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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러타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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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캘러타이프는 1840년대 윌리엄 폭스 탤벗이 개발한 사진술로, 염화은을 이용한 종이 위에 음화상을 얻어 여러 장의 양화로 복제하는 기술이다. 다게레오타이프에 비해 선명도가 떨어졌지만, 종이에 인화하는 방식 덕분에 이동이 간편하여 여행 사진가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캘러타이프는 1850년대까지 유럽에서 사용되었으며, 19세기 후반 콜로디온 습판법의 등장으로 쇠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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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러타이프

2. 역사

탤벗은 1834년부터 빛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1840년 캘러타이프를 발명하였다. 캘러타이프는 초기에 다게레오타이프에 비해 선명함과 재현도가 떨어져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 1840년대에는 탤벗의 지인이나 친척을 중심으로 캘러타이프가 사용되었으며, 1847년에는 최초의 사진 협회인 캘러타이프 협회가 창설되었다.[15]

1844년 의 포목상인 블랑카르-에브라르가 캘러타이프를 개량한 이후, 1847년부터는 영국뿐만 아니라 프랑스에서도 캘러타이프가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샤를 네그르, 앙리 르 세크, 귀스타브 르 그레 등의 화가나 판화가들이 캘러타이프 기술에 관심을 가졌으며, 종이에 인화하는 방식의 편리함 덕분에 1850년대까지 여행 사진가들에게 인기를 얻었다.[16]

캘러타이프는 다게레오타이프에 비해 덜 선명한 이미지를 생성했지만, 복제가 가능하다는 장점과 특유의 미학 덕분에 1850년대 영국프랑스유럽 대륙에서 인기를 유지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콜로디온 습판법의 등장으로 쇠퇴하였다.

2. 1. 탤벗의 초기 연구와 캘로타입의 발명

탤벗은 1834년부터 빛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염화은으로 감광성을 띄게 한 종이 위에 물건이나 식물을 놓고 음화상을 얻는 포토제닉 드로잉을 제작하였다.[13] 1839년 1월 31일 탤벗은 왕립학회에서 감광유제로 염화은을 사용하여 종이에 양화상을 얻는 기술을 발표하였다.[13] 1840년 가을, 탤벗은 암상자에서 얻은 음화를 현상하여 여러 장의 양화로 복제하는 기술을 개발하였고, 1841년 캘러타이프라고 명명한 자신의 기술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였다.[14]

1835년 탤벗은 빛에 노출된 정도에 따라 어두워지는 염화은으로 감광된 종이를 사용하여 최초의 성공적인 카메라 사진을 만들었다. 이 초기 "포토제닉 드로잉" 과정은 ''인화'' 과정으로, 이미지가 완전히 보이도록 카메라에서 종이를 노출해야 했다. 허용 가능한 네거티브를 생성하려면 매우 긴 노출 시간(일반적으로 한 시간 이상)이 필요했다.

1840년 말, 탤벗은 1839년에 도입된 다게레오타이프 공정이 개척한 개념인 ''현상'' 과정을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는 매우 희미하거나 완전히 보이지 않는 잠상만 카메라에서 생성해야 했는데, 이는 피사체가 밝은 햇빛 아래에 있으면 1~2분 안에 할 수 있었다. 빛으로부터 보호된 종이는 카메라에서 꺼내어 잠상을 화학적으로 현상하여 완전히 보이는 이미지로 만들었다. 이 주요 개선 사항은 1841년에 ''캘러타이프'' 또는 ''탈보타입'' 공정으로 대중에게 소개되었다.[3]

