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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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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톨텍은 멕시코 중부에서 번성했던 문화로, 톨텍 문명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멕시코만 연안의 노노알카와 중앙아메리카 북부의 치치메카 집단이 혼합되어 발전했다는 설, 테오티와칸에 살았던 케찰코아틀 신을 숭배하는 집단에서 기원했다는 설 등이 있다. 톨텍은 툴라를 중심으로 흑요석 산업 등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믹스텍-푸에블라 양식의 이콘, 토힐 납유약 도자기류 등의 특징을 보였다. 아즈텍은 톨텍을 문명의 창시자로 숭배하며 자신들의 문화적 기원으로 삼았지만, 현대 학자들은 톨텍 문화의 확산을 테오티우아칸의 영향과 지역 간 문화 교류의 결과로 해석한다. 톨텍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해석은 16세기부터 논쟁의 대상이 되었으며, 1990년대 이후에는 아즈텍 신화 기록의 역사성에 대한 비판적인 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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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텍
개요
톨텍의 메소아메리카 내 분포 및 영향
톨텍의 메소아메리카 내 분포 및 영향.
다른 이름코요틀라텔카스
치치메카
나후아스
노노알카스
종교톨텍 종교
언어나와틀어
오토미어
시대메소아메리카 후기 고전 시대
연대기원후 950년 ~ 1168년경
주요 유적지[[File:Toltec Emblem.svg|21px]] 톨란-시코코티틀란 (수도), 우아팔칼코
멸망 원인툴라를 정복한 치치메카족의 침입
역사적 맥락
선행 문화[[File:Glifo Puh.svg|21px]] 테오티우아칸
[[File:Calacmul.png|21px]] 칼라크물
메스칼라 문화
[[File:Otomí quexquémittl.png|21px]] 오토미
추피쿠아로
코바
치첸이트사
푸우크
후행 국가마야판 동맹
토토나카판
아스카포찰코
[[File:Acolhuacan.jpeg|21px]] 아콜후아
[[File:Ehecatepec.jpg|21px]] 에카테펙
[[File:Chalco Glyph ZP.svg|21px]] 찰코

2. 톨텍 문명의 기원

톨텍 문화의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지만, 여러 학설이 존재한다.

멕시코만 연안의 노노알카(Nonoalca) 사람들과 중앙아메리카 북부의 정주성 치치메카(Chichimeca) 집단이 혼합되어 톨텍 문화가 발전했다는 설이 있다. 전자는 새로운 문화의 대다수를 구성했으며 마야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2] 이들은 초기 고전기(Early Classic period) 테오티와칸의 전성기 동안 국가의 정치 및 경제 시스템에 긴밀하게 통합되어 툴라(Tula) 지역, 특히 비야그란(Villagran)과 칭구(Chingu)에 대규모 정착지를 형성했다.[3]

오이 쿠니아키는 톨텍인이 원래 테오티와칸에 살았던 케찰코아틀 신을 숭배하는 집단이며, 구체적으로는 오토미족이나 마트라친카족이고,[13] 코요트라텔코식 토기를 사용하며, 툴라 시코코티틀란, 쇼치칼코 등의 "툴라"(성채 도시)들을 중앙 고원에 건설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14] 그 근거로, 전승에 일종의 국가 양도적인 기록이 보이거나, 케찰코아틀 신에 의해 창조된 사람들이 톨텍인이라는 기록이 있다는 점,[15] 치치메카의 이동은 어떻게 생각해도 문헌 기록으로는 11세기 이전에는 불가능하다는 점,[15] 테오티와칸 쇠퇴의 계기가 된 파괴 행위는 도시 전체에 미치지 않고 오로지 중추 부분에만 국한된다는 점, 테오티와칸의 전성기에 케찰코아틀 신의 신전이 건설되고, 나중에 파괴되었다는 사건이 있으며, 쇼치칼코는 과거 기능했던 케찰코아틀 신전의 사상적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16] 고전기 후기의 마야에도 케찰코아틀 신을 연상시키는 레리에프 등이 증가한다는 점, 툴라 시코코티틀란이 불타 파괴된 후 그 위에서 "전성기에 사용되었던 토기"인 마사파계 토기가 출토된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또한, 침략자인 치치메카인은 공격 대상이 된 도시를 "갈대가 빽빽하게 우거진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의미의 툴라라고 부르고, 그곳 주민을 "톨텍"이라고 부르는 한편, 자신들을 "톨텍"이라고 자칭했기 때문에, 치치메카인 자신이 "톨텍"인 것처럼 오해하게 되었다[17]고 한다. 서구의 "주류" 연구자들은 톨텍인을 멕시코 서부의 우토-아스텍어족에 속하는 나와틀어를 사용하는 반문명화된 사람들인 톨텍-치치메카가 주를 이루고, 푸에블라주 및 멕시코 만 연안에 거주하며 조각과 건축에 능한 장인적인 사람들인 노노알카라고 불리는 소수로 구성되었다고 여겨왔다.[11] 그리고 그들의 문화에는 야금술과 마사파계 토기가 수반되었다고 여겨져 왔다.[12]

