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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트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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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트의 난은 1549년 영국 노퍽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이다. 당시 농민들은 인클로저로 인한 토지 상실, 임금 감소, 인플레이션 등 사회경제적 어려움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로버트 케트의 지휘 아래 와이먼덤에서 시작된 반란은 노리치를 점령하고 마우스홀드 히스에 캠프를 세우는 등 세력을 키웠다. 그러나 왕실 군대의 반격으로 더신데일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진압되었고, 케트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처형되었다. 케트의 난은 이후 민중 영웅으로 재평가되었으며, 노리치 지역의 학교, 거리, 펍 등의 이름으로 기념되고 있다. 또한 소설, 연극, 음악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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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트의 난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로버트 케트와 그의 지지자들이 마우스홀드 히스의 개혁의 떡갈나무 아래에 있는 모습
로버트 케트와 그의 지지자들이 마우스홀드 히스의 개혁의 떡갈나무 아래에 있는 모습 (Kett's Rebellion in Norfolk (1859)에서)
분쟁 명칭케트의 난
날짜1549년 7월 8일 – 1549년 8월 27일
장소노퍽
결과에드워드 6세 군대의 승리
결과 상세반란 진압
반군 지도자 처형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이스트 앵글리아 반군
지휘관 및 지도자
지휘관 1로버트 케트
지휘관 2에드워드 시모어, 초대 서머싯 공작
존 더들리,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윌리엄 파, 초대 노샘프턴 후작
병력 규모
병력 규모 1~16,000명
병력 규모 2~12,000명의 군대
~1,200명의 독일 및 이탈리아 용병
사상자 및 피해
사상자 1최소 3,000명 사망
부상자 수 미상
사상자 2~250명 사망
사상자 3~3,250명 사망

2. 배경

1540년대 잉글랜드는 농업 위기를 겪었다. 인구 대다수가 토지에 의존했기 때문에 이는 전국적인 불안으로 이어졌다. 이 중 가장 심각했던 것은 노퍽에서 일어난 케트의 난이었다. 폭도들의 주된 불만은 지주들이 사욕을 채우기 위해 인클로저를 하고 공동 경작지에 울타리를 치는 것이었다.[1] 인클로저는 소작농들에게 가축을 방목할 곳을 없앴다. 일부 지주들은 소유지를 독점하고 경작지를 양을 위한 목초지로 바꾸기 위해 세입자들을 농장에서 내쫓았다.[1] 양모 수요가 늘면서 양모 가격이 올라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1] 인플레이션, 실업, 임대료 상승, 임금 감소는 일반 백성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가중시켰다.[2] 역사학자 줄리안 콘월은 이 시기를 "국가가 부자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하는 정책을 가진 부류의 사람들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거의 의심할 수 없었다"라고 표현했다.[3]

2. 1. 16세기 잉글랜드의 사회경제적 위기

1540년대 잉글랜드는 농업 위기를 겪었다. 인구 대다수가 토지에 의존했기에, 이는 전국적인 불안으로 이어졌다. 이 중 가장 심각했던 것은 노퍽에서 일어난 케트의 난이었다. 폭도들의 주된 불만은 지주들이 사욕을 채우기 위해 인클로저를 하고 공동 경작지에 울타리를 치는 것이었다.[1] 인클로저는 소작농들에게 가축을 방목할 곳을 없앴다. 일부 지주들은 소유지를 독점하고 경작지를 양을 위한 목초지로 바꾸기 위해 세입자들을 농장에서 내쫓았다.[1] 양모 수요가 늘면서 양모 가격이 올라 더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1] 인플레이션, 실업, 임대료 상승, 임금 감소는 일반 백성들이 직면한 어려움을 가중시켰다.[2] 역사학자 줄리안 콘월은 이 시기를 "국가가 부자를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하는 정책을 가진 부류의 사람들에게 넘어갔다는 것을 거의 의심할 수 없었다"라고 표현했다.[3]

2. 2. 케트의 난 이전의 움직임

와먼덤에서 시작된 초기 소요 사태는 1549년 7월, 노리치에서 남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작은 시장 마을에서 일어났다. 그 전 달에는 인근의 애틀버러 마을에서 장원 영주가 공유지를 구획(울타리를 쳐서 사유화)하기 위해 세운 울타리를 뜯어내는 소동이 있었다. 폭도들은 에드워드 시모어, 서머싯 공작(에드워드 6세의 미성년 시절에 섭정)이 불법적인 구획에 반대하는 포고령을 발표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합법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와먼덤은 1549년 7월 6일 주말에 연례 축제를 열었고, 와먼덤 수도원의 공동 수호성인인 성 토마스 베켓을 기리는 연극이 공연되었다. 이 축제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1538년에 토마스 베켓의 이름을 교회 달력에서 삭제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불법이었다. 축제가 끝난 월요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리 세인트 보돌프와 헤더셋 마을로 가서 울타리와 담장을 뜯어냈다.

그들의 첫 번째 표적 중 한 명은 헤더셋의 변호사이자 지주였던 존 플로더유 경이었다. 그는 수도원 해산 과정에서 와먼덤 수도원(교구 교회의 일부)을 철거하는 감독관 역할을 하고 토지를 구획한 것으로 인해 평판이 좋지 않았다. 플로더유는 폭도들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의 구획은 건드리지 말고 대신 와먼덤의 로버트 케트의 구획을 공격하도록 했다.

