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석봉
1. 개요
강석봉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하와이로 이주하여 대한인국민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1909년 귀국 후 조선국민회를 조직하고 신한국보를 국내에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5년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19년 목포 4.8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2년형을 선고받고 피신했다가 1923년 재차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해방 후 무안군 일로읍에서 여생을 보냈으며,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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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강석봉 |
|---|---|
| 출생일 | 1890년 9월 23일 |
| 출생지 | 대한민국 전라남도 목포시 |
| 사망일 | 1956년 10월 14일 |
| 사망지 | 대한민국 전라남도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 |
| 직업 | 한국의 독립운동가 조선국민회 활동 목포의 4·8 만세운동 주도 |
| 종교 | 기독교 |
| 배우자 | 오석경 |
| 자녀 | (아들)종천, 종수, 종산 (딸) 복순 소순, 은순,청자, 금랑 (손자) 경수, 정훈 (손녀) 해선 해령, (외손자) 조영진, 조무부, 조영민 (외손녀) 조희숙, 조명숙 (진외증손자-강소순의 손자) 조효성, 조효천 (진외고손자-강소순의 증손자) 조찬양, 조영광, 조아인, 조성민 |
| 친척 | 조카 한규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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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 출생 -
최남선
최남선은 1890년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한 대한민국의 문인이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역사학자이며, 《소년》을 창간하고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여 현대 한국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3·1 운동 독립선언서 기초, 친일 행적, 단군 연구, 《단군론》, 《불함문화론》 저술 등의 활동을 했다. -
1890년 출생 -
김창영 (1890년)
김창영은 일제강점기 경찰 및 관료, 만주국 관리로서 항일 무장 세력 탄압과 귀순 공작에 참여하고 금산군수와 전라남도 참여관을 지냈으며, 광복 후 경성부부윤을 역임했으나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처벌받고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
1956년 사망 -
뤼시앵 페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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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사망 -
김창룡
김창룡은 일제강점기 관동군 헌병으로 항일 조직 색출에 참여한 군인으로, 해방 후 대한민국 육군에서 정보 및 방첩 업무를 담당하며 숙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지만, 특무부대장으로서 인권 침해 및 사건 조작 의혹, 김구 암살 사건 연루 의혹 등 각종 논란 속에 암살당해 역사적 평가가 엇갈린다.
2. 생애
전남 목포 사람으로, 1905년경 부친 강영숙을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 박용만, 이승만 등이 하와이로 오기 전에 하와이 협성협회(1907.9) 등에서 활동하다가 1909년부터는 하와이국민회 즉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에서 활약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서는,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무장독립운동단체 결성 지시를 받고 귀국한 장일환과 국내 기독교계의 서광조 등과 함께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 등을 추진하였다. 1915년 3월 장일환, 배민수·김형직·백세빈·이보식, 숭실대학 학생 등과 조선국민회(회장 장일환)를 조직하고 전라도구역장의 임무를 맡았으며,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던 중 이듬해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배민수, 김형직등과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선국민회는 무장 비밀결사조직으로서 권총을 '돼지다리'라고 하는 등 암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8년 출옥 후 그는 기독교의 기반이 닦여진 목포로 귀향하여 동지 서상봉·배치문·곽우영·서화일·박여성·박복영·양병진 등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만세운동 등을 계획하였다. 귀향 후 그는 목포의 기독교계 정명여학교에서 강호연이라는 이름의 한문교사로 활동하며 독립의지를 학생들에게 전파하다가, 1919년 4월 8일의 독립만세운동(목포4.8만세운동)을 위해서 양동교회 집사이던 서기건 등과 정명여학교가 참여하는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새벽부터 태극기와 선언서를 투입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4월 8일 독립만세운동을 위해서 남궁혁과 박상렬 형제 등도 적극 준비하고 있었는데 박상렬은 상업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기로 하였다. 참여한 학교는 정명여학교 외에도 영흥학교, 목포공립보통학교, 목포상업학교 등이었다. 이 시위로 서기건, 박상렬 등 80여 명이 체포되어 약 40명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치루었는데, 강석봉은 피신하여 궐석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4.8독립만세 운동 주모자 중 가장 무거운 형량이었다.
