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막시무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막시무스는 로마 제국 시대의 군인으로, 출신지는 현재 그리스 북부에 위치한 필리피였다. 그는 로마 군단에서 복무하며 도미티아누스와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전쟁과 파르티아 전쟁에 참전했다. 특히, 다키아 전쟁에서 패배한 데케발루스 왕을 추격하여 그의 머리를 트라야누스에게 바치는 공을 세웠으며, 이로 인해 데쿠리온으로 승진했다. 파르티아 전쟁 이후에는 명예로운 제대(missio)를 받고 사망했으며, 그의 묘비는 필리피에서 발견되었다.
막시무스의 묘비 위치가 그의 고향을 나타낸다면,[22] 막시무스는 기원전 42년에 그리스 북부 필리피에 세워지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기원전 30년-서기 14년)에 확장된 로마군 퇴역병들의 식민지인 콜로니아 이울리아 아우구스타 필리펜시스에서 태어났다. 로마 군단 복무[23]에서 확인되듯이,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였는데, 당시 로마 제국 거주민들 중 10-20%만이 시민권을 지녔다. 막시무스는 아우구스투스가 필리피에 정착시킨 이탈리아 고참병들의 후손일 수도 있으며, 서기 65년 무렵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24]
막시무스는 늦어도 서기 85년에 군대에 입대하여,[5] 서기 66년 이후부터 비미나키움(모이시아)에 주둔한 제7클라우디아 군단의 기병대(단 120명으로 구성)에서 ''에케스''(기병)로 복무했다.[6] 그는 기병대에서 ''콰이스토르 에퀴툼''[7], ''싱굴라리스 레가티 레기오니스''[10], ''벡실라리우스''(기수)[11] 등 세 가지 상위 직책을 맡았다.
2. 출신
2. 1. 가문과 출생
막시무스의 묘비 위치가 그의 고향 도시(퇴역한 고참병들이 자주 그랬듯이)를 나타내는 것이라면,[22] 막시무스는 기원전 42년에 그리스 북부 필리피에 세워지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기(기원전 30년-서기 14년)에 많이 확장된, 로마군 퇴역병들의 식민지인 콜로니아 이울리아 아우구스타 필리펜시스(Colonia Iulia Augusta Philippensis)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름 및 로마 군단에서 일찍이 복무한 것[23]에서 확인되었듯이, 태어났을 때부터 로마 시민권자이었는데, 로마 군단 내 복무는 시민권을 필요로 했다(이 당시에, 로마 제국의 거주민들 중 10-20%만이 시민권을 지녔다). 막시무스는 아우구스투스가 필리피에 정착시킨 이탈리아 고참병들의 후손일 수도 있다. 그는 아마 서기 65년 무렵에 태어났을 것이다.[24]
2. 2. 시민권과 초기 생애
막시무스의 묘비 위치가 그의 고향을 나타낸다면(퇴역 군인들에게는 흔한 경우였다),[2] 막시무스는 기원전 42년에 설립된 로마 군대 퇴역 군인들의 식민지인 ''콜로니아 율리아 아우구스타 필리펜시스''(Colonia Iulia Augusta Philippensis)에서 태어났다.[22] 이곳은 아우구스투스 (재위 기원전 30년 – 서기 14년) 치하에서 크게 확장되었다. 그의 이름[3]과 로마 군단 입대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이었다. 당시에는 로마 제국 인구의 10~20%만이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막시무스는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필리피에 정착한 이탈리아 출신 퇴역 군인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막시무스는 아마도 서기 65년경에 태어났을 것이다.[4][24]
3. 초기 군 경력
3. 1. 클라우디아 제7군단 복무
막시무스는 늦어도 서기 85년에는 군에 입대했다.[25] 그는 최소 서기 66년부터 비미나키움(모이시아)에 배치된 클라우디아 제7군단 기병대(총 120명)에서 기병(eques)으로 복무했다.[26] 그는 기병대에서 세 가지 고위 직위를 맡았다고 주장했으나, 이 직위들이 모두 공식적인 군 계급인지 아니면 막시무스가 수행했던 단순한 역할인지는 확실치 않다.
