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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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우규는 오대 십국 시대 후량의 황족으로, 후량 태조 주전충의 서자이다. 그는 912년 아버지를 살해하고 황위를 찬탈했으나, 무능하고 잔혹한 통치로 인해 913년 반란으로 살해되었다. 주우규는 아버지에게 소외당하며 난폭한 성격으로 성장했고, 영왕에 봉해진 후에도 군사적 능력과 덕망 부족으로 백성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결국, 그는 쿠데타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으며, 사후에는 서인으로 강등되어 정식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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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우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주우규 |
| 원래 이름 (한자) | 梁 廢帝 |
| 휘 (이름) | 주우규 (朱友珪) |
| 자 | 없음 |
| 소자 | 요희 (遙喜) |
| 작위 | 후량의 제2대 황제 영왕 (郢王) |
| 연호 | 봉력 (鳳曆) 913년 |
| 묘호 | 없음 |
| 시호 | 없음 |
| 생애 | |
| 출생 | 당나라, 광계(光啓) 2년 (886년) |
| 사망 | 후량, 봉력 원년 2월 17일 (913년 3월 27일) (27 - 28세) |
| 통치 | |
| 재위 기간 | 건화 2년 6월 5일 - 봉력 원년 2월 17일 (912년 7월 21일 - 913년 3월 27일) |
| 즉위식 | 건화 2년 (912년) 음력 6월 2일 |
| 이전 통치자 | 태조(太祖) |
| 다음 통치자 | 말제(末帝) |
| 연호 | 봉력 (913년) |
| 가족 관계 | |
| 부친 | 주전충 |
| 모친 | 기창 (씨명 불상) |
| 배우자 | 장황후 |
2. 생애
주우규는 당나라 광계(光啓) 연간(885년 - 888년)에 주전충이 박주(亳州)로 향했을 때 기녀와 관계를 맺어 낳은 서자이다.[3] 주전충은 당시 절도사였고, 주우규의 어머니는 보주(亳州, 현재의 보저우, 안후이성)의 군대 위안부였으며,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 전해지지 않는다.[3] 주전충은 아내 장부인을 존경하고 총애하여 두려워했기에, 주우규의 어머니를 현무의 수도 변주(汴州)로 데려가지 않고 보주의 저택에 머물게 했다.[3] 아들이 태어나자 주전충은 기뻐하며 야오시(遙喜, "먼 기쁨")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3]
어린 시절 주우규는 소질이 뛰어난 맏형 주우유와 자주 비교되고, 아버지로부터 노골적으로 소외당하여 난폭하고 잔인한 성격으로 자랐다고 한다. 907년 영왕(郢王)으로 봉해졌다.[1]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주우규는 당나라 광계(光啓) 연간(885년 - 888년)에 주전충이 박주(亳州)로 향했을 때 기녀와 관계를 맺어 낳은 서자이다.[3] 주전충은 당시 절도사였고, 주우규의 어머니는 보주(亳州, 현재의 보저우, 안후이성)의 군대 위안부였으며, 그녀의 이름은 역사에 전해지지 않는다.[3] 주전충은 아내 장부인을 존경하고 총애하여 두려워했기에, 주우규의 어머니를 현무의 수도 변주(汴州)로 데려가지 않고 보주의 저택에 머물게 했다.[3] 아들이 태어나자 주전충은 기뻐하며 야오시(遙喜, "먼 기쁨")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3]어린 시절 주우규는 소질이 뛰어난 맏형 주우유와 자주 비교되고, 아버지로부터 노골적으로 소외당하여 난폭하고 잔인한 성격으로 자랐다고 한다. 907년 영왕(郢王)으로 봉해졌다.[1]
2. 2. 즉위 전 활동
당나라 시대인 광계(光啓) 연간(885년 - 888년)에 주전충이 박주(亳州)로 향했을 때에 기녀와 관계를 맺어 낳은 서자이다.[4] 어린 시절 소질이 뛰어난 맏형 주우유와 자주 비교되고, 아버지로부터 노골적으로 소외당했다. 그 때문에 주우규는 난폭하고, 잔인한 성격으로 자랐다고 한다. 907년, 주전충은 애제에게 선위를 받아 후량을 건국하고, 주우규를 영왕(郢王)으로 봉했다.[4] (주우유는 이미 사망했으므로, 주우규는 황제의 가장 나이 많은 생존한 아들이었다.)910년, 태조는 주우규를 황궁 호위병인 정예 공학군(控鶴)의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삼공 중 하나인 사도(司徒)라는 명예직을 수여했다. 또한, 주우규에게 모든 비한 병사들을 통솔하는 장군 직함도 부여했다. 911년, 주우규는 모든 군대에 대한 규율 감찰관으로 추가 임명되었다.[3]
