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미유 코킬라트
1. 개요
카미유 코킬라트는 벨기에의 군인이자 탐험가로, 1853년 리에주에서 태어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다. 헨리 모턴 스탠리와 함께 콩고 지역을 탐험하며 콩고 자유국 건설에 기여했으며, 1889년 콩고 자유국 총독으로 제안되었으나 1891년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그는 콩고 자유국의 개척자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업적을 기려 도시 이름이 변경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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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 육군사관학교 동문 -
디디에 예툼바 롱질라
디디에 예툼바 롱질라는 벨기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콩고 민주 공화국 육군 대장으로 진급하여 합동군사참모본부 항공야전군사령관을 역임하고 원수로 예편한 군인이다. -
벨기에 육군사관학교 동문 -
제라르 르망
제라르 르망은 벨기에 육군 장교로 벨기에 군 현대화에 기여하고 리에주 요새 사령관으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 -
아메리고 베스푸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에 활동한 이탈리아의 상인이자 탐험가로, 신대륙 탐험과 기록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 명명에 영향을 미쳤지만, 그의 항해 기록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
말라리아로 죽은 사람 -
올리버 크롬웰
올리버 크롬웰은 잉글랜드 내전에서 의회파를 이끌고 잉글랜드 연방 수립에 기여했으며, 호국경으로 통치했으나 사후 부관참시를 당한 잉글랜드의 군인이자 정치가였다. -
1853년 출생 -
칼 라르손
스웨덴 화가 칼 라르손은 수채화, 유화, 프레스코화 등 다양한 작품을 남겼으며, 가족과 집을 주제로 한 그림,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은 화풍, 그리고 《구스타프 바사의 스톡홀름 입성》과 《동지제의 희생》 등의 대표작으로 유명하다. -
1853년 출생 -
메가타 다네타로
메가타 다네타로는 일본 제국의 관료이자 법률가, 교육자로, 귀족원 의원과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하버드 대학교 졸업 후 일본 법률 및 재정 제도 정비에 기여했고, 대한제국 재정 고문으로 화폐정리사업을 실시하여 한국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일본 근대 교육 발전에도 공헌했으며 국제연맹 총회에 일본 대표로 참석했다.
2. 생애
카미유 에메 코킬라트(Camille-Aimé Coquilhat, 1853년 10월 15일 ~ 1891년 3월 24일)는 벨기에의 군인이자 콩고 자유국의 식민 행정가였다. 리에주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군 복무를 경험한 후, 1882년부터 헨리 모턴 스탠리가 이끄는 국제 아프리카 협회(IAA) 소속으로 콩고 강 유역 탐험과 식민지 개척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특히 훗날 콩고 자유국의 일부가 되는 에카퇴르 지역에서 방갈라족을 대상으로 식민 기지를 건설하는 등 활동했다. 건강 문제로 벨기에와 콩고를 오가며 활동했으며, 1889년에는 카미유 얀센의 후임으로 콩고 자유국 총독 대행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콩고로 돌아온 직후인 1891년 3월 24일 보마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벨기에로 옮겨져 안트베르펜에 안장되었다.
벨기에에서는 코킬라트를 콩고 식민지 개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하며, 과거 에카퇴르빌(Équateurville)로 불렸던 도시를 그의 이름을 따 코킬라트빌( Coquilhatstad네덜란드어 )로 개칭하기도 했다. 이 도시는 이후 음반다카로 다시 이름이 변경되었다.
2.1. 초기 생애
카미유 에메 코킬라트(Camille-Aimé Coquilhat)는 1853년 10월 15일, 벨기에 리에주의 프랑스계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 동안 프랑스 제3공화국의 북부군에 자원하여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 벨기에로 돌아와 벨기에군의 소위가 되었다.
1882년, 코킬라트는 헨리 모턴 스탠리가 이끄는 국제 아프리카 협회(IAA)의 오트콩고 탐험대에 자원하여 합류했다. 그는 1884년까지 스탠리빌에서 근무하며 경험을 쌓았다. 이후, 훗날 콩고 자유국(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이 될 지역인 에카퇴르 지역에서 방갈라어를 사용하는 방갈라족 거주지에 식민지 기지를 건설하는 활동에 참여했다.
2.2. 군 복무
카미유 코킬라트는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1870–1871) 동안 프랑스 제3공화국의 북부군에 자원하여 복무했다. 전쟁이 끝난 후 벨기에로 돌아와 벨기에군 소위로 임관했다.
1882년, 그는 헨리 모턴 스탠리가 이끄는 국제 아프리카 협회(IAA)의 오트콩고 탐험대에 자원하여 참여했으며, 1884년까지 스탠리빌에서 근무했다. 이후 콩고 자유국(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 에카퇴르 지역의 방갈라어 사용 부족인 방갈라족 거주지에 식민지 기지를 건설하는 데 관여했다. 1886년에는 스탠리 폭포에서 동부 콩고의 아랍 세력과의 전투에 잠시 참여하기도 했다.
2.3. 콩고 탐험 및 식민 활동
1882년, 코킬라트는 헨리 모턴 스탠리가 이끄는 국제 아프리카 협회(IAA)의 상부 콩고 강 원정대에 자원하여 참여했으며, 1884년까지 키상가니(당시 스탠리빌)에서 근무했다. 이후 그는 훗날 콩고 독립국(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이 되는 지역의 에카퇴르 지역에서 방갈라족이 거주하는 곳에 식민지 기지를 건설하는 임무를 맡았다.
1885년 건강 문제로 벨기에로 잠시 돌아왔으나, 1886년 다시 콩고로 복귀하여 보요마 폭포(당시 스탠리 폭포)에서 동부 콩고의 아랍 세력(실제로는 잔지바르인)과의 전투에 잠시 참여했다. 그러나 같은 해 건강이 다시 악화되어 벨기에로 돌아가 1890년까지 머물렀고, 이 기간 동안 식민 행정부에서 일했다.
1889년, 코킬라트는 당시 콩고 자유국 총독이었던 카미유 얀센의 후임자로 지명되어 다시 콩고로 파견되었다. 하지만 콩고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91년 3월 24일, 보마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벨기에로 운구되어 안트베르펜에 안장되었다.
벨기에 내에서는 코킬라트를 콩고 자유국 건설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과거 에카퇴르빌(Équateurville)로 불렸던 도시는 그의 이름을 따 코킬라트빌( Coquilhatstad네덜란드어 )로 개칭되었으나, 이후 음반다카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2.4. 죽음
1889년, 코킬라는 콩고 자유국 총독인 카미유 얀센을 대체할 인물로 제안되어 다시 콩고로 파견되었다. 코킬라는 콩고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891년 3월 24일 보마에서 말라리아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벨기에로 송환되어 앤트워프에 묻혔다.
3. 평가 및 유산
벨기에에서 코킬라트는 콩고 독립국의 "선구자" 중 하나로 기념되었다. 에카퇴르빌(Équateurville)로 알려졌던 도시는 그를 기리기 위해 코킬라트빌(Coquilhatville, Coquilhatstad네덜란드어)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코킬라트빌은 이후 음반다카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4. 저술
오트콩고에 관하여. 파리: 르베그, 18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