직위 | 설명 |
---|---|
콰이스토르 에퀴툼[27] | 아마 기병대의 재무관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28] 이 직위는 이 금석문에서만 등장한다. 친위대 기병대에 ‘fisci curator’ (재정 관리관)가 존재했다.[29] |
싱굴라리스 레가티 레기오니스[30] | 군단장 호위 기병대의 호위병. 추정상 군단 기병대의 4개 투르마(30명으로 된 기병대 조직) 중 하나였을 것이다. 특정 투르마가 이 역할을 수행했는지(그 기병대의 특별한 지위에 따라서), 혹은 투르마가 단순히 군단장을 돌아가며 호위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후자의 경우는 지위에 따른 것은 아니었다. |
벡실라리우스[31] | 거기수. 이 직위는 세 가지 중 유일하게 확실한 군 계급으로, 하급 장교직이었다. 봉급면에서, 군단 보병대의 서기수는 아마도 ‘sesquiplicarius’ ("1.5명분"), 즉 계급보다 50% 더 많은 봉급을 받을 자격이 있었을 것이다.[32] |
막시무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재위 81-96년)의 다키아 전쟁(서기 86–88년)에 참전했다. 따라서 그는 제1차 타파이 전투(86년) 및 제2차 타파에 전투(88년)에 참전했을 수 있다. 그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용맹함에 대한 공로를 치하받기도 했다.[33]
3. 2. 도미티아누스의 다키아 전쟁 참전
막시무스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재위 81-96년)의 다키아 전쟁(86-88년)에 참전했다.[33] 그는 제1차 타파이 전투(86년) 및 제2차 타파에 전투(88년)에 참전했을 수 있다. 그는 도미티아누스에게 용맹함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았다.[33]4. 로마의 다키아 정복 (서기 101-106년)
막시무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전쟁(101–102년, 105–106년)에 참전했다.[34] 이 시기에 막시무스는 군단 기병대에서 보조군의 정예 기병대인 알라이로 진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막시무스는 판노니오룸 제2 알라이 연대에서 '두 배 봉급을 받는 자'라는 뜻의 '두플리카리우스'라는 초급 장교로 복무했다.[35]
106년, 다키아 정복 막바지에 막시무스는 척후병 부대에서 복무하며 패배한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 추격에 참여했다. 당시 데케발루스는 소수의 다키아 귀족 호위병만 남은 도망자 신세였다. 막시무스와 그의 병사들은 데케발루스를 산악 지역으로 몰아넣었으나, 막시무스가 도착하기 전에 데케발루스는 자결했다. 이 사건은 트라야누스 원주에 묘사되어 있다. 막시무스는 데케발루스의 머리를 베어 라니스스토룸에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바쳤고, 트라야누스는 그의 공로를 치하하며 데쿠리온으로 승진시켰다.[15]
4. 1. 알라(Ala) 기병대로의 승진
막시무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전쟁(101–102년과 105–106년)에 참전했다.[34] 트라야누스는 막시무스를 호위 및 연락에 한정된 역할을 맡던 군단 기병대에서 보조군의 정예 교전용 기병대인 알라이로 진급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막시무스는 판노니오룸 제2 알라이 연대에서 초급 장교인 ‘두플리카리우스’ (duplicarius, ‘두 배 봉급을 받는 자’)로 복무했다. 이 진급으로 막시무스의 급여는 상당히 인상되었을 것이다.[35]106년, 다키아 정복 막바지에 막시무스는 척후병(explorator) 부대에서 복무하며 패배한 다키아의 왕 데케발루스 추격에 참여했다. 당시 데케발루스는 다키아 귀족 호위병만 남은 도망자 신세였다(나머지 다키아 귀족들은 트라야누스에게 항복했다). 막시무스와 그의 병사들은 데케발루스를 산악 지역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막시무스가 도착하기 전에 데케발루스는 트라야누스 원주에 묘사된 대로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했다. 막시무스는 데케발루스의 머리를 베어 라니스스토룸에 있는 트라야누스의 원정 기지로 가져갔다. 트라야누스는 막시무스의 공로를 치하하며 보병대의 켄투리오에 해당하는 데쿠리온(투르마의 지휘관)으로 승진시켰다.