2. 1. 다양한 기원설

멕시코만 연안의 노노알카(Nonoalca) 사람들과 중앙아메리카 북부의 정주성 치치메카(Chichimeca) 집단이 혼합되어 톨텍 문화가 발전했다는 설이 있다. 전자는 새로운 문화의 대다수를 구성했으며 마야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겨진다.[2] 이들은 초기 고전기(Early Classic period) 테오티와칸의 전성기 동안 국가의 정치 및 경제 시스템에 긴밀하게 통합되어 툴라(Tula) 지역, 특히 비야그란(Villagran)과 칭구(Chingu)에 대규모 정착지를 형성했다.[3]

오이 쿠니아키는 톨텍인이 원래 테오티와칸에 살았던 케찰코아틀 신을 숭배하는 집단이며, 구체적으로는 오토미족이나 마트라친카족이고,[13] 코요트라텔코식 토기를 사용하며, 툴라 시코코티틀란, 쇼치칼코 등의 "툴라"(성채 도시)들을 중앙 고원에 건설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14] 그 근거로, 전승에 일종의 국가 양도적인 기록이 보이거나, 케찰코아틀 신에 의해 창조된 사람들이 톨텍인이라는 기록이 있다는 점,[15] 치치메카의 이동은 어떻게 생각해도 문헌 기록으로는 11세기 이전에는 불가능하다는 점,[15] 테오티와칸 쇠퇴의 계기가 된 파괴 행위는 도시 전체에 미치지 않고 오로지 중추 부분에만 국한된다는 점, 테오티와칸의 전성기에 케찰코아틀 신의 신전이 건설되고, 나중에 파괴되었다는 사건이 있으며, 쇼치칼코는 과거 기능했던 케찰코아틀 신전의 사상적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16] 고전기 후기의 마야에도 케찰코아틀 신을 연상시키는 레리에프 등이 증가한다는 점, 툴라 시코코티틀란이 불타 파괴된 후 그 위에서 "전성기에 사용되었던 토기"인 마사파계 토기가 출토된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또한, 침략자인 치치메카인은 공격 대상이 된 도시를 "갈대가 빽빽하게 우거진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의미의 툴라라고 부르고, 그곳 주민을 "톨텍"이라고 부르는 한편, 자신들을 "톨텍"이라고 자칭했기 때문에, 치치메카인 자신이 "톨텍"인 것처럼 오해하게 되었다[17]고 한다. 서구의 "주류" 연구자들은 톨텍인을 멕시코 서부의 우토-아스텍어족에 속하는 나와틀어를 사용하는 반문명화된 사람들인 톨텍-치치메카가 주를 이루고, 푸에블라주 및 멕시코 만 연안에 거주하며 조각과 건축에 능한 장인적인 사람들인 노노알카라고 불리는 소수로 구성되었다고 여겨왔다.[11] 그리고 그들의 문화에는 야금술과 마사파계 토기가 수반되었다고 여겨져 왔다.[12]

3. 고고학적 증거

이달고주 툴라의 피라미드 C


리처드 다이얼(Richard Diehl) 등 일부 고고학자들은 툴라와 관련된 특정 양식적 특징을 특징으로 하는 톨텍 고고학적 지평(Horizon)의 존재를 주장하며, 이는 메소아메리카의 다른 문화와 정치체로 확장된다. 이 지평과 관련된 특징으로는 믹스텍-푸에블라 양식의 이콘, 토힐 납유약 도자기류 및 실호 또는 X-파인 오렌지 도자기류가 있다. 치첸이트사에서 툴라와 관련된 양식적 특징이 발견된 것도 톨텍 지평의 증거로 받아들여진다. 툴라와 치첸이트사 사이의 상호 작용의 본질은 특히 논란이 되고 있으며, 학자들은 톨텍에 의한 치첸이트사의 군사 정복, 치첸이트사가 툴라를 식민지로 세운 것, 또는 두 지역 사이의 느슨한 관계 중 하나를 주장한다. 믹스텍-푸에블라 예술 양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다.

