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베네딕토 1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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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제265대 교황으로 재임했으며, 2022년 12월 31일 선종했다. 그는 신앙교리성 장관을 역임하며 가톨릭 교리를 수호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존중하면서도 전통 전례를 복원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보수적인 신념과 가톨릭 성직자 성추행 스캔들에 대한 대처, 바티칸 기밀 문서 유출 사건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주요 저서로는 《나자렛 예수》 시리즈, 회칙으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등이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이름베네딕토 16세
로마자 표기Benedictus XVI
이탈리아어 표기Benedetto XVI
독일어 표기link=베네딕트 16세
독일어 발음IPA|de|ˈjoːzɛf ˈʔaːlɔɪ̯s ˈʁat͡sɪŋɐ|lang
본명요제프 알로이스 라칭거
출생일1927년 4월 16일
출생지마르크틀, 바이에른 주, 바이마르 공화국 (독일)
사망일2022년 12월 31일
사망 장소마테르 에클레시애 수도원, 바티칸 시국
국적독일 (바티칸 시민권)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재임 기간 시작2005년 4월 19일
재임 기간 종료2013년 2월 28일
전임자요한 바오로 2세
후임자프란치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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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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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별칭베네딕트
교황 관련 직책
직함로마 주교
교황교황
주요 직책
이전 직책추기경단 단장 (2002–2005)
오스티아 교구 추기경 주교 (2002–2005)
벨레트리-세니 교구 추기경 주교 (1993–2005)
신앙교리성 장관 (1982–2005)
국제 신학 위원회 위원장 (1982–2005)
교황청 성경 위원회 위원장 (1982–2005)
산타 마리아 콘솔라트리체 알 티부르티노 추기경 (1977–1993)
뮌헨-프라이징 대주교 (1977–1982)
은퇴 후 호칭명예 교황, 그의 성하 베네딕토 16세, 로마 교황 명예
철학
주요 사상탈헬레니즘화 거부
연속성의 해석학
철학 분야서양 철학
철학 시대현대 철학
주요 관심사기독교 신학
교회론
영향을 받은 철학자아리스토텔레스
사도 바울로
플라톤
요한 바오로 2세
보에티우스
보나벤투라
순교자 유스티노
클레멘스 알렉산드리누스
토마스 아퀴나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아우구스티누스
위(僞)-디오니시우스 아레오파기타
요한 다마스쿠스
밧모섬의 요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콘스탄티노플의 프로클로스
아빌라의 테레사
오리게네스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
소크라테스
슈파에만
주요 저서나자렛 예수
기독교 입문
종말론: 죽음과 영원한 생명
[[Deus caritas est라틴어
철학 학파아우구스티누스주의
새 신학
성직 정보
교파로마 가톨릭교회
부제 서품일1950년 10월 29일
부제 서품 장소프라이징 대성당, 프라이징
사제 서품자미하엘 폰 파울하버
사제 서품일1951년 6월 29일
사제 서품 장소프라이징 대성당, 프라이징
주교 서품자요제프 슈탕글
공동 서품자
주교 서품일1977년 5월 28일
주교 서품 장소뮌헨 프라우엔 교회
추기경 서임자교황 바오로 6세
추기경 서임일1977년 6월 27일
교황 재임 중 주교 서품자
주교 1알베르토 보보네
주교 서품일 11984년 5월 12일
주교 2지그문트 지모프스키
주교 서품일 22002년 5월 25일
주교 3요제프 클레멘스
주교 서품일 32004년 1월 6일
주교 4브루노 포르테
주교 서품일 42004년 9월 8일
주교 5미에치슬라프 목르치키
주교 서품일 52007년 9월 29일
주교 6프란체스코 조반니 브루냐로
주교 서품일 62007년 9월 29일
주교 7잔프란코 라바시
주교 서품일 72007년 9월 29일
주교 8톰마소 카푸토
주교 서품일 82007년 9월 29일
주교 9세르지오 파가노
주교 서품일 92007년 9월 29일
주교 10빈첸초 디 마우로
주교 서품일 102007년 9월 29일
주교 11가브리엘 조르다노 카치아
주교 서품일 112009년 9월 12일
주교 12프랑코 코폴라
주교 서품일 122009년 9월 12일
주교 13피에트로 파롤린
주교 서품일 132009년 9월 12일
주교 14라파엘로 마르티넬리
주교 서품일 142009년 9월 12일
주교 15조르지오 코르벨리니
주교 서품일 152009년 9월 12일
주교 16사비오 혼
주교 서품일 162011년 2월 5일
주교 17마르첼로 바르톨루치
주교 서품일 172011년 2월 5일
주교 18셀소 모르가 이루주비에타
주교 서품일 182011년 2월 5일
주교 19안토니오 귀도 필리파치
주교 서품일 192011년 2월 5일
주교 20에드가 페냐 파라
주교 서품일 202011년 2월 5일
주교 21찰스 존 브라운
주교 서품일 212012년 1월 6일
주교 22마렉 솔치니스키
주교 서품일 222012년 1월 6일
주교 23안젤로 빈첸초 자니
주교 서품일 232013년 1월 6일
주교 24포르투나투스 느와추쿠
주교 서품일 242013년 1월 6일
주교 25게오르크 겐스바인
주교 서품일 252013년 1월 6일
주교 26니콜라스 테베닌
주교 서품일 262013년 1월 6일
기타 정보
언어 구사 능력독일어 (모국어)
이탈리아어
라틴어
프랑스어
영어
스페인어
거주지바티칸
교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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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베네딕토 16세는 2013년 2월 28일 교황직에서 물러나면서 '전임 교황'(Papa emeritus)으로 불리게 되었다. 전임 교황에게는 성하 경칭이 계속 사용되며, 하얀색 수단을 입지만 붉은색 모제타와 구두는 착용하지 않는다. 본명 대신 교황명을 그대로 유지하고, 어부의 반지는 폐기되었다.

카스텔간돌포에 있는 교황의 여름 별장으로 거처를 옮긴 베네딕토 16세는 바티칸 정원 내 교회의 어머니 수도원이 재단장을 마치자 2013년 5월 그곳으로 이주했다. 수도원 주변에는 외부로부터 보호를 위해 두꺼운 울타리와 장벽이 설치되었다. 전임 교황은 이곳에서 공부와 저술 활동에 전념했다.

2014년 2월 22일, 베네딕토 16세는 성 베드로 대성전에서 열린 교황 프란치스코의 첫 추기경 서임식에 참석하여 사임 후 처음으로 공개 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다른 추기경들과 함께 앉았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다가와 인사하자 주케토(Zucchetto)를 벗어 경의를 표하고 다시 착용했다. 이후 교황 요한 23세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합동 시성식 미사에도 함께했다.

2008년 4월, 베네딕토 16세는 미국을 방문하여 조지 W. 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회담하고 자신의 생일을 축하했다. 뉴욕 유엔총회에서 연설하고 양키 스타디움에서 미사를 집전했으며, 9·11 테러로 파괴된 세계무역센터 터(그라운드 제로)를 방문했다. 그는 가톨릭 성직자의 소년 성학대 사건에 대해 사과하면서도 "미국의 물질적 문화에도 문제가 있다"고 언급했다.

2.1. 어린 시절과 교육 (1927-1951)

요제프 알로이스 라칭거(Joseph Alois Ratzinger)는 1927년 4월 16일 성 토요일 오전 8시 30분, 독일 바이에른주 마르크틀 암 인에서 아버지 요제프 라칭거와 어머니 마리아 라칭거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찰관이었으며, 어머니는 식당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의 형 게오르크 라칭거사제이자 레겐스부르크 돔슈파텐 합창단의 전(前) 지휘자였으며, 누나 마리아 라칭거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1991년에 죽을 때까지 집안을 돌보았다. 그들의 종조부는 독일의 정치가 게오르크 라칭거이다.

