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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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순왕은 신라의 제56대 왕으로, 927년 후백제의 견훤에게 경애왕이 살해된 후 왕위에 올랐다. 신라가 쇠퇴하자 935년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고려에 귀순했다. 그는 왕건의 딸 낙랑공주와 재혼하고, 고려의 사심관 제도의 첫 번째 인물이 되었으며, 고려 경종의 장인이 되었다. 경순왕은 978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묘는 경기도 연천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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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순왕 - 경순왕릉
경순왕릉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무덤으로, 경기도 연천군에 위치한 원형 봉토무덤이며 고려 왕릉에서 보이는 곡장이 둘려져 있는 특징을 가진, 신라 왕릉 중 유일하게 경주 지역 외에 위치한 유적이다. - 고려의 왕작 - 고려 양헌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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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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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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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김부(金傅) |
작호 | 정승공(政丞公) |
왕호 | 낙랑왕(樂浪王) |
시호 | 경순(敬順), 효애(孝哀) |
출생 | 897년 |
사망 | 978년 5월 18일 (80~81세) |
매장지 |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경순왕릉 |
신분 | |
신분 | 신라 제56대 국왕 |
재위 기간 | 927년 11월 ~ 936년 1월 13일 |
고려에서의 직위 | 경주사심관 |
재임 기간 (고려) | 935년 ~ 978년 5월 18일 |
가계 | |
왕조 | 신라 |
부친 | 신흥대왕 김효종 |
모후 | 계아태후 김씨 |
배우자 | 죽방부인, 낙랑공주 |
자녀 | 마의태자, 김덕지, 헌숙왕후 |
통치 | |
즉위 | 927년 |
선대 국왕 | 경애왕 |
후대 국왕 | 왕조 폐지 (태조 왕건이 고려의 왕으로 즉위) |
기타 | |
종교 | 불교 |
2. 생애
경순왕은 927년 신라 제56대 마지막 왕으로 즉위하여 8년간 재임하다 후삼국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하고 935년 나라를 고려에 바쳤다.[18] 아버지는 신흥대왕에 추봉된 효종이며, 어머니는 헌강왕의 딸인 계아태후이다. 신문왕의 6대손으로, 그의 가계는 문성왕으로부터 경순왕까지 이어진다.
경순왕은 927년 후백제 왕 견훤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19] 신라는 이미 쇠약해진 상태였고, 경순왕은 옛 신라 영토의 작은 부분을 다스리다가 935년 고려 태조에게 양위했다.[2][3] 그는 태조의 딸인 낙랑공주와 재혼했고, 경주의 사심관으로 임명되어 고려 ''사심관'' 제도의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4]
930년 정월 고려는 고창(지금의 경북 안동) 전투에서 후백제에 큰 승리를 거두고, 934년에는 후백제가 지배하던 웅진(지금의 충남 공주) 이북 운주(지금의 충남 홍성)의 30개 군현이 고려로 투항했다. 935년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갇혔다가 고려로 도망쳐 투항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왕건은 견훤을 상보라 높여 부르고, 양주(지금의 경기도 양주)를 식읍으로 주며 남궁에 머무르게 했다.
978년 4월 4일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묘는 대한민국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 있다.[4]
2. 1. 즉위 전
927년 11월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을 죽게 하고, 경애왕의 외사촌 동생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신라 제56대 왕인 경순왕이다.[19] 경순왕은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아버지 대아찬 김효종을 신흥왕에, 할아버지 각간 김인경을 의흥왕에 각각 추봉하였다.
2. 2. 즉위 과정 (927년)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경애왕의 외사촌 동생인 김부를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신라 제56대 왕인 경순왕이다.[19] 경순왕은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 아버지 대아찬 김효종을 신흥왕에, 할아버지 각간 김인경을 의흥왕에 각각 추봉하였다.2. 3. 재위 기간 (927년 ~ 935년)
927년 11월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경애왕의 외사촌 동생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신라 제56대 왕인 경순왕이다.[19] 경순왕은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어 왕위에 올랐다.경순왕은 재위 시 영토가 상실되고 국력이 쇠퇴하여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를 더 이상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견훤보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0년 이후 신라의 선필 장군이 고려에 항복하였다.[20] 고려 태조가 고창(경북 안동) 병산에서 후백제와 싸워 크게 승리하자, 경순왕은 고려와 친하게 지내는 정책을 더 강화했다. 후백제의 영안, 하곡, 직명, 송생 등 운주 경내의 30여 군현이 차례로 고려에 항복하였다.
