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기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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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기남은 1902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나 용산 소신학교, 프랑스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는 명동성당 보좌신부, 계성초등학교 운영을 담당하며 장면과 인연을 맺었고, 일제강점기에는 경성대목구장으로 임명되어 한국인 최초의 주교가 되었다. 해방 후에는 가톨릭 교회 재건에 힘썼으며, 서울대교구 대주교를 역임하고 한국천주교주교회의를 설립했다. 1967년 은퇴 후 1984년 선종했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로 불리지만,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과 해방 후 정치 관여로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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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기남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존칭 접두사 | 가장 존경하는 |
| 이름 | 노기남 |
| 존칭 접미사 | 대주교 |
| 직함 | 서울대교구 대주교 |
![]() | |
| 출생일 | 1902년 1월 22일 |
| 출생지 | 대한제국 평안남도 중화군 |
| 사망일 | 1984년 6월 25일 |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 국적 | 한국인 |
| 종교 | 천주교 |
| 사목 정보 | |
| 소속 교구 | 서울 |
| 임기 시작 | 1962년 |
| 임기 종료 | 1967년 3월 23일 |
| 전임자 | 아드리앵 라리보 |
| 후임자 | 김수환 |
| 기타 직책 | 티툴리의 명의 대주교 |
| 성직 정보 | |
| 사제 서품일 | 1930년 10월 26일 |
| 주교 서품일 | 1942년 12월 20일 |
| 주교 서품자 | 아드리앵 조제프 라리보 |
| 교계 | 대주교 |
| 사목 표어 | 당신의 뜻대로 (Fiat voluntas tua) |
| 개인 정보 | |
| 묘소 | 용인 천주교 공원묘원 |
| 부모 | 노성구 (부) |
| 학력 | 예수성심신학교 소신학교•대신학교 |
| 성인 정보 | |
| 기타 정보 | |
2. 생애
노기남은 1902년 1월 22일 평안남도 평양부 율리면 무진동의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장연이다. YMCA 청년학당을 거쳐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장면(뒷날 대한민국 부통령 역임)을 만났다. 1917년 프랑스 신부들이 운영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 사제 서품을 받아 종현성당 보좌신부 겸 계성보통학교(현 계성초등학교) 운영을 맡았다.
1942년 11월 10일 경성대교구장에 임명되었고, 12월 20일 한국인 최초로 주교 서품을 받았다.[13] 일제강점기 말, 일제의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아드리앵 라리보 주교가 사임하면서, 그의 비밀 추천으로 경성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평양대목구장과 춘천지목구장 서리직도 겸임하였다. 일중전쟁 발발 후, 일본의 교회 압박과 동화 정책에 대응하며 교회 보호에 힘썼다. 창씨개명으로 사용한 일본식 이름은 “오카모토 테츠지(岡本鉄治)”이다.
1945년 해방 후, 한국 가톨릭 교회 제도 설정에 힘써 1962년 12월 20일 한국 천주교회는 자립교회로 인정받아 대목구에서 교구로 승격되었다. 노기남은 서울대교구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었고,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를 설정하는 등 한국교회 안정에 기여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반발한 김구의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고,[4] 장면에게 정계 진출을 권유하기도 했다. 1948년 5월부터 8월까지는 대구교구장을 겸임했다.
1962년 서울대교구 초대 대주교로 임명된 후,[1] 한국천주교주교회의를 설립하여 한국 천주교회 안정에 기여했다.[1] 1963년 대한민국 국민훈장을 받았고,[1] 1965년 이탈리아 문화훈장을 받았으며,[1] 같은 해 한국종교인협의회 회장에 선출되었다.[1] 1967년 3월 23일 은퇴하여 안양 성라자로마을로 거처를 옮겼다.[1]
1984년 3월 13일 고려청자 헌납 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었고,[1] 5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행사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맞이하여 103위 시성식을 집전했다.[1] 6월 25일, 82세에 노환으로 별세하였다.[1]
2. 1. 출생과 초기 활동
노기남은 1902년 1월 22일 대한제국 평안남도 평양부 율리면 무진동에서 독실한 가톨릭 신자 집안에서 노성구(盧成九)의 11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장연이다. 이후 YMCA에서 운영하는 청년학당에 다니다가 용산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용산 소신학교에서 영어 담당 교사인 장면(뒷날 대한민국 부통령 역임)을 만나게 된다.1917년 프랑스 신부들이 운영하는 12년 과정의 신학교에 입학했다. 1930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사제로 서품되어 종현성당 보좌신부 겸 계성보통학교(현 계성초등학교) 운영을 담당했다. 이곳에서 다시 장면을 만나게 된다.