요제프 라칭거의 생가
요제프 라칭거의 생가

다섯 살 때, 라칭거는 뮌헨 대주교인 미하엘 폰 파울하버 추기경을 꽃으로 환영한 아이들 중 한 명이었다. 추기경의 독특한 복장에 감명을 받은 그는 그날 후에 추기경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1939년 12세에 그는 트라운슈타인의 소신학교에 입학했다. 1941년 열네 번째 생일을 보낸 직후 그는 나치당의 청소년 조직인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했다. 1939년 3월 이후로 나치 독일의 모든 열네 살 남자아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단체에 강제적으로 가입해야만 했다. 그의 아버지는 신심 깊은 가톨릭 신자였으며, 나치즘에 반대했다. 1941년 라칭거의 사촌 가운데 한 명이 다운 증후군에 걸렸는데, 어린 나이였음에도 히틀러 정권의 T4 작전 우생학 운동에 의해 살해당했다.
히틀러 유겐트 시절의 모습
히틀러 유겐트 시절의 모습

1943년, 신학교에 있던 그는 독일 대공포 부대에 루프트바펜헬퍼로 징집되었다. 그 후 독일 보병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1945년 연합군 전선이 그의 주둔지에 가까워지자, 그의 부대가 해체된 후 라칭거는 가족이 있는 트라운슈타인의 집으로 탈영했고, 바로 그때 미군이 라칭거의 집에 본부를 설치했다. 그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1945년 6월 19일에 석방되었다.

라칭거와 그의 형 게오르크는 1945년 11월 트라운슈타인에 있는 성 미카엘 신학교에 입학하여 나중에 뮌헨 루트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두 사람 모두 1951년 6월 29일 프라이징에서 뮌헨의 미하엘 폰 파울하버 추기경에 의해 사제 서품을 받았다. 1953년, 라칭거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 교리에서의 백성과 하느님의 집"이라는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7년에 보나벤투라에 관한 자격논문(교수직 자격을 부여함)을 완성했으며, 1958년 프라이징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2.2. 교수 및 신학자 (1951-1977)

라칭거는 1958년 프라이징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59년에는 본 대학교 교수가 되어 "신앙의 하느님과 철학의 하느님"이라는 주제로 첫 강의를 했다. 1963년에는 뮌스터 대학교로 옮겨 강의했는데, 그의 강의는 인기가 매우 높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 라칭거는 쾰른의 요제프 프링즈 추기경의 신학 자문(peritus) 겸 독일어권 대표로 참여하였다. 그는 한스 큉, 에드워드 쉴레벡스크 같은 진보적인 신학자들과 협력하며 교회 개혁을 지지했다. 그는 공의회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일부에서는 그를 '공의회 파괴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1966년, 라칭거는 튀빙겐 대학교의 신학 교수로 부임하여 한스 큉과 함께 교수로 재직하였다. 1968년 저서 《그리스도교회 입문서》에서 교황은 의사 결정 전에 교회 내 다양한 의견을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67년과 1968년 독일 대학가를 휩쓴 네오마르크시즘 학생운동의 영향으로, 그는 보수적인 성향으로 바뀌었다.

1969년, 라칭거는 바이에른의 레겐스부르크 대학교로 돌아왔다. 그는 한스 우르스 폰 발타자르, 앙리 드 루박, 발터 카스퍼 등과 함께 신학 저널 《코뮤니오》(Communio)를 창간했다. 《코뮤니오》는 현재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를 포함한 17개국 언어로 출판되는 가톨릭 신학 사상의 중요한 저널이다. 그는 교황으로 선출될 때까지 이 저널에 많은 기고를 했다.

2.3. 뮌헨-프라이징 대교구장 (1977-1982)

1977년 3월 24일, 라칭거는 뮌헨프라이징대주교로 임명되어 주교품을 받았다. 그의 사목 표어는 '진리의 협력자'(Cooperatores Veritatis)였다. 같은 해 6월 2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산타 마리아 콘솔라트리체 알 티불티노 성당의 사제급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2005년 콘클라베 당시, 그는 바오로 6세가 임명한 14명의 추기경 중 한 명이자, 80세 미만인 세 명의 추기경 중 한 명이었다.

뮌헨 홀른슈타인 궁전 (뮌헨-프라이징 대교구장 관저)
뮌헨 홀른슈타인 궁전 (뮌헨-프라이징 대교구장 관저)

2.4. 신앙교리성 장관 (1981-2005)

1981년 11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라칭거를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1982년 초 뮌헨 대주교직을 사임하고, 1993년 추기경단에서 벨레트리 세그니의 주교급 추기경, 1998년에는 추기경단 차석 추기경, 2002년 11월 30일에는 수석 추기경으로 진급하였다. 역대 추기경단 수석 추기경은 오스티아의 명의 주교였던 관례에 따라, 라칭거는 동시에 오스티아 교구장 직책도 받았다. 교황청 성서위원회 위원장과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장도 겸임하였다.

라칭거는 신앙교리성 장관으로서 산아 제한, 동성애, 종교 다원주의 등 가톨릭 교회의 교리를 옹호하였다. 그는 해방신학의 마르크스주의적 성향을 비판하며 남아메리카 해방신학자들에 대한 제재를 가했고, 한스 큉을 비롯한 진보적인 신학자들에게 처벌을 내리는 등 교회에 대한 공개적 비판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러한 행보는 보수적인 신자들로부터 환영받았다.

2000년, 신앙교리성은 《주님이신 예수님》(Dominus Iesus)이라는 문헌을 발표했다.

2001년, 일부 과학자들의 인간 복제 실험 시도에 대해 라칭거는 "인간 복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가 저지른 만행과 다름없는 짓"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2.5. 교황 선출과 재임 (2005-2013)

2011년 사도 궁전에서의 교황 베네딕토 16세
2011년 사도 궁전에서의 교황 베네딕토 16세

요한 바오로 2세의 건강이 악화되자, 교황청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라칭거는 차기 교황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었다. 2005년 4월, 교황으로 선출되기 전 타임스지는 그를 ‘세계 100대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2005년 4월 8일, 라칭거는 추기경단장으로서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 미사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집전했다.

같은 해 4월 18일 시작된 콘클라베에서 라칭거 추기경은 나이가 많고 건강이 좋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당시 불안정한 정세 속에서 과도기적 관리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의 풍부한 경험, 뛰어난 업무 능력, 유창한 외국어 구사 능력 등이 높게 평가받아 2005년 4월 19일, 투표 2일째에 새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78세의 나이로 교황직을 맡게 된 라칭거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콘클라베에서 추기경들의 투표 추세로 보아 본인이 될 것 같은, 마치 나에게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이때 갑자기 현기증이 났다.”고 말했다. 또한 하느님에게 자신이 교황으로 선출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그는 “주님께서 당신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말씀하신다면 당신은 주님의 뜻을 순종하라는 다른 추기경의 메모를 받았다.”고 하면서 이 메모를 계기로 교황직을 수용키로 마음을 정했다고 밝혔다.

교황 선출 당일, 군중에게 인사한 후 연설한 취임사 내용은 다음과 같다.

