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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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국민회는 1915년 장일환, 강석봉, 서광조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된 항일 무장 기독교 비밀단체이다. 하와이 국민회 활동가들과 숭실학교 재학생, 졸업생, 만주 및 중국 지역 운동세력이 연계되어 평양에서 결성되었으며,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계획했다. 1917년 3월 23일 조직을 완성하고 장일환을 회장으로, 배민수를 서기 겸 통신부장으로 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1918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해산되었으며, 장일환은 고문으로 사망했다.
1910년대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공개적으로 전개하기 어려웠다. 이에 조선국민회는 비밀결사 형태로 조직된 항일무장기독교 단체였다.[1][2]
조선국민회는 1915년 평양에서 조직된 항일무장기독교 비밀단체이다.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조직한 박용만의 지도를 받은 장일환이 주도했다.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달리 무력을 통해 일본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일환은 1914년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지도를 받고 귀국하여 강석봉, 서광조 등과 함께 숭실학교를 기반으로 조선국민회를 조직하고,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을 추진하였다.[1][2]
2. 결성 배경
2. 1. 국외 독립운동과의 연계
1914년 하와이국민회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장일환, 강석봉, 서광조 등과 김형직, 배민수 등 숭실학교(崇實學校) 재학생 및 졸업생, 그리고 만주, 중국 지역 운동 세력과 연계된 백세빈, 노선경 등이 주축이 되어 1915년에 조직되었다.[1][2] 장일환은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조직한 박용만의 지도로 평양에서 조직하였다.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달리 일본의 무력 침공과 국권 찬탈에 대해 무력을 길러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4년 장일환은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지도를 받은 뒤 귀국하여, 강석봉, 서광조 등과 평양 숭실학교를 기반으로 김형직, 배민수 등, 그리고 만주, 중국의 운동 세력과 연계된 백세빈, 노선경(노백린의 아들)과 함께 조선국민회를 평양에서 비밀리에 조직하고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 등을 추진하였다.[1]
2. 2. 국내 상황
1914년 하와이국민회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장일환, 강석봉, 서광조 등과 김형직, 배민수 등 숭실학교(崇實學校) 재학생, 졸업생 그리고 만주, 중국지역 운동세력과 연계된 백세빈, 노선경 등이 주축이 되어 1915년에 조직한 항일무장기독교 비밀단체이다.[1][2] 장일환은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조직한 박용만의 지도로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다.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달리 일본의 무력 침공과 국권 찬탈에 대해 무력을 길러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4년 장일환은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지도를 받은 뒤 귀국하여 강석봉, 서광조 등과 평양 숭실학교를 기반으로 김형직, 배민수 등 그리고 만주, 중국의 운동세력과 연계된 백세빈, 노선경(노백린의 아들)과 함께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비밀리에 조직,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 등을 추진하였다. 1917년 3월 23일 조선국민회 조직을 완성하고 회장에는 장일환, 서기 겸 통신부장에는 배민수, 백세빈은 외국통신원, 전라도 구역장에는 강석봉, 경상도 구역장에는 여병섭이 맡았다. 백세빈, 이보식 등 25명이 참가하였다. 숭실학교를 중퇴하고 서당교사였던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도 참가하였다. 권총을 '돼지다리'라고 하는 등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던 비밀결사기독교단체였다.[1][2] 북한 김일성 주석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아버지(김형직)가 조국광복회에 참가했다."고 말했다.[3]
3. 조직 및 주요 활동
조선국민회는 권총을 '돼지다리'라고 부르는 등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했다.[1][2] 북한 김일성 주석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아버지(김형직)가 조국광복회에 참가했다."고 언급했다.[3]
3. 1. 조직 구성
1914년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조직한 박용만의 지도로, 평양에서 조직되었다. 장일환, 강석봉, 서광조 등 하와이국민회 활동을 하다가 귀국한 이들과 김형직, 배민수 등 숭실학교(崇實學校) 재학생 및 졸업생, 그리고 만주, 중국 지역 운동세력과 연계된 백세빈, 노선경(노백린의 아들) 등이 주축이 되어 1915년에 조직한 항일무장기독교 비밀단체이다.[1][2]
1917년 3월 23일 조선국민회 조직을 완성하고, 회장에는 장일환, 서기 겸 통신부장에는 배민수, 백세빈은 외국통신원, 전라도 구역장에는 강석봉, 경상도 구역장에는 여병섭이 맡았다. 백세빈, 이보식 등 25명이 참가하였다. 숭실학교를 중퇴하고 서당교사였던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도 참가하였다.[1][2]
당시 참여하였던 25명의 회원들을 일제의 보고서(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를 통해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3. 2. 주요 활동
