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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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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군단은 로마의 핵심 군사 조직으로, 로마 왕정 시대부터 제정 시대까지 로마의 팽창과 유지를 위한 핵심 전력이었다.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정예 중장보병 부대로서, 시대에 따라 규모와 조직이 변화했다. 공화정 시대에는 시민군으로 구성되어 필요에 따라 소집되었으나, 마리우스 군제개혁 이후 직업 군인 체제로 전환되어 상비군으로 운영되었다. 군단은 훈련, 규율, 전술, 장비 등에서 뛰어났으며, 질서정연한 진형과 지휘를 바탕으로 강력한 전투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원거리 공격 수단의 부족, 중장기병에 대한 취약성 등의 단점도 존재했다. 로마 군단의 몰락은 제국의 쇠퇴, 용병 의존도 증가, 야만족의 침입 등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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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군단
로마 군단 정보
로마 군단 깃발
국가고대 로마군
존속 기간기원전 753년 – 476년
군사사
제도사육군
(병종과 직책, 정규군, 아우크실리아, 장군 목록)
해군
(함선, 제독 목록)
전사
전쟁전쟁
주요 전투주요 전투
훈장전공
무기사
군사 기술군사 기술
(개인 장비, 공성 병기, 주둔지, 개선문, 도로)
군정사군정사
전술
보병 전술보병 전술
공성전공성전
국경 방어국경 방어
(성벽, 하드리아누스 방벽, 안토니누스 방벽)
명칭
라틴어legio
로마자 표기legio
어원"고르다"를 뜻하는 라틴어 "legere"에서 유래, 징집병을 의미

2. 용어의 역사

초기 로마 왕정 시대에 '군단'은 로마 육군 전체를 의미했을 수도 있지만, 이 시기의 자료는 부족하고 신뢰하기 어렵다.[31] 이후 군단 조직은 시간이 흐르면서 크게 변화했지만, 일반적으로 군단은 대략 5,000명의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공화정 시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군단은 10개의 ''마니풀루스''로 구성된 세 개의 열로 나뉘었다. 공화정 말기와 제정 시대 초기(대략 기원전 100년)에는 군단이 각각 500~600명으로 구성된 10개의 코호르스로 나뉘었다. 군단에는 소규모의 ''알라''(기병대)도 포함되었다.

서기 3세기부터 군단은 대략 1,000명에서 1,500명 규모로 작아졌지만, 더 큰 경우도 있었다. 서기 4세기 동로마군의 국경 수비 군단(''리미타네이'')은 이보다 더 작았을 수 있다. 공화정 시기의 군단은 고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수 있다.[32]

로마 군단의 규모는 공화정 시기 4,200명(군단병)과 300명의 에퀴테스(기병)에서 제정 시기 5,200명의 군단병과 120명의 보조군으로 변화했다. 1세기 중엽까지 10개의 코호르스(각각 약 500명)가 하나의 로마 군단을 구성했다. 이후 첫 번째와 5번째 코호르스의 인원이 두 배(160명)가 되고, 나머지 9개 코호르스는 6개의 켄투리아(각각 80명)로 구성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4세기경, 로마 군단은 1,000~1,500명 정도로 작아졌는데, 이는 넓어진 영토를 담당하기 위해 대규모 군단과 보조군 부대가 작은 단위로 쪼개졌기 때문이다.

''군단''이 생기기 전, 로마 왕정 및 공화정 초기에는 로마군이 약 100명의 ''켄투리아''들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편성되어 지휘관에게 응했으며, 기원전 2세기까지 경보병과 기병에서 이러한 독립적 조직이 지속되었으나, 이후 동맹군으로 대체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켄투리아의 지휘관(켄투리온), 옵티오(부지휘관), 아퀼리페르(기수)의 역할은 이 시기에 명시되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의 인구 조사에서 모든 건강하고 재산을 가진 로마 남성 시민들은 재산에 따라 5개 계층으로 나뉘어 군 복무를 했고, 이들은 ''군단''의 하급 부대인 켄투리아로 편성되었다. 군 입대는 시민의 의무이자 명예였다. 부유한 지주들은 가장 긴 군 복무를 했는데, 이들은 국가가 무너지면 가장 많은 것을 잃을 사람들이었다.