반대되는 견해는 마이클 E. 스미스(Michael E. Smith)와 리사 몬티엘(Lisa Montiel)이 2003년에 발표한 연구에서 제기되었는데, 이 연구에서는 이달고주 툴라와 관련된 고고학적 기록을 테오티와칸과 테노치티틀란을 중심으로 한 정치체의 기록과 비교한다. 그들은 테오티와칸과 테노치티틀란이 메소아메리카에 미친 영향에 비해 툴라의 다른 문화에 대한 영향은 미미했으며, 제국으로 정의될 만한 가치가 없고, 왕국에 가까웠다고 결론지었다. 툴라가 제국의 수도로 예상되는 도시적 복잡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영향력과 지배력은 그리 멀리 미치지 못했다.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에 툴라가 참여한 증거가 발견되었는데, 예를 들어 대규모 흑요석 공방의 유적이 있다.

3. 1. 툴라의 물질 문화

툴라 그란데는 전성기에 약 6만 명의 인구를 수용했으며, 피라미드, 볼코트, 아틀란티스 전사 조각상 등 독특한 건축물을 남겼다.[7] 중앙 광장을 둘러싼 시민 건물들은 기둥을 사용한 열주가 특징적이며, 건물 3은 톨텍의 역사적, 신화적 고향을 참조하는 상징적인 건물로 여겨진다.[8]

광장의 함몰된 열주식 홀 유닛은 툴라 선조들의 도시와 유사하며, 지역 및 장거리 무역, 외교 관계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7][4] 툴라와 소코누스코 지역 간 공유된 도자기와 의례용 작은 조각상은 톨텍이 메소아메리카 전역과 교류했음을 보여준다.[7][4]

툴라는 광범위한 흑요석 산업을 통해 테오티와칸의 역할을 계승했을 가능성이 있다.[4] 유적지에서 발견된 수많은 흑요석 조각과, 치첸 이차와 동일한 지질학적 원천에서 유래한 흑요석은 툴라의 무역 참여를 증명한다.

3. 2. 톨텍 고고학적 지평

일부 고고학자들은 톨텍 고고학적 지평의 존재를 주장하며, 믹스텍-푸에블라 양식의 이콘, 토힐 납유약 도자기류, 실호 또는 X-파인 오렌지 도자기류 등을 그 특징으로 꼽는다. 치첸이트사에서 발견되는 툴라와 관련된 양식적 특징도 톨텍 지평의 증거로 제시되지만, 두 지역 간의 관계는 여전히 논쟁 중이다. 툴라와 치첸이트사 사이의 상호 작용의 본질은 특히 논란이 되고 있으며, 학자들은 톨텍에 의한 치첸이트사의 군사 정복, 치첸이트사가 툴라를 식민지로 세운 것, 또는 두 지역 사이의 느슨한 관계 중 하나를 주장한다. 믹스텍-푸에블라 예술 양식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있다.

반면, 마이클 E. 스미스와 리사 몬티엘은 툴라의 다른 문화에 대한 영향은 테오티와칸과 테노치티틀란에 비해 미미하며, 제국보다는 왕국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툴라가 제국의 수도로 예상되는 도시적 복잡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 영향력과 지배력은 그리 멀리 미치지 못했다고 본다. 다만, 대규모 흑요석 공방의 유적에서 볼 수 있듯이, 툴라가 광범위한 무역 네트워크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었다.