케트의 오크, 헤더셋, 노퍽 근처 B1172 옆


케트는 57세 정도였으며 와먼덤에서 더 부유한 농부 중 한 명이었다. 케트(Ket, Cat, Chat, 또는 Knight로도 표기) 가문은 12세기부터 노퍽에서 농사를 지어왔다. 케트는 토마스와 마저리 케트의 아들이었으며, 프랜시스 케트 목사는 그의 조카였다. 케트의 형제 중 두 명 또는 세 명이 1549년까지 사망했지만, 그의 맏형 윌리엄은 반란에 참여했다. 케트의 아내 앨리스와 몇몇 아들은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케트는 와먼덤 수도원이 철거될 때 자신의 교구 교회를 구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로 인해 플로더유와 갈등을 겪었다. 폭도들의 불만을 들은 케트는 그들의 대의에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울타리를 뜯어내는 것을 도운 후 그들을 헤더셋으로 데려가 플로더유의 구획을 파괴했다.

다음 날인 7월 9일 화요일, 시위대는 노리치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 케트는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인근 마을에서 사람들이 합류하고 있었다. 현지 전설에 따르면 반란군들의 만남의 장소는 와먼덤과 헤더셋 사이의 길에 있는 참나무였으며, 그곳에서 나중에 반란군 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케트의 오크로 알려진 이 나무는 노퍽 카운티 의회에 의해 보존되었다.[1][2] 오크는 마우스홀드 히스의 참나무가 반란군 진영의 중심지가 되면서 반란의 상징이 되었지만, 이 "개혁의 오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한 자료에 따르면 개혁의 오크는 1960년대에 노리치 시의회에서 주차장을 만들기 위해 잘라냈다고 한다.[3] 하지만 레그 그로브스는 1940년대에 이미 파괴되었다고 썼다.[4]

3. 케트의 난

에드워드 시모어, 서머싯 공작의 인클로저 반대 포고령에 힘입어, 와먼덤에서 시작된 반란군은 자신들의 행동이 합법적이라고 믿었다.[1] 1549년 7월 6일, 와먼덤 축제에서 토마스 베켓을 기리는 연극이 공연된 후, 사람들은 모리 세인트 보돌프와 헤더셋으로 이동하여 울타리를 뜯어냈다. 이들의 첫 표적 중 하나는 수도원 해산 과정에서 토지를 구획한 존 플로더유 경이었다. 플로더유는 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로버트 케트의 구획을 공격하게 했다.[2]

케트는 57세 정도의 부유한 농부였으며, 12세기부터 노퍽에서 농사를 지어온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와먼덤 수도원 철거 당시 자신의 교구 교회를 구하는 데 앞장섰고, 이로 인해 플로더유와 갈등을 겪었다. 폭도들의 불만을 들은 케트는 그들의 대의에 동참하여 자신의 울타리를 뜯어내고, 그들을 이끌고 헤더셋으로 가 플로더유의 구획을 파괴했다.[2]

7월 9일, 시위대는 노리치를 향해 출발했고, 케트는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와먼덤과 헤더셋 사이의 길에 있는 참나무(케트의 오크)는 반란군들의 만남의 장소로, 나중에 반란군 9명이 교수형에 처해진 곳이다.[1] 이 나무는 노퍽 카운티 의회에 의해 보존되었지만,[1][2] 마우스홀드 히스의 참나무가 반란군 진영의 중심지가 되면서 "개혁의 오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3][4]

케트와 추종자들은 7월 9일 밤 보소프에 야영했고, 노퍽과 서퍽의 보안관 에드먼드 윈드햄 경의 해산 명령을 거부했다. 다음 날, 반군은 노리치 시장 토마스 코드의 방문을 받았지만,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 반군은 이턴 우드를 거쳐 헬레스던에서 웬섬 강을 건너 드레이턴에서 밤을 보냈다.[2]

1549년 7월 12일, 반란군은 노리치 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마우스홀드 히스에 도착하여 6주 반 동안 사용할 기지를 구축했다.[5] 케트는 세인트 마이클 채플(훗날 케트의 성으로 알려짐)에 본부를 설치했다.[6] 반란군은 마우스홀드에 캠프를 구축한 후 29개 조항의 불만 목록을 작성했다. 이 목록은 케트, 코드, 올드리치 및 각 백의 대표들이 서명하여 서머싯 공작에게 전달되었다.[9]

새뮤얼 우드워드의 저서 ''노리치 성의 역사와 고대 유물''(1847)에 실린 16세기 노리치 지도


1549년 7월 21일, 왕실 평의회의 사자 요크 헤럴드 바솔로뮤 버틀러가 런던에서 노리치에 도착하여 반란군에게 사면을 제안했으나, 케트는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며 거부했다. 7월 22일, 반군은 비숍스게이트 다리를 공격하여 노리치를 함락시켰다.[13]

노샘프턴 후작이 이탈리아 용병을 포함한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셰필드 경이 전사하고 군대가 붕괴되면서 퇴각했다.[15] 이후 워릭 백작이 이끄는 더 강력한 군대가 파견되어 8월 24일 노리치에 진입했다.[20]