4년간 피신하던 그는 1923년 1월 대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목포로 압송되어 1923년 2월 12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해방될 때까지 현 신안군인 선도에 연금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해방 후는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에서 여생을 마쳤고, 묘지는 청호리에 있다가, 1995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옮겼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86년에는 대통령 표창,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높여 추서받았다.
2.1. 하와이 이주와 초기 항일 운동 (1905년 ~ 1909년)
강석봉은 전남 목포 사람으로, 1905년경 부친 강영숙을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 박용만, 이승만 등이 하와이로 오기 전 하와이 협성협회(1907.9) 등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부터는 하와이국민회 즉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에서 활약하다가, 1909년 귀국하여 항일무장기독교단체인 조선국민회와 목포4.8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귀국 후에는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2.2. 귀국과 국내 항일 운동 (1909년 ~ 1919년)
강석봉은 전남 목포 사람으로, 1905년경 부친 강영숙을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 박용만, 이승만 등이 하와이로 오기 전에 하와이 협성협회(1907.9) 등에서 활약하다가 1909년부터는 하와이국민회 즉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에서 활약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서는,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의 결성 지시를 받고 귀국한 장일환과 국내 기독교계의 서광조 등과 함께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 등을 추진하였다. 1915년 3월 장일환, 배민수·김형직·백세빈·이보식, 숭실대학 학생 등과 조선국민회(회장 장일환)를 조직하고 전라도구역장의 임무를 맡았으며,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던 중 이듬해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배민수, 김형직등과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선국민회는 무장 비밀결사조직으로서 권총을 '돼지다리'라고 하는 등 암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8년 출옥 후 그는 기독교의 기반이 닦여진 목포로 귀향하여 동지 서상봉·배치문·곽우영·서화일·박여성·박복영·양병진 등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만세운동 등을 계획하였다. 귀향 후 그는 목포의 기독교계 정명여학교에서 강호연이라는 이름의 한문교사로 활동하며 독립의지를 학생들에게 전파하였다.
1919년 목포4.8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4월 8일의 독립만세운동을 위해서 양동교회 집사이던 서기건 등과 정명여학교가 참여하는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새벽부터 태극기와 선언서를 투입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4월 8일 독립만세운동을 위해서 남궁혁과 박상렬 형제 등도 적극 준비하고 있었는데 박상렬은 상업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기로 하였다. 참여한 학교는 정명여학교 외에도 영흥학교, 목포공립보통학교, 목포상업학교 등이었다. 이 시위로 서기건, 박상렬 등 80여 명이 체포되어 약 40명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치루었는데, 강석봉은 피신하여 궐석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4.8독립만세 운동 주모자 중 가장 무거운 형량이었다.
2.3. 목포 4.8 만세운동 주도 (1919년)
강석봉은 전남 목포 사람으로, 1905년경 부친 강영숙을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 박용만, 이승만 등이 하와이로 오기 전에 하와이 협성협회(1907.9) 등에서 활약하다가 1909년부터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에서 활약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무장독립운동단체의 결성 지시를 받고 귀국한 장일환과 국내 기독교계의 서광조 등과 함께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 등을 추진하였다. 1915년 3월 장일환, 배민수, 김형직, 백세빈, 이보식, 숭실대학 학생 등과 조선국민회(회장 장일환)를 조직하고 전라도구역장의 임무를 맡았으며,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던 중 이듬해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배민수, 김형직 등과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선국민회는 무장 비밀결사조직으로서 권총을 '돼지다리'라고 하는 등 암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8년 출옥 후 그는 기독교의 기반이 닦여진 목포로 귀향하여 동지 서상봉, 배치문, 곽우영, 서화일, 박여성, 박복영, 양병진 등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만세운동 등을 계획하였다. 귀향 후 정명여학교에서 강호연이라는 이름의 한문교사로 활동하며 독립의지를 학생들에게 전파하다가, 1919년 4월 8일의 독립만세운동을 위해서 양동교회 집사이던 서기건 등과 정명여학교가 참여하는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새벽부터 태극기와 선언서를 투입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4월 8일 독립만세운동에는 정명여학교 외에도 영흥학교, 목포공립보통학교, 목포상업학교 등이 참여하였다. 이 시위로 서기건, 박상렬 등 80여 명이 체포되어 약 40명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는데, 강석봉은 피신하여 궐석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4.8독립만세 운동 주모자 중 가장 무거운 형량이었다.
