바이에른 주에서 강한 지지를 받았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여러 내각에 참여하고, 하인리히 헬트 주 총리(1924-1933) 재임 기간 동안 바이에른의 자치를 유지했다. 1933년 나치당의 집권 이후 해산되었으며, 이후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이 당의 노선을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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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인민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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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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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이름 | Bayerische Volkspartei |
약칭 | BVP |
창립 | 1918년 11월 |
해산 | 1933년 7월 4일 |
분리 | 독일 중앙당 |
후계 정당 |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 바이에른 민족당 (법적 후계자는 아님) |
본부 | 뮌헨, 바이마르 공화국 |
색상 | |border=darkgray}} 청색 흰색 |
깃발 | [[File:Flag of Bavaria (lozengy).svg|200px]] |
국가 | 독일 |
지도부 | |
대표 | 칼 프리드리히 슈페크 (1918년–1929년) 프리츠 섀퍼 (1929년–1933년) |
이념 및 정책 | |
이념 | 정치적 가톨릭주의 바이에른 지역주의 기독교 민주주의 보수주의 (독일) |
정치적 위치 | 중도우파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조직 | |
준군사 조직 | Bayernwacht |
기관지 | 바이엘른 속보 (Bayerischer Kurier) |
2. 역사
제1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중앙당 내 우파 세력은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의 활동에 반감을 가졌다. 특히 바이에른에서 활동하던 정치인들은 전국 정당인 중앙당을 나와 바이에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보수적 가톨릭계 정당 창설을 모색했다. 11월 혁명 발발 5일 후인 1918년 11월 12일 게오르크 하임과 제바스티안 시베바워는 레겐스부르크에서 바이에른 인민당 창당대회를 개최했다.[4] 이들은 국민투표제, 여성 참정권 도입, 농업 개혁을 주장했고, 프로이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지방 분권화를 추구했다.
창당 후에도 전국 단위에서 중앙당과 협력했지만, 중앙당에 비해 보수적인 노선을 견지했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의 내각 참여를 막기 위한 범우파 연합을 지향했다. 전국적인 문제보다는 바이에른주 지방의 문제에 집중했으며, 이 지역에서 강한 지지를 받았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바이에른 인민당은 쿠노, 마르크스, 루터, 뮐러, 브뤼닝 내각에 참여했다.
1919년 2월, 요하네스 호프만을 총리로 하는 사민당·독립사민당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바이에른 인민당은 의회 정치로의 전환을 위해 이를 묵인했다. 4월에는 레테 공화국이 수립되어 호프만 정권이 밤베르크로 피신했지만, 중앙 정부의 지원군을 얻어 레테 공화국을 붕괴시켰다. 이후 호프만 내각에 바이에른 인민당 소속 칼 폰 프라이베르크 남작이 재무장관으로 입각했다.
1920년 3월 카프 반란의 여파로 바이에른에서 우파의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호프만 정권이 타도되었다. 이후 구스타프 폰 카를이 바이에른 총리에 취임하면서 바이에른 인민당 주도의 보수 정권이 이어졌다. 1920년 9월 18일에는 밤베르크 강령을 제정하여 바이에른의 자치권을 요구했다.
1923년 가을, 중앙 정부가 루르 지방에서의 프랑스군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중단하자, 바이에른 주 총리 오이겐 폰 크닐링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카를에게 독재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뮌헨 폭동으로 카를과 크닐링이 사임하고, 하인리히 헬트가 주 총리로 선출되어 9년간 재임했다.
1925년 대통령 선거에서 바이에른 인민당은 중앙당 후보 빌헬름 마르크스 대신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 1930년 이후부터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내각 참여를 지지했으며, 1933년 수권법 통과로 해산됐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이 당 노선을 계승했다.