8월 26일, 1,400명의 란츠크네히트 용병이 도착하면서 케트는 마우스홀드 진영을 떠나 저지대로 이동했다.[23] 8월 27일, 더신데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반란군은 패주했고 수천 명이 죽었다.[24] 더신데일의 정확한 위치는 불확실하지만, 영국 고고학 협의회의 지도 회귀 분석에 따르면 현재 시내 중심부에서 북동쪽에 부분적으로 개발된 지역인 노리치 롱 밸리 부근으로 추정된다.[25]

3. 1. 와이먼덤에서의 봉기

1549년 7월, 노리치에서 남서쪽으로 약 16km 떨어진 작은 시장 마을 와먼덤에서 난이 시작되었다. 그 전 달에는 인근의 애틀버러 마을에서 장원 영주가 공유지를 구획하며 세운 울타리를 뜯어내는 소동이 있었다. 폭도들은 에드워드 시모어, 서머싯 공작이 불법적인 구획에 반대하는 포고령을 발표했기에 자신들이 합법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했다.[1] 와먼덤은 7월 6일 주말에 연례 축제를 열었고, 와먼덤 수도원의 공동 수호성인인 성 토마스 베켓을 기리는 연극이 공연되었다. 이 축제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1538년에 토마스 베켓의 이름을 교회 달력에서 삭제하라고 명령했기에 불법이었다. 축제가 끝난 월요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리 세인트 보돌프와 헤더셋 마을로 가서 울타리와 담장을 뜯어냈다.

그들의 첫 번째 표적 중 한 명은 헤더셋의 변호사이자 지주였던 존 플로더유 경이었다. 그는 수도원 해산 과정에서 와먼덤 수도원(교구 교회의 일부)을 철거하는 감독관 역할을 하고 토지를 구획한 것으로 인해 평판이 좋지 않았다. 플로더유는 폭도들에게 뇌물을 주고 자신의 구획은 건드리지 말고 대신 와먼덤의 로버트 케트의 구획을 공격하도록 했다.[2]

케트는 57세 정도였으며 와먼덤에서 더 부유한 농부 중 한 명이었다. 케트(Ket, Cat, Chat, 또는 Knight로도 표기) 가문은 12세기부터 노퍽에서 농사를 지어왔다. 케트는 토마스와 마저리 케트의 아들이었으며, 프랜시스 케트 목사를 포함한 여러 형제가 있었다. 케트의 형제 중 두 명 또는 세 명이 1549년까지 사망했지만, 그의 맏형 윌리엄은 반란에 참여했다.[3] 케트의 아내 앨리스와 몇몇 아들은 반란에 가담한 것으로 기록되지 않았다.[4] 케트는 와먼덤 수도원이 철거될 때 자신의 교구 교회를 구하는 데 앞장섰으며, 이로 인해 플로더유와 갈등을 겪었다.[5] 폭도들의 불만을 들은 케트는 그들의 대의에 동참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의 울타리를 뜯어내는 것을 도운 후 그들을 헤더셋으로 데려가 플로더유의 구획을 파괴했다.[6]

다음 날인 7월 9일 화요일, 시위대는 노리치를 향해 출발했다. 이때 케트는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인근 마을에서 사람들이 합류하고 있었다.[7] 현지 전설에 따르면 반란군들의 만남의 장소는 와먼덤과 헤더셋 사이의 길에 있는 참나무였으며, 그곳에서 나중에 반란군 9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케트의 오크로 알려진 이 나무는 노퍽 카운티 의회에 의해 보존되었다.[8][9] 마우스홀드 히스의 참나무가 반란군 진영의 중심지가 되면서 케트의 오크는 반란의 상징이 되었지만, "개혁의 오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10]

3. 2. 노리치로의 진군

에드워드 시모어, 서머싯 공작의 불법적인 토지 구획 반대 포고령에 힘입어, 와먼덤에서 시작된 반란군은 자신들의 행동이 합법적이라고 믿었다.[1] 1549년 7월 6일, 와먼덤 축제에서 토마스 베켓을 기리는 연극이 공연된 후, 사람들은 모리 세인트 보돌프와 헤더셋으로 이동하여 울타리를 뜯어냈다. 이들의 첫 표적 중 하나는 수도원 해산 과정에서 토지를 구획한 존 플로더유 경이었다. 플로더유는 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로버트 케트의 구획을 공격하게 했다.[2]

케트는 57세 정도의 부유한 농부였으며, 12세기부터 노퍽에서 농사를 지어온 가문 출신이었다. 그는 와먼덤 수도원 철거 당시 자신의 교구 교회를 구하는 데 앞장섰고, 이로 인해 플로더유와 갈등을 겪었다. 폭도들의 불만을 들은 케트는 그들의 대의에 동참하여 자신의 울타리를 뜯어내고, 그들을 이끌고 헤더셋으로 가 플로더유의 구획을 파괴했다.[2]

7월 9일, 시위대는 노리치를 향해 출발했고, 케트는 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와먼덤과 헤더셋 사이의 길에 있는 참나무(케트의 오크)는 반란군들의 만남의 장소로, 나중에 반란군 9명이 교수형에 처해진 곳이다.[1] 이 나무는 노퍽 카운티 의회에 의해 보존되었지만,[1][2] 마우스홀드 히스의 참나무가 반란군 진영의 중심지가 되면서 "개혁의 오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3][4]

