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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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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윤양은 북송 태종의 손자이자 상공정왕 조원분의 아들로, 송 진종의 조카이다. 진종의 후계자로 지명되기도 했으나, 인종이 태어나면서 본가로 돌아갔다. 관료로서 우천우위장군, 위주자사, 여주방어사, 영강군 절도사 등을 역임했으며, 인종의 양자이자 훗날 영종이 되는 조종실의 아버지였다. 사망 후 영종에 의해 복왕으로 추존되었고, 황고로 칭해졌다.

2. 생애

조윤양은 성품이 엄격하고 예의가 발랐지만, 관대한 면모도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어린 시절 조카를 잃은 진종에 의해 일시적으로 황태자 후보로 궁궐에 들어갔으나, 인종이 태어나면서 사저로 돌아갔다.[1]

사후 태위 중서령에 추증되었고, 복왕의 왕호와 안의(安懿)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조윤양 사후 4년 뒤, 친아들 영종이 즉위하면서, 제사 때 조윤양의 대우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올랐는데, 이를 복의라고 한다.[1]

2. 1. 초기 생애

태종 조광의의 넷째 아들이자 임씨 소생 상공정왕 조원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조원분은 송 진종의 이복 동생이다. 형으로는 신안군왕 조윤녕과 조윤회(조윤중으로 개명)가 있었으나, 조윤회는 일찍 사망했다. 송 진종의 둘째 아들 조현우가 사망하자, 아들을 잃은 백부 송 진종은 조윤양을 궁궐로 불러들여 양육했다. 이후 진종에 의해 일시적으로 후계자로 지명되기도 하였으나, 진종의 친아들 인종이 탄생하면서 본가로 돌아갔다.[1] 1009년 4월 우천우위장군이 되고, 우효위장군을 거쳐 1018년 8월 위주자사로 부임하였다.

2. 2. 관료 생활

인종 즉위 후 여주방어사, 영강군 절도사 등을 거쳐 지대종정사 등을 지냈다. 1029년 9월 화주관찰사로 부임했다.[1]

1035년 2월 강녕절도사 재직 중, 아들이 없던 송 인종은 4살이던 조윤양의 13째 아들 조종실(훗날의 영종)을 양자로 삼고, 입궐시켜 황자로 봉했으며 황궁에서 양육했다. 《송사연의》 28권에 의하면 조윤양이 종실 중 자녀가 많아서 그의 아들을 택했다고 한다.[1] 1044년 7월 여남군왕에 봉해졌고, 동년 8월 겸 동평장사가 되었다. 곧 판종정사로 승진했다. 1050년 평강군 절도사 겸 시중, 1055년 다시 판대종정사가 되었다.[1]

2. 3. 사망과 추존

1059년 11월 9일 65세로 사망하자 증직으로 태위 중서령에 추증되었다.[1] 사촌 동생 송 인종이 붕어하자, 아들이 없던 인종의 양자가 된 13째 아들 조서영종으로 즉위하면서 복왕에 추존되고 안의의 시호가 내려졌다.

영종은 친부인 조윤양을 황제로 추존하고자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거셌다. 그러나 영종은 신하들의 의지를 꺾고 조윤양을 황고(皇考)로 칭하였다. 이를 복의라 한다. 영종은 복안의왕의 아들 영주방어사 기국공 조종박을 복국공으로 개봉한 뒤 조윤양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1] 이후 복국공들이 대대로 복안의왕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러나 끝내 묘호는 추존하지 못했다.

3. 성격

겉으로는 엄격하고 예의 바른 인물이었지만, 관대한 면모도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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