931년 2월 경순왕이 태수 겸용을 보내 고려 태조에게 만날 것을 재차 요청하자 고려 태조가 기병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라벌(경주)을 방문했다. 경순왕은 백관들과 함께 교외에 나아가 영접하여 극진한 예우를 하고 연회를 베풀었다. 경순왕은 술기운이 오르자 고려 태조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 수가 없음을 하소연하며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 고려 태조는 수 십일을 머물면서 휘하의 군사들에게 엄숙하고 공정하여 털끝만큼도 규율을 범하지 못하게 하였다.[21] 5월에는 고려 태조가 경순왕과 태후 죽방부인을 비롯한 상국 김유렴 등의 신하에게 물품을 지급했다.[22]
고려 태조가 돌아갈 때 경순왕은 혈성까지 나가서 배웅하고, 사촌 동생인 김유렴[23]을 인질로 삼아 따라 보냈다. 도성의 남녀들이 감격하여 흐느끼면서 “옛날 견훤이 왔을 때에는 호랑이나 이리를 만난 것 같았는데, 이번 왕건이 왔을 때에는 마치 부모를 만난 것 같다.”고 기뻐했다.[24] 가을 8월에 고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임금에게 비단과 안장을 갖춘 말을 보내주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병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선물을 주었다.
930년 정월 고려는 고창(古昌, 지금의 경북 안동) 전투에서 후백제에 큰 승리를 거두고, 934년에는 후백제가 지배하던 웅진(지금의 충남 공주) 이북 운주(지금의 충남 홍성)의 30개 군현이 고려로 투항했다.
935년 음력 6월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전북 금산사에 갇혔다가 고려로 도망쳐 투항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왕건은 견훤을 받아들여 상보라 높여 부르고, 양주(지금의 경기도 양주)를 식읍으로 주며 남궁에 머무르게 했다.
이와 같이 사방의 영토는 다른 나라의 것이 되고 나라 형세는 고립되고 약해져서,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버틸 수 없었다. 고려의 세력은 점차 커지고, 민심도 신흥 국가인 고려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2. 4. 고려 귀순과 신라 멸망 (935년)
927년 견훤이 신라 수도 금성을 기습하여 경애왕을 죽게 하고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우니 이가 신라 제56대 왕 경순왕이다.[19] 경순왕은 경애왕이 갑작스럽게 죽게 되어 왕위에 올랐다.경순왕은 재위 기간 동안 영토 상실과 국력 쇠퇴,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인해 견훤보다 왕건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930년 이후 신라 장군 선필이 고려에 항복하고, 고려 태조가 고창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자, 경순왕은 고려와 친하게 지내는 정책을 강화했다.[20]
931년 경순왕의 요청으로 고려 태조가 서라벌(경주)을 방문했을 때, 경순왕은 고려 태조의 손을 붙잡고 견훤 때문에 살 수 없음을 하소연하며 눈물을 흘렸다.[21] 고려 태조가 돌아갈 때 경순왕은 사촌 동생 김유렴[23]을 인질로 보냈고, 도성 백성들은 왕건을 부모처럼 만난 것 같다고 기뻐했다.[24]
930년 고려는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에 승리하고, 934년에는 웅진 이북 운주의 30개 군현이 고려에 투항했다. 935년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갇혔다가 고려로 투항하자, 고려의 세력은 점차 커지고 민심도 고려로 기울어졌다.
935년 음력 10월, 경순왕은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고려 투항을 논의했다. 왕자는 1천 년 사직을 가벼이 남에게 줄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경순왕은 백성을 위해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청했고, 신라는 멸망했다.
태자와 막내 왕자 덕지는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태자는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다가 생을 마쳤고, 덕지는 화엄종에 귀의하여 승려가 되었다.[25]
삼국사기에 따르면 마의태자는 아버지의 고려 항복에 반대하여 금강산에서 은둔 생활을 했다.[5][6] 경순왕은 935년 고려 태조에게 양위했다.[2][3]
2. 5. 고려 귀순 후
935년 음력 6월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전북 금산사에 갇혔다가 고려로 도망쳐 투항하였다. 왕건은 견훤을 상보라 높여 부르고, 양주(지금의 경기도 양주)를 식읍으로 주며 남궁에 머무르게 했다.[26]사방의 영토는 다른 나라의 것이 되고 나라 형세는 고립되고 약해져서,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 버틸 수 없었다. 고려의 세력은 점차 커지고, 민심도 신흥 국가인 고려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서라벌을 출발하여 고려 송악(지금의 개성)으로 향하자 화려하게 장식한 수레가 30리 넘게 이어져 사람들과 도로가 꽉 메이었으며 구경꾼들이 담장을 두른 듯했다.[26]
경순왕이 왕철 등의 안내를 받아 송악에 도착하자 고려 태조가 교외에 나와 영접하며 위로하고, 궁궐 동쪽 유화궁에 머물도록 했다.