라칭거는 교황으로서 새 이름을 교황 베네딕토 15세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 모두에게 경의를 표하고 본받고자 ‘베네딕토’로 선택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교황이었던 베네딕토 15세는 참전국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평화를 열렬히 주창한 조정자였으며, 원주민들에게 적극적으로 가톨릭 교리를 전파한 ‘교의 전략가’로도 알려져 있다. 누르시아의 성 베네딕토는 서구 수도원 제도를 만든 베네딕도회의 창립자이자 유럽의 수호성인이다. ‘베네딕토’는 라틴어로 ‘좋게 말한’ 또는 ‘축복된’이라는 뜻이다.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 4월 25일 일반 알현 중 연설에서 자신이 베네딕토라는 이름을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4월 24일, 베네딕토 16세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거행된 즉위식을 통해 정식으로 교황에 즉위했으며, 다음 해 5월 7일에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전에서 로마 주교좌 착좌 미사를 거행하여 로마의 주교로 착좌했다. 교황청은 베네딕토 16세의 즉위식이 열린 성 베드로 광장과 인근 도로에 모인 순례자들의 수가 35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했다. 또한 약 110개국 대표단이 교황 즉위식에 참가했으며, 특히 교황의 모국인 독일에서도 10만 명의 신도가 참가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즉위식이 시작된 시간에는 독일 전역의 성당에서 15분간 축하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즉위미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베네딕토 16세
즉위미사를 마치고 돌아가는 베네딕토 16세


베네딕토 16세의 즉위식은 요한 바오로 2세 때 개정된 전례와 의식, 복장들이 처음으로 선보인 자리였다. 베네딕토 16세는 선출된 후 즉시 이를 승인했다. 교황 즉위식의 중요한 변화는 우선 장소에서 나타났다. 예식은 성 베드로 대성전의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추기경들이 원형으로 둘러싼 가운데 교황이 동방 가톨릭교회 총대주교들과 함께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내려가 참배했다. 이어서 무덤에서 걸어 나와 온 세계를 향해 교황으로서의 직무를 시작함을 선포했다.

두 번째 변화는 순명 서약 부분이었다. 이전에는 즉위식에 참석한 모든 추기경들이 순명 서약을 했다. 하지만 새 즉위식에서는 모든 교회가 새로 선출된 교황을 인정함을 드러내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모든 교회 구성원을 상징하는 12명을 선발했는데, 여기에는 대한민국의 김수환 추기경을 비롯한 추기경 3명 외에 주교, 교구 사제, 부제, 남녀 수도자, 부부, 그리고 최근 견진성사를 받은 젊은 남녀 등이었다.

베네딕토 16세는 즉위 미사 강론에서 “나의 진정한 통치는 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며, 내 생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주님의 말씀과 뜻에 귀를 기울이며, 그분의 인도를 받아 인류 역사 안에서 그분 자신이 교회를 이끌어가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교황은 특히 현대 사회를 ‘사막’으로 비유하며, “오늘날 세상에는 가난과 굶주림, 자포자기와 소외, 파괴된 사랑, 공허한 영혼, 인간 생명의 존엄성 상실 등 수많은 사막이 존재한다.”라며 교회의 사명은 “사람들을 사막에서 이끌어내 풍성한 생명을 선사하시는 성자께 인도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즉위식을 마친 뒤, 교황 전용차에 탑승해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축복을 내렸다.

베네딕토 16세가 방문한 나라들 (노란색)
베네딕토 16세가 방문한 나라들 (노란색)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 8월 18일 쾰른에서 열린 세계 청년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교황 즉위 이후 첫 순방으로 모국인 독일을 찾았다. 나흘에 걸친 첫 국외 방문에서 가톨릭 수장으로서 젊은이들에게 한층 다가서는 한편, 유대교이슬람교 지도자를 만나 종교 간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했다. 세계 청년 대회가 열린 쾰른에서는 100만 명의 젊은이들에 둘러싸여 열광적인 환호를 받기도 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젊은이들에게 진리를 추구할 것을 권면하면서 신앙의 원칙을 회복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행한 강론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우리의 창조주, 자유의 보장자, 그리고 참된 선함과 진리의 보장자이신 살아 있는 하느님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2009년 9월 9-14일 동안에는 자신의 고향 바이에른주를 방문했다. 바이에른 교구의 초청으로 이뤄진 방문에서 교황은 뮌헨, 알퇴팅, 레겐스부르크에서 미사를 집전하고 자신의 생가가 있는 마르크틀 암 인과 사제 서품을 받았던 프라이징도 들렀다.

2011년 9월 22-25일 3박 4일 일정으로 세 번째로 독일을 방문했다. 교황은 에첼스바흐 성모 순례지를 비롯해 베를린과 에르푸르트, 프라이부르크 등지를 순방하면서 미사를 집전하고 기도회를 주재했다. 또한 독일 의회 하원에서 한 20분간의 연설에서 “독일은 권력이 부패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경험으로 알고 있다.”면서 나치히틀러를 비유해 정치인의 권력 남용과 부패를 경고했다. 교황은 앞서 대통령궁 환영 행사에서는 “우리 사회가 종교에 점점 더 무관심해지고 있다.”고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교황은 정치인들과의 회동 뿐만 아니라 유다교를 비롯해 정교회, 이슬람, 개신교의 지도자들과도 만났다.

베네딕토 16세는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교도튀르키예 방문을 앞두고 레겐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지하드가 역사적으로 폭력과 결부되어 있다는 옛 고서의 내용을 인용한 발언을 하여 본의 아니게 그를 문명 충돌의 중심에 서게 하였다. 그의 방문 소식에 튀르키예 내 국가주의자들과 이슬람교 극단주의자들이 거세게 반대 집회를 열었으며, 교황의 경호 문제에 비상이 걸렸다.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교황청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 사방이 방탄유리로 둘러싸인 교황 전용 의전차량 대신 강철로 된 특수 방탄차량을 동원하고 교황에게는 겉옷 안에 방탄조끼를 입도록 했다. 튀르키예 정부도 교황이 방문하는 장소마다 테러범을 찾아 제거할 정예 저격수와 폭탄 처리 전문가, 대테러 요원들을 배치하는 것은 물론 헬리콥터와 해군 쾌속정까지 동원하였다. 2006년 11월 28일에서 12월 1일까지 3박4일간의 일정으로 이루어진 튀르키예 순방에서 교황은 튀르키예 이슬람 최고 지도자 알리 바르다코글루와 만나고 블루 모스크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묘지 등을 방문하는 등 직접 이슬람과의 화해를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사태가 진정되었다. 더불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바르톨로메오스 1세가 주례한 성찬예배에 참석하여 공동성명을 하는 등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사이의 거의 천 년이나 해묵은 갈등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하였다. 그 밖에도 튀르키예의 소수 가톨릭 신자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종교적 자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2007년 5월 13일, 교황은 중남미-카리브 주교회의 개막식 참석과 18세기 프란치스코회 수사인 안토니오 데 산타나 갈바옹의 시성을 위해 브라질을 방문하였다.

2007년 9월에 오스트리아를 방문한 베네딕토 16세는 에 있는 홀로코스트 기념관에서 나치 독일에 의해 희생당한 6만 5천 명의 유다인들을 위해 추모하는 묵언의 기도를 바치고 유다교 지도자들과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2008년 4월에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직에 오른 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교황이 도착하여 바티칸으로 돌아갈 때까지 엿새 동안 미국은 교황에 대한 최고의 예우를 계속 이어갔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비행기를 타고 도착할 때는 감리교도인 조지 W. 부시 대통령 내외가 직접 공항에 나가 영접했고 떠날 때는 딕 체니 부통령 내외가 역시 비행기 트랩 밑에까지 가서 환송했다. 교황의 81번째 생일이기도 했던 이날 백악관 환영행사에는 사상 최대 규모인 1만여 명에 가까운 각계 인사가 초청되기도 했다. 여기에 미국 주요 방송들은 방문 이전부터 떠날 때까지 교황의 모든 일정을 거의 생중계하다시피 했고, 주요 신문들도 하루도 빠짐없이 교황 관련 기사를 1면에 올렸다. 교황이 워싱턴 D.C.뉴욕에서 두 차례 집전한 군중 미사에는 암표까지 등장한 가운데 가톨릭 신자와 일반 시민 등 무려 10만 6천여 명이 몰리는 대성황을 이뤘다. 교황은 이어 18일 뉴욕의 국제 연합 본부를 방문하여 행한 연설을 마치고 기립박수를 받았다.

2008년 7월 교황은 시드니에서 열리는 세계 청년 대회에 참석하고자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였다. 2008년 9월 12일에는 루르드의 성모 발현 150주년을 맞아 프랑스를 사목 방문하고, 성모 발현의 참된 의미를 되새길 것을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권고했다.