4. 톨텍에 대한 역사적 기록과 논쟁

톨텍에 대한 가장 초기의 역사적 언급 중 하나는 16세기 도미니카 수도사(Dominican friar) 디에고 두란(Diego Durán)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중앙아메리카 역사를 연구한 최초의 서구인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두란은 톨텍들이 "최고 사제 토필친"의 제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토필친과 그의 제자들은 설교를 하고 기적을 행했다고 한다. 두란은 "놀란 사람들은 이 사람들을 톨텍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스승' 또는 '어떤 기술에 정통한 사람들'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두란은 이 토필친이 "인디언들" 사이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견된 사도 토마스(Thomas the Apostle)일 수 있다고 추측했지만, 두 반구 사이의 어떤 접촉에 대한 정황 증거 이상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톨텍 문화의 본질에 대한 후속 논쟁은 19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리아노 베이티아(Mariano Veytia), 마누엘 오로스코 이 베라(Manuel Orozco y Berra), 샤를 에티엔 브라쇠르 드 부르부르(Charles Etienne Brasseur de Bourbourg), 프란치스코 클라비헤로(Francisco Clavigero)와 같은 중앙아메리카 학자들은 모두 아즈텍 연대기를 읽고 이것들을 이달고 주 툴라를 중심으로 한 전 중앙아메리카 제국의 현실적인 역사적 묘사라고 믿었다. 이러한 역사주의적 관점은 대니얼 개리슨 브린턴(Daniel Garrison Brinton)에 의해 처음으로 도전을 받았는데, 그는 아즈텍 자료에 묘사된 "톨텍"이 후고전기의 여러 나우아틀어를 사용하는 도시 국가 중 하나일 뿐이며, 특히 영향력 있는 국가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즈텍이 톨텍을 보는 관점을 "인간 정신이 옛날을 미화하는 경향"과 톨란(Tollan)의 위치와 케찰코아틀(Quetzalcoatl)과 테스카틀리포카(Tezcatlipoca) 사이의 투쟁 신화를 혼동하는 것으로 돌렸다. 이달고 주 툴라에서 작업한 최초의 고고학자 데지레 샤르네(Désiré Charnay)는 톨텍 수도에 대한 그의 인상을 바탕으로 역사주의적 관점을 옹호했으며, 툴라와 치첸이트사(Chichén Itzá) 사이의 건축 양식의 유사성을 처음으로 지적한 사람이었다. 이는 그가 쿠쿨칸의 지휘 아래 톨텍 군대가 치첸이트사(Chichén Itzá)를 무력으로 점령했다는 이론을 제기하게 했다. 샤르네 이후로 "톨텍"이라는 용어는 후기 고전기와 초기 후고전기에 마야 지배권에 특정 중앙 멕시코 문화적 특징이 유입된 것과 관련되어 왔다.

툴라 고고학 유적지에서 가장 큰 구조물인 템포 트라우이스칼판테쿠틀(Pyramid B). 정상에는 아틀란티스 조각상이 있다.


툴라의 회반죽 부조: 코요테, 재규어, 독수리가 인간의 심장을 먹고 있다.


툴라의 재규어 부조


역사주의적 사고방식은 데이비드 카라스코(David Carrasco), 미구엘 레온-포르티야(Miguel León-Portilla), 나이젤 데이비스(Nigel Davies), H. B. 니콜슨(H. B. Nicholson) 등의 학자들의 저술에서 볼 수 있듯이 20세기까지도 지속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톨텍이 실제 민족 집단이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톨텍"을 툴라 유적지와 연결했는데, 이곳은 아즈텍 신화의 톨란(Tollan)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전통은 기원후 10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중앙 멕시코(Mexico) 대부분이 톨텍 제국(Toltec Empire)의 지배를 받았다고 가정한다. 아즈텍은 "갈대의 장소"를 의미하는 톨란(Tollan)이라는 여러 멕시코 도시 국가를 언급했는데, 예를 들어 "톨란 출룰라"가 있다. 고고학자 로레트 세주르네(Laurette Séjourné)는 역사가 엔리케 플로레스카노(Enrique Florescano)의 견해를 따르며 "원래" 톨란(Tollan)은 아마도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H. B. 니콜슨(H. B. Nicholson) (2001 (1957)) 및 나이젤 데이비스 (1977)와 같은 많은 역사주의자들은 아즈텍 연대기가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기록이 혼합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다양한 아즈텍 서술에 대한 비교적 접근 방식을 적용하여 두 가지를 분리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신 케찰코아틀(Quetzalcoatl)과 종종 토필친 세 아카틀 케찰코아틀(Topiltzin Ce Acatl Quetzalcoatl)이라고 불리는 톨텍 통치자를 구별하려고 했다.

4. 1. 초기 연구

16세기 도미니카 수도사 디에고 두란(Diego Durán)은 톨텍을 "최고 사제 토필친의 제자들"이라고 언급하며, 그들이 "인디언들" 사이에서 기독교 복음을 전파했다고 주장했다. 이는 사도 토마스(Thomas the Apostle)가 파견되었을 가능성을 추측했지만, 확실한 증거는 제시하지 못했다.

19세기 후반, 마리아노 베이티아(Mariano Veytia), 마누엘 오로스코 이 베라(Manuel Orozco y Berra), 샤를 에티엔 브라쇠르 드 부르부르(Charles Etienne Brasseur de Bourbourg), 프란치스코 클라비헤로(Francisco Clavigero) 등은 아즈텍 연대기를 이달고 주 툴라를 중심으로 한 톨텍 제국의 역사적 기록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대니얼 개리슨 브린턴(Daniel Garrison Brinton)은 이러한 역사주의적 관점에 도전하며, 아즈텍 자료에 묘사된 "톨텍"이 후고전기의 여러 나우아틀어를 사용하는 도시 국가 중 하나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즈텍의 톨텍 인식은 과거를 미화하는 경향과 신화적 혼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았다.