케트와 추종자들은 7월 9일 밤 보소프에 야영했고, 노퍽과 서퍽의 보안관 에드먼드 윈드햄 경의 해산 명령을 거부했다. 다음 날, 반군은 노리치 시장 토마스 코드의 방문을 받았지만,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후 반군은 이턴 우드를 거쳐 헬레스던에서 웬섬 강을 건너 드레이턴에서 밤을 보냈다.[2]

3. 3. 마우스홀드 히스 점령

1549년 7월 12일, 반란군은 노리치 시를 내려다볼 수 있는 마우스홀드 히스에 도착하여 6주 반 동안 사용할 기지를 구축했다.[5] 이곳은 그해 여름 이스트 앵글리아 지역에 나타난 여러 반군 캠프 중 가장 큰 규모였다. 당시 반란군은 "캠프 사람들"로, 반란은 "캠핑 타임" 또는 "소란의 시간"으로 불렸다.[5]

케트는 세인트 마이클 채플(훗날 케트의 성으로 알려짐)에 본부를 설치했다.[6] 서리 백작이 세인트 레너드 수도원 부지에 지은 마운트 서리 저택은 1547년 백작 처형 이후 비어 있었고, 케트의 포로 수용소로 사용되었다.[7] 케트의 평의회는 노퍽 백(Hundred of Norfolk)과 서퍽 대표들로 구성되었으며, 개혁의 떡갈나무 아래에서 회의를 열어 캠프 운영, 식량 및 무기 조달, 젠트리 체포 영장 발부 등의 업무를 처리했다.[7] 노리치 시민들과 주변 마을 주민들이 캠프에 합류하면서 캠프 규모는 당시 잉글랜드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였던 노리치(인구 약 12,000명)보다 커졌다. 노리치 시장 토마스 코드, 전 시장 토마스 올드리치, 설교자 로버트 왓슨은 반군과 협상하며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평의회에 참여했다.[8]

반란군은 마우스홀드에 캠프를 구축한 후 29개 조항의 불만 목록을 작성했다. 이 목록은 케트, 코드, 올드리치 및 각 백의 대표들이 서명하여 서머싯 공작에게 전달되었다.[9] 이 목록은 젠트리의 권력 제한, 농촌 지역 통제력 약화, 급격한 경제 변화 억제, 공유지 남용 방지, 성직자 가치 개혁 등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10]

반란군은 울타리를 허물고 도랑을 메우는 작업을 계속했지만, 29개 조항 중 울타리 관련 언급은 단 하나뿐이었다. '샤프란 재배지를 울타리 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울타리 설치 관련 법률을 제정하되, 앞으로는 누구도 울타리를 치지 못하게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샤프란 재배지 예외 조항은 역사가들에게 혼란을 야기했는데, 이는 '주권 재배지'를 잘못 표기한 것이라는 주장과 지역 산업에서 샤프란의 중요성을 반영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1]

반란군은 또한 "모든 농노를 해방하라. 하느님께서는 귀한 피를 흘려 모든 사람을 자유롭게 하셨다"라고 요구했다.[12] 이는 1547년 방랑자 처벌법에 대한 불만일 수도 있지만, 당시 잉글랜드인 수천 명이 처한 농노제 폐지를 요구한 것일 수도 있다. (1549년, '방랑자와 게으른 자 처벌법'은 '노예'라는 단어를 피했지만, 1547년 법의 가혹한 조항은 상당수 유지되었다.)

3. 4. 노리치 함락



1549년 7월 21일, 왕실 평의회의 사자 요크 헤럴드 바솔로뮤 버틀러가 런던에서 노리치에 도착했다. 그는 도시 관리들과 함께 마우스홀드로 가서 이 모임을 반란이라고 선언하고 사면을 제안했다. 이로써 도시와 캠프 사이의 휴전은 종료되었다. 케트는 사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며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하며 제안을 거부했다. 요크 헤럴드는 반란군을 체포할 병력이 부족하여 시장과 함께 노리치로 후퇴했다. 케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제 공식적으로 반란군이 되었고, 당국은 도시 문을 닫고 도시 방어 준비에 착수했다.[13]

7월 22일, 케트는 휴전을 제안했지만 시 당국은 이를 거부했다. 반군은 비숍스게이트 다리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마우스홀드에서 내려와 카우 타워와 비숍스게이트 사이의 웬섬 강을 헤엄쳐 건너기 시작했다. 시의 방어군은 반군이 강을 건너는 동안 일제히 화살을 쏘았지만 공격을 막을 수 없었고, 노리치는 곧 반군의 손에 떨어졌다.[13] 반군은 총과 다른 군수품을 탈취하고 전략적 요충지에 경비병을 배치했다. 요크 헤럴드는 반군에게 두 번째 사면을 제안했으나, 이 또한 거부당했다. 헤럴드는 런던으로 떠났으며, 영국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가 반군 군대의 손에 넘어갔다. 무차별적인 폭력은 없었다. 시 지도자들은 마우스홀드로 끌려가 서리 하우스에 수감되었다. 시장 코드(Codd)는 풀려나 반군 진영에 머물렀고, 부시장 오거스틴 스튜어드는 도시에 남았다.[14]