로마의 왕들이 쫒겨난 후 공화정 초기, ''군단''은 두 개로 나뉘어 각각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에게 할당되었다. 초기에는 전쟁이 주로 약탈에 치중했기 때문에 군단 전체가 동원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기원전 494년, 독재관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10개의 군단을 양성했는데, 이는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전보다 많은 수였다.[34]

일부 전쟁은 군단 구조에서 벗어난 로마군에 의해 수행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기원전 479년 파비아 씨족이 에트루리아 도시 베이이를 상대로 벌인 전쟁이다(파비아 씨족은 전멸). 기원전 4세기, 로마의 전쟁이 빈번해지고 계획적으로 변하면서 군단은 공식적으로 조직되었고, 집정관의 병력도 각각 두 개의 군단으로 늘어났다.

공화정 시기 군단은 일시적인 존재였다. 1~4군단(집정관 한 명당 2개)을 제외한 다른 부대들은 전쟁 시에 모집되었다.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시들은 로마 군단 지원을 위해 10개의 코호르스를 제공해야 했다.

공화정 중기 군단은 다음과 같은 부대들로 구성되었다.


  • ''에퀴테스''(기병): 부유한 젊은 로마 남성들이 정치 경력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복무했던 명망있는 부대였다. 기병은 직접 장비를 마련했으며, 원형 방패, 투구, 검, 갑옷, 랜스 등으로 무장했다. 군단 내 기병은 300명 정도로 적었고, 30명으로 구성된 ''투르마'' 10개로 이루어져 데쿠리온의 지휘를 받았다. 중기병 외에 경기병도 있었는데, 이들은 ''하스타티''나 ''에퀴테스''가 되기에는 어린 부유한 젊은 시민들이었다. 전투 시에는 적 보병 진형을 혼란시키고 측면 공격을 하거나 적 기병대와 교전했다. 특히 적 기병과 교전할 때는 등자가 없던 시절이라 안정성과 민첩성을 위해 하마 상태로 전투를 벌이는 경우가 많았다.[35]
  • ''벨리테스''(경보병): 주로 가난한 시민들로 구성되었으며, 산병 역할을 수행하여 재블린을 던져 적을 괴롭히고, 중보병 열 뒤에서 보호를 받았다. 공화정 초기와 중기에는 척후병으로도 활용되었다.
  • 중보병: 군단의 핵심 부대로, 철 투구, 방패, 갑옷, 필룸(무거운 재블린) 등으로 무장한 시민 군단병으로 구성되었다. 기원전 387년 이후 글라디우스(단검)가 선호되었으며, 징 박힌 샌들(''칼리가이'')도 효과적인 무기였다. 마리우스 군제개혁 이전에는 경험에 따라 세 개의 열로 나뉘었다.
  • ''하스타티'': 경험이 적은 신병들로 구성되었으며, 전방에 배치되어 경험을 쌓게 했다.
  • ''프린키페스'': 보다 경험이 많은 병사들로, ''하스타티''가 무너지면 제2열을 맡았다.
  • ''트리아리이'': 베테랑 병사들로, 심각한 상황에서만 사용되었으며, 하스타(창)로 무장하고 팔랑크스 대형으로 싸웠다. ''"Ad triarios redisse"''(트리아리이에 의지하기)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뜻하는 격언이었다.


세 개의 열은 각각 10개의 마니풀루스로 나뉘었고, 하나의 마니풀루스는 2개의 켄투리아로 구성되어 선임 지휘관의 지휘를 받았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의 켄투리아는 60명, 트리아리이의 켄투리아는 30명이었다. 벨리테스 1,200명, 기병 300명과 함께, 공화정 중기 군단은 명목상 4,500명이었다.

3. 기능과 구성

로마 제국 시대 대부분 동안, 로마 군단은 로마군의 정예 중보병을 형성했고, 로마 시민만으로 구성되었다. 반면 군대의 나머지는 보조군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추가적인 보병과 대부분의 로마 기병을 제공했다. 시민권을 열망하는 속주민들은 명예 제대를 하면 시민권을 얻었다. 로마 제국 시대 대부분 동안 로마군은 군단병보다 보조군으로 주로 구성되었다.[33][4]

백인대장(켄투리온)(코스프레)


로리카 세그멘타타를 착용한 로마 군단병


북방 속주 로마 군단병(3세기 말)(코스프레)


로마 군대는 지휘관인 사령관과 군인인 군단병이라는 두 가지 다른 조직으로 구성되었다. 공화정 시대에는 지휘관은 민회의 선거로 선출된 공직자였으며, 대부분 상원 의원이었다. 한편 백인대장은 부대 내 선거로 선출되었다. 따라서 고급 장교는 물론 백인대장, 특히 제1보병대에 선출되는 것은 최고의 영광이었다.