한편, 주우진의 어머니 장부인이 사망한 후, 태조는 점점 더 방탕해져 아들들이 군사 문제로 자리를 비울 때마다 그들의 아내들을 궁으로 불러 그를 시중들게 하고 종종 성관계를 가졌다. 주우문의 아내 왕부인이 특히 아름다워 태조의 총애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 동경 대량(즉, 이전의 변주, 태조가 낙양을 주요 수도로 삼은 후)의 수비군으로 있던 주우문을 그의 적합한 후계자로 믿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주우규는 태조가 주우문에게 보이는 총애에 특히 질투심을 느꼈다. 그는 또한 태조가 어떤 잘못을 저지른 그를 공개적으로 매질한 후 아버지에게 환멸을 느꼈다.[1]
후에 주전충은 양자 박왕(博王) 주우문에게 제위를 양위하고, 친자인 주우규를 주자사로 좌천하는 등 순조로운 후계 계승을 계획했다.[1] 912년 여름, 북방의 라이벌 진에 대한 원정 후 낙양으로 돌아온 태조는 병세가 위중해졌고, 주우문에게 제국을 맡기기 위해 왕부인을 대량으로 보내 주우문을 소환했다. 주우규의 아내 (역시 장씨)도 궁에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은밀히 주우규에게 말했다. "황제께서 황제의 옥새를 왕부인에게 주어 동경으로 가져가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곧 죽을 것입니다!" 더욱이, 7월 17일,[2] 태조는 또한 참모총장 경상에게 주우규를 래주 자사로 임명하고 즉시 그곳으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주우규가 자신을 죽이려는 다음 명령이 내려질 것이라고 믿게 했다. 그 당시에는 관리 처형 전에 먼저 유배 보내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1]
이 결정에 반발한 주우규는 선수를 쳐 아버지를 암살하고 제위를 빼앗아, 그 책임을 모두 주우문에 덮어씌우고 처자식을 처형해 버렸다. 7월 18일,[2] 주우규는 은밀히 황실 경호대 장군 한경(韓勍)을 만났는데, 그는 태조가 고위 관리와 장군들을 자주 처형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고, 따라서 주우규와 공모하기로 동의했다. 그날 밤, 그들은 군대를 이끌고 궁궐로 들어가 태조를 암살했다. 주우규는 직접 태조와 대면했고, 그의 시종 풍정악(馮廷諤)이 실제로 태조를 찔러 죽이는 일을 수행했다. 주우규는 태조가 아직 살아있는 척하며 궁궐 시종 정소보(丁昭溥)를 통해 태조의 이름으로 주우진에게 명령을 내려 당시 대량에서 황실 경호대 사령관이었던 주우문을 죽이라고 했다. 주유진은 그 명령을 수행했다. 그 후 주우규는 암살의 책임을 주유문에게 돌리고 왕위를 찬탈했다.[1]
2. 3. 찬탈과 통치
당나라 시대인 광계(光啓) 연간(885년 - 888년)에 주전충이 박주(亳州)로 향했을 때 기녀와 관계를 맺어 낳은 서자이다.[1] 어린 시절 소질이 뛰어난 맏형 주우유와 자주 비교되고, 아버지로부터 노골적으로 소외당했다. 그 때문에 주우규는 난폭하고, 잔인한 성격으로 자랐다고 한다.[1] 907년 영왕(郢王)으로 봉해졌다.[1]후에 주전충은 양자 박왕(博王) 주우문에게 제위를 양위하고, 친자인 주우규를 주자사로 좌천하는 등 순조로운 후계 계승을 계획했다. 이 결정에 반발한 주우규는 선수를 쳐 아버지를 암살하고 제위를 빼앗아, 그 책임을 모두 주우문에 덮어씌우고 처자식을 처형해 버렸다.[1]
아버지인 태조 주전충을 살해하고, 912년 제위를 찬탈한 주우규이지만, 죽은 아버지로부터 소외당한 사실에 알 수 있듯, 덕망이나 군사적인 소질에는 모자라고, 한편 살륙을 좋아하는 악평이 있는 인물이었다.[1] 주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인사나 포상을 행하였으나 호화스러운 생활을 보내 사람들의 불만을 샀고 금군(禁軍)의 불만이 폭발하였다.[1]
주우규가 즉위한 직후, 당시 허베이성, 한단에 위치한 위주(魏州)에서 잠재적인 후진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고 있던 고위 장군 양사후는 이 기회를 틈타 부유한 천웅군(天雄, 위주에 본부를 둠)을 장악했고, 주우규는 감히 양사후에게 도전하지 못했다.[1] 대신 그는 양사후를 천웅의 절도사로 임명하는 한편, 양사후에 의해 쫓겨난 천웅의 절도사 뤄저우한을 선의군(宣義, 현재 허난성, 안양)으로 전임시켰다.[1] 주우규는 이후 양사후를 소환하여 만나 그를 어르고 달래 후량 군인들의 존경을 받던 양사후가 자신을 지지하도록 하려 했다.[1] 그는 이후 양사후를 천웅으로 돌려보냈다.[1]
주우규가 태조의 죽음에 주우문을 비난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우규 자신이 태조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고, 많은 고위 장군들이 그에게서 멀어졌다.[1] 그는 그들을 회유하기 위해 포상을 주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특히 산시성, 윈청에 본부를 둔 호국군(護國)의 절도사 주유천은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했고, 주우규가 그를 뤄양으로 소환했을 때 주유천은 거부했다.[1] 이에 주우규는 주유천을 상대로 대대적인 토벌전을 선포하고, 캉화이전을 총사령관, 한칭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주유천은 이후 후진의 왕자 이존욱에게 항복하고 후진의 지원을 요청했다.[1] 캉화이전은 곧 호국의 수도인 하중부(河中)로 진격하여 포위했지만, 이존욱이 도착하여 캉화이전 휘하의 후량군을 격퇴했다.[1]