3. 5. 왕실 진압군의 반격

노샘프턴 후작은 이탈리아 용병을 포함한 약 1,4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섰다. 노샘프턴 후작은 도시에 항복을 요구했으나, 부시장 오거스틴 스튜어드는 마우스홀드에 있던 시장 코드와 상의 후 도시 문을 열었다. 케트는 성벽과 문 방어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기에, 노샘프턴의 군대가 도시를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다시 포위하는 전략을 택했다. 반군은 도시를 내려다보는 고지대로 물러났다.[15]

7월 31일 밤, 왕립군은 방어 준비를 하고 도시를 순찰했다. 자정에 반군이 툼블랜드 주변의 좁은 거리와 골목길을 이용해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3시간 후, 왕립군은 반군을 몰아냈고, 반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16]

다음 날 아침 8시, 카우 타워와 비숍스게이트 사이의 성벽이 강화되었고, 셰필드 경은 메이드스 헤드 여관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이후 노샘프턴은 반군이 항복을 논의하려 포크소프 게이트 주변에 모였다는 정보를 받았다. 셰필드는 전령과 함께 갔으나 반군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거짓 소문이거나 주의를 돌리기 위한 것이었고, 그 사이 수천 명의 반군이 비숍스게이트 주변의 웬섬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17]

노샘프턴의 주력 부대는 시장에 있었고, 공격이 시작되자 병사들은 도시 동쪽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시가전에 투입되었다. 셰필드는 기병대를 이끌고 반군을 공격했으나, 비숍스게이트 거리의 그레이트 병원 밖에서 말에서 떨어져 도랑에 빠졌다. 헬멧을 벗자 반군, 소문에 따르면 풀케라는 정육업자에게 일격을 맞아 죽었다.[18] 셰필드의 사망과 군대 붕괴로 노샘프턴은 퇴각했다.[19]

워릭 백작은 웨일스, 독일, 스페인 용병을 포함한 약 14,000명의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파견되었다. 워릭은 하원과 추밀원의 멤버였으며 강력한 지도자였다. 반군은 케트에게 충성하며 워릭의 병사들과 계속 싸웠다.[20]

노샘프턴은 워릭의 부사령관으로 두 번째 진압 시도에 참여했다. 8월 24일, 워릭은 세인트 스테판과 브레이즌 게이트를 공격해 도시에 진입했다. 반군은 후퇴하며 집에 불을 질러 왕립군의 진격을 늦추려 했다. 오후 3시경, 워릭의 짐 수송대가 길을 잃고 비숍스게이트 거리로 향하다 반군에게 점령당했다. 드루리 대위는 병력을 이끌고 수송대를 탈환하려 했고, 비숍스게이트 주변에서 격렬한 전투 끝에 대포 몇 문을 구출했다.[21]

8월 25일, 반군은 매그달렌 게이트와 포크소프 게이트 근처 성벽에 포격을 가했다. 도시 북쪽이 다시 반군에게 넘어가자, 워릭은 공격을 시작했고, 치열한 시가전 끝에 도시를 다시 탈환했다.[22]

3. 6. 더신데일 전투와 반란 진압

8월 26일, 1,400명의 외국 용병이 노리치에 도착했다. 이들은 독일의 란츠크네히트로, 사수와 창병이 혼합된 병력이었다. 이들의 증원으로 워릭은 반란군과 맞서 싸울 강력한 군대를 갖추게 되었다. 케트와 그의 추종자들은 이 사실을 알고 그날 밤 마우스홀드의 진영을 떠나 전투를 준비하기 위해 저지대로 이동했다.[23] 8월 27일 아침, 양 군대는 도시 밖에서 서로 대치했다. 최종 전투는 '더신데일'에서 벌어졌고, 반란군에게는 재앙이었다. 잘 무장하고 훈련된 병력을 상대로 노출된 상태에서 반란군은 패주했고 수천 명이 죽었다.[24]

더신데일의 정확한 위치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장 유물(머스킷 총알과 기타 납탄, 화살촉과 같은 철제 유물은 쉽게 남아있지 않음)은 현재 시내 중심부에서 북동쪽에 부분적으로 개발된 지역인 노리치 롱 밸리를 가리킨다. 노퍽 고고학의 앤 카터는 그레이트 플럼스테드 마을의 공유지에 인접한 "더싱스 데일"에 대한 언급을 교구 기록에서 발견하여 동쪽으로 더 떨어진 다른 위치를 제안했다. 영국 고고학 협의회에서 발표한 지도 회귀 분석은 카터의 제안을 뒷받침하지만, 정확한 지점을 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으로 결론 내렸다.[25]

4. 결과

더스데일 전투에서 약 3,000명의 반란군이 사망했고, 워릭 백작의 군대는 약 250명의 병력을 잃었다.[26] 8월 28일, 반란군은 개혁의 오크 나무와 매그덜렌 게이트 밖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30명에서 3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워릭 백작은 며칠 전 노리치에 진입했을 때 이미 49명의 반란군을 처형했다.[27] 반란군이 살해한 유일한 사건은 노샘프턴의 이탈리아 용병 한 명이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진 것이었다.[28]

4. 1. 케트 형제의 처형

더스인더일 전투에서 약 3,000명의 반란군이 사망했고, 워릭 백작의 군대는 약 250명의 병력을 잃었다.[26] 전투 다음 날인 8월 28일, 반란군은 개혁의 오크 나무와 매그덜렌 게이트 밖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그 수는 30명에서 3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워릭 백작은 며칠 전 노리치에 진입했을 때 이미 49명의 반란군을 처형했다.[27] 반란군이 냉혹하게 살해한 사건은 단 한 건으로, 노샘프턴의 이탈리아 용병 중 한 명이 체포된 후 교수형에 처해진 사건뿐이었다.[28]