고려 태조가 경순왕에게 “지금 왕께서 과인에게 나라를 주었으니 그것은 매우 큰 은혜입니다. 원컨대 종실과 혼인하여, 장인과 사위의 좋은 관계를 영원히 하고자 합니다.”라 하며, 고려 태조가 정전에 문무 백관을 모아놓고 예를 갖추어 큰딸 안정숙의공주(일명 낙랑공주)[27]를 시집보내고 왕을 사위로 삼았다.[28] 이후 아홉째 딸인 ‘공주’도 경순왕에게 시집보냈다.[29]
935년 12월 경순왕을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공으로 삼아 봉하고, 해마다 녹봉으로 섬을 주고, 같이 따라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식읍으로 삼도록 하고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였다.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937년 (태조 20) 5월 경순왕이 진평왕이 차던 허리띠로 알려진 성제대를 왕건에게 바쳤다.[30][31]
경순왕은 고려 태조에게 백부 잡간 김억렴[32]의 딸을 권하여 고려 태조가 후비로 맞이하였는데, 그녀가 제5왕후인 신성왕후 김씨이다. 슬하에 아들은 고려 안종으로 추존된 왕욱으로 그는 고려 제8대 왕 고려 현종의 아버지이다.
975년 10월 경순왕은 슬하의 첫째 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고려 제5대 왕인 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현숙왕후 김씨이다.[33]
이 일로 고려 경종은 경순왕을 특별히 배려하여 위계를 태자의 위인 상보령으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정종·광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2. 6. 사망과 묘
978년(고려 경종 3) 무인년 4월 4일에 사망하였다. 시호는 경순(또는 효애라고도 한다.)이었다. 원래 경순왕의 시신은 다른 신라의 왕릉이 있는 경주로 운구하려 하였으나, 고려 왕실에서 왕의 영구는 도성 밖 100리를 넘을 수 없다고 반대하여 임진강을 건너지 못하고 현재의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남쪽 고랑포 8리 계좌 언덕에 안장하였다.[1] 그의 묘는 대한민국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에 있다.[4]3. 가족 관계 및 후손
경순왕의 가계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되어 있다. 왕후 죽방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왕자를 두었는데,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각각 태자, 계자로만 기록되어 있다. 계자는 범공(梵空)이라는 승명이 전해진다.[38]
1784년 개성에서 발견된 경순왕의 4남 김은열의 묘지명에는 형은 '일, 굉, 명', 동생은 '중석, 건, 선, 종'이라 기록되어 있다. 특히 2남 김굉과 4남 김은열은 고려 태조의 외손녀인 낙랑공주 왕씨 소생으로, 평장사를 역임하고 공이 있어 특별히 성북 십리 밖 오룡산 남쪽 삼십리 주변을 장지로 하사받았다고 한다. 1785년 후손 경주 김씨 김사목이 족보를 만들면서 2남 김굉을 김황으로, 3남 김명을 김명종으로 개명하고 시호를 붙이는 등 내용을 추가하였다. 이후 일부 경주 김씨 족보에 이들 8명의 이름이 등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김은열 묘지명》은 작성자가 없고, 부인 및 생애 등이 기록되지 않아 완전하지 않다고 평가받는다.[46]
경순왕의 가족 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 | 이름 | 비고 |
---|---|---|
5대조 | 문성왕 | |
고조부 | 김안 | 상대등 |
증조부 | 김민공 | 각간 |
조부 | 김인경 | 의흥대왕[34] (김실홍[35] 또는 김관유[36]) |
부왕 | 김효종 | 신흥대왕 |
모후 | 계아태후 | 헌강왕의 딸 |
왕후 | 죽방부인[37] | |
장남 | 태자[38] | |
차남 | 김덕지[39] | |
제1 후배 | 낙랑공주 왕씨[40] | |
1녀 | 헌숙왕후 김씨[41] | 고려 경종에게 출가 |
제2 후배 | 공주 왕씨[42] |
《김은열 묘지명》 및 일부 족보에 기록된 아들들은 다음과 같다.