데지레 샤르네(Désiré Charnay)는 툴라에서 작업한 최초의 고고학자로, 툴라와 치첸이트사(Chichén Itzá) 건축 양식의 유사성을 지적하며 톨텍 군대의 치첸이트사 점령설을 제기했다. 이후 "톨텍"이라는 용어는 후기 고전기와 초기 후고전기에 마야 지배권에 특정 중앙 멕시코 문화적 특징이 유입된 것을 지칭하게 되었다.

역사주의적 사고방식은 20세기까지 지속되었으며, 데이비드 카라스코(David Carrasco), 미구엘 레온-포르티야(Miguel León-Portilla), 나이젤 데이비스(Nigel Davies), H. B. 니콜슨(H. B. Nicholson) 등의 학자들은 톨텍을 실제 민족 집단으로 간주하고 툴라 유적지를 아즈텍 신화의 톨란(Tollan)과 연결했다. 이들은 기원후 10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중앙 멕시코(Mexico) 대부분이 톨텍 제국(Toltec Empire)의 지배를 받았다고 보았다. 아즈텍은 여러 도시 국가를 톨란(갈대의 장소)이라고 불렀으며, 로레트 세주르네(Laurette Séjourné)와 엔리케 플로레스카노는 "원래" 톨란은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H. B. 니콜슨(H. B. Nicholson)과 나이젤 데이비스(Nigel Davies) 등은 아즈텍 연대기가 신화와 역사가 혼합된 것임을 인지하고, 비교적 접근 방식을 통해 이를 분리하려 했다. 예를 들어, 신 케찰코아틀(Quetzalcoatl)과 톨텍 통치자 토필친 세 아카틀 케찰코아틀(Topiltzin Ce Acatl Quetzalcoatl)을 구별하려고 했다.

4. 2. 역사주의적 관점과 비판

대니얼 개리슨 브린턴(Daniel Garrison Brinton)은 아즈텍 자료에 묘사된 "톨텍"이 후고전기의 여러 나우아틀어를 사용하는 도시 국가 중 하나일 뿐이며, 특히 영향력 있는 국가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즈텍이 톨텍을 보는 관점을 "인간 정신이 옛날을 미화하는 경향"과 톨란(Tollan)의 위치와 케찰코아틀(Quetzalcoatl)과 테스카틀리포카(Tezcatlipoca) 사이의 투쟁 신화를 혼동하는 것으로 돌렸다.

이러한 역사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과 달리, 데이비드 카라스코(David Carrasco), 미구엘 레온-포르티야(Miguel León-Portilla), 나이젤 데이비스, H. B. 니콜슨(H. B. Nicholson) 등의 학자들은 톨텍이 실제 민족 집단이었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톨텍"을 툴라 유적지와 연결했는데, 이곳은 아즈텍 신화의 톨란(Tollan)으로 여겨졌다. 기원후 10세기에서 12세기 사이에 중앙 멕시코(Mexico) 대부분이 톨텍 제국(Toltec Empire)의 지배를 받았다고 가정한다.

로레트 세주르네(Laurette Séjourné)는 역사가 엔리케 플로레스카노(Enrique Florescano)의 견해를 따르며 "원래" 톨란은 아마도 테오티우아칸(Teotihuacán)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H. B. 니콜슨(H. B. Nicholson) (2001 (1957)) 및 나이젤 데이비스 (1977)와 같은 많은 역사주의자들은 아즈텍 연대기가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기록이 혼합된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로 인해 그들은 다양한 아즈텍 서술에 대한 비교적 접근 방식을 적용하여 두 가지를 분리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신 케찰코아틀(Quetzalcoatl)과 종종 토필친 세 아카틀 케찰코아틀(Topiltzin Ce Acatl Quetzalcoatl)이라고 불리는 톨텍 통치자를 구별하려고 했다.

오이 쿠니아키는 톨텍인이 원래 테오티와칸에 살았던 케찰코아틀 신을 숭배하는 집단이며, 구체적으로는 오토미족이나 마트라친카족이고,[13] 코요트라텔코식 토기를 사용하며, 툴라 시코코티틀란, 쇼치칼코 등의 "툴라"(성채 도시)들을 중앙 고원에 건설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14]

4. 3. 톨텍 신화론

1990년대 이후, 아즈텍 신화 기록의 역사성에 대한 비판적이고 해석적인 접근 방식이 등장했다. 이러한 접근은 '톨텍'을 대부분 신화적이고 철학적인 구성으로 이해하며, 아즈텍 자료 해석에 적용한다. '톨텍'은 숙련된 장인이나 이달고 툴라 주민을 의미할 수 있으며, '톨란'은 이달고 툴라뿐 아니라 '갈대의 장소'라는 의미로 모든 위대한 도시를 가리킬 수 있다.