케트는 전투 다음 날 밤 노퍽주 스와닝턴에서 체포되어 그의 형제 윌리엄과 함께 반역죄 재판을 받기 위해 런던 탑으로 이송되었다. 유죄 판결을 받은 형제는 12월 초에 노리치로 돌려보내졌다. 케트는 1549년 12월 7일 노리치 성의 성벽에서 교수형에 처해졌고, 같은 날 윌리엄은 와먼드햄 수도원의 서쪽 탑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4. 2. 반란의 사회적 영향

더스인더일 전투에서 약 3,000명의 반란군이 사망했고, 워릭 백작의 군대는 약 250명의 병력을 잃었다.[26] 전투 다음 날 아침인 8월 28일, 개혁의 오크 나무와 매그덜렌 게이트 밖에서 처형된 반란군의 수는 30명에서 300명까지 다양하게 추정된다. 워릭 백작은 며칠 전 노리치에 진입했을 때 이미 49명의 반란군을 처형했다.[27] 반란군이 살해한 사건은 노샘프턴 백작의 이탈리아 용병 한 명이 체포된 후 교수형에 처해진 사건뿐이었다.[28]

케트는 전투 다음 날 밤 스와닝턴에서 체포되어 그의 형제 윌리엄과 함께 반역죄 재판을 받기 위해 런던 탑으로 이송되었다. 유죄 판결을 받은 형제는 12월 초에 노리치로 돌려보내졌다. 케트는 1549년 12월 7일 노리치 성 성벽에서, 윌리엄은 같은 날 와먼드햄 수도원 서쪽 탑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5. 평가와 유산

케트의 난은 시간이 지나면서 다양한 평가를 받아왔다. 초기에는 반란으로 규정되었으나, 점차 민중 봉기로 재해석되는 경향을 보였다.

1550년 노리치 당국은 8월 27일을 케트의 난으로부터 "도시의 해방"을 기념하는 휴일로 지정하고, 반란의 죄에 대한 강의를 대성당과 교구 교회에서 하도록 했다.[29] 이 전통은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존 체크는 ''반역의 해악, 그것이 공공 재산에 얼마나 심각한가''(1549)에서 이 봉기를 언급했다.[30] 니콜라스 소더턴은 이 반란에 대한 목격담을 필사본으로 남겼는데, 반란군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알렉산더 네빌의 1575년 라틴어 역사서인 ''De furoribus Norfolciensium''도 비슷한 관점을 보였다. 네빌은 매튜 파커의 비서였는데, 파커는 마우스홀드의 개혁의 떡갈나무 아래에서 케트의 추종자들에게 흩어지라고 설교했지만 실패한 인물이다.[31] 1615년, 네빌의 작품은 영어로 번역되어 ''Norfolke Furies''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이후 여러 차례 재인쇄되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케트의 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케트는 반역자에서 민중 영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843년의 익명 작품은 네빌의 묘사를 비판했고, 1859년 성직자 프레데릭 러셀은 "케트가 일반적으로 반역자로 여겨지지만, 그가 옹호한 대의는 너무나 정의로워서, 더 나은 이름과 더 나은 운명을 받아야 했다"라고 평가했다.[33]

1948년, 노리치의 전 시장 프레드 헨더슨은 케트를 위한 기념비를 제안했다. 1949년 반란 400주년에 그의 말이 새겨진 명판이 노리치 성 벽에 설치되었다.[34] 2011년에는 케트의 사망 기념일에 노리치 '점거''와 녹색당 회원들의 기념 행진이 있었고, 노리치 성 문 앞에 화환이 놓였다.

케트의 난은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기억되고 있다. 학교, 거리, 펍, 산책로 등의 이름에 사용되었으며, 와이먼덤의 로버트 케트 주니어 학교, 노리치의 더신데일 초등학교, 와이먼덤의 로버트 케트 펍, 이스트앵글리아 대학교의 케트 하우스 레지던스, 노리치의 케트 타번,[36] 민속 밴드인 루이스 갈랜드 앤 케트의 반란, 노리치의 우드포드 양조장에서 생산하는 케트의 반란 맥주 등이 그 예이다. 또한 케트의 난은 소설, 연극, 시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로 활용되었다.

5. 1. 역사적 평가

1550년, 노리치 당국은 8월 27일을 케트의 난으로부터 "도시의 해방"을 기념하는 휴일로 정하고, 반란의 죄에 대한 강의를 대성당과 교구 교회에서 지불했다.[29] 이 전통은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이 봉기는 존 체크 경이 쓴 ''반역의 해악, 그것이 공공 재산에 얼마나 심각한가''(1549)에서 논의되었다.[30] 반란에 대한 유일하게 알려진 생존자 목격담은 노리치 시장의 아들, 아마도 니콜라스 소더턴일 것으로 보이는 니콜라스 소더턴의 필사본으로, 반란군에 적대적이었다. 알렉산더 네빌의 1575년 라틴어 반란 역사서인 ''De furoribus Norfolciensium''도 마찬가지였다. 네빌은 매튜 파커의 비서였으며, 파커는 마우스홀드의 개혁의 떡갈나무 아래에서 케트의 추종자들에게 설교하며, 그들에게 흩어지라고 설득했지만 실패했다.[31] 1615년, 네빌의 작품은 노퍽 성직자 리처드 우즈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Norfolke Furies''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다음 세기 동안 재인쇄되었다.

