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형씨
1. 개요
진주 형씨는 고구려 영류왕 때 당나라에서 8학사 중 한 명으로 파견되어 평양에 정착한 형옹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고려 시대에는 이부상서를 지낸 형병이 중시조이며, 형방, 형공미 등이 진주에 정착하여 진주를 본관으로 삼았다. 조선 시대에는 형사보, 형효갑 등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병사공파, 판사공파 등으로 분파되었다. 1985년에는 5,145명, 2000년에는 5,822명이 진주 형씨로 등록되었다.
2. 역사
진주 형씨(晋州 邢氏) 시조 형옹(邢顒)은 634년(고구려 영류왕 17년) 당나라 태종(太宗) 때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으로 8학사(八學士) 중 한 명으로 평양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벼슬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당(唐)나라 문화, 문학, 유교 보급에 공헌하고 관향(貫鄕)을 남양(南陽)으로 사향(賜鄕) 받아 뿌리를 내렸다.
중시조는 고려(高麗)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형병(邢昞)이며, 그는 850년(발해 이진왕 21년)에 출생하였다. 형옹의 13세손 형방(邢昉)은 1177년(고려 명종(明宗) 7년)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 대광보국(大匡輔國)을 지냈으며, 경상남도 진주(晉州) 반성(斑城)에 정착(定着)하였다. 15세손 형공미(邢公美)는 충렬왕(忠烈王) 때 왜구 정벌에 공을 세우고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2.1. 시조 및 기원
진주 형씨(晋州 邢氏) 시조 형옹(邢顒)은 634년(고구려 영류왕 17년) 당나라 태종(太宗) 때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으로 8학사(八學士) 중 한 명으로 평양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벼슬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당(唐)나라 문화, 문학, 유교 보급에 공헌하고 관향(貫鄕)을 남양(南陽)으로 사향(賜鄕) 받아 뿌리를 내렸다.
중시조는 고려(高麗)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낸 형병(邢昞)이며, 그는 850년(발해 이진왕 21년)에 출생하였다. 형옹의 13세손 형방(邢昉)은 1177년(고려 명종(明宗) 7년)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충목왕(忠穆王)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 대광보국(大匡輔國)을 지냈으며, 경상남도 진주(晉州) 반성(斑城)에 정착(定着)하였다. 15세손 형공미(邢公美)는 충렬왕(忠烈王) 때 왜구 정벌에 공을 세우고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형씨(邢氏)의 비조는 성왕(成王)때 즉 주공(周公)의 넷째 아들을 형후(邢候)로 봉(封)한 것이 기원이다. 형씨(邢氏)의 유래(由來)는 서주(西周: BC 1057년 ~ BC 771년) 무왕(武王)의 동생 휘(諱) 단(旦)의 건국호(建國號)는 주(周)이며, 넷째 아들인 휘(諱) 정연(靖淵)을 형후(邢侯)에 봉(封)한 것이다.
주공(周公)의 사적(史蹟) : 주(周) 나라는 웨이수이강(황하(黃河)로 흐르는 지류(支流))이 흐르고 있는 곳으로 당시의 수도(首都)는 시안(서주에서 당나라까지 사이의 수도였음)이고, 태공망(강태공)이 주(周)나라 초(初)의 정치가이다. 주나라의 서백이 죽은 후 큰 아들 발이 서백의 뒤를 이었으나, 주공(周公)이 건국(建國)하였다. 무왕(武王)의 동생인 주공(周公)에게는 노(魯)나라가, 태공망에게는 제 나라가 주어졌으며, 이것이 주(周)나라의 봉건제도의 시작이다.(수도는 호경) 무왕(武王)이 죽은 뒤 그의 아들이 왕위(王位)에 올라 성왕(成王)이 되니 주공(周公)이 어린 성왕(成王)을 도와 정치(政治)를 하였다.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에 의해 봉건제도(封建制度)가 정비(整備)되어 주왕조(周王朝) 300년의 기초(基礎)가 다져졌다. 주공(周公)은 주(周)나라의 정치가로서 후세(後世) 사람들에게 성인(聖人)으로 불리었으며, 공자(孔子)도 이상의 정치가로 존경하였다. 공자(孔子)는 춘추시대(春秋時代:B.C 562~479년) 때 노(魯)나라에서 태어났으며, 유교(儒敎)를 창시(創始)하였다.
2.2. 고려시대
634년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으로 당나라 8학사의 한 사람으로 평양에 들어온 형옹(邢顒)이 시조이다. 형옹은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이르렀으며, 당나라의 문화, 문학, 유교 보급에 공헌하고 관향(貫鄕)을 남양(南陽)으로 사향(賜鄕) 받아 뿌리를 내렸다.
중시조는 850년에 출생한 형병(邢昞)으로 고려 때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지냈다. 형옹의 13세손 형방(邢昉)은 1177년 고려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평장사(平章事) 대광보국(大匡輔國)에 이르렀으며, 경상남도 진주 반성(斑城)에 정착하였다. 15세손 형공미(邢公美)는 고려 충렬왕 때 왜구 정벌에 공을 세워 진양군(晋陽君)에 봉해졌다.
