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수
1. 개요
최영수는 1942년 경상북도 경산군 출생으로, 1970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여러 성당에서 주임신부로 활동하며 성당 건축과 청소년 사목에 헌신했다. 그는 가톨릭신문 사장, 대구 평화방송 초대 사장,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언론, 사회 정의, 생명 존중 운동에 기여했다. 2000년 대구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되었으며, 2007년 대구대교구장에 착좌하여 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2009년 교구장직을 사임하고 투병하다가 선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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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최영수 |
|---|---|
| 세례명 | 요한 |
| 로마자 표기 | Choi Yeong-su |
| 직함 | 대주교 |
| 소속 교구 | 천주교 대구대교구 |
| 관구 | 대구관구 |
| 출생일 | 1942년 3월 23일 |
| 선종일 | 2009년 8월 31일 |
| 선종 장소 | 대구 가톨릭대학교병원 |
| 안장지 | 대구시 중구 남산동 교구성직자 묘지 |
| 종교 | 천주교 |
| 좌우명 | 그리스도와 함께 |
| 사제 서품일 | 1970년 11월 6일 |
|---|---|
| 주교 서품일 | 2001년 2월 27일 |
| 대구대교구장 임기 시작 | 2007년 3월 29일 |
|---|---|
| 대구대교구장 임기 종료 | 2009년 8월 17일 |
| 전임자 | 이문희 바오로 |
| 후임자 | 조환길 타대오 |
| 모교 | 가톨릭대학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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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대구대교구장 -
노기남
노기남은 한국 최초의 주교이자 서울대교구 초대 대주교로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기여했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
조환길
조환길은 1954년 대구 출생으로 1981년 사제 서품을 받고 대구대교구에서 사목하다가 2010년 대구대교구 교구장에 임명된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대주교이다. -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대주교 -
윤공희
윤공희는 1950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광주대교구 대주교를 역임하며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시민들을 보호하고 민주주의 회복에 헌신한 대한민국 로마 가톨릭교회 성직자이다. -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대주교 -
조환길
조환길은 1954년 대구 출생으로 1981년 사제 서품을 받고 대구대교구에서 사목하다가 2010년 대구대교구 교구장에 임명된 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 사제이자 대주교이다. -
경산시 출신 -
최경환 (1955년)
최경환은 행정고시 합격 후 공직과 한국경제신문 논설위원을 거쳐 이회창 후보 경제특보를 지냈으며, 4선 국회의원, 지식경제부 장관,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을 역임하며 '초이노믹스'를 추진했으나, 국정원 특활비 뇌물 수수 혐의로 의원직을 상실하고 복권 후 22대 총선에서 낙선한 정치인이다. -
경산시 출신 -
윤두현
윤두현은 언론인 출신 정치인으로 서울신문, YTN 기자, YTN 보도국장, 디지털YTN 대표이사 사장, 청와대 홍보수석비서관을 거쳐 제21대 국회의원, 국민의힘 미디어 관련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그랜드코리아레저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2. 일대기
최영수는 1942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남을 배려하고 겸손한 성품으로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1970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영천성당, 산격성당, 경주 성동성당 등에서 주임 신부로 활동하며 성당 건축과 청소년 사목에 헌신했다. 특히 산격성당에서는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성당 건축을 위해 헌신한 일화가 유명하다.
1995년부터 가톨릭신문 사장, 대구 평화방송 초대 사장 등을 역임하며 언론을 통한 선교 활동에 힘썼다. 또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사형 폐지 운동, 새만금 갯벌 살리기 운동 등 사회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00년 대구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된 후, 이문희 대주교를 보필하며 교구 발전에 기여했다. 2007년 대구대교구장에 착좌한 후에는 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2009년 건강상의 이유로 대교구장직을 사임하고 투병하다가, 같은 해 8월 31일 향년 67세로 선종했다. 장례 미사는 대구가톨릭대학교 성 김대건 기념관에서 거행되었으며, 유해는 대구대교구청 내 교구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지 크기는 3.96m2이다.
2.1. 초기 생애와 사목 활동
1942년 3월 23일 경상북도 경산에서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아버지 최석암(비오)과 어머니 김정식(막시마) 사이에서 7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신앙심 깊은 부모님의 영향으로 맑고 고운 심성을 지니고 자랐으며, 주변 사람들을 돕고 겸손한 자세로 생활하여 주위의 신망을 얻었다. 동창인 최재용 신부(수원교구 수원대리구장)는 훗날 최영수 대주교가 보좌주교로 임명될 당시 가톨릭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남을 헤아릴 줄 아는 고운 성품을 지녀 동창들이 잘 따랐다"라고 회고했다.