툴라 이달고에 있는 트라우이스칼판테쿠틀리 신전의 인간형 새-뱀 신 (아마도 케찰코아틀을 묘사)


이달고 툴라에 있는 불탄 궁전의 기둥들 (배경에는 두 번째 공놀이장이 있다)


툴라에 있는 아틀란티스 조각상으로 표현된 톨텍 전사들




아즈텍 기록에 따르면 톨텍은 의학, 달력 시스템, 나와틀어를 만들었다. 아즈텍은 사회적 업적 대부분을 톨텍과 그들의 도시 톨란에 돌렸지만, 툴라는 아즈텍 묘사만큼 화려하지 않다. 툴라는 비교적 부드러운 아도베 벽돌로 지어졌고, 테오티우아칸과 테노치티틀란에 비해 규모가 작았다. 툴라 유물은 아즈텍의 톨텍 존경이 선전적일 수 있으며, 이전 문화를 과장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미셸 그라울리히(2002)와 수전 D. 길레스피(1989)는 아즈텍 기록에서 역사적 자료 구별이 어렵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용감한 전사인 첫 번째 톨텍 통치자와 무기력한 노인인 마지막 통치자 등 케찰코아틀과 관련된 두 명의 톨텍 통치자가 있다. 그라울리히와 길레스피는 아즈텍의 순환적 시간관이 역사 기록에 기록되었고, 토필친 세 아카틀과 케찰코아틀 신을 구분하는 것은 헛된 일이라고 제안했다. 그라울리히는 톨텍 시대를 아즈텍의 네 번째 신화적 "태양" 시대로 간주하며, 유일하게 역사적으로 가능한 데이터는 일부 통치자 이름과 정복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사람들 사이에서 '톨테카'는 예술가, 장인, 현자와 동의어였고, '톨테카요틀'은 예술, 문화, 문명을 의미했으며, '치치메카요틀'의 반대말이었다. 이 해석은 메소아메리카의 어떤 큰 도시 중심지도 '톨란'으로, 그 주민들을 톨텍으로 언급할 수 있었고, 톨텍 조상을 주장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주장한다. 메소아메리카 이주 기록은 톨란이 케찰코아틀(유카텍어로는 ''쿠쿨칸'', 키체어로는 ''Q'uq'umatz'')에 의해 통치되었고, 그는 나중에 망명하여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고 말한다. 패트리샤 아나왈트에 따르면, 톨텍 조상과 케찰코아틀 왕조 주장은 아즈텍, 키체, 이차 마야 등 다양한 문명에 의해 제기되었다.

회의적 견해는 중앙 멕시코 기원 문화 특성이 메소아메리카로 확산된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테오티우아칸 지배와 지역 내 문화 특성 확산에 기인한다. 최근 학문은 이달고 툴라를 아즈텍 기록의 톨텍 수도로 보지 않고, '톨텍' 용어를 분리하여 툴라 주민들의 민족, 역사, 사회 조직에 대한 고고학적 단서를 찾는다.

톨텍 문명의 주체인 톨텍인에 대해, 서구의 "주류" 연구자들은 톨텍-치치메카라고 불리는 멕시코 서부의 우토-아스텍어족에 속하는 나와틀어를 사용하는 반문명화된 사람들과, 노노알카라고 불리는 소수의 장인적인 사람들로 구성되었다고 여겨왔다.[11] 그들의 문화에는 야금술과 마사파계 토기가 수반되었다고 여겨져 왔다.[12]

하지만, 오이 쿠니아키는 이러한 견해가 가 자료를 조작했기 때문에 혼란스럽다고 주장하며, 톨텍인은 원래 테오티와칸에 살았던 케찰코아틀 신을 숭배하는 집단이며, 구체적으로는 오토미족이나 마트라친카족이고,[13] 코요트라텔코식 토기를 사용하며, 툴라 시코코티틀란, 쇼치칼코 등의 "툴라"(성채 도시)들을 중앙 고원에 건설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14]