베네딕토 16세는 2009년 3월 17~23일 동안 아프리카카메룬앙골라를 방문하였다. 교황은 여러 연설과 미사 강론을 통해 에이즈, 전쟁, 여성의 인권, 빈부격차, 미신, 부정부패 등 아프리카 대륙의 문제점을 거침없이 거론했다. 또 복음 선포에 앞장서는 가톨릭 지도자들을 격려하며 교회가 아프리카 대륙의 변화와 개혁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당부했다. 교황은 또 아프리카 주교단에게 10월 로마에서 열릴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2차 아프리카 특별총회 의안집을 전달했다. 이 의안집은 세계화를 비판하며 아프리카 대륙이 해결해야 할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문제는 물론, 교회 토착화와 신앙교육, 사목자 양성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2011년 11월 18일에는 베냉을 방문하여 3일간의 머물렀다. 베냉 정부는 교황이 방문한 날을 공휴일로 지정하는 등 교황의 방문을 대대적으로 환영했다.

2009년 5월 8~15일 베네딕토 16세는 요르단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의 서아시아 지역을 방문하였다. 스스로 ‘평화의 순례’로 명명한 이 사목 방문을 통해 교황은 종교 간 상호이해와 포용을 강조했다.

2009년 9월 26일부터 28일까지 체코 공화국을 순방한 베네딕토 16세는 체코인들에게 “다시금 기독교적 뿌리와 전통을 되찾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교황은 “체코 교회는 중부 유럽에서 비교적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복음화의 정도는 가장 낮다.”고 지적하며 “체코가 기독교적 전통을 하루빨리 회복할 수 있길 바란다.”고 기원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수도 프라하의 아기 예수 성당과 체코의 수호성인인 성 벤체슬라오 기념 성당 등 유명한 가톨릭 성당 등을 방문했고 바츨라프 클라우스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과 종교 지도자단, 시민단체 대표단, 청년들을 만났다.

2010년 4월 17~18일 이틀간 베네딕토 16세는 몰타를 사목 방문하고, “성 바오로 사도가 두 번째 로마 여행 기간 중 지중해에서 표류한 지 1950년이 지난 것을 기념하며, 몰타의 그리스도인들이 몰타가 가진 자랑스러운 기독교적 뿌리와 전통 안에서 복음에 충실한 삶을 살아주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2010년 5월 11일부터 14일까지 베네딕토 16세는 포르투갈을 방문하였다. 파티마의 성모 발현 93주년인 5월 13일, 파티마 성모 순례지에 도착한 교황은 순례자 5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광장에서 기념미사를 거행하였으며, 파티마 성모 발현 목격자인 복자 프란치스코와 복녀 히아친타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교황은 이 자리에서 “파티마의 예언적 사명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으며 파티마의 메시지가 요구하는 회개는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010년 9월 16-19일, 베네딕토 16세는 교황으로서는 최초로 영국을 사목방문하였다.

교황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내외와 정치 지도자, 영국 성공회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암스 등 종교 지도자, 가톨릭 사제단, 청년층과 노년층 등을 폭넓게 만나며 급격한 세속화가 진행 중인 영국 사회에 참된 신앙의 의미를 전하며,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세속화와 상대주의, 무신론에 도전받고 있지만, 신앙인들은 실천적 삶으로 하느님을 증거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가톨릭 신앙을 일깨웠다.

교황은 또 버밍엄의 코프턴 파크에서 19세기 신학자였던 가경자 존 헨리 뉴먼 추기경의 시복식을 주례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크리스토퍼 히친스스티븐 프라이, 리처드 도킨스 등 영국의 대표적인 반교회적·무신론적 성향의 지식인들이 대거 교황과 교회를 비난하고 반대 움직임을 벌여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교황은 2010년 11월 6-7일, 이틀간 스페인을 사목 방문하였다. 6일에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있는 오브라도이로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였으며, 7일에는 스페인 국왕 부부가 참례한 가운데, 가우디가 1882년부터 짓기 시작해 아직도 건축이 진행 중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교황은 축복식에서 “가우디는 탁월한 건축가이자 그리스도인”이라며, 그의 필생의 작품인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기술과 예술, 신앙의 놀라운 종합”이라고 치하했다. 또한, 남성과 여성의 해소될 수 없는 결합인 혼인과 생명의 가치를 보호하고 증진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2011년 8월 제26회 세계 청년 대회마드리드에서 열리자 이를 위해 18일 마드리드 시벨레스 광장에서 참가자들을 만나 격려하고, 이어 20일에는 철야기도를 집전하고 전 세계 청년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21일에는 폐막 미사를 주례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11년 6월 4일 크로아티아를 방문하였다. 그는 수도 자그레브에서 거행한 미사 강론을 통해 가정 공동체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전통적인 기독교 가치관의 수호를 위해 노력해줄 것을 권고했다.

2012년 3월 23일~26일 나흘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멕시코를 방문하였다. 베네딕토 16세는 멕시코 내 마약과 폭력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아이들을 보호할 것을 요청했다. 그는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과 가진 면담에서 멕시코 내 마약거래 조직간의 폭력과 멕시코의 세속주의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내며 이같이 당부했다. 또한 과나후아토 평화광장에 모인 4천여 명의 어린이와 부모들에게 “멕시코 어린이들은 가톨릭의 미래를 책임질 일꾼들”이라며 격려했다.

2012년 3월 26일~2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쿠바를 방문하였다. 교황은 방문 마지막 날인 28일 하바나 혁명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수만 명의 군중 앞에서 “쿠바와 세계는 변화가 필요하지만 이것은 각자가 진실을 추구하고 화해와 우애가 싹트는 사랑을 선택할 때 가능하다”며 “진실은 인간이 항상 진정한 자유를 탐색하게 하는 욕망”이라고 말했다. 쿠바의 통상 금지 조치에 대해서도 “제한적인 경제 조치로 국민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어줬다.”고 지적했다. 교황의 이러한 발언은 아메리카 대륙에 하나 남은 공산주의 국가인 쿠바에서 정치적 개방을 요구하는 자들에 대한 지지를 나타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날 미사 직후 피델 카스트로와의 비공개 만남을 끝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2.6. 교황직 사임과 이후 (2013-2022)

2013년 2월 27일, 마지막 수요 일반 알현에서 교황 전용차(popemobile)를 탄 베네딕토 16세 (성 베드로 광장)
2013년 2월 27일, 마지막 수요 일반 알현에서 교황 전용차(popemobile)를 탄 베네딕토 16세 (성 베드로 광장)

명예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왼쪽)이 2013년 7월 바티칸 정원에서 함께 있는 모습
명예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왼쪽)이 2013년 7월 바티칸 정원에서 함께 있는 모습

2014년 베네딕토 16세
2014년 베네딕토 16세

2019년 베네딕토 16세
2019년 베네딕토 16세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베네딕토 16세의 시신에 조의를 표하고 있다
세르조 마타렐라 이탈리아 대통령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베네딕토 16세의 시신에 조의를 표하고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실에 있는 베네딕토 16세의 묘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실에 있는 베네딕토 16세의 묘


베네딕토 16세는 2013년 2월 11일 바티칸에서 열린 추기경회의에서 2월 28일 오후 8시를 기해 교황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사임 발표문에서 "하느님 앞에서 양심을 성찰하면서 '급변하는 세상', '신앙생활의 중대한 문제들로 흔들리는 세상'에서 베드로 직무를 수행하는데 요구되는 '몸과 마음의 힘'이 없다"고 확신하며, "'온전한 자유'로 교황직을 사임한다"고 말했다.

이는 1415년 그레고리오 12세가 사임한 이후 598년 만의 일로, 이전 사임 교황들과 달리 베네딕토 16세는 온전히 자발적으로 사임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사임 후 '명예 교황' 칭호를 사용하며 바티칸 내 마테르 에클레시아 수녀원에서 생활했다. 그는 저술 활동과 기도에 전념했으며, 2022년 12월 31일 선종할 때까지 그곳에서 지냈다.