2. 1. 창당 배경과 초기 (1918년-1919년)
제1차 세계 대전 말 독일 제국의 패색이 짙어지고 독일 11월 혁명이 발발하면서, 중앙당 내 바이에른 지역 정치인들이 주축이 되어 1918년 11월 12일 레겐스부르크에서 창당되었다.[4] 이들은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로 대표되는 중앙당 좌파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반대하고, 바이에른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보수적 가톨릭 정당을 지향했다.[16] 창당 초기에는 국민투표제, 여성 참정권 도입, 농업 개혁, 지방 분권화를 주장했다.[5]
쿠르트 아이스너의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 정부에 맞서 바이에른 주 의회 소집을 요구하는 운동을 주도했다.[3] 1919년 1월 12일과 2월 2일에 실시된 바이에른 주 의회 선거에서 바이에른 인민당은 35%의 득표를 얻어 66석을 획득하여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스너가 암살당하고, 의회 내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하여 바이에른 인민당 소속 의원 Heinrich Oselde이 살해되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이후 요하네스 호프만을 총리로 하는 독일 사회민주당·독립사민당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지만, 바이에른 인민당은 의회 정치로의 전환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이를 묵인했다.
2. 2. 호프만 정권 시기 (1919년-1920년)
1919년 바이에른 주 의회 선거에서 바이에른 인민당은 제1당이 되었으나,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의 연립 정권 구성을 묵인하며 의회 정치로의 전환을 지원했다. 바이에른 인민당은 요하네스 호프만 총리 선출에 만장일치로 찬성했으나, 곧 의회가 폐회되고 레테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호프만 정부는 밤베르크로 피신했다. 레테 공화국 붕괴 후, 호프만 내각에 칼 폰 프라이베르크 남작이 재무장관으로 입각하며 연립 정부에 참여했다.[16]2. 3. 바이에른 인민당 주도 정권 시기 (1920년-1933년)
1920년 3월 카프 반란의 여파로 바이에른에서도 우파의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호프만 정권이 타도되었다. 그 후 바이에른 인민당의 정치인 구스타프 폰 카를이 바이에른 총리에 취임했다. 이후 바이에른에서는 "질서 세포 바이에른(Ordnungszelle Bayern)"[16]이라고 불리는 바이에른 인민당원을 총리로 하는 보수 정권이 이어졌다.
카르는 바이에른을 "마르크스주의적 혼란"과 완전히 "유대화된" 바이마르 공화국 내의 Ordnungszellede(질서의 세포)로 설립한다는 구상을 책임졌다.[3] 그는 또한 자유군단과 유사한 시민 방위대(''Einwohnerwehr'')의 성장을 촉진했다. 카르는 1921년 공화국 보호법이 시민 방위대의 무장 해제를 강요하자 재상직에서 사임했다.[8]
1920년 9월 18일, 밤베르크 강령을 제정했다. 이 강령에서 바이에른 인민당은 바이에른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권리나 바이마르 헌법에 구속되지 않고 국가 형태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권리(왕정 복고 등)를 요구했다.[16]
1923년 가을, 중앙 정부가 루르 지방에서 프랑스군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중단했지만, 바이에른 인민당의 바이에른 주 총리 오이겐 폰 크닐링은 이에 반대하여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카를에게 독재 권한을 부여했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에 의한 뮌헨 폭동이 일어나 카를은 사임했고, 폭동의 사후 수습을 둘러싸고 당내에서 불만이 높아졌던 크닐링도 1924년에 사임하게 되었다.

바이에른 인민당은 하인리히 헬트를 주 총리로 선출했다.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이 끝날 때까지 9년 동안 헬트가 바이에른 인민당을 여당으로 하면서 주 총리를 맡게 된다.[16] 헬트 재임 기간 동안, 바이에른과 제국 정부 간의 갈등이 종식되었고, 경제가 안정되었으며, 주 행정이 개혁되었고 인프라가 확장되었다.[5]
1925년 대통령 선거에서 바이에른 인민당은 중앙당 후보 빌헬름 마르크스 대신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 이는 중앙당이 사민당과 손을 잡았던 것에 대한 혐오감 때문이었다.[16]
바이에른 주 의회에서 바이에른 인민당은 항상 제1당을 차지했지만, 1932년 주 의회 선거에서는 나치당이 약진하여 의석수가 줄어들었다.