1914년 하와이국민회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한 장일환, 강석봉, 서광조 등과 김형직, 배민수 등 숭실학교(崇實學校) 재학생, 졸업생 그리고 만주, 중국지역 운동세력과 연계된 백세빈, 노선경 등이 주축이 되어 1915년에 조직한 항일무장기독교 비밀단체이다. 장일환은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을 조직한 박용만의 지도로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조직하였다.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달리 일본의 무력 침공과 국권 찬탈에 대해 무력을 길러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4년 장일환은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지도를 받은 뒤 귀국, 강석봉, 서광조(徐光朝) 등과 평양 숭실학교를 기반으로 김형직, 배민수 등 그리고 만주, 중국의 운동세력과 연계된 백세빈, 노선경(노백린의 아들)과 함께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 등을 추진하였다.[1][2]1917년 3월 23일 조선국민회 조직을 완성하고, 회장에는 장일환, 서기 겸 통신부장에는 배민수, 백세빈은 외국통신원, 전라도 구역장에는 강석봉, 경상도 구역장에는 여병섭이 맡았다. 백세빈, 이보식 등 25명이 참가하였다. 숭실학교를 중퇴하고 서당교사였던 김일성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도 참가하였다. 권총을 '돼지다리'라고 하는 등 철저하게 비밀을 지키던 비밀결사기독교단체였다.[1][2] 북한 김일성 주석도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아버지(김형직)가 조국광복회에 참가했다."고 말했다.[3]
4. 참여 인물
조선국민회는 1917년 3월 23일 평양에서 조직된 비밀결사 독립운동단체였다. 일제의 보고서인 '불령단관계잡건 조선인'(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에 따르면, 회장 장일환을 비롯하여 25명의 회원이 참여하였다.[4] 주요 인물로는 외국통신계 백세빈, 배민수, 김형직, 서광조, 김병두, 이보식, 조옥초, 김인준, 노덕순, 최지화, 전라도 구역장 강석봉, 김석헌, 최달형, 김지수, 양경수, 경상도 구역장 여병섭, 이병균, 박인관, 황해도 구역장 노선경 등이 있다. 이들 중에는 김형직과 같이 서당 교사나, 배민수 등 숭실중학교 학생들도 포함되어 있었다.[4]
4. 1. 전체 명단 (25명)
5. 일제의 탄압과 와해
조선국민회는 1918년 간도(間島)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해산되었다. 조선국민회는 비밀결사단체였으나,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조선인 형사 김태석에게 미행당하고 있었다. 장일환 등이 중국 식당에서 국내외 지하운동을 상의하다가 현장을 미행 중이던 형사 나까무라와 김태석에게 모두 체포되면서, 결국 조선국민회는 와해되었다.[5]
5. 1. 체포 및 재판
1918년 2월 간도(間島)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해산되었다.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국민회 조직은 일본의 앞잡이가 된 조선인 형사 김태석에게 미행당하고 있었는데, 장일환 등이 중국식당에서 국내외 지하운동을 상의하다가 현장 미행 중이던 두 형사 나까무라와 김태석에게 현장에서 모두 체포되었다.1주일 이상 배민수 등을 고문하였는데, 만주에서 온 백세빈은 고문에 굴복하여 조직에 대해 실토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회원을 비롯해서 회원들의 지인들까지 모두 체포되어 재판 당시는 30명 정도가 되었다. 회장 장일환을 비롯해서 배민수, 김형직, 강석봉 등은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장일환은 배민수에게 유언을 남기고 고문으로 사망하였다.[5]
검찰은 보안법 위반 등의 이유를 들어 배민수에게 1년, 김형직과 구형필, 서광조, 평석은 10개월, 노덕순, 김평두, 조옥초, 최달형, 강석봉에게는 8개월, 최지화, 이보식, 김인준, 이경균 등은 6개월의 형을 구형받고 재판에서도 그대로 선고되었다. 회원들은 항소하지 않고 그대로 모두 형을 살았는데, 배민수는 1919년 이전이라 비교적 형이 적었다고 회고하였다. 재판과정에서 배민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우리들을 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고, 일본제국의 국왕이라도 우리와 같은 처지라면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고 진술하기도 하였다.[6]
5. 2. 판결
1918년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해산되었다. 비밀결사단체인 조선국민회 조직은 일본의 앞잡이인 조선인 형사 김태석에게 미행당하고 있었는데, 장일환 등이 중국 식당에서 국내외 지하운동을 상의하다가 현장 미행 중이던 두 형사 나까무라와 김태석에게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5] 배민수 등은 1주일 이상 고문을 받았는데, 만주에서 온 백세빈은 고문에 굴복하여 조직에 대해 실토하였다. 이로 인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회원을 비롯해서 회원들의 지인들까지 모두 체포되어 재판 당시에는 30명 정도가 되었다. 회장 장일환을 비롯해 배민수, 김형직, 강석봉 등은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독립을 염원하였던 장일환은 배민수에게 유언을 남기고 고문으로 사망하였다.[5]검찰은 보안법 위반 등의 이유로 배민수에게 1년, 김형직, 구형필, 서광조, 평석에게는 10개월, 노덕순, 김평두, 조옥초, 최달형, 강석봉에게는 8개월, 최지화, 이보식, 김인준, 이경균 등에게는 6개월 형을 구형했고, 재판에서도 그대로 선고되었다. 회원들은 항소하지 않고 모두 형을 살았는데, 배민수는 1919년 이전이라 비교적 형이 적었다고 회고하였다. 재판 과정에서 배민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우리들을 법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고, 일본 제국의 국왕이라도 우리와 같은 처지라면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라고 진술하기도 하였다.[6]
6. 역사적 의의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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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뉴스
김형직 독립운동 사료 독립기념관에 소장
http://news.naver.co[...]
연합뉴스
2005-03-23
[2]
뉴스
金日成의 父 金亨稷 조선국민회활동 사실로 확인돼
http://news.naver.co[...]
연합뉴스
1998-03-25
[3]
서적
세기와 더불어 제1편 항일혁명편
[4]
일반
[5]
서적
배민수자서전
[6]
서적
배민수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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