베네딕토 16세의 시신은 2023년 1월 2일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운구되었고, 2023년 1월 5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례로 장례미사가 거행되었다.

3. 주요 사상과 업적

베네딕토 16세는 현대 사회의 세속주의와 상대주의를 비판하고, 기독교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했다. 또한 낙태, 동성애, 피임 등에 대해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고수했다.

2006년 영국 성공회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엄스를 만나 가톨릭과 성공회 간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에큐메니즘 발전에 대한 "심각한 장애물"을 인정했다. 정교회에 대해서는 사도적 전승을 지키고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교황 수위권에 대한 인식 차이로 인해 "완전한 교회로서는 결점이 있다"고 언급했다. 유대교와의 관계에서는 미국 유대인 반명예훼손위원회로부터 "유대인 역사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높은 감수성"을 인정받았다.

이슬람교와의 관계는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강연에서 지하드를 비판하는 발언으로 인해 긴장 관계가 조성되기도 했다. 파키스탄 의회는 발언 철회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후 베네딕토 16세는 튀르키예를 방문하여 블루 모스크에서 기도하며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2001년 9.11 테러를 언급하며 "종교가 증오의 도구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하고, 다른 종교 신자들과의 대화를 중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2008년 10월 6일, 세계적 경기 침체를 우려한 베네딕토 16세는 제12차 세계 주교 시노드 이틀째 되는 날, 하느님의 말씀을 주제로 한 설교를 통해 "지금 커다란 은행들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며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휩쓰는 상황에 대해 "돈은 사라지고 허무한 것이지만 하느님의 말씀만이 견실하며 참된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은행들이 가난한 서민들을 돕고 실질 경제를 지탱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며 윤리적 가치를 바탕으로 새로운 국제금융협약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

지구 온난화와 관련, 베네딕토 16세는 "환경 보전과 지속 가능한 발전, 그리고 기후 변화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인류 가족 전체를 위한 중대한 관심사"라며 "어떠한 국가나 기업도 모든 경제·사회적 발전에 있는 윤리적 합의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3.1. 전통 가톨릭 교리 수호

베네딕토 16세는 현대 사회의 세속주의와 상대주의를 비판하고, 기독교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했으며, 낙태, 동성애, 피임 등에 대해 전통적인 가톨릭 교회의 입장을 고수했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

베네딕토 16세는 신앙과 과학 사이에 모순이 없음을 강조하며, 과학을 하느님의 창조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성의 차원을 넓히는 과학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현대 과학에 대한 맹신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과학이 인류를 위한 진정한 선을 지향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창조론진화론에 대해서는 이성과 신앙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말했다. 베네딕토 16세는 과학이 창조를 이해하는 데 제한적이라고 지적하면서도, 그리스도인들도 창조에 대한 질문에 더 광범위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생명 윤리 문제

베네딕토 16세는 이탈리아에서 인간 배아에 대한 치료 복제와 실험의 타당성에 대한 국민 투표가 벌어졌을 때, 배아 연구 규제 완화 법안을 저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인간 배아는 하느님이 주신 생명이며 생명은 투표 대상이 아니라고 강조하며, 국민 투표를 거부할 것을 호소하여 투표율 미달로 부결시켰다.

동성애, 낙태, 피임에 대한 입장

베네딕토 16세는 HIV/AIDS 팬데믹 확산 방지를 위해 콘돔 사용을 거부하고, 순결, 결혼 생활의 충실 등을 강조했다. 2010년에는 남성 매춘부가 HIV 감염 위험을 줄이기 위해 콘돔을 사용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와 관련된 악을 줄이려는 의도일 수 있다고 언급했지만, 콘돔이 HIV/AIDS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은 아니라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동성애에 대해서는 동성애 성향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도덕적으로 악한 것으로 향하는 경향이므로 객관적인 질서의 혼란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동성애 혐오 공격과 폭력을 비난하며, 동성애자들이 폭력의 대상이 되는 것은 개탄할 만한 일이라고 말했다.

낙태와 동성 결혼에 대해서는, 다양한 형태의 결혼 해체와 함께 인간의 진정한 자유로 잘못 여겨지는 무정부적인 자유의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3.2. 전례 개혁과 전통 복원

1962년 이전 라틴 전례 양식의 전통 제대
1962년 이전 라틴 전례 양식의 전통 제대

2007년 7월 7일, 베네딕토 16세는 자의교서교황들(Summorum Pontificum)》을 발표하여 사실상 폐지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전례미사를 봉헌하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 문헌에서 교황은 요한 23세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인 1962년에 공포한 로마 미사 경본에 따른 트리엔트 미사 거행을 성삼일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전면 허용했다.

교황은 전체 열두 개 조항으로 이뤄진 이 문헌에서 사제 혼자 미사를 봉헌할 때는 성삼일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이 미사를 드릴 수 있으며, 신자들이 요청할 경우에도 미사를 봉헌하도록 했다. 교황은 자의교서와 함께 발표한 전 세계 주교들에게 보내는 친서에서 이 문헌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 정신을 훼손한다거나 교회 공동체 사이에 새로운 분열을 일으킬 것이라는 일각의 비판이나 우려에 대해서는 근거 없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또한, 교황은 트리엔트 미사 방식을 허용하면서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을 원용했다. 첫째는 “교회의 기도 법칙은 교회의 믿음 법칙에 일치한다”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트리엔트 방식의 미사 전례 역시 가톨릭교회의 믿음 법칙에 따른 기도 법칙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 기도 법칙의 ‘통상적 표현’, ‘특별한 표현’을 구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에 따른 미사 방식을 ‘통상적 표현’, 트리엔트 미사 방식을 ‘특별한 표현’이라고 불렀다. 트리엔트 방식을 허용한다고 해서 로마 미사 예식이 두 가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한 가지 예식을 두 가지 양식으로 사용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교황은 트리엔트 방식의 미사 허용이 전혀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이 문제가 계기가 돼 교회와 갈라선 전통주의자 단체인 성 비오 10세회와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뿐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수용하면서도 심정적으로는 옛 미사 방식에 더 호감을 갖는 신자들에게도 사목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리고 2011년 4월 30일 자의교서 《교황들》에 관한 훈령 《보편 교회》(Universae Ecclesiae) 제33항을 통해 성삼일 전례도 1962년판 로마 양식으로 거행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2007년 7월 7일, 베네딕토 16세는 교황령(motu proprio) 수모룸 폰티피쿰(Summorum Pontificum)을 발표하여, 신자들의 요청에 따라 미사를 1962년 미사경본(즉, 트리엔트 미사)에 따라 더 쉽게 거행할 수 있도록 선언하였다. 이전에는 트리엔트 미사를 거행하기 위해 주교에게 청원해야 했던 안정적인 단체들은 이제 지역 사제에게 허가를 요청하기만 하면 되었다. 수모룸 폰티피쿰은 사목자들이 신자들의 요청 시 트리엔트 미사를 제공해야 한다고 명시하지만, 자격을 갖춘 모든 사제가 트리엔트 미사의 사적인 거행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신자들이 원하는 경우 참석할 수 있도록 한다. 트리엔트 미사의 정기적인 공개 거행의 경우, 교회 담당 사제의 허가가 필요하다.

수반되는 서한에서 교황은 새로운 지침에 대한 질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이 조치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행을 의미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기에, 베네딕토 16세는 트리엔트 미사가 공의회를 훼손하지 않을 것이며, 바오로 6세 미사가 여전히 표준이며 사제들이 그 형태로 미사를 거행하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트리엔트 미사의 사용이 "법적으로 폐지된 적이 없으며, 따라서 원칙적으로 항상 허용되었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서한에서는 "많은 곳에서 새로운 미사경본의 규정에 충실하지 않은 거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례가 변형되었다는 점"을 비난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창의성을 허용하거나 심지어 요구하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었으며 자신의 경험을 언급하였다.