프랜시스 블로미필드의 상세한 설명은 그의 ''노리치 역사''(1741년과 1742년 사이에 부분적으로 출판)에서 네빌을 바탕으로 했지만, 라파엘 홀린셰드, 피터 헤일린, 토마스 풀러의 작품과 같은 다른 자료와 다양한 지역 기록에서 자료를 보충했다. 블로미필드는 참여자들의 불만을 언급 없이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공정성을 유지했지만, 그들이 원래 의도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32]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반란에 대한 더 동정적인 묘사가 인쇄물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케트가 반역자에서 민중 영웅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시작했다. 1843년의 익명의 작품은 네빌의 반란에 대한 묘사를 비판했고, 1859년, 반란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위해 보관소에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한 성직자 프레데릭 러셀은 "케트가 일반적으로 반역자로 여겨지지만, 그가 옹호한 대의는 너무나 정의로워서, 더 나은 이름과 더 나은 운명을 받아야 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고 결론을 내렸다.[33]

1948년, 1885년 식량 폭동에 참여하여 성에 갇혔던 노리치의 전 시장 프레드 헨더슨은 케트를 위한 기념비를 제안했다. 원래는 동상을 원했지만, 그는 그의 말이 새겨진 노리치 성 벽의 명판에 정착했고, 1949년 반란 400주년에 공개되었다.[34] 21세기에 케트의 죽음은 여전히 노리치 시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2011년 12월 7일, 그의 사망 기념일에 노리치 '점거''와 노리치 녹색당 회원들의 기념 행진이 있었고, 노리치 성의 문 앞에서 화환이 놓였다.

반란 이후 케트와 그의 형제 윌리엄의 토지는 몰수되었지만, 그 중 일부는 나중에 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반환되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케트 가문은 반란과의 연관성으로 고통받은 것 같지 않고, 노퍽의 여러 지역에서 번성한 것으로 보인다.[35]

이 반란은 와이먼덤 지역의 노리치와 와이먼덤 지역의 학교, 거리, 펍, 산책로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와이먼덤의 로버트 케트 주니어 학교, 노리치의 더신데일 초등학교, 와이먼덤의 로버트 케트 펍, 이스트앵글리아 대학교의 케트 하우스 레지던스, 노리치의 케트 타번,[36] 그리고 민속 밴드인 루이스 갈랜드 앤 케트의 반란과 노리치의 우드포드 양조장에서 생산하는 케트의 반란 맥주가 있다.

케트의 난은 프레데릭 H. 무어의 ''미스트레스 헤이젤워드: 개혁의 오크 이야기''(1876), F. C. 탄슬리의 ''케트와 시골을 위해''(1910), 잭 린제이의 ''위대한 오크''(1949), 실비아 헤이먼의 아동 이야기 ''충성스러운 반역자''(1965), 마가렛 칼로우의 ''반역적인 오크''(2012) 및 C. J. 샌섬의 ''툼랜드''(2018)을 포함한 소설에 등장했다. 조지 콜먼 그린의 ''케트 더 태너''(1909)를 포함한 연극, 그리고 키스 챈들러의 시집 ''케트의 반란과 기타 시''(1982)를 포함한 시에도 등장했다. 1988년 영국 작곡가 말콤 아놀드는 반란에서 영감을 얻어 ''로버트 케트 서곡 (작품 141)''을 제작했다.

5. 2. 현대의 기억과 기념

1550년, 노리치 당국은 8월 27일을 케트의 난으로부터 "도시의 해방"을 기념하는 휴일로 정하고, 반란에 대한 강의를 대성당과 교구 교회에서 지불하도록 했다.[29] 이 전통은 1세기 이상 지속되었다.

존 체크 경은 ''반역의 해악, 그것이 공공 재산에 얼마나 심각한가''(1549)에서 이 봉기를 논했다.[30] 이 반란에 대한 유일하게 알려진 생존자 목격담은 노리치 시장의 아들인 니콜라스 소더턴(사망 1540)의 필사본으로 추정되며, 반란군에 적대적이었다. 알렉산더 네빌의 1575년 라틴어 반란 역사서인 ''De furoribus Norfolciensium''도 마찬가지였다. 네빌은 매튜 파커의 비서였으며, 파커는 마우스홀드의 개혁의 떡갈나무 아래에서 케트의 추종자들에게 설교하며 흩어지라고 설득했지만 실패했다.[31] 1615년, 네빌의 작품은 노퍽 성직자 리처드 우즈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어 ''Norfolke Furies''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고, 다음 세기 동안 재인쇄되었다. 프랜시스 블로미필드는 ''노리치 역사''(1741년과 1742년 사이에 부분적으로 출판)에서 네빌을 바탕으로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지만, 라파엘 홀린셰드, 피터 헤일린, 토마스 풀러의 작품과 같은 다른 자료와 다양한 지역 기록에서 자료를 보충했다. 블로미필드는 참여자들의 불만을 언급 없이 설명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공정성을 유지했지만, 그들이 원래 의도에서 벗어난 것에 대해 비난했다.[32]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반란에 대한 더 동정적인 묘사가 인쇄물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케트가 반역자에서 민중 영웅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 1843년의 익명 작품은 네빌의 반란 묘사를 비판했고, 1859년, 성직자 프레데릭 러셀은 반란에 대한 자신의 설명을 위해 보관소에서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케트가 일반적으로 반역자로 여겨지지만, 그가 옹호한 대의는 너무나 정의로워서, 더 나은 이름과 더 나은 운명을 받아야 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고 결론을 내렸다.[33]