캘러타이프 종이의 감광성 할로겐화은은 질산은과 아이오딘화 칼륨의 반응으로 생성된 아이오딘화 은이었다. 먼저, 고급 필기용지 한쪽 면에 질산은 용액을 바르고 건조시킨 다음, 아이오딘화 칼륨 용액에 담갔다가 다시 건조시켜 "요오드화 종이"를 만들었다. 이 단계에서 화학 물질의 균형은 종이가 빛에 거의 민감하지 않아 무기한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사용을 원할 때, 처음에 질산은을 바른 면에 질산은, 아세트산, 갈산으로 구성된 "은의 갈로-질산염" 용액을 바르고 가볍게 찍어내어 카메라에 노출시켰다. 종이를 부드럽게 따뜻하게 하면서 "은의 갈로-질산염" 용액을 더 바르면 현상이 이루어졌다. 현상이 완료되면 캘러타입을 헹구고 찍어낸 다음, 남은 아이오딘화 은을 빛에 노출될 때 약간만 변색되는 상태의 브롬화 은으로 변환하는 브롬화 칼륨 용액으로 세척하여 안정화하거나, 정착하여, 티오황산 나트륨의 뜨거운 용액에 담갔다. 이 용액은 당시 ''소다의 하이포설파이트''로 알려졌고 일반적으로 "하이포"라고 불렸으며, 아이오딘화 은을 용해시켜 완전히 씻어낼 수 있도록 하여 현상된 이미지의 은 입자만 남기고 캘러타입을 빛에 완전히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캘러타입 공정은 여러 개의 양화를 간단한 접촉 인화로 만들 수 있는 반투명 원본 네거티브 이미지를 생성했다. 이는 카메라로 복사해야만 복제할 수 있는 불투명한 원본 양화를 생성하는 다게레오타입 공정에 비해 중요한 장점을 제공했다.

캘러타입 종이는 캘러타입 네거티브에서 양화를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었지만, 탤벗의 초기 염화은 종이는 일반적으로 ''염화은 종이''라고 불리며 이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더 간단하고 저렴했으며, 탤벗 자신도 염화은 종이 인쇄물의 모양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염화은 인쇄를 만드는 데 필요한 더 긴 노출 시간은 햇빛으로 접촉 인쇄를 할 때 최악의 경우 사소한 불편함이었다. 캘러타입 네거티브는 인쇄물에서 종이의 입자를 덜 눈에 띄게 하고 투명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종종 왁스로 함침되었다.

2. 2. 캘로타입의 발전과 보급

탤벗은 1840년 가을, 암상자에서 얻은 음화를 현상하여 여러 장의 양화로 복제하는 기술을 개발하였고, 1841년 캘러타이프라고 명명한 자신의 기술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였다.[14] 캘러타이프는 다게레오타이프에 비해 선명함과 재현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1840년대 초까지 많은 인기를 얻지 못하였다.[15] 초상 사진술로는 각광받지 못하여 1840년대에 캘러타이프를 애용한 사진가는 대부분 탤벗의 지인이거나 친척이었고, 이들은 1847년 최초의 사진 협회인 캘러타이프 협회를 창설하였다.[15]

1844년 의 포목상인 블랑카르-에브라르가 캘러타이프를 개량하였으며, 1847년을 기점으로 캘러타이프는 영국을 벗어나 프랑스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캘러타이프로 인화한 종이 사진은 판화와 유사한 점이 있었으므로 샤를 네그르, 앙리 르 세크, 귀스타브 르 그레 등의 화가나 판화가가 이 기술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종이에 인화하는 방식이었으므로 다게레오타이프보다 이동이 간편하여 1850년대까지 여행 사진가로부터 인기를 얻었다.[16]

토마스 던컨(Thomas Duncan) by 힐 & 애덤슨(Hill & Adamson). 캘러타입 인쇄, 크기: 19.60 x 14.50 cm, 스코틀랜드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ies of Scotland) 소장


캘러타이프는 유연성과 제작의 용이성에도 불구하고 다게레오타이프를 대체하지 못했다.[4] 탤벗이 영국과 그 외 지역에서 자신의 과정을 특허냈기 때문이다. 탤벗과 달리, 자신의 과정을 공개하는 대가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은 다게르는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내지 않았다.[4] 당시 영국 특허법이 적용되지 않았던 스코틀랜드에서는 에든버러 캘러타입 클럽(Edinburgh Calotype Club)의 회원들과 다른 초기 스코틀랜드 사진가들이 종이 음화 사진 기술을 성공적으로 채택했다.[5] 영국에서는 1847년경 런던에 캘러타입 협회가 조직되어 12명의 열성적인 사진가들을 끌어모았다.[6] 1853년, 종이 음화 사진이 대중에게 공개된 지 12년 만에 탈보트의 특허 제한이 해제되었다.[7]