교황은 트리엔트 미사를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허용하는 것이 분열을 예방하거나 치유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며, 역사적으로 "교회 지도자들이 화해와 일치를 유지하거나 회복하기 위해 충분한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경우"가 있었고,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 의무를 부과한다. 즉, 진정으로 일치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 일치 속에 머물거나 다시 얻을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다리오 카스트리용 오요스 추기경 (그 단체와 관련된 이들의 완전한 교회적 친교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설립된 교황청 위원회 위원장)은 이 교령이 "그들의 복귀를 위한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SSPX 총장인 베르나르 펠레 주교는 "이 위대한 영적 은총에 대해 교황 성하께 깊은 감사를 표한다"고 말했다.

2021년 7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도 서한전례의 수호자를 발표하여 베네딕토 16세의 수모룸 폰티피쿰 결정을 상당 부분 뒤집고 전례적 라틴 미사 사용에 대한 새로운 광범위한 제한을 부과하였다. 이 결정은 논란이 되었고, 보수적이고 전통주의 가톨릭 신자들에게 자선심이 부족하고 교회의 전례 유산에 대한 공격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3.3. 교회 일치와 종교 간 대화

베네딕토 16세는 성공회 신자들이 가톨릭 교회와의 일치를 이루면서도, 성공회 고유의 전례와 영성적 요소를 유지할 수 있도록 사도적 헌장 《성공회 신자 단체》(Anglicanorum Coetibus)를 발표했다. 이를 통해 이전의 성공회 신자들은 성직 자치단을 통해 사목적 지도를 받게 되었으며, 기혼 성공회 사제도 가톨릭 사제로 서품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주교가 될 수는 없었다. 이는 여성 성직자와 동성애자 문제에 반대하는 성공회 내 보수적 전통주의자들을 가톨릭으로 이끌기 위한 조치였다.

2006년 베네딕토 16세는 영국 성공회캔터베리 대주교 로완 윌리엄스를 만나 가톨릭과 성공회 간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에큐메니즘 발전에 대한 "심각한 장애물"을 인정했다.

정교회에 대해서는 사도적 전승을 지키고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교황 수위권에 대한 인식 차이로 인해 "완전한 교회로서는 결점이 있다"고 언급했다.

유대교와의 관계에서는 미국 유대인 반명예훼손위원회로부터 "유대인 역사와 홀로코스트에 대한 높은 감수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성 비오 10세 형제회 소속 리처드 윌리엄슨 주교의 파문 철회는 그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라는 점에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슬람교와의 관계는 레겐스부르크 대학교 강연에서 지하드를 비판하는 발언으로 인해 긴장 관계가 조성되기도 했다. 파키스탄 의회는 발언 철회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후 베네딕토 16세는 튀르키예를 방문하여 블루 모스크에서 기도하며 화해의 제스처를 취했다. 2001년 9.11 테러를 언급하며 "종교가 증오의 도구가 될 수 없다"고 강조하고, 다른 종교 신자들과의 대화를 중시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3.4. 사회 문제에 대한 관심

2008년 10월 6일, 세계적 경기 침체를 우려한 베네딕토 16세는 제12차 세계 주교 시노드 이틀째 되는 날, 하느님의 말씀을 주제로 한 설교를 통해 "지금 커다란 은행들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며 금융위기가 전 세계를 휩쓰는 상황에 대해 "돈은 사라지고 허무한 것이지만 하느님의 말씀만이 견실하며 참된 현실"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성공이나 경력, 돈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인생을 모래 위에 쌓아 올리는 셈"이라며 "물질이나 손에 잡을 수 있는 것만이 진실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말했다. 교황청 관계자들은 이 설교가 마태오 복음서의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은행들이 가난한 서민들을 돕고 실질 경제를 지탱하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며 윤리적 가치를 바탕으로 새로운 국제금융협약을 만들 것을 촉구했다.

지구 온난화와 관련, 베네딕토 16세는 "환경 보전과 지속 가능한 발전, 그리고 기후 변화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인류 가족 전체를 위한 중대한 관심사"라며 "어떠한 국가나 기업도 모든 경제·사회적 발전에 있는 윤리적 합의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바티칸 시국에서 열린 기후변화 회의에서 "환경을 무시하는 행위는 곧 인간 공존에 대한 위협으로 이어졌으며, 환경 파괴는 하느님의 뜻에 거스르는 것"이라며 전 세계 정치인과 과학자들에게 창조론 존중을 촉구하고, 열대 우림지역 보존 필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급속한 산업화를 겪는 나라들은 환경에 무분별하게 피해를 줌으로써 과거 다른 나라들이 저지른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라며 산업화한 선진국들이 개발도상국과 청정 기술을 공유하여 환경에 피해를 주는 재화 수요를 억제하라고 촉구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지구 자원 보호 책임을 각자가 진지하게 져야 하지만, 선진 산업 국가와 개발 도상국 간 협력 증진을 포함해 범세계적 차원의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하느님의 창조물인 환경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 것처럼, 환경 문제는 바티칸이 다뤄야 할 문제였다. 베네딕토 16세는 바오로 6세 홀에 태양광 발전 패널을 설치하고, 헝가리 조림 사업에 투자해 CO₂ 배출권을 매입하여 바티칸을 탄소 중립 국가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등 환경 문제에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그는 세계 경제적 이익을 위한 환경 대책에는 비판적이었으며, 환경 문제는 윤리적 문제라고 생각했다. 환경 악화는 해당 국가의 빈곤층 등 사회적 약자를 더욱 곤궁하게 만드는 환경 난민 문제와도 연결된다고 보았다.

4. 논란과 비판

베네딕토 16세는 재임 기간 동안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특히 가톨릭 교회 내 성추행 사건 처리, 콘돔 사용에 대한 입장, 보수적인 신념 등이 주요 쟁점이었다.

사망 후, 보건 당국, 에이즈 반대 운동가, 피해자 권리 단체 등은 베네딕토 16세의 과거 행적, 특히 가톨릭 교회 내 성추행 사건과 HIV 전염률이 높은 지역에서의 콘돔 사용에 대한 그의 입장을 비판했다.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는 베네딕토 16세를 "그 시대 최고의 신학자 중 한 명"이라고 칭송했고, 모스크바 총대주교 키릴은 가톨릭과 러시아 정교회 간의 화해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베네딕토 16세를 교회 박사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게르하르트 뮐러 추기경은 그를 "오늘날의 진정한 교회 박사"라고 묘사했다.

2005년 5월, 베네딕토 16세는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 조사를 개시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생전부터 성인으로 추앙받았고, 장례식에서 "Santo Subito"(즉시 성인으로)라는 외침이 나올 정도였기에, 이례적으로 사후 5년이 지나지 않아 시복 조사가 시작되었다. 2005년 10월에는 첫 번째 시성식을 통해 요제프 빌체프스키 등이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2011년 1월에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시복이 결정되었고, 5월 1일 베네딕토 16세가 직접 시복식을 집전하여 요한 바오로 2세는 복자가 되었다.

4.1. 보수적 신념에 대한 비판

베네딕토 16세는 보수적인 신학자 출신으로, 재임 기간 동안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옹호하며 여러 논란을 일으켰다.

2005년 교황은 HIV 확산 방지를 위한 방안으로 순결, 결혼 생활의 충실, 빈곤 퇴치 노력 등을 제시하면서도 콘돔 사용은 거부했다. 2009년 3월에는 "예방약을 나눠준다고 해서 (에이즈)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악화시킬 것입니다."라고 발언하여 논란을 빚었다. 2010년 11월, 베네딕토 16세는 인터뷰에서 남성 매춘부가 HIV 감염 위험을 줄이기 위해 콘돔을 사용하는 것은 비도덕적인 행위를 줄이려는 의도일 수 있다고 언급했지만, 콘돔이 HIV/AIDS 문제에 대한 "진정한 또는 도덕적인 해결책"은 아니라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재확인했다.

동성애 문제에 있어서도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인 1986년, 모든 주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동성애 성향은 "본질적으로 도덕적으로 악한 것으로 향하는 다소 강한 경향이며, 따라서 그 성향 자체는 객관적인 질서의 혼란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1992년에는 "성적 지향을 고려하는 것이 불공정한 차별은 아니다"라는 문서를 승인했다.