고대 로마에 대한 문헌은 로마가 멸망한 지 오래되어 책의 일부와 유적 출토품 등이 많기 때문에 그 해석 또한 다양해져 당시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어려운 상황이다.

공화정 로마에서는 집정관의 군대였던 제1군단과 제4군단을 제외하고, 다른 군단들은 필요에 따라 소집되고 해산되어 매우 짧은 기간만 존속했다. 이는 당시 로마 군단이 직업 군인이 아니라 일반 시민이 필요에 따라 소집되어 편성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제국 시대에 접어들면서 로마 속주에 대한 심각한 외적의 위협이 닥치자, 레기오(legio) 병사들은 봉급을 받는 직업 군인이 되었고, 각각 "수리(aquila)"(군단기)와 자랑스러운 전적을 가진 완전한 상비군단이 되었다.

4. 일반적 체제와 강점에 대한 개요

로마 군단은 로마군의 정예 중보병으로, 제정 시기 대부분 동안 로마 시민으로만 구성되었다. 군대의 나머지 병력은 보조군으로 구성되었으며, 이들은 추가적인 보병과 로마 기병대의 대부분을 제공했다.[33] 시민권을 원했던 속주민들은 보조군에서 명예 제대를 하면 시민권을 받았다.[33] 제정 시대 대부분 동안 로마군은 군단병보다 보조군으로 주로 구성되었다.[33]

로마 군단은 마리우스 군제개혁(기원전 107년) 이전에는 영구 부대가 아니었고, 창설, 동원, 해체를 반복했다. 로마 역사에서 수백 개의 군단이 언급되었고, 현재까지 대략 50여 개의 군단이 확인되었다. 공화정 시기 군단병들은 스스로 군사 장비를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로마군의 구조는 로마 사회를 반영했다. 항상 4개의 집정관 군단(임기 중인 두 명의 집정관들이 나누어 지휘)이 있었고, 전쟁 시에는 추가 부대가 징집될 수 있었다. 기원전 2세기 말, 로마는 군대에 들어가기 위한 재산 및 재정적 자격으로 인해 인력 부족을 겪었다. 이 상황은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재산 자격을 폐지하고, 국가가 복무 기간에 장비 및 보상을 지급하여 모든 시민들이 복무할 수 있게 하는 법령을 발표하게 했다. 그 결과 로마군은 자발적이고 전문적인 상비군이 되었으며, 복무 범위가 로마 시민을 넘어 ''보조병''으로 입대할 수 있는 비시민권자에게도 확대되어 복무를 마치면 로마 시민권과 약탈물들을 보상받았다.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그가 물려받은 약 50여 개의 군단은 약 25–35개의 상비 군단으로 축소되었고, 이는 로마 제국 역사 대부분 동안 유지되었다.

공화정 초기에는 전쟁이 주로 약탈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군단의 모든 전력이 한 번에 동원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기원전 494년에 독재관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10개의 군단을 양성했는데,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는 이전 어느 때보다 많은 수였다.[34] 일부 전쟁은 군단 구조에서 벗어난 로마군에 의해 수행되기도 했는데, 가장 유명한 예는 에트루리아 도시 베이이 (Veii)를 상대로 파비아 씨족의 군대가 벌인 기원전 479년의 전쟁이다(이 전투에서 파비아 씨족은 전멸). 군단은 로마의 전쟁 활동이 점차 빈번해지고 계획된 작전으로 발전함에 따라 기원전 4세기에 공식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집정관의 병력도 각각 두 개의 군단으로 양성되었다.

공화정 중기에 군단은 다음과 같은 부대들로 구성되었다.