캘러타이프는 다게레오타입보다 덜 선명한 이미지를 생성했다. 종이를 음화로 사용한다는 것은 종이의 질감과 섬유가 그것으로 만들어진 인쇄물에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는 일반적으로 선명하고 깨끗한 다게레오타입에 비해 약간 거칠거나 흐릿한 이미지를 초래했다.[4][8] 그럼에도 불구하고, 캘러타이프와 캘러타이프로 만들어진 염화은 인쇄물은 특히 캘러타이프의 미학을 소중히 여기고 상업 사진가들과 차별화를 원했던 아마추어 캘러타이피스트들 사이에서 1850년대 영국과 프랑스 외의 유럽 대륙에서 인기를 유지했다.[9] 19세기 후반에 콜로디온 습판법이 다게레오타입의 선명함과 캘러타입의 복제성을 결합한 유리 음화를 모두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영국 사진가들은 또한 캘러타입을 인도로 가져갔는데, 1848년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의 외과 의사인 존 맥코시(John McCosh)는 둘립 싱(Duleep Singh) 마하라자 둘립 싱(Maharajah Duleep Singh)의 첫 번째 이미지를 찍었다.[10]

2. 3. 캘로타입의 쇠퇴

캘러타이프는 1840년 초까지 다게레오타이프에 비해 선명함과 재현도가 떨어져 많은 인기를 얻지 못했다. 초상 사진술로는 각광받지 못하여 1840년대에 캘러타이프를 애용한 사진가는 대부분 탤벗의 지인이거나 친척이었다. 이들은 1847년 최초의 사진 협회인 캘러타이프 협회를 창설하였다.[15]

1844년 의 포목상인 블랑카르-에브라르가 캘러타이프를 개량하였고, 1847년을 기점으로 영국을 벗어나 프랑스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종이에 인화하는 방식이었으므로 다게레오타이프보다 이동이 간편하여 1850년대까지 여행 사진가로부터 인기를 얻었다.[16]

유연성과 제작의 용이성에도 불구하고, 캘러타입은 다게레오타입을 대체하지 못했다.[4] 탤벗이 자신의 기술을 특허낸 것과 달리, 다게르는 자신의 발명품에 대한 특허를 내지 않았다.[4] 당시 영국 특허법이 적용되지 않았던 스코틀랜드에서는 에든버러 캘러타입 클럽의 회원들과 다른 초기 스코틀랜드 사진가들이 종이 음화 사진 기술을 성공적으로 채택했다.[5] 영국에서는 1847년경 런던에 캘러타입 협회가 조직되어 12명의 열성적인 사진가들을 끌어모았다.[6] 1853년, 종이 음화 사진이 대중에게 공개된 지 12년 만에 탈보트의 특허 제한이 해제되었다.[7]

캘러타입은 다게레오타입보다 덜 선명한 이미지를 생성했다. 종이를 음화로 사용한다는 것은 종이의 질감과 섬유가 인쇄물에 나타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약간 거칠거나 흐릿한 이미지를 초래했다.[4][8] 그럼에도 캘러타입은 1850년대 영국과 프랑스 외의 유럽 대륙에서 인기를 유지했다.[9] 19세기 후반에 콜로디온 습판법이 다게레오타입의 선명함과 캘러타입의 복제성을 결합한 유리 음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영국 사진가들은 캘러타입을 인도로 가져갔는데, 1848년 동인도 회사의 외과 의사인 존 맥코시는 둘립 싱의 첫 번째 이미지를 찍었다.[10]

3. 캘로타입의 과정

1835년 탈보트는 염화은으로 감광된 종이를 사용하여 최초의 사진을 만들었다. 이 초기 "포토제닉 드로잉" 과정은 이미지가 완전히 보이도록 카메라에서 종이를 노출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긴 노출 시간(일반적으로 한 시간 이상)이 필요했다.[3]