정당 | 1919년 | 1920년 | 1924년 | 1928년 | 1932년 |
---|---|---|---|---|---|
바이에른 인민당 (BVP) | 35.0% | 39.4% | 32.8% | 31.6% | 32.6% |
나치당 (NSDAP) | - | - | - | 6.1% | 32.5% |
1932년 5월 말, 프란츠 폰 파펜이 총리에 취임하자 돌격대 금지령 해제나 프로이센 쿠데타 등을 둘러싸고 중앙 정부와 대립을 심화했다. 바이에른 인민당은 돌격대 금지 해제에 반대하고, 프로이센 쿠데타에 대해서는 주의 독립성 침해로 간주하여 국가 재판소에 제소했다.[16]
2. 4. 나치 집권과 해산 (1933년)
1933년 1월 나치당이 집권한 후, 국회에 있던 바이에른 인민당(BVP) 의원 19명 전원이 1933년 수권법에 찬성 투표를 했다. 이로써 아돌프 히틀러는 총리로서 국회를 거치지 않고 법을 제정하고 시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되었다.[4]빌헬름 프리크 내무장관은 동조화(Gleichschaltung) 정책을 통해 바이에른을 나치화하려 했다. 1933년 4월 10일, 프리크 장관은 프란츠 폰 에프 장군을 바이에른의 제국 총독으로 임명했고, 하인리히 헬트 총리는 강제로 퇴임했다.[4]
뮌헨 경찰청장이 된 하인리히 히믈러와 그의 보좌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뮌헨에서 정적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산당원과 사민당원이 중심이었지만, 가톨릭과 나치당 정권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바이에른 인민당원 중에서도 체포자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바이에른 인민당은 늦봄부터 집회를 열지 못하게 되었다. 히믈러가 나치당을 제외한 모든 정치 단체의 집회를 금지하자, 바이에른 인민당 간부는 1933년 7월 4일 당의 해산을 결정했다. 체포된 정치인들은 이후 모두 석방되었다.[3]
3. 이념 및 정책
제1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패전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중앙당 내 우파 세력은 좌파 세력을 대표하는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의 활동에 반감을 가졌다. 특히 바이에른에서 활동하던 정치인들은 전국 정당인 중앙당을 나와 바이에른 지역 정당 창설을 모색했다. 11월 혁명 발발 5일 뒤인 1918년 11월 12일 게오르크 하임과 제바스티안 시베바워는 레겐스부르크에서 바이에른 인민당 창당대회를 개최했다. 이들은 국민투표제, 여성 참정권 도입, 농업 개혁을 주장했고, 프로이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지방 분권화를 추구했다.[4]
창당 후에도 전국 단위에서 중앙당과 협력했지만, 중앙당에 비해 보수적인 노선을 견지했다. 전국 문제보다는 바이에른 주 문제에 집중했으며, 이 지역에서 강한 지지를 받았다. 하인리히 헬트는 1924년 바이에른 주 총리에 취임해 1933년까지 재직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바이에른 인민당은 쿠노, 마르크스, 루터, 뮐러, 브뤼닝 내각에 참여했다. 1930년 이후부터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내각 참여를 지지했다. 1933년 수권법 통과로 해산됐다. 제2차 세계 대전 종결 후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이 당 노선을 계승했다.
1919년 2월, 요하네스 호프만을 총리로 하는 사민당·독립사민당 연립 정권이 수립되었다. 바이에른 인민당은 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파인 독립사민당이 사민당과 연립하는 것을 묵인했다. 의회 정치로의 전환을 원활하게 진행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월 17일 의회가 소집되었지만, 바이에른 인민당을 비롯한 부르주아 정당들이 타협하여 만장일치로 호프만이 총리로 선출되었다. 의회는 의회파와 레테파의 위태로운 균형 위에 개최되었기에, 호프만 정권 선출 후 즉시 폐회되었고, 당분간 의회 없이 정치를 진행하게 되었다. 4월 7일 레테파가 뮌헨에서 혁명을 일으켜 레테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호프만 정권은 밤베르크로 피신했다. 하지만 중앙 정부의 지원군을 얻어 5월 초에 레테 공화국을 붕괴시켰다. 뮌헨 탈환 후 호프만 정권은 내각 개편을 실시하여, 바이에른 인민당 소속의 칼 폰 프라이베르크 남작이 재무장관으로 입각했다.