  • ''에퀴테스'' (기병): 부유하고 젊은 로마 남성들로 구성된 기병은 가장 명망있는 부대로, 정치 경력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기병은 원형 방패, 투구, 검, 갑옷, 랜스 등으로 무장했으며, 군단 내에서 수가 적었다. 3,000명 중 300명만이 기병이었고, 이들은 30명으로 구성된 ''투르마'' 10개로 이루어져 데쿠리온들의 지휘를 받았다. 중기병 외에도, ''하스타티'' 또는 ''에퀴테스''가 되기에 어린 부유하고 젊은 시민들을 징집한 경기병도 있었다. 기병은 적 보병 진형을 혼란시키고 측면 공격을 하거나 적 기병대와 교전하는 데 사용되었다. 등자가 없던 시기에는 하마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기도 했는데, 이는 안정성과 민첩성 면에서 상당한 이점을 제공했다.[35]
  • ''벨리테스'' (경보병): 주로 가난한 시민들로 구성된 ''벨리테스''는 산병 역할을 수행하며, 재블린을 던져 적을 괴롭히거나 적 뒤 부대의 움직임을 담당했다. 재블린을 던진 후에는 중보병들 사이로 후퇴하여 보호받았다. 공화정 초기와 중기 군대에 기병이 부족하면 척후병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중보병: 군단의 핵심 부대로, 철 투구, 방패, 갑옷, 필룸 등으로 무장한 시민 군단병으로 구성되었다. 기원전 387년 이후에는 글라디우스가 선호되었다. 징 박힌 샌들(''칼리가이'')도 효과적인 무기였다. 마리우스 군제개혁 이전에 중보병은 경험에 따라 세 개의 열로 나뉘었다.
  • ''하스타티''(단수형. ''하스타투스''): 경험이 적은 신병들로, 전방에 배치되어 경험을 얻게 했다.
  • ''프린키페스''(단수형. ''프린켑스''): 보다 경험 많은 병사들로, 제2열을 맡았다.
  • ''트리아리이''(단수형. ''트리아리우스''): 베테랑 병사들로, 심각한 상황에서만 사용되었으며, 비전투 시에는 한쪽 무릎을 꿇었다. 주로 예비병력이나 엄호 부대 역할을 했고, 하스타이(창)으로 무장하여 팔랑크스 대형으로 싸웠다. ''Ad triarios redisse'' – ''트리아리이에 의지하기''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뜻하는 로마 격언이었다.


각 열은 마니풀루스라는 전술 단위(주로 10개)로 나뉘었고, 하나의 마니풀루스는 2개의 켄투리아로 구성되었다. 이 시기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의 각 켄투리아는 60명, 트리아리이의 켄투리아는 30명이었다. 벨리테스 1,200명, 기병 300명과 함께, 3,000여 명이 공화정 중기 군단의 명목상 병력이었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 이후 군단은 6개의 켄투리아로 된 "코호르스"로 조직되었다. 각 켄투리아는 고유 군기를 지녔고, 텐트, 맷돌, 노새, 질탕관을 공유하는 8명으로 구성된 부대 단위(''콘투베르니아'', contubernia) 10개로 이루어졌다.

기원전 2세기 말,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전의 임시적인 군단을 직업군으로 개혁하여, 로마가 더 큰 규모의 군대를 동원하고 직업 없는 시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그러나 이는 병사들의 충성심을 로마 당국보다 지휘관에게 두게 하여,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공화정을 끝내는 결과를 낳았다.

공화정 말과 제정 초 군단은 ''마리우스'' 군단으로 불린다. 기원전 101년 베르켈라이 전투 이후, 마리우스는 모든 이탈리아 동맹군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며 동맹군 군단 개념을 없앴고, 모든 이탈리아 군단은 로마 군단으로 여겨졌다. 동시에 세 종류의 중보병은 ''프린키페스''를 기준으로 한 단일 유형으로 통합되었으며, 필룸, ''글라디우스'', 쇠사슬 갑옷(''로리카 하마타''), 투구, 정사각형 방패(''스쿠툼'')로 무장했다.