2. 2. 사제 서품과 활동
1942년 11월 10일 노기남은 경성대교구장에 임명되었고, 12월 20일 코르바사(Colbasa) 명의 주교로 서품되었다. 이는 한국인 최초의 주교 서품이었다.[13]일제강점기 말, 일제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외국인 교구장을 일본인으로 교체하려 하였다. 이에 당시 경성대목구장이던 프랑스인 아드리앵 라리보(원형근) 주교가 사임하면서, 그의 비밀 추천으로 노기남이 경성대목구장에 임명되었다. 노기남은 평양대목구장과 춘천지목구장 서리직도 겸임하였다.
일중전쟁 발발 후, 일본은 교회에 대한 압박과 동화 정책을 강화했지만, 노기남은 이에 적절히 대응하며 교회 보호에 힘썼다. 창씨개명으로 사용한 일본식 이름은 “오카모토 테츠지(岡本鉄治)”이다. 다만, 이러한 그의 행동에 대해서는 훗날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친일파」 참조).
2. 3. 해방 이후 활동과 교회 재건
1945년 한국이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되자 가톨릭 교회 재건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한국 가톨릭 교회의 교회 제도 설정에 힘썼다.[4] 한국 천주교 교계제도 설정에 노력하여 1962년 12월 20일 한국 천주교회는 자립교회로 인정을 받아서 대목구에서 교구로 승격되었다. 노기남 주교는 서울교구가 서울관구의 선도교구인 대교구로 설정됨에 따라 대구의 서정길 주교, 광주의 현 주교와 더불어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대목구에서 정식교구로 승격함에 따라 교구장 착좌식을 거행하였다(대목구장 주교는 교구장이 아니므로 착좌식이 없다). 그리고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를 설정하는 등 한국교회가 안정을 기하는 데 노력했다.모스크바 삼상회의에 반발한 김구가 결성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이 되었다.[4] 용산소학교 시절 은사이기도 한 장면을 찾아 정계 진출을 권유한 것도 노기남이다.
1948년 5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주재 사제의 사임으로 공석이었던 대구교구장도 겸임했다.
2. 4. 대주교 임명과 은퇴
1962년 12월 20일 한국 천주교회가 자치 교회로 인정받으면서 경성교구가 서울대교구로 승격되었고, 노기남 주교는 대주교로 임명되었다.[1] 대주교 취임 후에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를 설립하는 등 한국 천주교회의 안정에 힘썼다.[1]1963년 대한민국 국민훈장을 수여받았다.[1] 1965년 2월에는 이탈리아 문화훈장을 수여받았고,[1]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종교인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1] 1967년 3월 23일 서울대교구장인 서울대주교직을 사임하고 은퇴하여 안양의 성라자로마을로 거처를 옮겼다.[1]
1984년 3월 13일 고려청자 헌납 위원회 고문으로 위촉되었다.[1] 5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맞이하여 조선의 순교자 103명의 시성식을 집전했다.[1] 6월 25일, 82세에 노환으로 별세하였다.[1]
3. 논란과 평가
노기남은 오랜 기간 한국 가톨릭 교회의 중심 인물이었기 때문에 '한국 천주교회의 대부'로 불린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의 친일 행적, 제1공화국 시기 정치 관여, 1981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관련 발언 등으로 '정치 신부'라는 비판도 받았다.[17]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단과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으나,[18]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하며, 노기남이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단체에 소속된 것이라고 주장했다.[18] 김수환 추기경도 노기남의 친일 행적이 자발적이거나 적극적이지 않았다고 반박했다.[15]
3. 1. 일제 강점기 친일 논란
일제 강점기 말, 노기남은 천주교 경성교구장 겸 조선인 주교로서 태평양 전쟁에 협력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5]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천주교 경성교구가 참가했을 때 장면과 함께 연맹의 업무를 담당했다.[6] 경성교구는 성직자와 신도들에게 일본군 장병을 위한 기도와 전쟁 승리를 위한 미사를 거행하도록 하였고, 국방헌금을 걷고 신부들에게 시국 관련 강연을 하도록 지시했는데, 이러한 교구의 행위를 주관 또는 방조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1940년에는 황기 2600년 봉축식과 함께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결성하고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7][14] 이 단체는 기관지 《경향잡지》를 통해 내선일체 실현과 국가에 대한 멸사봉공을 위해 단체를 결성했다는 취지를 설명했다. 또한, 애국반이라는 기본 단위로 신도 조직을 결성해 신사참배 강요에 호응하고 국방헌금을 낼 것을 강요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1943년에는 조선전시종교보국회에 천주교 대표위원으로 참가해 출병 기고문을 제출했다는 의혹도 제기되었으나, 본인의 자필 여부는 불확실하다.[5]
그러나 노기남의 활동은 적극적인 친일 행위가 아니라 한국 가톨릭 교회 대표로서 어쩔 수 없는 행동이었다는 반론도 있다.[5]
2005년 10월 21일 민족문제연구소가 장면, 김성수와 함께 노기남을 친일파로 지목하자, 김수환 추기경은 동아일보와의 기자회견에서 유감을 표명하며 노기남을 변호했다.[8][15] 김수환은 노기남이 천주교 대표, 장면이 신자 대표였기에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단체에 참여하게 된 것이며, 이를 친일로 판단하는 것은 경솔한 행동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자신도 학병으로 징집되고 창씨개명을 했으며 신사참배를 한 경험을 언급하며 친일파 선정 기준에 대한 비판을 제기했다.[8][15]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는 친일인명사전 수록 예정자 명부 종교 부문에 노기남을 선정했다. 이에 대해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전쟁 마지막 시기에 종교 등 각 단체 책임을 맡은 인물은 일본이 강압적으로 만든 총동원 단체의 장이 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을 고려해야 한다"며, "노기남이 강압적으로 만들어진 단체에 어쩔 수 없이 속한 것일 뿐, 적극적인 협력자는 아니었다"고 주장했다.[9]
2009년 노기남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되었다.[10]
3. 2. 해방 이후 정치 관여 논란
