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증수
1. 개요
조증수는 전한 성제 때의 관료로, 좌풍익, 정위 등을 역임했다. 홍가 원년(기원전 20년) 여강 태수에서 좌풍익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정위가 되었다. 성제가 창릉 조성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주도자 진탕을 탄핵하여 돈황으로 유배 보냈다. 영시 3년(기원전 14년)에는 상산도위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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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의 정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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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한나라의 정치인 -
석편
석편은 전한 시대의 관료로, 기원전 138년에 내사에 임명되어 석경의 뒤를 이어 내사를 지냈으며, 정당시가 그의 후임자이다. -
전한의 정치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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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
전한의 정치인 -
장량
장량은 전국시대 말기부터 초한쟁패기를 거쳐 전한 초기에 활약한 한나라 귀족 출신 인물로, 유방을 도와 한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우고 유후에 봉해진 뛰어난 지략가이자 책사이다. -
전한 사람 -
전한 무제
전한의 제7대 황제인 전한 무제는 54년간 재위하며 유교 기반 중앙집권 강화, 흉노 정벌을 통한 영토 확장, 소금과 철의 전매제 등 경제 개혁을 추진하여 전한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나, 과도한 군사 지출, 사치스러운 생활, 무고의 난 등 부정적인 면모도 보였다. -
전한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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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緱起)는 전한 시대에 기후(騎虎)에 봉해지고 태상(太常)을 역임한 인물로, 기원전 32년 사망 후 그의 아들 구숭(求崇)이 기후 자리를 계승했다.
2. 생애
조증수는 전한 시대의 관리로, 홍가 원년(기원전 20년)에 여강태수에서 좌풍익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에는 정위가 되었다. 정위 시절에는 성제의 창릉 조성 사업 실패와 관련하여 일을 주도한 진탕을 탄핵하였다. 이후 영시 3년(기원전 14년)에는 상산도위로 좌천되었다.
2.1. 여강태수 및 좌풍익 시절
홍가 원년(기원전 20년)에 여강태수에서 좌풍익으로 승진하였다. 이듬해에는 정위가 되었다.
당시 성제는 진탕과 해만년의 제안을 받아들여 창릉(昌陵)을 만들고 백성들을 그곳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결국 능읍을 완성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조증수는 이 일을 주도했던 진탕을 탄핵하였고, 그 결과 진탕은 해만년과 함께 돈황으로 유배되었다.
영시 3년(기원전 14년)에는 상산도위로 좌천되었다.
2.2. 정위 시절과 진탕 탄핵
홍가 원년(기원전 20년) 여강 태수에서 좌풍익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인 기원전 19년에는 정위가 되었다.
정위 재임 시절, 성제는 진탕과 해만년의 건의에 따라 창릉(昌陵) 조성을 추진하며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등 대규모 사업을 벌였으나, 이는 결국 능읍을 완성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났다. 이에 조증수는 사업 실패의 책임을 물어 주도자였던 진탕을 탄핵하였다. 그의 탄핵으로 진탕과 해만년은 돈황으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은 당시 무리하게 추진되던 대규모 토목 공사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과 함께, 정위로서 조증수가 보여준 강직한 일면을 보여준다.
3. 관직 변천
홍가 원년(기원전 20년)에 여강태수에서 좌풍익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는 수도권 지역을 다스리는 삼보 중 하나인 중요한 직책이었다. 이듬해인 기원전 19년에는 구경의 하나로 법률을 담당하는 정위로 임명되었다.
정위 재임 중, 성제가 진탕과 해만년의 건의를 받아들여 창릉(昌陵)을 조성하고 백성을 이주시키려 했으나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조증수는 이 일을 주도했던 진탕을 탄핵하였고, 그 결과 진탕과 해만년은 돈황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영시 3년(기원전 14년)에는 상산도위로 좌천되었다.
아래는 조증수가 역임한 주요 관직을 정리한 표이다.
* 참고 문헌
** 반고, 《한서》 권19하 백관공경표 下, 권70 부상정감진단전(傅常鄭甘陳段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