4. 2. 데케발루스 왕 추격과 죽음
막시무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전쟁(101–102년 및 105–106년)에 참전했다.[34] 이 전쟁 중에 트라야누스는 막시무스를 군단 기병대에서 보조군의 정예 전투 기병대인 알라이로 승진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막시무스는 판노니오룸 제2 알라이 연대의 초급 장교인 ‘두플리카리우스’ (duplicarius, ‘두 배 봉급을 받는 자’)였으며, 이 승진으로 급여가 상당히 인상되었을 것이다.[35]106년, 다키아 정복의 마지막 단계에서 막시무스는 그의 부대와 함께 ''엑스플로라토르'' (정찰)로 복무하며, 패배한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를 추격하는 데 관여했다. 당시 데케발루스는 다키아 귀족의 개인 호위병만 남은 도망자 신세였다. 막시무스와 그의 부하들은 산악 지형에서 데케발루스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막시무스가 그에게 도달하기 전에, 데케발루스는 자신의 목을 베어 자살했다. 이 사건은 트라야누스 원주에 묘사되어 있다. 막시무스는 데케발루스의 머리를 베어 라니스스토룸에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바쳤다. 그 보상으로, 트라야누스는 막시무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보병의 켄투리오에 해당하는 기병대 지휘관인 데쿠리온으로 승진시켰다.[34]
막시무스를 유명하게 만든, 데케발루스 왕의 추격과 자결에 대한 두 가지 묘사가 있다.
(A) 막시무스 묘비의 부조는 막시무스가 말을 타고 칼과 방패, 두 개의 창을 들고, 데케발루스 왕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데케발루스 왕은 전형적인 다키아 귀족의 머리 장식인 프리기아 모자를 쓰고 있다. 데케발루스는 등을 대고 누워 굽은 다키아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이미지는 트라키아 영웅의 전형을 반영하기 위해 양식화된 것으로 보인다.[34]
(B) 데케발루스 생포에 대한 또 다른 묘사가 트라야누스 원주의 패널에 의해 제공된다 (나선형 22, 패널 B; Cichorius 106, 위). 이것은 데케발루스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여주는 앞선 두 패널과 함께 보아야 한다.[34]
# 로마 기병대는 데케발루스와 그의 개인적인 기마 호위병인 선발된 ''파일레이티''를 추격한다. 로마 기병 세 명은 망토를 입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원주에 묘사된 군부대의 전형에 따라, 이들은 황제의 근위 기병대인 ''아우구스티 기병 친위대'', 즉 프라에토리아 근위대의 기병대원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기병들은 망토를 입지 않아 갑옷과 목 스카프가 보인다. 이들은 막시무스 자신의 연대, 알라 II 판노니오룸의 기병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데케발루스 생포 작전은 정예 프라에토리아 기병대와 알라 기병대의 합동 특수 부대에 위임된 것으로 보인다.[37]
# 로마 기병대가 데케발루스의 기병을 따라잡아 가로막는 모습을 보여준다. 오염으로 인한 석재 침식으로 인해 로마 기병대의 무기(창과 칼)가 사라졌다. 일련의 사건은 데케발루스의 호위병이 파괴되었음을 보여준다. 로마 말의 발굽 아래 짓밟힌 사람을 주목하라(오른쪽 전경).[37]
# 마지막 호위병이 쓰러진 후, 왕은 홀로 바위투성이의 장소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기병 한 명이 내려 말을 끌고 걸어가 그에게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지형이 너무 가파르거나 험해서 말을 탈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오른쪽 전경). 