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인 모리아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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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주인 모리아쓰는 하타케야마 요리쿠니의 아들로, 무로마치 막부의 슈고 다이묘 하타케야마 씨의 서류를 칭했다. 다이죠인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으나, 시마즈 요시히사의 명으로 환속하여 측근으로 등용되었다. 그는 시마즈 가문의 규슈 통일에 기여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요시히사의 관계를 맺어주는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이후 가로가 되었으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시마즈 요시히로를 따라 참전하여 그의 대역을 자처하며 퇴각을 도왔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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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인 모리아쓰 | |
---|---|
기본 정보 | |
씨명 | 사쓰마 하타케야마 씨 |
다른 이름 | 대선방 |
다른 이름 | 아타 모리아쓰 |
다른 이름 | 아타 조주인 |
생애 | |
시대 | 센고쿠 시대 -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
출생 | 덴분 17년 (1548년) |
사망 | 게이초 5년 9월 15일 (1600년 10월 21일) |
묘소 | 린코지 (기후현오가키시 가미이시즈정) |
가계 | |
부모 | 부: 하타케야마 요리쿠니 |
배우자 | 도리이 다다요시 딸 |
자녀 | 다다히데 |
섬긴 주군 | |
주군 | 시마즈 요시히사 → 요시히로 |
기타 | |
특기 사항 | null |
관련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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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하타케야마 요리쿠니의 아들로 태어났다.[4]。 무로마치 막부의 유력한 슈고 다이묘인 하타케야마 씨의 서류를 칭했던 사쓰마 하타케야마 씨 출신이다. 아버지 요리쿠니가 사쓰마 반도 남쪽 끝의 보츠 부근으로 이주하여 낳은 아들이다.
어린 시절에 다이죠인[2]에서 불문에 들어가 다이죠인 세이큐 법인의 제자가 되었다. 기슈네고로지에서 8년간, 고야산의 목식 상인에게서 3년간 수행했다. 그 후 귀국하여 안요인[3]의 주지가 되었다.
시마즈 요시히사가 세이준에게 환속을 명하고 측근으로 등용했다. 주자로서 섬기며 시마즈 씨의 규슈 통일에 활약했다. 덴쇼 14년 (1586년), 히데요시와 요시히사의 관계를 맺어주었다.[4]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의 역에서 시마즈 씨의 형세가 불리해지자 화해를 주장했다고 한다.
덴쇼 16년 (1588년), 가로[4]가 되었다. 요시히사와 함께 이시다 미쓰나리와 회견했다.[4] 덴쇼 20년 (1592년)경, 마치다 규바이, 가마다 마사치카 등과 함께 가신의 지행 안행장에 서명했으며, (시마즈 요시히로의) 노중 (가로)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세이준은 필두 노중이었던 이주인 고칸과 함께 다이코 겐치에 입회하여 미쓰나리와 상담하며 시마즈 가문의 가신단의 지행 배분에 관여했다. 이 때문에, 감지나 소속 변경을 명령받은 많은 가신들의 격렬한 적의의 표적이 되었으며, 국인층으로부터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 대담한 지행 분할을 진행하는 이주인 고칸과도 대립하여 불화를 소문냈다.
게이초 5년 (1600년)에 세키가하라 전투가 시작되자, 7월 말의 빠른 비각에 의한 요시히로의 위급한 소식에 응하여, 호조군, 죠사군 등 70명의 사졸을 이끌고 국허를 출발했다. 이세 사다나리・니이노 료안과 마찬가지로 (마지못해 서군에 가담하게 된) 요시히로를 따랐다. 세키가하라 전투 본전 직전인 9월 13일 아침에 난궁산 부근에 도착했다. 미쓰나리가 1,000명 정도의 수세로 마중 나와 "마치 소환된 귀신 같다"고 칭찬했다. 같은 날 낮에 오가키 성의 성문에 이르자, 요시히로는 문 밖까지 나와 기뻐하며 세이준의 손을 잡고 진소에 초대했다.
또한, 착진 때, 요시히로가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흰 봉황 무늬의 진바오리를 세이준에게 선물했고, 이시다 미쓰나리도 금 닦은 군배와 부채를 선물했다.
세이준이 가장 이름을 떨친 것은 "도리가사카의 퇴각전"이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총붕괴되고 시마즈군이 적중 고립되었을 때, 시마즈 도요히사의 진언으로 요시히로는 수만 대군을 꿰뚫고 적중 돌파를 감행했다. 세이준은 강력한 가신인 다마린보에게 요시히로를 등에 업고 산중을 돌파하도록 명령한 후, 앞서 언급한 요시히로로부터 받은 진바오리와, 미쓰나리로부터 받은 군배를 착용하고, 요시히로의 그림자가 되었다.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어 확실하지 않다. 요시히로의 이름을 사칭하여 분전하다가 쳐졌다는 설도 있고, 일부러 요시히로의 이름을 사칭하여 할복했다는 설도 있으며, 난전 끝에 가신 18명과 함께 마키타 우에노에서 전사했다는 설도 있다. 『사쓰마 번 구전집』에 따르면, 세이준을 쳐 죽인 것은 마쓰쿠라 시게마사의 가신 야마모토 요시즈미라고 한다.