그 근거로, 전승에 국가 양도적인 기록이 보이거나, 케찰코아틀 신에 의해 창조된 사람들이 톨텍인이라는 기록이 있다는 점,[15] 치치메카의 이동은 문헌 기록으로는 11세기 이전에는 불가능하다는 점,[15] 테오티와칸 쇠퇴의 계기가 된 파괴 행위는 도시 중추 부분에만 국한된다는 점, 테오티와칸의 전성기에 케찰코아틀 신의 신전이 건설되고, 나중에 파괴되었다는 사건이 있으며, 쇼치칼코는 과거 기능했던 케찰코아틀 신전의 사상적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16] 고전기 후기의 마야에도 케찰코아틀 신을 연상시키는 레리에프 등이 증가한다는 점, 툴라 시코코티틀란이 불타 파괴된 후 그 위에서 "전성기에 사용되었던 토기"인 마사파계 토기가 출토된다는 점 등을 들고 있다.

또한, 침략자인 치치메카인은 공격 대상 도시를 "갈대가 빽빽하게 우거진 인구 밀집 지역"이라는 의미의 툴라라고 부르고, 그곳 주민을 "톨텍"이라고 부르는 한편, 자신들을 "톨텍"이라고 자칭했기 때문에, 치치메카인 자신이 "톨텍"인 것처럼 오해하게 되었다[17]고 한다.

5. 톨텍과 아즈텍의 관계

아즈텍인들은 톨텍을 문명의 창시자이자 예술과 과학의 대가로 숭배했다. 그들은 톨텍으로부터 의학, 달력, 나우아틀어 등을 물려받았다고 믿었다.[9] '톨테카'라는 단어는 '숙련된 장인'을 의미하기도 했다.[9] 아즈텍은 톨텍의 도시 톨란을 이상적인 문명 국가로 숭배했다.[9]

후고전기 메소아메리카의 여러 통치 계보는 톨텍 조상을 주장하며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9] 나우아 사람들 사이에서 '톨테카요틀'은 예술, 문화, 문명, 도시화를 의미했으며, '치치메카요틀'('치치멕다움')의 반대말로 여겨졌다.[9] 메소아메리카 이주 기록은 종종 톨란이 케찰코아틀(쿠쿨칸, Q'uq'umatz)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그는 나중에 톨란에서 망명을 당하고 메소아메리카 다른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고 전한다.[9] 톨텍 조상에 대한 주장과 그들의 엘리트 통치 왕조가 케찰코아틀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주장은 아즈텍, 키체 및 이차 마야와 같이 다양한 문명에 의해 제기되었다.[9]

그러나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툴라는 아즈텍이 묘사한 것만큼 화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툴라는 비교적 부드러운 아도베 벽돌로 지어졌고, 규모 면에서도 테오티우아칸이나 테노치티틀란에 비해 작았다.[9]

1990년대 이후, 역사주의적 입장은 아즈텍 신화적 기록의 역사성에 대한 보다 비판적이고 해석적인 접근 방식에 밀려났다.[9] 이러한 접근 방식은 '톨텍'이라는 단어를 대부분 신화적이고 철학적인 구성으로 이해한다.[9]

미셸 그라울리히(Michel Graulich)와 수전 D. 길레스피(Susan D. Gillespie)와 같은 학자들은 아즈텍의 톨텍 역사 기록에서 역사적 사실을 찾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아즈텍 기록에는 케찰코아틀과 관련된 두 명의 톨텍 통치자가 등장하는데, 한 명은 용감한 전사이고 다른 한 명은 무기력한 노인으로 묘사된다. 이는 아즈텍의 순환적인 시간관이 역사 기록에 반영된 결과일 수 있으며, 따라서 역사적인 토필친 세 아카틀과 케찰코아틀 신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최근 학문은 '톨텍'이라는 용어를 아즈텍 기록에서 분리하여 툴라 주민들의 민족, 역사 및 사회 조직에 대한 고고학적 단서를 찾으려고 시도한다.

5. 1. 톨텍 조상 주장

후고전기 메소아메리카의 여러 통치 계보는 톨텍 조상을 주장하며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9] 나우아 사람들 사이에서 '톨테카'는 예술가, 장인 또는 현자와 동의어였고,[9] '톨테카요틀'은 예술, 문화, 문명, 도시화를 의미했다.[9] 메소아메리카 이주 기록은 종종 톨란이 케찰코아틀(쿠쿨칸, Q'uq'umatz)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그는 나중에 톨란에서 망명을 당하고 메소아메리카 다른 곳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했다고 전한다.[9] 톨텍 조상에 대한 주장과 그들의 엘리트 통치 왕조가 케찰코아틀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주장은 아즈텍, 키체 및 이차 마야와 같이 다양한 문명에 의해 제기되었다.[9]