바이에른 인민당은 바이에른 주 의회에서 항상 제1당이었다. 1932년 4월 주 의회 선거에서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에 육박당했지만, 근소한 차이로 제1당을 유지했다.[17] 국회 선거에서도 1930년 총선거까지는 바이에른에서 가장 많은 득표를 한 정당이었다 (1932년 7월 이후 총선거에서 나치당에 추월당했다).[18]
바이에른 인민당이 바이에른에 강력한 기반을 가진 배경은 바이에른의 많은 가톨릭교도와 강한 지방 감정이다. 바이에른 인민당은 바이에른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았으며, 바이에른에서는 가톨릭 단체가 곳곳에 퍼져 있었고, 마을과 촌락에서의 생활은 지방 사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사회 구조가 바이에른 인민당을 지탱했다. 바이에른에서도 상 프랑켄, 중 프랑켄 지방( 아이히슈테트, 밤베르크 등 가톨릭 "월경지" 제외)은 개신교가 많았기 때문에, 바이에른 인민당의 약점이 되는 지역이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바이에른 인민당이 주 의회 선거에서 나치에 육박당하거나, 국회 선거의 바이에른 선거구에서 나치에게 추월당한 것은, 나치가 바이에른 농촌에 진출하여 가톨릭교도에게 나치 지지층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가톨릭교도는 비스마르크와의 문화 투쟁 시대에는 중앙당에 투표했지만, 문화 투쟁 종식 후에는 종교 정당에 투표하는 비율이 감소했다. 바이에른에서는 종교 정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강했고, 그것이 바이에른 인민당의 무기가 되어 왔지만, 헌법에 의해 교회의 권리가 보장되고, 중앙당이 정계에서 확고한 역할을 하는 바이마르 공화국 안에서는 가톨릭교도가 종교 정당에 투표하는 메리트는 적었고, 결국 바이에른에서도 종교 정당에 투표하는 사람이 줄어들고, 정책으로 투표 대상을 결정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 때문에 가톨릭교도 사이에서도 포괄 정당인 나치의 인기가 높아져 갔다.
당 의장(Vorsitzender)은 다음과 같다.
재임 기간 | 이름 |
---|---|
1918년-1929년 | 카를 프리드리히 슈페크 |
1929년-1933년 | 프리츠 셰퍼 |
3. 1. 기본 이념
기독교적 가치를 공적 생활에 적용할 것을 주장했다. 특히 가정생활의 전통적 미덕, 결혼의 신성함과 영원성, 아동의 종교 교육을 중시했다.[4]오스트리아의 기독교사회당과 연대 관계를 맺고 오스트리아와의 "독일 재통일"을 주장했다. 가톨릭 신자가 많은 오스트리아를 병합하면 독일의 가톨릭적 요소가 강화되고, 독일인 애국심에도 호소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폭넓은 지지를 기대할 수 있는 주장이었다.[4]
3. 2. 주요 정책
바이에른 인민당은 중앙당의 중앙집권적 정책에 반대하며, 바이에른의 자치권 확대를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3] 연방주의 강화를 추구하며, 바이에른의 독립적인 외교권과 국가 형태 결정권을 요구했다.[4]또한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내각 참여에 반대하고 범우파 연합을 지향하는 등 반공주의 노선을 견지했다.[3] 농업 보호 정책과 조합주의적 경제 구조를 추구했다.[5]
4. 조직 및 지지 기반
바이에른 인민당은 바이에른 주를 기반으로 활동했으며, 주로 가톨릭 교도, 농민, 중산층의 지지를 받았다. 1918년 게오르크 하임과 제바스티안 시베바워가 레겐스부르크에서 창당한 이래, 중앙당과 협력하면서도 더 보수적인 노선을 추구했다.[4]
주요 강령은 국민투표제와 여성 참정권 도입, 농업 개혁, 그리고 프로이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지방 분권화였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과의 연립에 반대하며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3]