1840년 말, 탈보트는 다게레오타입 공정이 개척한 ''현상'' 과정을 개발하여, 짧은 시간 안에 촬영이 가능하게 발전시켰다. 이 과정은 피사체가 밝은 햇빛 아래에 있으면 1~2분 안에 매우 희미하거나 보이지 않는 잠상을 만들고, 이후 화학적 현상을 통해 이미지를 완성했다. 이 개선된 방법은 1841년에 ''캘로타입'' 또는 ''탈보타입'' 공정으로 소개되었다.[3]

캘로타입은 다게레오타입과 달리 여러 장의 양화를 만들 수 있는 반투명 네거티브 이미지를 생성하여, 접촉 인화를 통해 복제가 가능하다는 장점을 가졌다.

탈보트는 캘로타입 네거티브에서 양화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초기 염화은 종이(일반적으로 ''염화은 종이''라고 불림)를 사용했다. 염화은 종이는 더 간단하고 저렴했으며, 탈보트는 그 인쇄물의 모양을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캘로타입 네거티브는 종종 왁스로 함침되어 인쇄물의 종이 입자를 덜 눈에 띄게 하고 투명도를 향상시켰다.

3. 1. 재료 준비

캘러타이프에 사용되는 종이는 할로겐화 은을 감광성 재료로 사용했다. 할로겐화 은은 질산 은아이오딘화 칼륨을 반응시켜 생성되는 아이오딘화 은이었다. 먼저, 고급 필기용지 한쪽 면에 질산은 용액을 바르고 건조시킨 다음, 아이오딘화 칼륨 용액에 담갔다가 다시 건조시켜 "요오드화 종이"를 만들었다.[3] 이 단계에서 화학 물질의 균형을 조절하여 종이가 빛에 거의 민감하지 않도록 하여 무기한 보관이 가능하게 했다.[3]

사용을 원할 때는, 처음에 질산은을 바른 면에 질산은, 아세트산, 갈산으로 구성된 "은의 갈로-질산염" 용액을 바르고 가볍게 두드려 건조시킨 후 카메라에 노출시켰다.[3]

3. 2. 촬영 및 현상

1840년 말, 탈보트는 1839년에 도입된 다게레오타입 공정이 개척한 개념인 ''현상'' 과정을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는 매우 희미하거나 완전히 보이지 않는 잠상만 카메라에서 생성해야 했는데, 이는 피사체가 밝은 햇빛 아래에 있으면 1~2분 안에 할 수 있었다. 빛으로부터 보호된 종이는 카메라에서 꺼내어 잠상을 화학적으로 현상하여 완전히 보이는 이미지로 만들었다. 이 주요 개선 사항은 1841년에 ''캘로타입'' 또는 ''탈보타입'' 공정으로 대중에게 소개되었다.[3]

캘로타입 종이의 감광성 할로겐화은은 질산은과 아이오딘화 칼륨의 반응으로 생성된 아이오딘화 은이었다. 먼저, 고급 필기용지 한쪽 면에 질산은 용액을 바르고 건조시킨 다음, 아이오딘화 칼륨 용액에 담갔다가 다시 건조시켜 "요오드화 종이"를 만들었다. 이 단계에서 화학 물질의 균형은 종이가 빛에 거의 민감하지 않아 무기한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사용을 원할 때, 처음에 질산은을 바른 면에 질산은, 아세트산, 갈산으로 구성된 "은의 갈로-질산염" 용액을 바르고 가볍게 찍어내어 카메라에 노출시켰다. 종이를 부드럽게 따뜻하게 하면서 "은의 갈로-질산염" 용액을 더 바르면 현상이 이루어졌다. 현상이 완료되면 캘로타입을 헹구고 찍어낸 다음, 남은 아이오딘화 은을 빛에 노출될 때 약간만 변색되는 상태의 브롬화 은으로 변환하는 브롬화 칼륨 용액으로 세척하여 안정화하거나, 정착하여, 티오황산 나트륨의 뜨거운 용액에 담갔다. 당시 ''소다의 하이포설파이트''로 알려졌고 일반적으로 "하이포"라고 불린 이 용액은 아이오딘화 은을 용해시켜 완전히 씻어낼 수 있도록 하여 현상된 이미지의 은 입자만 남기고 캘로타입을 빛에 완전히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캘로타입 공정은 여러 개의 양화를 간단한 접촉 인화로 만들 수 있는 반투명 원본 네거티브 이미지를 생성했다. 이는 카메라로 복사해야만 복제할 수 있는 불투명한 원본 양화를 생성하는 다게레오타입 공정에 비해 중요한 장점을 제공했다.