2008년 12월에는 로마 교황청에 보낸 연말 메시지에서 "성별 이론"을 비판하며 "인간이 창조주와 창조로부터 자기 해방을 시도하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이러한 발언은 LGBT 단체들로부터 동성애 혐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2012년 크리스마스 연설에서는 "성이 더 이상 자연의 주어진 요소가 아니며, 인간이 받아들이고 개인적으로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선택하는 사회적 역할"이라는 새로운 성 윤리 철학을 비판했다. 그의 발언은 동성 결혼에 대한 비난으로 해석되었으며, 일부 언론은 베네딕토 16세가 동성 결혼을 낙태, 안락사와 마찬가지로 세계 평화에 대한 위협으로 규정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사망 후, 가톨릭 교회 내 성추행 사건 처리 및 콘돔 사용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다시 한번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4.2. 가톨릭 성직자 성추행 스캔들 대처 논란

2001년 이전에는 성추행 혐의 조사와 가해자 징계의 주된 책임은 각 교구에 있었다. 2001년,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훗날의 교황 베네딕토 16세)은 요한 바오로 2세를 설득하여 신앙교리성이 모든 성추행 조사를 담당하도록 했다. 존 L. 앨런 주니어에 따르면, 라칭거는 그 후 몇 년 동안 "가톨릭 교회의 다른 어떤 인물도 주장할 수 없는 수준으로 문제의 윤곽을 파악"했으며, 나중에 그가 교회의 '오물'이라고 언급한 것과의 만남으로 인해 2003~2004년 동안 일종의 '전환 경험'을 한 것으로 보였다. 그 이후로 그와 그의 직원들은 "그 혼란을 청소하려는 개종자의 열정"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빈센트 니콜스 추기경은 신앙교리성 수장으로서의 라칭거의 역할에 대해 "교회법에서 중요한 변화를 이끌었다. 아동에 대한 인터넷 범죄를 교회법에 포함시키고, 아동 학대 범죄를 18세 미만 모든 아동의 성적 학대를 포함하도록 확대하고, 사례별로 공소시효를 면제하고, 범죄자에 대한 사제직에서의 신속한 해임을 확립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성추행 사건을 처리하는 전직 검사였던 찰스 J. 시클루나는 "라칭거 추기경은 그러한 사건들을 처리하는 데 큰 지혜와 단호함을 보여주었고, 가장 어렵고 까다로운 사건들에 직면하여 큰 용기를 보여주었다."라고 말했다. 크리스토프 쇤보른 추기경에 따르면, 라칭거는 "사건을 은폐하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사건을 해결하고 조사하려고 했다. 이것은 바티칸에서 항상 환영받은 것은 아니었다". 라칭거는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성추행 혐의를 받는 오스트리아 추기경이자 요한 바오로 2세의 친구인 한스 헤르만 그뢰어를 조사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그 결과 그뢰어는 사임했다.

2010년 3월, 베네딕토 16세는 아일랜드 가톨릭 교회에 사제들의 미성년자 성추행 사건을 다룬 사목 서한을 보내 슬픔을 표하고, 학대 혐의를 처리하는 방식을 변경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피해자 단체들은 이 서한이 학대 혐의에 대한 내부 조사와 관련하여 세속 법 집행이 교회법 비밀 유지보다 우선순위를 갖는지 여부를 명확히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교황은 그 후 "미래에 젊은이들을 보호하고" 학대에 책임이 있는 사제들을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는" 조치를 도입할 것을 약속했고, 다음 달 바티칸은 기존 교회법을 어떻게 시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지침을 발표했다. 이 지침은 "범죄 신고에 관한 민법은 항상 준수되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전임자보다 성 학대 문제 해결에 더 적극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네딕토 16세는 여러 차례 미흡한 대처를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2022년 1월, 독일 법률회사 베스트팔 슈필커 바스트(Westpfahl Spilker Wastl)가 가톨릭 교회의 의뢰로 작성한 보고서는 1977년부터 1982년까지 뮌헨과 프라이징 대교구 대주교였던 당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성추행 혐의가 있는 사제 4명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베네딕토 16세는 이러한 혐의를 부인했다. 다만, 1980년 1월 뮌헨과 프라이징 대교구 관구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전 발언을 수정하여 독일 수사관들에게 자신이 그곳에 없었다고 잘못 말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오류는 "악의적인 것이 아니었고", 그의 진술의 "편집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의 결과"였다고 해명했다. 로이터에 따르면, 마틴 푸쉬 변호사는 "총 4건의 사례에서 당시 추기경이었던 라칭거 대주교가 성 학대 사건과 관련하여 과실을 저질렀다고 결론지었다"고 말했다.

2022년 2월, 베네딕토 16세는 뮌헨 대주교 재임 시절 성 학대 사건 처리에 오류가 있었다고 인정했다. 바티칸이 공개한 서한에 따르면, 그는 "중대한 잘못"에 대해 용서를 구했지만 개인적인 잘못은 부인했다. 베네딕토 16세는 "저는 가톨릭 교회에서 큰 책임을 맡았습니다. 제 임기 동안 여러 곳에서 발생한 학대와 오류에 대한 저의 고통은 더욱 큽니다"라고 밝혔다. 뮌헨 검찰청은 2022년 보고서에 따라 베네딕토 16세와 프리드리히 베터 추기경에 대한 수사를 시작했다. 2023년 3월, "범죄 혐의에 대한 충분한 의심을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에" 수사는 "중단"되었다. 수사 대상은 "교회 관리자들 자신이 저지른 학대 행위가 아니라, 적극적인 행위 또는 부작위를 통한 교사 및 방조 행위 가능성"이었다.

라칭거가 추진했던 사건 중 하나는 레지오 마리애 설립자이자 멕시코 출신 사제인 마르시알 마키엘의 성추행 혐의 관련이었다. 전기 작가 안드레아 토르니엘리(Andrea Tornielli)는 라칭거 추기경이 마키엘에 대한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요한 바오로 2세와 여러 추기경을 포함한 고위 관계자들, 그리고 교황의 영향력 있는 비서 스타니스와프 지위스가 그를 막았다고 주장했다.

제이슨 베리에 따르면, 안젤로 소다노 추기경은 "혐의가 정당하지 않다고 가정하고" 있던 라칭거에게 1999년 마키엘에 대한 소송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2004년 마키엘이 교황으로부터 영예를 받자 새로운 고발자들이 등장했고, 라칭거 추기경은 "스스로 마키엘에 대한 조사를 승인"했다. 라칭거가 교황이 된 후, 그는 마키엘과 레지오 마리애에 대한 소송을 시작하여 마키엘을 교회의 활동적인 직무에서 물러나게 했다. 2010년 5월 1일, 바티칸은 "반박할 수 없는 증인들에 의해 확인된 마키엘 신부의 가장 심각하고 객관적으로 부도덕한 행동으로, 진정한 범죄에 해당하며 양심과 진정한 종교적 감정이 결여된 삶을 보여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2020년 11월, 바티칸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가 성추행 혐의를 받고 있던 축출된 전 추기경 테오도르 맥캐릭의 권력 상승을 허용했다는 비난 보고서를 발표했다. 베네딕토 16세가 2006년 맥캐릭에게 워싱턴 D.C. 대주교직에서 사임할 것을 압박했음에도 불구하고, 맥캐릭은 베네딕토 16세의 재임 기간 동안 사역 활동을 매우 활발하게 계속했으며, 심지어 2009년 알링턴 국립묘지에서 열린 미국 상원의원 테드 케네디의 장례식 집례라는 매우 공개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2019년, 베네딕토 16세는 6,000단어 분량의 서한을 발표하여 교회의 성추행 위기를 세속화와 1960년대의 성혁명에 의해 주도된 도덕성 침식의 결과로 돌렸다. 이 서한은 그의 후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견해와는 극명하게 대조되는데,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문제를 교회의 계층적 구조 내 권력 남용의 부산물로 보았다. 뉴욕 타임스는 나중에 "당시 그의 허약한 건강을 고려할 때, 많은 교회 관계자들은 베네딕토 16세가 실제로 그 편지를 썼는지, 아니면 프란치스코 교황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편지를 발표하도록 조종당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베네딕토 16세의 서거 후, 교회 내 성추행과의 싸움에 대한 그의 노력은 특히 피해자 단체들로부터 엇갈린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탈리아 피해자 단체인 Rete l'Abuso의 설립자 프란체스코 자난디는 "라칭거(베네딕토 16세의 세례명)는 프란치스코 교황보다 소통은 덜했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렇게 한 최초의 교황이었다"고 말했다. 옹호 및 연구 단체인 BishopAccountability.org의 공동 이사인 앤 바렛 도일은 베네딕토 16세는 "가톨릭 사제들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한 수십만 명의 어린이들에게 가해진 헤아릴 수 없는 피해를 바로잡는 그의 일차적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으로 주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수많은 책임 있는 주교들이 권력을 유지하고 비밀주의 문화가 그대로 남았다"고 말했고, 사제에게 성적으로 학대당한 생존자 네트워크는 성명서에서 "베네딕토 16세는 교회의 이미지 악화와 성직자 계층으로의 재정 흐름에 더 관심이 있었지, 진정한 사과와 피해자에 대한 진정한 배상이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4.3. 바티리크스 스캔들