바이에른 주 의회에서 항상 제1당을 유지할 정도로 강력한 지지를 받았으나, 상 프랑켄 · 중 프랑켄 지방과 같이 개신교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이 농촌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가톨릭 교도 유권자층 일부가 나치 지지로 돌아서기도 했다. 이는 비스마르크와의 문화 투쟁 이후 종교 정당에 대한 투표율이 감소하는 경향과 맞물려, 바이에른 인민당의 지지 기반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4. 1. 조직 구조
바이에른 인민당은 당 의장과 국가의회 원내대표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바이에른 각 지역에 지부를 두었으며, 당원 수는 55,000명, 지역 지부는 2,500개였다.[4][3][5]1918년~1919년 독일 혁명 이후, 중앙당의 바이에른 지도자들은 1918년 11월 12일 레겐스부르크에서 게오르크 하임을 중심으로 바이에른 인민당을 창당했다. 중앙당에서 분리된 주요 요인은 중앙당이 중앙 집권적인 국가 정부를 선호한 반면, 바이에른 당원들은 연방주의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또한 독일 사회민주당 (SPD)이 주도하는 혁명에 대한 평가를 포함하여 바이에른의 보수적인 입장이 분리에 영향을 미쳤다.[3]
바이에른 인민당의 창당 강령은 강력한 연방주의 구조를 가진 국가 차원의 의회 정부, "프로이센 우위" 폐지, 여성 투표권, 국민투표 도입을 요구했다. 당 차원에서는 "농민 회의"(Bauernkammer)를 첫 단계로 하여 조합주의 구조를 추구했다. 당 지도부는 주로 성직자, 귀족, 중산층 출신이었다.[5]
1920년 9월 18일에는 밤베르크 강령을 제정하여 바이에른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권리, 바이마르 헌법에 구속되지 않고 국가 형태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권리(왕정 복고 등)를 요구했다.
1923년 가을, 중앙 정부가 루르 지방에서 프랑스군에 대한 소극적 저항을 중단하자, 바이에른 주 총리 오이겐 폰 퀴닝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를 주 총독으로 임명하여 독재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의 뮌헨 폭동으로 카르는 사임했고, 퀴닝도 1924년에 사임했다. 이후 하인리히 헬트가 주 총리로 선출되어 9년 동안 바이에른 인민당을 이끌었다.
1932년 4월 24일 주 의회 선거에서 바이에른 인민당은 45석으로 제1당을 유지했지만, 나치당이 43석을 획득하며 약진했다. 헬트 내각은 나치당과 사민당 어느 쪽과도 연립하지 않고 소수파 정권을 유지했다.
4. 2. 주요 지지층
바이에른 인민당은 바이에른 지역의 가톨릭 교도, 농민, 중산층을 주요 지지 기반으로 삼았다.[17] 바이에른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았으며, 지방 사제들이 지역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17] 특히, 가톨릭 단체가 바이에른 곳곳에 퍼져 있었고, 마을과 촌락에서의 생활은 지방 사제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 구조가 바이에른 인민당을 강력하게 지탱했다.그러나 상프랑켄 · 중프랑켄 지방 (아이히슈테트나 밤베르크와 같은 가톨릭의 "월경지"는 제외)은 개신교가 많았기 때문에, 이곳은 바이에른 인민당의 약점이 되는 지역이었다.[17]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는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이 농촌에 진출하고, 가톨릭교도 중에서도 나치 지지층이 증가하면서 바이에른 인민당의 지지 기반이 약화되었다.[18]
4. 3. 지역별 지지 기반
바이에른 인민당은 바이에른 주 의회에서 항상 제1당을 차지할 정도로 바이에른 지역에서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17] 이는 바이에른의 많은 가톨릭 교도와 강한 지방 감정 덕분이었다. 바이에른 인민당은 바이에른 가톨릭 교회의 지원을 받았으며, 바이에른에서는 가톨릭 단체가 곳곳에 퍼져 있었고, 마을과 촌락에서의 생활은 지방 사제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그러나 상 프랑켄 · 중 프랑켄 지방(아이히슈테트나 밤베르크와 같은 가톨릭의 "월경지"는 제외)과 같이 개신교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였다.