1990년대 이후, 역사주의적 입장은 아즈텍 신화적 기록의 역사성에 대한 보다 비판적이고 해석적인 접근 방식에 밀려났다.[9] 이러한 접근 방식은 아즈텍 또는 일반적으로 메소아메리카인들이 메소아메리카 후고전기 동안 여러 문명의 위력과 세련됨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한 대부분 신화적이고 철학적인 구성으로 '톨텍'이라는 단어에 대한 다른 이해를 아즈텍 자료 해석에 적용한다.[9] 아즈텍 기록에 따르면 톨텍은 의학을 발견하고, 달력 시스템을 설계하고, 나우아틀어를 만들었다고 한다.[9]

5. 2. 톨텍의 유산

아즈텍인들은 톨텍으로부터 의학, 달력, 나우아틀어 등을 물려받았다고 믿었다.[9]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며, 톨텍 문화의 확산을 테오티우아칸의 영향과 지역 간 문화 교류의 결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아즈텍은 자신들의 문화적 기반을 톨텍에 투영하여, 톨텍 문명을 이상화하고 자신들의 기원을 신화화했을 가능성이 있다.[9]

아즈텍 기록에 따르면 톨텍은 뛰어난 장인 기술과 예술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로, '톨테카'라는 단어는 '숙련된 장인'을 의미하기도 했다. 아즈텍은 톨텍의 도시 톨란을 이상적인 문명 국가로 숭배했지만,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툴라는 아즈텍이 묘사한 것만큼 화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툴라는 비교적 부드러운 아도베 벽돌로 지어졌고, 규모 면에서도 테오티우아칸이나 테노치티틀란에 비해 작았다.

미셸 그라울리히(Michel Graulich)와 수전 D. 길레스피(Susan D. Gillespie)와 같은 학자들은 아즈텍의 톨텍 역사 기록에서 역사적 사실을 찾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아즈텍 기록에는 케찰코아틀과 관련된 두 명의 톨텍 통치자가 등장하는데, 한 명은 용감한 전사이고 다른 한 명은 무기력한 노인으로 묘사된다. 이는 아즈텍의 순환적인 시간관이 역사 기록에 반영된 결과일 수 있으며, 따라서 역사적인 토필친 세 아카틀과 케찰코아틀 신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나우아 사람들 사이에서 '톨테카요틀'은 예술, 문화, 문명, 도시화를 의미했으며, '치치메카요틀'('치치멕다움')의 반대말로 여겨졌다. 메소아메리카의 여러 통치 계보들은 톨텍 조상을 주장하며 권력을 강화하려 했고, 톨란은 케찰코아틀에 의해 통치되었다는 신화가 널리 퍼져 있었다. UCLA 인류학 교수인 패트리샤 아나왈트(Patricia Anawalt)에 따르면, 톨텍 조상에 대한 주장은 아즈텍, 키체 및 이차 마야와 같은 다양한 문명에서 나타난다.

최근 학문은 '톨텍'이라는 용어를 아즈텍 기록에서 분리하여 툴라 주민들의 민족, 역사 및 사회 조직에 대한 고고학적 단서를 찾으려고 시도한다.

6. 결론

참조

[1] 서적 The Aztecs Wiley-Blackwell 2012
[2] 서적 The ancient Americas: a brief history and guide to research University of Utah Press 1997
[3] 학술지 Mesoamerica ''after the Decline of Teotihuacan A. D. 700-900 '' 1993
[4] 학술지 Tula and the Toltecs 2012-09-24
[5] 학술지 Review of Mesoamerica after the Decline of Teotihuacan A. D. 700-900 https://www.jstor.or[...] 1993
[6] 서적 Tula and the Toltecs http://oxfordhandboo[...] Oxford University Press 2012-09-24
[7] 백과사전 Toltec Empire http://dx.doi.org/10[...] John Wiley & Sons, Ltd 2022-03-12
[8] 서적 Twin Tollans: Chichén Itzá, Tula, and the epiclassic to early postclassic Mesoamerican world Dumbarton Oaks Research Library and Collection 2011
[9] 웹사이트 Eagle Relief, Toltec https://www.metmuseu[...]
[10] 서적 古代マヤ 密林に開花した神秘の文明の軌跡をたどる BL出版
[11] 문서 コウ1975,p.162,タウンゼント2004,p.61,p.69
[12] 문서 大井1985,p.191
[13] 문서 大井1985,pp.197-198
[14] 문서 大井1985,p.199
[15] 문서 大井1985,p.193
[16] 문서 大井1985,pp.199-201
[17] 문서 大井1985,pp.196-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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