2. 1. 출생과 출가
조주인 모리아쓰는 하타케야마 요리쿠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무로마치 막부의 유력한 슈고 다이묘인 하타케야마 씨의 서류를 칭했던 사쓰마 하타케야마 씨 출신이다. 아버지 요리쿠니가 사쓰마 반도 남쪽 끝의 보츠 부근으로 이주하여 낳은 아들이다.어린 시절에 다이죠인에서 불문에 들어가 다이죠인 세이큐 법인의 제자가 되었다. 기슈네고로지에서 8년간, 고야산의 목식 상인에게서 3년간 수행했다. 그 후 귀국하여 안요인의 주지가 되었다.
2. 2. 시마즈 가문 출사
조주인 모리아쓰는 하타케야마 요리쿠니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쓰마 하타케야마 씨는 무로마치 막부의 유력한 슈고 다이묘인 하타케야마 씨의 서류를 칭했다. 어린 시절 다이죠인에서 불문에 들어가 수행했으며, 시마즈 요시히사의 명으로 환속하여 측근으로 등용되었다. 덴쇼 14년 (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요시히사의 관계를 맺어주었으며, 규슈 평정에서 시마즈 씨가 불리해지자 화해를 주장했다.덴쇼 16년 (1588년) 가로가 되었고, 덴쇼 20년 (1592년)경에는 시마즈 요시히로의 노중(가로)이 되었다. 다이코 겐치에 입회하여 이시다 미쓰나리와 상담하며 시마즈 가문의 가신단 지행 배분에 관여하여 많은 가신들과 국인층의 원망을 샀으며, 이주인 고칸과도 대립했다.
게이초 5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가 시작되자 요시히로를 따라 참전했다. 도리가사카의 퇴각전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의 그림자가 되어 싸우다 전사했다.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2. 3. 다이코 겐치와 가신들의 반발
2. 4. 세키가하라 전투와 최후
조주인 모리아쓰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했다. 1600년 7월 말, 요시히로의 위급한 소식을 듣고 70명의 병사를 이끌고 급히 달려갔다. 9월 13일, 난궁산 부근에 도착하여 이시다 미쓰나리의 환영을 받았고, 같은 날 오가키 성에서 요시히로와 재회했다. 요시히로는 히데요시에게 받은 진바오리를, 미쓰나리는 군배와 부채를 선물하며 그를 격려했다.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패배하고 시마즈군이 고립되자, 모리아쓰는 요시히로의 대역을 자처하며 퇴각을 도왔다. 그는 요시히로에게 받은 진바오리와 미쓰나리에게 받은 군배를 착용하고 요시히로의 그림자가 되어 적진을 돌파했다.
모리아쓰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요시히로의 이름을 사칭하며 분전하다 전사했다는 설, 요시히로를 대신해 할복했다는 설, 난전 속에서 가신들과 함께 전사했다는 설 등이 있다. 마쓰쿠라 시게마사의 가신 야마모토 요시즈미가 그를 죽였다는 기록도 있다.
3. 아버지 하타케야마 요리쿠니
하타케야마 요리쿠니(?-1585)는 조주인 모리아쓰의 아버지이다. 킷칸겐(橘穏軒, 킷인겐, 橘陰軒이라고도 함)은 헌호이다. 하타케야마 나카쓰카사쇼유 집안은 막부 직속의 호코슈 집안 중 하나였다.[5]「고야산 사이인 라이고도 권진장」의 서명 순서로 볼 때, 하타케야마 일문에서 슈고 가문에 다음가는 입장에 있었다.[5]「본번인물지」에서는 하타케야마 나오무네의 아들 요리카네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지만, 「양 하타케야마 계도」에는 요리카네의 이름이 없다. 또한 「본번인물지」에서는 가와치 슈고로 기록하는 등 과장된 부분이 있지만, 막신의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덴분 14년(1545년)에 사쓰마로 내려갔다. 이듬해 1546년에 보노쓰의 이치조인이 칙원소로 보임되기를 희망했을 때, 전 관백 코노에 타네이에에게 주선하여 실현시킨 것이 최초의 사료이다. 겐키 2년(1571년)에는 키이리 스에요시와 함께 상경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에게 당입어복을 헌상하는 등[7] 교토의 인맥과 실적을 살리면서 조정과 쇼군가의 사자와의 응대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로서 시마즈 가문의 대외 교섭의 한 축을 담당했다.
4. 일화
조주인 모리아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평정 이후, 시마즈 요시히로의 중신으로서 중앙 정권과 시마즈 가문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중앙과의 관계에 소극적이었던 시마즈 요시히사는 이러한 모리아쓰의 노력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요시히사가 시마즈 다다쓰네에게 보낸 편지에는 "요시히로는 조슈인을 중용하고 있는 것 같지만, 훗날 후회할 것이 틀림없다"라는 내용이 남아있다. 모리아쓰 자신도 요시히사의 반감을 느껴 한때 검지 봉행 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참조
[1]
문서
阿多盛淳
[2]
문서
鹿児島市稲荷町
[3]
문서
鹿児島県日置市にあった廃寺
[4]
URL
https://www.pref.kag[...]
[5]
서적
畠山政近の動向と畠山中務少輔家の展開
[6]
문서
旧記雑録前編二
[7]
문서
旧記雑録後編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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