1970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최영수는 영천성당, 산격성당, 경주 성동성당 등에서 주임신부로 활동하며 성당 건축과 청소년 사목에 헌신했다. 특히 산격성당에서는 성당 건축을 위해 연탄가스 중독과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어려움 속에서도 헌신한 일화가 유명하다. 경주 성동성당에서는 공소 건립 예산의 3배를 지원하여 양남성당 건립에 기여했고, 영천성당에서는 신앙학교를 처음 도입하여 청소년 교육에 힘썼다.
2.2. 언론 및 사회 활동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제17대 가톨릭신문 사장을 역임했으며, 1996년부터 2001년까지 대구 평화방송 초대 사장으로 개국을 주도하는 등 선교 활동에 힘썼다. 2001년부터 2004년까지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대사회적으로 생명문화 정착과 인간존엄성을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무엇보다 최 주교는 사형 폐지 운동과 반생명법인 모자보건법 폐지 운동 등에 발 벗고 나섰다. 타 종단 지도자들과 함께 사형 폐지에 대한 종교인들의 뜻을 모으는 데 구심적 역할을 했으며, 2001년 6월 국회 회관 내 대회의실에서 최초로 6대 종단이 연합해 사형 폐지 행사를 열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새만금 갯벌 살리기 등 환경 운동에도 힘썼다. 당시 주교회의 차원에서 처음으로 새만금 간척 사업과 관련해 공식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2.3. 대구대교구 보좌주교 및 대주교
2000년 12월, 최영수는 대구대교구 보좌주교로 임명되어 이문희 대주교를 보필하며 총대리직을 수행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열린 제1차 교구 시노드의 후속 사업으로 대리구 체제 정착과 소공동체 운동 활성화에 힘썼다.
2007년 4월 30일, 대구대교구장에 착좌하여 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제2차 교구 시노드, 100주년 기념 대성전 건립, 100주년사 편찬 등을 추진했다.
2.4. 투병과 선종
Archidioecesis Daeguensis라틴어장 직을 사임한 2009년 8월 17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최영수 대주교의 사임을 수락했다. 이후 대구가톨릭대학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2009년 8월 31일 오전 6시 20분, 향년 67세로 선종하였다. 최영수 대주교의 마지막 순간에는 교구장 직무대행 조환길 주교, 유가족, 의료진, 그리고 몇몇 교구청 사제들이 함께했다. 대구대교구 사무처장 하성호 신부는 “대주교님께서 병환 중에서도 교구 100주년과 교구 발전을 위해 노력해 달라고 하시며 선종하실 때까지 교구를 위해 기도하셨다.”라고 전했다.
선종 직후, 대구 가톨릭대병원 장례식장 지하 1층 참관실에서 첫 연도가 바쳐졌고, 유해는 유가족들이 함께한 가운데 계산성당으로 옮겨졌다. 계산성당에는 빈소가 마련되었고, 많은 신자들이 최 대주교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장례미사는 2009년 9월 4일에 거행되었다. 장례 절차는 계산성당에서 열린 출관 예절로 시작되었고, 운구 차량은 대구가톨릭대학교 남산동 캠퍼스 성 김대건 기념관으로 이동했다. 장례미사는 조환길 주교의 주례로 한국 천주교 주교단과 대구대교구 사제단의 공동 집전으로 거행되었다. 성 김대건 기념관에는 사제와 시민 3천여 명이 장례미사를 함께했고, 입장하지 못한 신자 3천여 명은 기념관 앞에 마련된 대형 스크린을 통해 장례미사를 지켜보았다.
하관 예절은 대구시 중구 남산동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내 교구성직자 묘지에서 치러졌다. 최 대주교는 수의 대신 제의를 입고 주교관을 쓰고 손에 묵주를 든 채 대주교 문장이 새겨진 향나무 관에 입관되었다. 묘지는 3.96m2 넓이로, 흙으로 봉분을 한 다음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에 석판을 덮고, 따로 상석이나 제대를 쌓지 않았다. 이는 성직자들의 검소한 삶을 반영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