1948년, 1885년 식량 폭동에 참여하여 성에 갇혔던 노리치의 전 시장 프레드 헨더슨은 케트를 위한 기념비를 제안했다. 원래는 동상을 원했지만, 그는 그의 말이 새겨진 노리치 성 벽의 명판에 정착했고, 1949년 반란 400주년에 공개되었다.[34] 21세기에 케트의 죽음은 여전히 노리치 시민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2011년 12월 7일, 그의 사망 기념일에 노리치 '점거''와 노리치 녹색당 회원들의 기념 행진이 있었고, 노리치 성의 문 앞에서 화환이 놓였다.

반란 이후 케트와 그의 형제 윌리엄의 토지는 몰수되었지만, 그 중 일부는 나중에 그의 아들 중 한 명에게 반환되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케트 가문은 반란과의 연관성으로 고통받은 것 같지 않고, 노퍽의 여러 지역에서 번성한 것으로 보인다.[35]

이 반란은 와이먼덤 지역의 노리치와 와이먼덤 지역의 학교, 거리, 펍, 산책로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와이먼덤의 로버트 케트 주니어 학교, 노리치의 더신데일 초등학교, 와이먼덤의 로버트 케트 펍, 이스트앵글리아 대학교의 케트 하우스 레지던스, 노리치의 케트 타번,[36] 민속 밴드인 루이스 갈랜드 앤 케트의 반란, 노리치의 우드포드 양조장에서 생산하는 케트의 반란 맥주 등이 있다.

케트의 난은 프레데릭 H. 무어의 ''미스트레스 헤이젤워드: 개혁의 오크 이야기''(1876), F. C. 탄슬리의 ''케트와 시골을 위해''(1910), 잭 린제이의 ''위대한 오크''(1949), 실비아 헤이먼의 아동 이야기 ''충성스러운 반역자''(1965), 마가렛 칼로우의 ''반역적인 오크''(2012) 및 C. J. 샌섬의 ''툼랜드''(2018)을 포함한 소설에 등장했다. 조지 콜먼 그린의 ''케트 더 태너''(1909)를 포함한 연극, 그리고 키스 챈들러의 시집 ''케트의 반란과 기타 시''(1982)를 포함한 시에도 등장했다. 1988년 영국 작곡가 말콤 아놀드는 반란에서 영감을 얻어 ''로버트 케트 서곡 (작품 141)''을 제작했다.

참조

[1] 웹사이트 Kett's Oak http://www.heritage.[...] Norfolk County Council
[2] 웹사이트 Pictures of Kett's Oak through the ages on Hethersett village website http://www.hetherset[...]
[3] 서적 Wyler 2009, 16
[4] 서적 Groves 1947, 109 ("an old map of Mousehold shows that it stood where the Water Tower now stands near the junction of Primrose Road and Telegraph Lane")
[5] 서적 Wood 2002, 62–63
[6] 서적 Groves 1947, 31
[7] 서적 Wood 2002, 64
[8] 서적 Groves 1947, 34
[9] 웹사이트 "Kett's Demands Being in Rebellion" http://blogs.bl.uk/d[...] The British Library 2016-11-20
[10] 서적 Wood 2002, 66
[11] 서적 MacCulloch 1979
[12] 서적 Diarmaid MacCulloch, "Bondmen under the Tudor", Law and Government under the Tudors: Essays Presented to Sir Geoffrey Elton, ed. Claire Cross et al.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91–93.
[13] 서적 Hoare 2002, 40
[14] 서적 Hoare 2002, 41
[15] 서적 Hoare 2002, 44
[16] 서적 Hoare 2002, 45
[17] 서적 Hoare 2002, 45
[18] 서적 Hoare 2002, 45-6
[19] 서적 Hoare 2002, 46
[20] 서적 Hoare 2002, 49
[21] 서적 Hoare 2002, 52-3
[22] 서적 Hoare 2002, 56-7
[23] 서적 Hoare 2002, 57-8
[24] 서적 Hoare 2002, 60-2
[25] 지도 Norfolk LXIV.14 Ordnance Survey 1907
[26] 서적 Land 1977, 123
[27] 서적 Land 1977, 124–5
[28] 서적 Land 1977, 94
[29] 서적 Wood 2007, 228
[30] 서적 The hurt of sedicion howe greueous it is to a commune welth Iohn Daye and Wylliam Seres 1549
[31] 서적 Land 1977, 75
[32] 서적 Stoker 2004, 393
[33] 서적 Russell 1859, quoted in Wood 2007, 260
[34] 서적 Wood 2007, 262–4
[35] 서적 Land 1977, 144–5
[36] 간행물 People's Pubs: Robert Kett http://www.rmt.org.u[...] RMT News 201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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