순서 | 이름 | 비고 |
---|---|---|
1남 | 김일[43] | |
2남 | 김굉 (개명 후 김황)[44] | |
3남 | 김명 (개명 후 김명종)[45] | |
4남 | 김은열[46] | |
5남 | 김중석 (개명 후 김석)[47] | |
6남 | 김건[48] | |
7남 | 김선[49] | |
8남 | 김종 (개명 후 김추)[50] |
4. 묘소 실전 및 발견
경순왕의 묘는 실전되었다가, 1727년(영조 3) 안동인 김굉이 '경순대왕장지'라는 6자가 새겨진 지석을 발견하고, 1746년(영조 23) 10월 14일 동지 김응호가 경기도 장단에서 경순왕 '지석' 및 '신도비'가 나왔음을 알리는 상소를 올렸다.[51] 그 후속 조치로 1747년 4월 20일 김성운(강원·충청감사), 김응호(첨정) 등으로 하여금 능묘를 봉축하고 묘비를 다시 세우게 하고, 장단부사 심봉징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51]
그로부터 장단부에서는 매년 3월 1일과 10월 1일에 춘추 향사를 올리고, 관군으로 하여금 수호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현재의 경순왕릉 모습이 유지 보존되었다. 경북 경주 황남동의 숭혜전, 하동 청암면의 경천묘 등에도 제향되었다.
1748년(영조 24) 경순왕릉 인근 경기도 연천군 장단면 고랑 마을 민가에서 경주 김씨 김빈과 김굉 등이 '경순왕릉 신도비'도 발견하였는데, 비석의 재질은 화강석을 깎아 만든 것으로 가운데 차돌이 드러나 있다. 비문은 자연 풍화 등으로 심하게 마멸되어 전혀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비신 중간과 하단의 일부분에서 "경순왕(敬順王), 김(金), 시월여친지국(十月輿櫬至國)" 10자 정도만 남아 있다. 비석의 크기는 높이가 132cm, 폭이 67cm, 두께가 15cm-18cm이다.
이 비는 6·25 전까지 고랑포리 시가지에 있었으나 수복 전후 도로변에 방치되어 오던 것을 1973년 원당리 고랑포초등학교로 이전하였다가, 1986년 경순왕릉 정화사업에 따라 현재 위치로 옮겨지고 비각 및 재실을 새로 건립하였다.
5. 경순왕 영정
경순왕의 어진(왕의 초상화)은 통일 신라 멸망 직후인 고려 초에 처음 제작되었다.[52] 경순왕을 추모하기 위해 그려진 이 어진은 강원도 원주시 고자암에 보관되었다.
이후 원본은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 이를 모사한 작품 5점이 전해진다. 5점은 다음과 같다.
- 1677년(숙종 2년) 강원도 원주 고자암에서 제작
- 1749년 경상북도 영천 은해사 상용암에서 제작
- 1794년 초상화가 이명기가 은해사본을 보고 다시 그림
- 1904년(광무 8년) 승려 출신 대한제국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 본을 보고 다시 그림
- 이진춘 본의 초본
이 어진들은 경순왕 사당인 경상북도 경주시 숭혜전 창고에 방치되어 오다가 2007년에 처음으로 그 존재가 확인되었다. 이후 국립경주박물관에 위탁 보관되었지만, 그 전모는 알려지지 않았다.[52]
대한제국 시절 그려져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산 107-1 경천묘에 봉안 중인 '경순왕 어진'은 2008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로 지정되었다.[53]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웹사이트
King Gyeongsun
http://100.nate.com/[...]
[2]
뉴스
Goryeo: the dynasty that offered Korea its name
https://www.koreatim[...]
2012-04-04
[3]
논문
The Characteristics of Silla's Gongbang
https://ijkh.khistor[...]
2009-08
[4]
웹사이트
King Gyeongsun
http://100.naver.com[...]
[5]
웹사이트
Crown Prince Ma-ui
http://100.naver.com[...]
[6]
뉴스
The legends behind Korea's favorite fall foliage
https://koreajoongan[...]
2021-11-18
[7]
뉴스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왕조의 종말 - 중앙일보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11-11-23
[8]
문서
시호가 효애(孝哀)라고도 한다.
[9]
서적
삼국유사
[10]
웹사이트
http://unyangkim.or.[...]
[11]
서적
삼국유사
https://db.history.g[...]
[12]
문서
《삼국사기》에 서발한(舒發翰) [[김인경 (신라)|김인경]](金仁慶)의 아들 [[김효종 (신라)|김효종]]이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부잣집에 자신의 몸을 팔아 종이 된 효녀 지은(知恩)의 몸값을 갚아 양민으로 만들어주자, 정강왕(定康王, 재위 886~887)이 이를 대견하게 여겨 그를 헌강왕의 딸과 혼인시켰다고 하였다.