바이마르 공화국 말기에는 나치당이 농촌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가톨릭 교도 유권자층 일부가 나치 지지로 돌아서기도 했다. 가톨릭교도는 비스마르크와의 문화 투쟁 시대에는 일치하여 중앙당에 투표했지만, 문화 투쟁이 종식된 후에는 종교 정당에 투표하는 비율이 감소하는 경향이 있었다. 바이에른에서는 비교적 종교 정당에 투표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바이마르 헌법에 의해 교회의 권리가 보장되고, 중앙당이 정계에서 확고한 역할을 하는 상황에서는 가톨릭교도가 종교 정당에 투표하는 이점이 적었고, 결국 바이에른에서도 종교 정당에 투표하는 사람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가톨릭교도 사이에서도 포괄 정당인 나치의 인기가 높아져 갔다.
5. 역대 지도부
바이에른 인민당은 여러 주요 인물들이 이끌었다.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는 바이에른을 "마르크스주의적 혼란"과 "유대화된" 바이마르 공화국 내의 질서의 세포(Ordnungszellede)로 만들고자 했다.[3] 그는 자유군단과 유사한 시민 방위대(''Einwohnerwehr'') 설립을 주도했다. 카르는 1921년 공화국 보호법으로 시민 방위대가 해산되자 재상직에서 물러났다.[8] 1924년, 독재 권한을 가진 주 최고 위원(Generalstaatskommissarde)으로 임명되어 비상사태를 선포했고, 공화국 보호법 시행을 중단하고 정치적 폭력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9][10] 그는 우익적 입장이었지만, 1923년 11월 아돌프 히틀러의 맥주 홀 폭동 진압에 기여했다.[4] 이후 베를린의 압력으로 주 최고 위원직에서 사임했다.[11]
독일 정치 상황이 안정된 후, 하인리히 헬트 재상(1924–1933)과 프리츠 셰퍼 당 대표의 지도 아래 바이에른 인민당은 온건 노선을 추구했다. 헬트 재임 기간 동안 바이에른과 제국 정부 간 갈등이 종식되고 경제가 안정되었으며, 주 행정이 개혁되고 인프라가 확장되었다.[5] 1925년, 바이에른 인민당은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4]
바이에른 인민당의 준군사 조직인 Bayernwachtde(바이에른 감시)는 1925년에 결성되어 1933년 4월에 해산되었다.[12]
5. 1. 당 의장
대수 | 이름 | 취임 | 퇴임 |
---|---|---|---|
1 | 카를 프리드리히 슈페크 | 1918년 | 1929년 |
2 | 프리츠 셰퍼 | 1929년 | 1933년 |
5. 2. 국가의회 원내대표
대수 | 이름 | 취임 | 퇴임 |
---|---|---|---|
1 | 요한 라이히트 | 1920년 | 1933년 |
6. 역대 선거 결과
바이에른 인민당은 1919년 바이마르 국민 의회 선거에서 중앙당과 선거 동맹을 맺었고,[3] 1920년까지 공동 의원 단체를 가졌다. 이후 관계가 악화되어 일부 선거에서 경쟁하기도 했지만, 1927년 다시 관계를 회복했다. 바이에른 인민당은 빌헬름 쿠노 내각을 비롯한 여러 국가 내각에 참여하여 장관을 배출했으며,[3] 에리히 에밍거는 1923년부터 1924년까지 법무부 장관을 역임했다.