4년간 피신하던 그는 1923년 1월 대구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목포로 압송되어 1923년 2월 12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2.4. 체포와 투옥 (1923년)
강석봉은 1915년 3월 장일환(張日煥), 배민수(裵敏洙)·김형직(金亨稷)·백세빈(白世彬)·이보식(李輔植), 숭실대학 학생 등과 조선국민회(회장 장일환)를 조직하고 전라도구역장의 임무를 맡았으며, 간도(間島)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던 중 이듬해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배민수,) 김형직등과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선국민회는 무장 비밀결사조직으로서 권총을 '돼지다리'라고 하는 등 암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8년 출옥후 그는 1919년 4월 8일의 독립만세운동 주모자로 참여하여 궐석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은후 4년간 피신하였다. 1923년 1월 대구(大邱)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목포로 압송되어 1923년 2월 12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2.5. 해방 이후 (1945년 ~ )
강석봉은 전남 목포 사람으로, 1905년경 부친 강영숙을 따라 하와이로 이주하여 박용만, 이승만 등이 하와이로 오기 전에 하와이 협성협회(1907.9) 등에서 활약하다가 1909년부터는 대한인국민회 하와이지방총국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귀국하여서는,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하는 신한국보를 국내로 들여와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 박용만의 무장독립운동단체 결성 지시를 받고 귀국한 장일환과 국내 기독교계의 서광조 등과 함께 평양에서 조선국민회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할 계획 등을 추진하였다. 1915년 3월 장일환, 배민수·김형직·백세빈·이보식, 숭실대학 학생 등과 조선국민회(회장 장일환)를 조직하고 전라도구역장의 임무를 맡았으며, 간도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추진하던 중 이듬해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8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배민수, 김형직등과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조선국민회는 무장 비밀결사조직으로서 권총을 '돼지다리'라고 하는 등 암호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1918년 출옥 후 그는 기독교의 기반이 닦여진 목포로 귀향하여 동지 서상봉·배치문·곽우영·서화일·박여성·박복영·양병진 등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만세운동 등을 계획하였다. 귀향 후 그는 목포의 기독교계 정명여학교에서 강호연이라는 이름의 한문교사로 활동하며 독립의지를 학생들에게 전파하다가, 1919년 4월 8일의 독립만세운동(목포4.8만세운동)을 위해서 양동교회 집사이던 서기건 등과 정명여학교가 참여하는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고 실행하였다.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새벽부터 태극기와 선언서를 투입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플래카드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4월 8일 독립만세운동을 위해서 남궁혁과 박상렬 형제 등도 적극 준비하고 있었는데 박상렬은 상업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기로 하였다. 참여한 학교는 정명여학교 외에도 영흥학교, 목포공립보통학교, 목포상업학교 등이었다. 이 시위로 서기건, 박상렬 등 80여 명이 체포되어 약 40명이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치루었는데, 강석봉은 피신하여 궐석재판에서 2년형을 선고받았는데 당시 4.8독립만세 운동 주모자 중 가장 무거운 형량이었다.
4년간 피신하던 그는 1923년 1월 대구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목포로 압송되어 1923년 2월 12일 소위 보안법·출판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다시 옥고를 치렀다. 해방될 때까지 현 신안군인 선도에 연금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해방 후는 무안군 일로읍 청호리에서 여생을 마쳤고, 묘지는 청호리에 있다가, 1995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으로 옮겼다.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1986년에는 대통령 표창,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높여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