2.3. 조선시대
634년 고구려 영류왕의 요청으로 당나라 태종이 8학사의 한 사람으로 평양에 파견한 형옹(邢顒)이 진주 형씨의 시조이다. 형옹은 삼한벽상공신으로 삼중대광에 이르렀으며, 당나라의 문화, 문학, 유교를 보급하는 데 공헌하고 남양을 관향으로 하사받았다.
중시조는 고려 때 이부상서를 지낸 형병(邢昞)이다. 형웅의 13세손 형방(邢昉)은 1177년 문과에 급제하여 고려 충목왕 때 문하시중을 지내고 평장사 대광보국을 지냈으며, 경상남도 진주 반성에 정착하였다. 15세손 형공미(邢公美)는 고려 충렬왕 때 왜구 정벌에 공을 세워 진양군에 봉해졌다.
3. 분파
세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강계부사 등을 지내고 충청도 병마사를 지낸 18세손 형군철(君哲)을 파조로 하는 병사공파가 있으며, 전라남도 남평에 살았다. 19세손 형희(形希)는 장흥 형씨로 분파하였다.
18세손 형군소(君紹)는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평양윤을 거쳐 춘천, 회양, 강릉 등 삼도의 순찰사를 지낸 후 이부상서, 정당문학 등을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나 동문선에 '부벽루운'이 전해지는 판사공파의 파조이다.
4. 주요 인물
* 형적(邢積, 875년 ~ 928년) : 2세손. 고려 신호위상호군(神護衛上將軍)을 지냈다. 928년(고려 태조 11년) 임존성(任存城 :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형순(邢順, 895년 ~ ?) : 3세손. 예빈경으로 신라 경순왕이 나라를 고려에 넘겨주던 935년 후당(後唐)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석경당이 후당을 무너뜨리고, 후진(後晋)을 세우자 937년(고려 태조 20년) 5월 왕규와 함께 황제의 등극을 축하하는 사절로 다녀왔다. 그는 왕건 밑에서 문장과 지모를 발휘하여 밀직사(密直史)에 추봉됐다.
* 형사보(邢士保) : 조선 전기의 문신. 자는 중우(仲愚), 호는 지지당(止止堂)이고, 거창 출신이다. 부친은 형건(邢健), 형은 형사철(邢士哲)이다. 1510년(중종 5) 경오 식년시에서 생원에 합격되었고, 1522년(중종 17) 임오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종 조에 현량(賢良)으로 천거되었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1533년(중종 28)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를 지냈으나, 대간들의 논박으로 체직되었다. 1534년 합천군수(陜川郡守)에 제수되었으며, 곤양군수(昆陽郡守)를 역임했다.
* 형효갑(邢孝甲, 1571년 ~ ?)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성숙(誠叔)이다. 부친은 조산대부(朝散大夫) 군자감첨정(軍資監僉正)을 지낸 형탁(邢鐸)이다. 1610년(광해군 2) 식년시 생원 3등 46위로 입격하였고, 1616년(광해군 8) 별시에 46세의 나이로 응시하여 병과 15위로 문과 급제하였다. 박건갑(朴乾甲)‧유경갑(劉慶甲)과 합께 ‘대북3갑(大北三甲)’으로 불리면서 광해군 조에 활동했는데 모후(母后)를 폐위하도록 하는 등의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1616년(광해군 8)에 광해군은 그가 미리 글을 지어 와서 별시 과거에서 부정을 저질렀고, 또한 글의 내용에 임금을 비방한 내용이 있다고 판단하여 형효갑(邢孝甲)이 올린 대책문이 질문에 맞지 않는다며 그의 글을 과방에서 빼라고 명하였다. 이때 승정원‧사헌부‧사간원에서 그를 옹호하였으나, 임금이 재차 급제자 명단에서 그를 뺄 것을 명했다. 이와 관련하여 원이곤(元以坤)은 과거가 공정하지 않고 대간이 당파를 두둔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기도 하여 논란이 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유배를 당했다.
* 형의빈(邢義賓, 1684년 ~1722년) : 조선 중기 무신. 본관은 장흥(長興)이고, 거주지는 경기도 수원이다. 1694년(숙종 20) 알성시에 병과 2위로 무과 급제하였다. 1721년(경종 1) 김운택(金雲澤)‧김민택(金民澤)‧김조택(金祖澤)‧이기지(李器之)‧이천기(李天紀)‧윤휴경(尹休耕) 등과 함께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소생인 세자를 오해하였다는 혐의를 입은 김춘택(金春澤)의 일과 연루하여 먼 변경으로 정배(定配)하라는 상소가 있었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1722년(경종 2)에는 역모에 동참하여 환국(換局)을 도모하였다는 죄에 연루되어, 이언지(李彦之)와 함께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일곱 차례 형문(刑問)을 받았지만 끝내 죄를 인정하는 말을 하지 않았고, 경폐(徑斃)하였다. 향년 5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