이 기병은 정찰대장으로서의 막시무스를 나타낼 수 있다. Speidel이 지지하는 다른 견해는 데케발루스에 가장 가까이 보이는 기병이 막시무스라는 것이다. 이 인물이 막시무스 자신의 장례 기념비에 복제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17]
기병들은 데케발루스를 가능한 한 생포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야 그가 트라야누스의 다키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로마에서의 로마 개선식의 중심 인물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38] 그렇지 않으면 포로는 교살에 의해 처형되고 시체는 게모니아 계단 아래로 던져져 썩도록 내버려졌다. 이 경우, 데케발루스의 머리가 계단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39]
일부 학자들은 로마인에게 붙잡혔을 때 데케발루스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고(치명상을 입었지만) 주장했다. 막시무스 자신은 데케발루스를 "생포"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카시우스 디오의 『로마사 요약』의 한 구절은 그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명확히 한다. "데케발루스는 수도가 파괴되고 그의 전체 영토가 점령당했으며, 그 자신도 생포될 위험에 처하자 자살했다. 그의 머리가 로마로 가져와졌다."[40]
4. 3. 데케발루스의 죽음에 대한 묘사
막시무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다키아 전쟁(101–102년, 105–106년)에 참전했다.[34] 106년 다키아 정복 막바지에 막시무스는 척후병 임무를 수행하며 패배한 다키아 왕 데케발루스를 추격했다. 당시 데케발루스는 다키아 귀족 호위병만 남은 도망자 신세였다.[35]막시무스와 그의 부하들은 데케발루스를 산악 지형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막시무스가 도착하기 전에 데케발루스는 자신의 목을 그어 자결했다. 이 사건은 트라야누스 원주에 묘사되어 있다. 막시무스는 데케발루스의 머리를 베어 라니스스토룸에 있는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바쳤다.[35]
데케발루스의 추적 및 자결에 관한 사건은 두 가지 묘사가 존재한다.
(A) 막시무스 묘비의 부조는 검, 방패, 창 두 개를 든 막시무스가 프리기아 모자를 쓴 데케발루스에게 접근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데케발루스는 굽은 다키아 검(로마인에게는 ‘팔크스’)을 쥔 채 누워 있다. 이 형상은 트라키아 영웅의 정형화된 표현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35]
(B) 트라야누스 원주 패널(Spiral 22, Panel B; Cichorius 106)은 데케발루스 포획에 관한 더 상세하고 덜 정형화된 묘사를 제공한다. 이 묘사는 데케발루스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사건들의 일련을 보이는 앞선 두 개의 패널과 함께 봐야 한다.[35]
# 첫 번째 패널에서 로마 기병대는 데케발루스와 그의 정예 호위 기병대를 추격한다. 로마 기병 중 세 명은 친위대의 기병 무장 형태인 에퀴테스 싱굴라레스 아우구스티이고, 나머지는 막시무스의 부대인 판노니오룸 제2 알라이였을 것이다. 데케발루스 포획 작전은 정예 친위대와 알라이 기병들의 합동 작전으로 보인다.[35]
# 두 번째 패널은 로마 기병이 데케발루스의 기수들을 따라잡아 가로막는 모습을 보여준다. 데케발루스의 호위대는 궤멸되었다.[35]
# 세 번째 패널에 의하면, 마지막 호위대가 쓰러진 후 데케발루스는 바위투성이 지역으로 홀로 달아났으며, 그곳에서 말을 타기에 너무 가파르거나 거칠었기 때문에 말에서 내려 직접 걸으며 말을 끌고 가는 로마 기병과 마주쳤다. 이 기병은 막시무스일 수도 있다.[17]
기병들은 데케발루스를 산 채로 포획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개선식의 전형적인 구성은 패배한 적의 지도자가 개선식의 주인공 전차 앞에서 쇠사슬에 묶여 끌려다니는 것이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카라탁쿠스의 처형을 취소한 예시처럼, 개선식의 최고조는 황제가 붙잡힌 자의 운명을 결정할 때였다. 그렇지 않을 경우 포로는 가로테로 처형되어 시신은 게모니아 계단으로 던져져 썩도록 내버려졌다. 데케발루스의 머리가 계단의 바닥에 놓였다.[38]