동맹군 군단의 역할은 ''아욱실리아''라는 동맹군 보조병들이 맡게 되었다. 보조병은 특수 부대, 공병, 공성 무기 조종수, 척후 부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마리우스 군제개혁으로 군단 내부 체계가 규격화되었다. 각 군단은 ''코호르스''로 나뉘었고, 코호르스는 영구 부대 10개(첫 번째 코호르스는 5개의 켄투리아)로 구성되었으며, 각 켄투리아는 ''옵티오''의 도움을 받은 백인대장이 지휘했다. 군단 내 계급은 복무 기간을 근거로 했으며, 용기 있는 활약으로 고위 계급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모든 군단에는 긴 짐 행렬이 있었는데, 노새 640마리(군단병 8명당 노새 한 마리)가 포함되었다. 짐 행렬이 길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마리우스는 보병들에게 갑옷, 무기, 15일치 식량 등 25–30kg의 장비를 들고 다니게 했고, 이를 위해 십자 모양 막대기를 지급했다. 병사들은 ''마리우스의 노새''라는 별칭이 붙었다.

이 시기 전형적인 군단은 5,120명이었고, 보조병 포함 시 최대 11,000명이었다. 로마 제국 말에는 군단 규모가 1,000명으로 감축되었다.

백인대장 모습을 한 라인액터.


마리우스 군제개혁 이후 군단은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했다. 기원전 1세기부터 데마고그 지휘하 군단의 위협이 인지되었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헌법 위기를 일으켜 공화정 종말과 제정 시대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마지막 공화정 내전 기간에 지휘관들은 군단을 창설하고 번호를 매겼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내전 후, 아우구스투스는 군단 수를 28개로 줄였다. 또한 병사 봉급을 규격화하고, 보조병 수를 크게 늘렸다. 그는 친위대와 해군을 창설했고, 군단은 영구적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군사 정책은 후임자들도 따랐으며, 상설 병력은 30개 군단까지 늘었다. 군단병 5,120명 규모 군단은 동일 규모 보조군 지원을 받았고, 적대적 국경 주둔 군단은 더 많은 보조군을 갖는 경우였다. 세베루스 시기(193-211년)에 보조군은 로마군 447,000명 중 250,000명(55-60%)을 구성했다. 일부 군단은 15,000–16,000명으로 보강되기도 했다.

제정 시대 군단은 문장과 군단 역사를 가지며 규격화되었다. 군단은 ''레가투스'' 지휘를 받았고, 6명의 ''군사 호민관'', 의무 장교, 공병 장교, 기록 보존 장교, ''프라이펙투스 카스트로룸'', 군종 장교, 군악 장교 등이 있었다.

몽테뉴는 "로마인들이 세계 지배자가 된 주된 이유는 모든 민족들과 싸우면서 더 나은 것을 발견하면 자신의 관습을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적었다.[25]

로마 군단의 강점은 다음과 같다.

  • 유연성: 기병, 게릴라, 공성전 등 다양한 문제를 효과적으로 처리했다.
  • 훈련 및 체계: 십초벌과 같은 훈련, 조직, 체계화는 전투 효율성을 유지했다.
  • 끈기: 손실을 흡수하고 대체할 의향이 강했다.
  • 지도력: 혼재되었지만, 군사적 성공을 확보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 군사 문화: 중장보병 군단에 구체화된 군사 및 시민 문화는 지속적인 동기와 결속력을 부여했다.
  • 균일한 훈련: 군단병 지휘, 유지, 대체를 일관된 활동으로 만들었다.
  • 군사 장비: 갑옷(예: 로마 군사 개인 장비)은 품질이 좋고 보편적이었다.
  • 공학 기술: 요새 건설 등 공성전과 방어전에 능숙했다.
  • 군사 훈련: 베기보다 효과적인 검 찌르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5. 발전

초기 로마 왕정 시절, '군단'은 로마 육군 전체를 의미했을 수 있으나, 당시 사료는 부족하고 신뢰성이 떨어진다.[31] 이후 군단 조직은 크게 변화했지만, 일반적으로 대략 5,000명 규모였다. 공화정 시대 대부분 군단은 10개의 ''마니풀루스''로 구성된 3열 அமைப்பு였다. 공화정 말기와 제정 시대 초기(기원전 100년경부터)에는 10개의 코호르스로 구성되었고, 각 코호르스는 500~600명 규모였다. 군단에는 소규모 ''알라''(기병대)도 포함되었다.