캘로타입 종이는 캘로타입 네거티브에서 양화를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었지만, 탈보트의 초기 염화은 종이는 일반적으로 ''염화은 종이''라고 불리며 이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더 간단하고 저렴했으며, 탈보트 자신도 염화은 종이 인쇄물의 모양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염화은 인쇄를 만드는 데 필요한 더 긴 노출 시간은 햇빛으로 접촉 인쇄를 할 때 최악의 경우 사소한 불편함이었다. 캘로타입 네거티브는 인쇄물에서 종이의 입자를 덜 눈에 띄게 하고 투명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종종 왁스로 함침되었다.

3. 3. 정착 및 완성

1840년 말, 탈보트는 1839년에 도입된 다게레오타입 공정이 개척한 개념인 ''현상'' 과정을 개발했다. 이 과정에서는 매우 희미하거나 완전히 보이지 않는 잠상만 카메라에서 생성해야 했는데, 이는 피사체가 밝은 햇빛 아래에 있으면 1~2분 안에 할 수 있었다. 빛으로부터 보호된 종이는 카메라에서 꺼내어 잠상을 화학적으로 현상하여 완전히 보이는 이미지로 만들었다. 이 주요 개선 사항은 1841년에 ''캘로타입'' 또는 ''탈보타입'' 공정으로 대중에게 소개되었다.[3]

캘로타입 종이의 감광성 할로겐화은은 질산은과 아이오딘화 칼륨의 반응으로 생성된 아이오딘화 은이었다. 먼저, 고급 필기용지 한쪽 면에 질산은 용액을 바르고 건조시킨 다음, 아이오딘화 칼륨 용액에 담갔다가 다시 건조시켜 "요오드화 종이"를 만들었다. 이 단계에서 화학 물질의 균형은 종이가 빛에 거의 민감하지 않아 무기한 보관할 수 있도록 했다. 사용을 원할 때, 처음에 질산은을 바른 면에 질산은, 아세트산, 갈산으로 구성된 "은의 갈로-질산염" 용액을 바르고 가볍게 찍어내어 카메라에 노출시켰다. 종이를 부드럽게 따뜻하게 하면서 "은의 갈로-질산염" 용액을 더 바르면 현상이 이루어졌다. 현상이 완료되면 캘로타입을 헹구고 찍어낸 다음, 남은 아이오딘화 은을 빛에 노출될 때 약간만 변색되는 상태의 브롬화 은으로 변환하는 브롬화 칼륨 용액으로 세척하여 안정화하거나, 정착하여, 티오황산 나트륨의 뜨거운 용액에 담갔다. 당시 ''소다의 하이포설파이트''로 알려졌고 일반적으로 "하이포"라고 불린 이 용액은 아이오딘화 은을 용해시켜 완전히 씻어낼 수 있도록 하여 현상된 이미지의 은 입자만 남기고 캘로타입을 빛에 완전히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캘로타입 공정은 여러 개의 양화를 간단한 접촉 인화로 만들 수 있는 반투명한 원본 네거티브 이미지를 생성했다. 이는 카메라로 복사해야만 복제할 수 있는 불투명한 원본 양화를 생성하는 다게레오타입 공정에 비해 중요한 장점을 제공했다.

캘로타입 종이는 캘로타입 네거티브에서 양화를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었지만, 탈보트의 초기 염화은 종이는 일반적으로 ''염화은 종이''라고 불리며 이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더 간단하고 저렴했으며, 탈보트 자신도 염화은 종이 인쇄물의 모양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염화은 인쇄를 만드는 데 필요한 더 긴 노출 시간은 햇빛으로 접촉 인쇄를 할 때 최악의 경우 사소한 불편함이었다. 캘로타입 네거티브는 인쇄물에서 종이의 입자를 덜 눈에 띄게 하고 투명도를 향상시키기 위해 종종 왁스로 함침되었다.