일부 학자들은 데케발루스가 로마인들에게 붙잡혔을 때 여전히 살아있었다고 주장했다. 막시무스 역시도 데케발루스를 '포획'했다고 하였다. 하지만 카시우스 디오의 저서 '로마사' 발췌문에서 그가 이미 죽어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하였다.[40]
5.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전쟁 (114-6년)
막시무스는 이후 트라야누스의 파르티아 전쟁(114-116년)에 참전했고, 다시 한번 황제에게 용맹함을 인정받아 서훈을 받았다. 아마도 막시무스는 이 시기에 이미 '볼룬타리우스'(voluntarius, 지원병)였을 것이다. 그가 이후 제대(missio)하고 나서 직접 표현했던 것처럼, 그의 복무 기간(25년)은 같은 해 이전(서기 110년경)에 끝났어야 했기 때문이다.[36]
6. 제대 이후
막시무스는 116년에서 117년 사이 트라야누스의 최고 지휘관 중 한 명이자 당시 신설된 메소포타미아 노바 속주 병력의 지휘관이었던 데키무스 테렌티우스 스카우리아누스에게 영예로운 제대(''호네스타 미시오'')를 부여받았다.[1]
그는 117년 이후에 사망했다. 생전에 자신의 묘비를 고안했으며, 이 묘비는 그리스 필리피에서 발견되어 현재 드라마 지역의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묘비에는 그가 무용으로 수여받은 두 개의 토크가 묘사되어 있으며, 데케발루스를 포획했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적혀있다.[1]
참조
[1]
웹사이트
EDH entry HD012322
http://edh-www.adw.u[...]
2014-09-20
[2]
서적
Speidel (1984) 174
[3]
서적
Speidel (1984) 174
[4]
서적
Speidel (1984) 174
[5]
서적
Speidel (1984) 174
[6]
서적
Speidel (1984) 174
[7]
간행물
AE (1985) 721
[8]
서적
Speidel (1984) 175
[9]
서적
Speidel (1984) 179
[10]
간행물
AE (1985) 721
[11]
간행물
AE (1985) 721
[12]
서적
Speidel (1984) 181
[13]
간행물
AE (1985) 721
[14]
간행물
AE (1985) 721
[15]
서적
Speidel (1984) 180–1
[16]
서적
Speidel (1984) 185
[17]
서적
Speidel (1984) 184
[18]
서적
Speidel (1984) 184
[19]
서적
Speidel (1984) 185 n.99
[20]
논문
Cassius Dio Epitome LXVIII.15.3
[21]
웹사이트
EDH entry HD012322
http://edh-www.adw.u[...]
2014-09-20
[22]
서적
Speidel (1984) 174
[23]
서적
Speidel (1984) 174
[24]
서적
Speidel (1984) 174
[25]
서적
Speidel (1984) 174
[26]
서적
Speidel (1984) 174
[27]
간행물
AE (1985) 721
[28]
서적
Speidel (1984) 175
[29]
서적
Speidel (1984) 179
[30]
간행물
AE (1985) 721
[31]
간행물
AE (1985) 721
[32]
서적
Speidel (1984) 181
[33]
간행물
AE (1985) 721
[34]
간행물
AE (1985) 721
[35]
서적
Speidel (1984) 180–1
[36]
서적
[37]
서적
[38]
서적
[39]
서적
[40]
서적
Epitome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