[13]
문서
일설에 죽방부인(竹房夫人)을 경순왕의 모후(母后. 왕의 어머니)라 주장하나, 이는 《[[고려사]]》 오역(誤譯)에서 바롯된 결과라 할 것이다. 《[[고려사]]》는 [[신라]] 멸망 후 [[1451년]] 조선 문종 1년에 완성된 고려시대 역사서로, [[고려]] 입장에서 [[신라]] 경순왕을 선왕으로 보고 그의 왕비인 죽방부인을 선왕 경순왕의 태후(太后)라 기록하였던 것이다.
[14]
문서
두 아들의 이름은 사기에 전하지 않으나, 첫째 아들을 후대에 [[마의태자]]라 부르며, 막내 아들은 문헌에 [[김덕지]]라 한다.
[15]
문서
신명순성왕후 유씨 소생
[16]
문서
성무부인 박씨 소생
[17]
뉴스
[박종인의 땅의 歷史] 고랑포 좁은 물길에서 1500년 역사를 보았다 – 조선일보
https://news.chosun.[...]
조선일보
[18]
서적
삼국사기, 신라경순왕전비(新羅敬順王殿碑. 1814년)
[19]
문서
신라는 제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 때부터 고려의 세력에 의지해 후백제를 견제하려는 정책을 펼쳐왔다. 그래서 927년 정월에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자 군사를 보내 그를 돕기도 했다.
[20]
문서
신라 6두품 출신의 재암성장군 최선필(崔善弼) 대장군을 말한다. 『고려사』 권92, 열전5, 왕순식(王順式) 부 선필(善弼)전 참조
[21]
문서
삼국유사에는 무자년 928년(경순왕 2) 3월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22]
서적
고려사 권2 태조14년
[23]
문서
金裕廉 또는 金庾廉
[24]
서적
고려사 권2 태조14년
[25]
서적
삼국유사 제2권 기이(紀異) 제2 김부대왕(金傅大王)
[26]
서적
삼국사기
[27]
문서
신명순성왕후 유씨 소생이다.
[28]
문서
삼국유사에 경순왕이 자기 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에 와서 산다고 어미에게서 떨어져 사는 난조(鸞鳥)에 비유해 공주를 신란공주(神鸞公主)라고 고쳐 불렀으며, 시호를 효목(孝穆)이라고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29]
문서
성무부인 박씨 소생이다.
[30]
문서
고려사 고려 태조가 신라의 사신 김률(金律)에게 “신라에는 장육금상(丈六金像)주4)과 9층탑주5) 및 성제대(聖帝帶)라는 세 가지 보물이 있는데 이 보물들이 남아 있는 한 나라가 망하지 않는다고 들었다. 지금 탑과 불상은 그대로 있으나 성제대는 남아있는지 모르겠다.”고 물었다.
[31]
문서
삼국유사에는 천사옥대(天賜玉帶)라 기록되어 있다.
[32]
문서
경순왕의 아버지인 신흥대왕(神興大王)에 추존된 효종(孝宗)의 동생이다.
[33]
문서
삼국유사에는 헌승황후(憲承皇后)라 기록되어 있다.
[34]
서적
삼국사기
[35]
서적
신라경순왕전비
[36]
서적
삼국유사
[37]
서적
고려사
[38]
문서
역사에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39]
문서
하서 김인후 가장에 이름이 김덕지라 한다.
[40]
비석
신라경순왕전비
1814
[41]
서적
고려사
1814
[42]
문서
고려 태조와 성무부인 박씨 소생의 딸로 외조부는 호족 박지윤이다.
[43]
비석
신라경순왕전비
1814
[44]
비석
신라경순왕전비
1814
[45]
비석
신라경순왕전비
1814
[46]
문서
조선 후기 경주 김씨 은열공파에서 시조로 소원시킴
[47]
문서
조선 후기 의성 김씨에서 시조로 소원시킴
[48]
문서
조선 후기 (후)강릉 김씨 김건계에서 시조로 소원시킴
[49]
문서
조선 후기 언양 김씨에서 시조로 소원시킴
[50]
비석
신라경순왕전비
1814
[51]
비석
신라경순왕지릉
1747
[52]
뉴스
‘비운의 경순왕’ 초상화 첫 공개
http://news.donga.co[...]
동아일보
2010-06-02
[53]
뉴스
경천묘 ‘경순왕 어진’- 경남도유형문화재 지정
http://www.gnmaeil.c[...]
경남매일
2008-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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