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타 요한
1. 개요
지타 요한은 루마니아 태생의 배우로, 1924년 브로드웨이에서 데뷔하여 연극 배우로 활동했다. 1931년 영화 《더 스트러글》로 스크린에 데뷔하여 《미이라》에 출연했으나, 할리우드 시스템에 비판적이었으며 연극 무대를 선호했다. 이후 여러 편의 연극과 영화에 출연했으며, 1993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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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미슈주 출신 -
버르토크 벨러
버르토크 벨러는 헝가리 민속 음악을 연구하여 고전주의, 낭만주의, 민속 음악을 결합한 독창적인 음악 스타일을 구축한 20세기 헝가리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민족음악학자이다. -
티미슈주 출신 -
헤르타 뮐러
헤르타 뮐러는 루마니아 출신 독일어 사용 작가로, 독재 체제의 폭력과 개인의 소외 등을 다룬 작품으로 200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
독일계 미국인 -
리처드 닉슨
리처드 닉슨은 제37대 미국 대통령으로, 외교 정책, 워터게이트 사건, 그리고 사임이라는 상반된 유산을 남겼다. -
독일계 미국인 -
앤드루 존슨
가난한 환경에서 독학으로 정치 경력을 쌓아 대통령이 된 앤드루 존슨은 남북전쟁 이후 온건한 재건 정책으로 의회와 갈등을 겪고 탄핵 소추를 받았으나 부결되었으며, 이후 상원의원으로 활동한 논쟁적인 인물이다. -
미국의 여자 연극 배우 -
에델 클레이턴
에델 클레이턴은 190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 뮤지컬과 영화에서 활동한 미국의 배우로, 무성 영화와 유성 영화 시대 모두에서 활약했으며 사후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었다. -
미국의 여자 연극 배우 -
헤다 호퍼
헤다 호퍼는 1930년대부터 가십 칼럼을 기고하며 유명해진 미국의 배우이자 칼럼니스트이며, 12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으며,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되었다.
2. 생애
요한은 1924년 브로드웨이에서 데뷔하여 연극과 영화 분야에서 활동했다. 클라크 게이블과 함께 연극 Machinal에 출연했으며, 이후 MGM과 계약했으나, 6개월 만에 계약을 해지했다.
1931년 D.W. 그리피스의 영화 더 스트러글에 출연하며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 영화는 그리피스의 알코올 중독 투쟁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되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다. 1932년 보리스 칼로프와 함께 출연한 미이라는 그녀의 대표작이 되었지만, 감독 칼 프로인트와의 불화로 어려움을 겪었다.
요한은 노라 모란의 죄(1933), 럭셔리 라이너(1933) 등에도 출연했으나, 미이라만큼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그녀는 할리우드를 싫어했고, 배우를 상품으로 취급하는 스튜디오 시스템에 비판적이었다. 결국 스튜디오와의 갈등 끝에 계약을 해지하고 연극계로 돌아갔다.
1920년대부터 1940년대 초까지 존 하우스먼, 오슨 웰스와 협력하며 다양한 브로드웨이 작품에 출연했다. 배우로서의 경력 외에도 작가로서 조안 울프(Joan Wolfe)와 엘리자베스 요크(Elizabeth Yorke)라는 필명으로 연극과 영화 대본을 썼다.
이후 지역 사회 봉사 활동에 헌신하며, 아이들을 위한 연기 수업을 하거나, 학습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연기를 가르쳤다. 1986년 공포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습격에 마지막으로 출연했다.
요한은 매 공연 전에 기도하는 영적인 사람이었으며, 자신을 "신비주의자"라고 묘사했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겪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는 전쟁 관련 자선 활동을 펼쳤다.
2.1. 초기 생애 (1904-1924)
지타 요한은 1904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테메스바르(현재 루마니아 티미슈 현)에서 태어났다. 바나트 슈바벤인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피슈키아(현재 루마니아 티미쇼아라 근처)에서 엘리자베트 요한(Elisabeth Johan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후사르 장교 슈테판 요한이었다.
1911년, 요한은 7살 즈음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연극에서 연기를 시작했고, 이후 극단 길드 레퍼토리 컴퍼니와 함께 페르 귄트, 악마의 제자, 뺨 맞는 남자에 출연했다. 1924년 브로드웨이에 데뷔했다.
2.2. 연극 경력 (1924-1942)
2.3. 영화 경력 (1931-1986)
요한은 1931년 D.W. 그리피스의 영화 더 스트러글에 처음 출연했다. 요한은 그리피스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그의 알코올 중독과의 투쟁에서 영감을 받은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되어 기뻐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듬해 그녀는 보리스 칼로프와 함께 출연한 미이라(1932)에 출연했다.