4. 캘로타입과 다게레오타입의 비교

캘러타이프는 다게레오타이프에 비해 선명함과 재현도가 떨어져 1840년대 초까지 큰 인기를 얻지 못했다.[15] 초상 사진술로는 각광받지 못해 1840년대 캘러타이프 애용자는 대부분 탤벗의 지인이나 친척이었다. 이들은 1847년 최초의 사진 협회인 캘러타이프 협회를 창설했다.[15]

1844년 의 포목상인 블랑카르-에브라르가 캘러타이프를 개량했고, 1847년을 기점으로 영국을 벗어나 프랑스에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종이에 인화하는 방식은 다게레오타이프보다 이동이 간편하여 1850년대까지 여행 사진가로부터 인기를 얻었다.[16]

유연성과 제작의 용이성에도 불구하고 캘러타이프는 다게레오타입을 대체하지 못했다.[4] 탤벗이 자신의 기술을 특허낸 반면, 다게르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는 대가로 특허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4] 영국 특허법이 적용되지 않던 스코틀랜드에서는 에든버러 캘러타입 클럽 회원들과 다른 초기 스코틀랜드 사진가들이 종이 음화 사진 기술을 성공적으로 채택했다.[5] 영국에서는 1847년경 런던에 캘러타입 협회가 조직되어 12명의 사진가들을 끌어모았다.[6] 1853년, 탤벗의 특허 제한이 해제되었다.[7]

캘러타이프는 종이 질감과 섬유 때문에 다게레오타입보다 덜 선명한 이미지를 생성했다.[4][8] 그럼에도 캘러타입은 1850년대 영국과 프랑스 외 유럽 대륙에서 아마추어 캘러타이피스트들 사이에서 인기를 유지했다.[9] 19세기 후반, 콜로디온 습판법이 다게레오타입의 선명함과 캘러타입의 복제성을 결합한 유리 음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영국 사진가들은 캘러타입을 인도로 가져갔는데, 1848년 동인도 회사 외과 의사 존 맥코시는 둘립 싱의 첫 이미지를 찍었다.[10]

참조

[1] 웹사이트 Daguerreotypes – Time Line of the Daguerreian Era – Prints & Photographs Online Catalog (Library of Congress) https://www.loc.gov/[...] Loc.gov 2013-08-18
[2] 서적 The Finger print Sourcebook https://www.ncjrs.go[...] NIJ and International Association for Identification
[3] 특허 US Patent 5171 https://patents.goog[...] 1847-06-26
[4] 서적 The Origins of Photojournalism in America https://archive.org/[...] Smithsonian Institution Press
[5] 강연 Transcript of the opening speech,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https://web.archive.[...]
[6] 서적 Nature Exposed: Photography as Eyewitness in Victorian Science by Jennifer Tucker https://books.google[...]
[7] 웹사이트 Impressed by Light: British Photographs from Paper Negatives, 1840–1860: Exhibition Overview https://www.metmuseu[...]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8] 웹사이트 Photographic Processes: Calotypes (Prints and Photographs Reading Room, Library of Congress) https://www.loc.gov/[...] Loc.gov 2011-08-30
[9] 서적 Impressed by light: British photographs from paper negatives, 1840–1860. Accompanies the exhibition 'Impressed by light – British photographs from paper negatives, 1840–1860' held a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September 24 – December 30, 2007; at the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February 3 – May 4, 2008; and at the Musée d'Orsay, Paris, May 26 – September 7, 2008. https://books.google[...] New York: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10] 서적 The Duleep Singhs: The Photograph Album of Queen Victoria's Maharajah Sutton Publishing
[11] 문서 『発明の歴史カメラ』pp.15-16。
[12] 서적 세계미술용어사전 1999
[13] 서적 사진: 빛과 그림자의 예술 시공사 2004
[14] 서적 사진: 빛과 그림자의 예술 시공사 2004
[15] 서적 사진: 빛과 그림자의 예술 시공사 2004
[16] 서적 사진: 빛과 그림자의 예술 시공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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