1945년 광복 후 미군정이 시작되자 미군과 가까이 지내며 한국민주당 계열과 같은 친미, 반공주의 노선을 설정했다. 장면을 천거하여 정계에 나가도록 했으며, 이승만을 지지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지지했다. 당시 가톨릭 계열이며 노기남이 책임자로 있던 《경향신문》은 단선단정 여론을 이끌고 있었다.[16]1948년 무렵 일제 강점기의 친일행위자에 대한 구제로 비난을 받았다. 조선총독부 고위 관료를 지낸 엄창섭이 반민족행위처벌법 제정으로 체포되었을 때 간접 석방운동을 벌이고 출옥한 후 영세를 받게 했다. 감리교 목사로 유명한 친일파 목회자인 정춘수는 감리교단 내부의 비판으로 입지를 잃게 되자 노기남을 찾아가 가톨릭으로 개종하기도 했다.[11]
1981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당시 용의자를 숨겨준 혐의로 원주교구 사제가 체포되었는데, 노기남은 이 사건을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 공산주의자, 흉악범의 행위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정치 사제"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3. 3. 긍정적 평가
노기남은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과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한국 천주교 교계제도 설정에 노력하여 1962년 한국 천주교회가 자립교회로 인정받고 대목구에서 교구로 승격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로써 서울교구는 대교구로 승격되었고, 노기남은 한국인 최초로 대주교에 임명되었다.[1]대주교 취임 후에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를 설립하여 한국 천주교회가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데 힘썼다.[1] 1963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1965년 이탈리아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종교인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1] 1984년 5월에는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맞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맞이하여 조선의 순교자 103위의 시성식을 집전하는 등 한국 천주교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1]
4. 기타
노기남은 1959년 프랑스 최고문화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 1963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1965년 이탈리아 문화훈장을 받았다.[1][4][2][5][3][6] 저서로는 《나의 회상록》(1967), 《당신의 뜻대로》(1978)가 있다.
4. 1. 서훈
| 연도 | 훈장 |
|---|---|
| 1959년 | 프랑스 최고문화훈장, 레지옹 도뇌르 훈장[1][4] |
| 1963년 | 대한민국 국민훈장[2][5] |
| 1965년 | 이탈리아 문화훈장[3][6] |
4. 2. 저서
- 《나의 회상록》 (1967)
- 《당신의 뜻대로》 (1978)
참조
[1]
웹사이트
Catholic Hierarchy.com
http://www.catholic-[...]
[2]
서적
Democratic Movements and Korean Society: Historical Documents and Korean Studies
https://books.google[...]
Yonsei University Press
[3]
웹사이트
http://www.catholict[...]
[4]
문서
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5]
뉴스
‘천주교의 친일’ 언제 회개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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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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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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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천주교 인사 ‘친일사전’ 수록 재고 요구 - 서울대교구, 편찬위에 공문
서울신문
200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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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년 12월6일 이완용 등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 명단 확정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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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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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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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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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명단에 포함된 가톨릭인사 7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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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혼란' 한국號 어디로가나 김수환추기경 특별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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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07-01
[17]
뉴스
‘천주교의 친일’ 언제 회개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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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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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뉴스
천주교 인사 ‘친일사전’ 수록 재고 요구 - 서울대교구, 편찬위에 공문
http://www.seoul.co.[...]
서울신문
200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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