바이에른 인민당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에 치러진 5번의 바이에른 주 의회 선거에서 모두 최다 득표로 제1당을 차지하며 모든 주 정부에 참여했다.[3]
6. 1. 국가의회 선거
선거일 | 득표수 | 득표율 | 의석수 (총 의석수) | 의석 순위 |
---|---|---|---|---|
1920년 6월 6일 | 1,173,344표 | 4.2% | 20석 (459석) | 제7당 |
1924년 5월 4일 | 946,648표 | 3.2% | 16석 (472석) | 제8당 |
1924년 12월 7일 | 1,134,035표 | 3.7% | 19석 (493석) | 제7당 |
1928년 5월 20일 | 945,644표 | 3.1% | 17석 (491석) | 제8당 |
1930년 9월 14일 | 1,058,637표 | 3.0% | 19석 (577석) | 제10당 |
1932년 7월 31일 | 1,192,684표 | 3.2% | 22석 (608석) | 제6당 |
1932년 11월 6일 | 1,094,597표 | 3.1% | 20석 (584석) | 제6당 |
1933년 3월 5일 | 1,073,552표 | 2.7% | 19석 (647석) | 제6당 |
출처: [http://www.gonschior.de/weimar/Deutschland/Uebersicht_RTW.html Gonschior.de] |
6. 2. 바이에른 주 의회 선거
선거일 | 득표 | 득표율 | 의석수 (총 의석수) | 의석 순위 |
---|---|---|---|---|
1919년 1월 12일/2월 2일 | 1,193,101표 | 35.0% | 66석 (180석) | 제1당 |
1920년 6월 6일 | 1,193,101표 | 39.4% | 65석 (155석) | 제1당 |
1924년 4월 6일/5월 4일 | 982,348표 | 32.8% | 46석 (129석) | 제1당 |
1928년 5월 20일 | 1,045,963표 | 31.6% | 46석 (128석) | 제1당 |
1932년 4월 24일 | 1,272,005표 | 32.6% | 45석 (128석) | 제1당 |
출처: [http://www.gonschior.de/weimar/Bayern/Uebersicht_LTW.html Gonschior.de] |
바이에른 인민당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 5번의 바이에른 주 의회 선거에서 모두 최다 득표를 기록하여 제1당 지위를 유지했으며, 모든 주 정부에 참여했다.[3] 그러나 1930년대 나치당이 약진하면서 득표율 격차가 줄어들었다.
6. 3. 대통령 선거
1925년 대통령 선거 1차 투표에 하인리히 헬트가 출마했으나 1,007,450표(3.7%)를 얻어 낙선했다.[5] 2차 투표에서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선거일 | 당의 대통령 후보 | 득표 | 득표율 | 결과 |
---|---|---|---|---|
1925년 3월 29일 (1차 투표) | 하인리히 헬트 | 1,007,450표 | 3.7% | 낙선 |
출처: Gonschior.de |
7. 평가 및 유산
바이에른 인민당은 11월 혁명 직후인 1918년 11월 12일 게오르크 하임과 제바스티안 시베바워가 레겐스부르크에서 창당했다. 이들은 중앙당 내 우파 세력이었으나,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로 대표되는 좌파 세력에 반발하여 바이에른 지역을 기반으로 한 보수적 가톨릭 정당을 창설했다. 이들은 국민투표제, 여성 참정권 도입, 농업 개혁, 그리고 프로이센 견제를 위한 지방 분권화를 주장했다.[1]
바이에른 인민당은 전국적으로는 중앙당과 협력하면서도, 독일 사회민주당의 내각 참여를 막기 위한 범우파 연합을 지향하는 등 더 선명한 보수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바이에른 지역 문제에 집중하여 이 지역에서 강한 지지를 받았으며, 소속 정치인 하인리히 헬트는 1924년부터 1933년까지 바이에른 주총리를 역임했다.[1]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바이에른 인민당은 쿠노, 마르크스, 루터, 뮐러, 브뤼닝 내각에 참여했다. 1930년대 이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내각 참여를 지지했으며, 1933년 수권법 통과와 함께 해산되었다.[1]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바이에른의 기독교사회연합(CSU)이 바이에른 인민당의 노선을 계승했다. 그러나 CSU는 바이에른 인민당의 법적인 후계 정당은 아니며, 1945년 이후 바이에른의 독일 민족주의 진영 대부분을 흡수했다. 여기에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독일 국가 인민당의 바이에른 분파였던 Bayerische Mittelpartei|바이에른 중도당de과 바이에른 농민 연맹, 도시 자유주의 중산층 일부도 포함되었다. 바이에른당 역시 바이에른 인민당과 농민 연맹에서 지지 기반을 확보했다.[1]
8. 주요 당원
- 안톤 폰 아르코 아우프 파이 백작: 쿠르트 아이스너 암살범이다.[3]
- 프란츠 폰 에프: 나치당으로 이적했으며, 바이에른 주 국가 전권 위원을 역임했다.[4]
- Heinrich Oselde: 바이에른 주 의회 의원으로, 아이스너 암살 당일 의회에서 암살당했다.