요한은 노라 모란의 죄(1933)와 럭셔리 라이너(1933) 등 다른 영화에도 출연했다. 이 영화들은 미이라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는 1986년 공포 영화 살아있는 시체들의 습격에 마지막으로 출연했다.
|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
| 1931 | 더 스트러글 | 플로리 윌슨 | |
| 1932 | 타이거 샤크 | 퀴타 실바 | |
| 미이라 | 헬렌 그로스버너 | ||
| 1933 | 럭셔리 라이너 | 미스 모건 | |
| 더 맨 후 데어드 | 티나 파벨릭 | ||
| 노라 모란의 죄 | 노라 모란 | ||
| 1934 | 그랜드 캐너리 | 수잔 트랜터 | |
| 1986 | 레이더스 오브 더 리빙 데드 | 사서 | |
| 1993 | D. W. 그리피스: 영화의 아버지 | 출연 (다큐멘터리) |
2.4. 기타 활동 및 사회 참여 (1940년대-1993)
1962년 뉴욕주 나이액의 Elmwood Playhouse에서 《Don Juan In Hell》을 연출했다. 오손 웰스와 함께 출연했으며, 학습 장애가 있는 사람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2.5. 개인사 및 사망
지타 요한은 1904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티미슈 현 테메스바르에서 태어났으며, 출생명은 엘리자베스 요한이었다. 독일어를 사용하는 바나트 슈바벤 출신으로, 도이치벤체크 (현재 루마니아 티미쇼아라 근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후사르 장교 슈테판 요한이었다. 1911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요한은 세 번 결혼했다. 1929년 10월 5일 존 하우스만과 첫 결혼을 했다. 월가 대폭락으로 하우스만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요한은 그에게 배우가 될 것을 제안했다. 이들은 1933년 9월 13일 이혼했다. 요한은 존 휴스턴과 잠시 교제했으나, 1933년 2월 휴스턴의 음주운전 사고로 부상을 입었다. 1935년 7월 9일, 은퇴한 영화 제작자 존 맥코믹과 결혼했지만, 맥코믹의 통제적인 성격과 알코올 중독으로 1938년 8월 18일 이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요한은 전쟁 관련 자선 활동을 했다. 세 번째 결혼은 경제학자이자 출판업자인 버나드 셰드(셰트니츠)와 1941년 4월 18일에 했으며, 1950년대에 이혼했다.
셰드와 결혼 후, 요한은 뉴욕 록랜드 카운티에 집을 마련하여 수십 년 동안 거주했다. 그녀는 재혼하지 않고 자녀도 없었지만, 지역 사회와 자선 활동에 헌신했다.
요한은 1993년 9월 24일 뉴욕주 나이액의 병원에서 폐렴으로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는 화장되었고, 유해는 뉴욕주 북부에 있는 가족 농장의 시냇물에 뿌려졌다.
3. 출연 작품
지타 요한은 연극과 영화 분야에서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1924년 브로드웨이에서 데뷔하여 1940년대 초반까지 여러 연극에 출연했다. 1931년 영화계에 데뷔하여, 1932년 보리스 칼로프와 함께 출연한 《미이라》에서 헬렌 그로스버너 역을 맡아 가장 큰 명성을 얻었다. 이후 《노라 모란의 죄》(1933), 《럭셔리 라이너》(1933) 등 여러 영화에 출연했으며, 1986년에는 공포 영화 《레이더스 오브 더 리빙 데드》에 마지막으로 출연했다.
3.1. 연극
3.2. 영화
지타 요한은 1931년 D.W. 그리피스의 영화 더 스트러글에 처음 출연했다. 요한은 그리피스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그의 알코올 중독과의 투쟁에서 영감을 받은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되어 기뻐했다. 이 영화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듬해 그녀는 자신의 가장 유명한 영화인 보리스 칼로프와 함께 출연한 미이라(1932)에 출연했다. 이 영화는 그녀의 환생과 신비주의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녀에게 완벽한 역할처럼 보였다. 그러나 감독 칼 프로인트는 촬영장에서 그녀에게 적대적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사자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상태에서 (나중에 삭제된) 장면을 촬영하도록 강요했고, 세미 누드 장면을 촬영하도록 하려 했다. 요한은 프로인트가 자신의 감독 데뷔가 실패할 경우 희생양으로 그녀를 내세웠다고 주장했다.
요한은 노라 모란의 죄(1933)와 럭셔리 라이너(1933) 등의 다른 영화에도 출연했다. 이 영화들은 미이라만큼 성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