2012년 교황에게 보내진 고발 문서가 유출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바티리크스(Vatileaks)' 스캔들로 불린다. 유출의 주체인 전 집사 파올로 가브리엘레는 바티칸 법원에서 절도죄로 징역 18개월의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교황은 그를 사면했다. 가브리엘레는 "교황이 조종당하고 있다"며 "부정을 바로잡기 위해" 유출했다고 동기를 설명했다.

유출된 문서에는 바티칸의 재정을 관리하는 종교 사업 협회의 문서와 자금세탁 등 바티칸의 부정을 척결하려던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가 실각할 위험에 처해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은 바티칸 행정 수반인 베르토네 국무장관 등 교황의 측근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바티칸 내부에서 권력 투쟁이 심화되고 있다고 여겨졌다.

바티칸은 자금세탁 문제로 EU로부터 법적 미비점을 지적받아 왔다. 2009년 JP모건 체이스 은행은 밀라노 지점의 바티칸 은행 계좌를 폐쇄했는데, 이는 짧은 기간에 1500에 달하는 자금이 이체되고 매일 잔액이 0이 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JP모건 체이스 은행이 바티칸에 답변을 요구했으나 답변이 없었기 때문이다. 2010년 이탈리아 재무경찰은 바티칸 은행의 33 예금을 동결하고 부정 회계 혐의로 수사를 시작했다.

2010년 말 바티칸은 자금세탁을 포함한 불투명한 자금 흐름을 없애기 위한 재무정보감독국을 설치했지만, 2012년 미국의 「국제 마약 통제 전략 보고서」의 「자금세탁에 이용되는 국가 목록」에 바티칸이 포함되었다.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 대주교는 자금세탁 근절에 앞장섰으나, 주미 대사로 이동하며 실각했다. 이탈리아 중앙은행은 자금세탁 방지 노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독일 은행의 이탈리아 법인에 대한 바티칸 내 감독 업무를 중단시켰다.

이러한 부정은 베네딕토 16세가 바티칸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가톨릭 성직자 성추행 사건과 함께 교황의 심적 부담이 되었다.

5. 한국과의 관계

2007년 10월 11일, 베네딕토 16세는 김지영 주교황청 한국 대사를 접견한 자리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고,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와 비핵화를 기원했다. 그는 "북한이 핵개발 야망을 완전히 버리기를 바라며 한반도의 화해 협력을 추구하는 국제사회의 노력을 환영한다"고 밝히며, "여러 나라가 참여한 북핵 협상이 무시무시한 파괴로 이어지는 무기를 개발하는 프로그램의 중단을 이끌어내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강조했다.

베네딕토 16세는 한국의 과학 기술 발전이 인간 존엄성을 존중하는 윤리적 기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며, 한국인의 윤리적 감성이 국제적인 과학 연구와 그 활용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했다.

6. 저서

베네딕토 16세는 66권의 책, 세 편의 회칙, 그리고 네 편의 사도 권고를 저술했다. 주요 저서는 다음과 같다.

* 《전례의 정신》
* 《그리스도 신앙 - 어제와 오늘》
* 《미래의 도전들》
* 《주님은 우리 곁에 계신다》
* 《신앙과 미래》
* 《신앙의 현재 상황 - 그래도 로마가 중요하다》
* 《이 땅의 소금》
* 《하느님과 세상 - 우리 시대의 신앙과 삶》
* 《시온의 딸》
* 《하느님의 혁명》
* 《나자렛 예수》

한국어 번역 저서

* 《믿음과 미래》
* 《참된 형제란 무엇인가 ― 기독교적 형제관》
* 《기독교 입문》
* 《전례의 정신》
* 《새로운 로마 교황 나의 신앙의 발자취》 (반생이 적힌 자서전)
* 《베네딕토 16세 명상과 기도로 하는 십자가의 길》
* 《교황 베네딕토 16세 회칙 신은 사랑》
* 《믿음에 관하여 ― 라칭거 추기경과의 대화》 (추기경 시절 인터뷰)
* 《탈세속화 시대의 철학과 종교》
* 《교황 베네딕토 16세 영적 강화집 2005》
* 《교황 베네딕토 16세 영적 강화집 2006》
* 《교황 베네딕토 16세 영적 강화집 2007》
* 《사도적 권고 사랑의 성사 ― 교황 베네딕토 16세》
* 《회칙 희망으로 구원받다》
* 《나자렛 예수》 시리즈 - 교황 재임 중 교황의 직무와는 관계없이 집필·출판된 시리즈. 「교황 베네딕토 16세 요제프 라칭거」 명의. 한국어 번역 중 후기 2권은 퇴위 후 발간되었기에 명예 교황 명의임.
* 《나자렛 예수》
* 《나자렛 예수 II: 십자가와 부활》
* 《나자렛 예수 프롤로그: 탄생》
* 《사도 교회의 기원》
* 《교부》
* 《성 바오로》

7. 회칙

베네딕토 16세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Deus caritas est)》(라틴어: "God is Love"), 《희망으로 구원을(Spe salvi)》("Saved by Hope"), 《진리 안의 사랑(Caritas in veritate)》("Love in Truth") 등 세 편의 회칙을 저술했다.

그의 첫 번째 회칙인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그는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즉, 하느님과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아가페)을 통해 명상 속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경험하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사랑의 삶은 테레사 수녀와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같은 성인들의 삶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나아가는 방향이다. 이 회칙은 42개 단락에 약 1만 6천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전반부는 2005년 여름에 베네딕토 16세가 그의 모국어인 독일어로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반부는 그의 전임자인 요한 바오로 2세가 미완성으로 남긴 글에서 따온 것이다. 이 문서는 200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서명되었다. 이 회칙은 한 달 후 라틴어로 반포되었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폴란드어, 포르투갈어, 스페인어로 번역되었다. 이것은 바티칸이 교황의 공식 저서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기로 결정한 이후 처음으로 발표된 회칙이다.

베네딕토 16세의 두 번째 회칙인 《희망으로 구원을》은 희망이라는 미덕에 관한 것으로 2007년 11월 30일에 발표되었다.

세 번째 회칙인 《진리 안의 사랑》은 2009년 6월 29일(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축일)에 서명되었고 2009년 7월 7일에 발표되었다. 이 회칙에서 교황은 사회 정의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계속 이어갔다. 그는 "죄의 해로운 영향이 분명한" 만연한 경제 시스템을 비난하고, 사람들에게 사업과 경제 관계에서 윤리를 재발견하도록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