- 구스타프 폰 카를: 바이에른 주 총리 및 총독을 역임했다.[3]
- 오이겐 폰 크바르트 추 비크라트 운트 이즈니 백작: 바이에른 경제 장관을 역임했으며, 해산 후 나치당으로 이적했다.
- 오이겐 폰 크닐링: 바이에른 주 총리를 역임했다.[5]
- Alfons Goppelde: 해산 후 나치당으로 이적했다가 전후 기독교사회연합으로 이적하여 바이에른 주 총리를 역임했다.
- Hanns Seidelde: 전후 기독교사회연합에 입당하여 바이에른 주 총리를 역임했다.
- Fritz Schäfferde: 바이에른 인민당 당수를 역임했다.[5]
- 루트비히 지베르트: 나치당으로 이적하여 바이에른 주 총리를 역임했다.
- 하인리히 힘러: 1923년 바이에른 인민당을 탈당하여 나치당으로 이적했다.[13] 이후 나치 친위대 전국지도자, 독일 내무 장관, 전 독일 경찰청장을 역임했다.
- Karl von Freybergde 남작: 바이에른 재무 장관을 역임했다.
- 하인리히 헬트: 바이에른 주 총리를 역임했다.[5]
- Josef Müller (Politiker, 1898)de: 전후 기독교사회연합 당수를 역임했다.
- Georg Lörnerde: 나치당으로 이적하여 친위대 경제관리본부 고관 및 친위대 중장을 역임했다.
- 후고 막스 그라프 폰 운트 투 렐히엔펠트 아우프 쾨페링 운트 쇤베르크 백작: 바이에른 주 총리를 역임했다.
참조
[1]
서적
Germany, 1914–1933: Politics, Society and Culture
Pearson Education
[2]
서적
Germany, 1914-1933: Politics, Society and Cul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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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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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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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schichte der CDU: Bayerische Volkspartei (BVP)
https://www.kas.d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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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웹사이트
Bayerische Volkspartei (BVP)
https://www.staatsle[...]
2023-01-17
[6]
웹사이트
Geschichte des bayerischen Parlaments seit 1819: Kahr, Gustav Ritter von
https://www.bavariat[...]
2023-01-17
[7]
웹사이트
Der Freistaat Bayern Landtagswahlen 1919–1933
http://www.gonschior[...]
2023-01-17
[8]
웹사이트
Gustav Ritter von Kahr 1862–1934
https://www.dhm.de/l[...]
2023-01-17
[9]
서적
Weimar 1918–1933. Die Geschichte der ersten deutschen Demokratie
C.H. Beck
[10]
웹사이트
"[Erstes] Gesetz zum Schutze der Republik. Vom 21. Juli 1922"
http://www.documenta[...]
2023-01-25
[11]
서적
Neue Deutsche Biographie [Online-Version]
https://www.deutsche[...]
[12]
웹사이트
Bayernwacht, 1924–1933
https://www.historis[...]
2023-01-17
[13]
웹사이트
Heinrich Himmler
https://spartacus-ed[...]
2023-01-17
[14]
문서
プリダム
[15]
문서
成瀬治
[16]
웹사이트
Deutsch-Hannoversche Partei (DHP)
https://www.dhm.de/l[...]
2018-07-12
[17]
웹사이트
Gonschior.de
http://www.gonschior[...]
[18]
웹사이트
Gonschior.de Der Freistaat Bayern Reichstagswahlen 1919–1933
http://www.gonschi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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