호국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우규는 스스로가 오만하고 방탕해져 장군들과 관리들을 더욱 소외시켰다고 전해진다.[1] 주우진은 그의 (그리고 주우규의) 처남인 조연과 사촌 위안샹셴과 공모하기 시작했다. 주유진은 또한 위주로 사자를 보내 양사후를 설득하여 자신을 지지하도록 했고, 양사후는 이에 동의했다.[1]
마침내 913년에 시위친군도지휘사(侍衛親軍都指揮使) 원상선(袁象先) 등이 궁중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주우규를 살해하고 그의 이복동생 주우정을 황제로 추대하였다.[1] 913년 봄, 당시 황실 근위 장군이었던 위안샹셴은 군사를 일으켜 궁궐로 진격했다.[1] 주우규, 장황후,[5] 그리고 펑은 궁궐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탈출구가 없음을 깨닫고 주우규는 펑에게 장황후를 죽이고, 그 다음 주우규 자신을 죽이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위안샹셴과 조연은 주유진에게 왕위를 제안했고, 주유진은 이를 받아들였다.[1]
사후에는 시호가 없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1] 구오대사 및 신오대사에는 그의 치세를 본기(本紀)에서 제외시켰다.[1]
2. 4. 최후
주우규는 912년 아버지 태조 주전충을 살해하고 제위를 찬탈했지만, 덕망과 군사적 소질이 부족하고 살육을 좋아한다는 악평을 받았다.[1] 주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인사와 포상을 했으나, 호화로운 생활로 백성의 불만을 샀다.[1]913년 봄, 황실 근위 장군이었던 위안샹셴이 군사를 일으켜 궁궐로 진격했다.[1] 주우규는 도망치려 했으나 탈출구가 없음을 깨닫고, 측근 펑에게 황후 장씨를 죽이고 자신을 죽이도록 명령했다.[1][5] 향년 28세였다.
이복동생인 주우정이 황위를 계승했다.[1] 주우규는 사후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고, 『구오대사』와 『신오대사』에는 본기(本紀)가 세워져 있지 않다.[1]
3.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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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우규가 사용한 연호는 봉력(鳳曆)이다.
4. 가족 관계
아버지 주온과 어머니 박주 출신 군대 매춘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장황후이다.
5. 평가
주우규는 자가 요희이며 주전충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성을 잃었고, 본래 보주 영기였다. 당나라 광계 연간에 황제가 보주를 순행하다가 그녀를 불러 시침을 들게 하였고, 한 달 남짓 후에 떠나려 하자 임신했다고 알렸다. 이때 원정 장후가 현명하고 총애를 받아 황제가 평소 꺼려하여 결국 대량으로 데려가지 못하고, 보주에 머물게 하여 별저에 두었다. 기한이 되자 기생이 아들을 낳았다고 알렸고, 황제는 기뻐하여 이름을 요희라고 지었다. 이후 변주로 데려왔다.
주전충이 후량을 건국한 뒤 영왕에 봉해졌다. 개평 4년 10월, 검교 사도, 좌우 控鶴都指揮使를 겸하고, 4번 장군을 관리했다. 건화 원년, 여러 군의 도우후를 맡았다. 건화 2년, 주전충을 시해하고 찬탈했다. 주우정이 군사를 이끌고 토벌하자 자살했으며, 서인으로 추방되었다.
오대사를 편찬한 구양수는 "양 태조는 신하가 임금을 시해했고, 주우규는 아들이 아버지를 시해했으니 똑같다. 시해하고 즉위하여 해를 넘겨 개원했다. 춘추의 법은 모두 임금으로 기록하는데, 어째서 주우규는 본기에 기록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양나라의 일은 분명하다! 그의 아버지의 악함은 그의 아들을 빼앗기 전에 드러났지만, 말제의 뜻을 펴지 않을 수 없다. 춘추의 법은 임금이 시해당했는데, 역적이 토벌되지 않으면, 나라의 신하와 아들이 그 책임을 져야 한다. 내가 주우규의 일에 대해 역적을 토벌하려는 뜻을 펴려는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6. 기타
참조
[1]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2]
웹사이트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sinocal.sinic[...]
[3]
서적
History of the Five Dynasties
https://zh.wikisourc[...]
[4]
서적
Zizhi Tongjian
https://zh.wikisourc[...]
[5]
서적
Bo Yang Edition of the Zizhi Tongjian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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