서기 3세기부터 군단은 1,000~1,500명 규모로 작아졌지만, 더 큰 경우도 있었다. 서기 4세기 동로마 국경 수비 군단(''리미타네이'')은 더 작아졌을 수 있다. 공화정 시기 군단은 고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수 있다.[32]

제정 시대 대부분 로마 군단은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정예 중보병이었고, 보조군은 추가 보병과 로마 기병대 대부분을 제공했다. 시민권을 원하는 속주민은 보조군에서 명예 제대 후 시민권을 받았다. 제정 시대 대부분 로마군은 군단병보다 보조군이 더 많았다.[33]

글라눔에서 발견된 부조 속 제정 시기 로마 군단병. 글라눔은 기원전 27년부터 서기 260년 알레마니족 침입으로 파괴될 때까지 존속했다.


마리우스 군제개혁(기원전 107년) 이전 군단은 영구 부대가 아니었고, 창설, 동원, 해체를 반복했다. 로마 역사에서 수백 개의 군단이 언급되었고, 현재까지 50여 개가 확인되었다. 공화정 시기 군단은 징집된 자들로 구성되었고, 군사 장비는 스스로 마련했다. 당시 로마군 구조는 로마 사회를 반영했다. 네 개의 집정관 군단(두 명의 집정관이 각각 두 개 군단 지휘)이 항상 있었고, 전쟁 시 추가 군단이 징집되었다.

기원전 2세기 말, 로마는 군대 인력 부족을 겪었다.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재산 자격을 폐지하고, 국가가 장비와 보상을 지급하여 모든 시민이 복무할 수 있게 했다. 로마군은 자발적이고 전문적인 상비군이 되었고, ''보조병''으로 입대하는 비시민에게도 복무 후 로마 시민권과 약탈물을 보상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약 50개 군단을 물려받았지만, 25~35개 상비 군단으로 줄였고, 이 기준은 로마 제국 역사 대부분 유지되었다.

로마 군단은 로마 공화정 시기 3,000명에서 제정 시기 5,200명 이상으로 변화했다. 기본 부대 단위는 켄투리아였다. 1세기 중엽까지 군단은 10개 코호르스(각 500명)로 구성되었다. 이후 9개 코호르스(각 80명 켄투리아 6개)와 1개 2배 병력 코호르스(각 160명 이중 강화 켄투리아 5개)로 바뀌었다. 4세기경 군단은 1,000~1,500명으로 작아졌는데, 이는 대규모 군단과 보조 부대가 더 넓은 영토를 담당하기 위해 작은 부대로 쪼개졌기 때문이다.

로마 군단의 일반적 규모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시기군단병에퀴테스비고
로마 공화정4,200명300명120명 군단병으로 구성된 4개의 마니풀루스로 이루어진 코호르스 10개
로마 제국5,200명120명(보조군)각 480명으로 구성된 10개의 코호르스, 첫 번째 코호르스는 900명



로마 왕정 시대 군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세 개의 원래 로마 부족에서 각각 1,000명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오래된 상세 기록은 기원전 150년경 폴리비우스의 기록으로,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에게 패배한 후 로마 군대 조직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공화정 시대 군단은 분쟁 시에만 징집되었고, 보통 네 개 군단으로 제한되었으며, 각 집정관이 두 개 군단을 지휘했지만, 필요한 경우 더 많은 군단을 소집할 수 있었다. 군인들은 급여가 적었고, 주 수입은 전리품이었으며, 필요할 때만 소집되었다.

조직과 기능 측면에서 초기 공화정 시대 군대는 에트루리아인에게서 계승되었으며, 고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파랑크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3]

로마 군단병 묘사


기원전 387년 알리아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군사 조직이 개혁되었다. 카밀루스 체제하에서 군단은 처음에 사회 계급을 기반으로 구성되었으며, 가장 가난한 계층이 최전선을 담당했다. 군단병들은 대부분 ''하스타에'' (창)과 ''스쿠타'' (큰 직사각형 방패)를 사용하며, 바둑판 모양의 마니플 대형으로 싸웠다. 예외는 최후방에서 호플리트처럼 싸웠던 ''트리아리이''로, 그리스식 ''클리페이''를 사용했으며, 부유한 그들은 창이 부러질 경우 ''글라디이''를 사용할 수 있었다.

기원전 3세기 폴리비우스 체제하에서 계급은 부유함이 아닌 나이와 경험에 따라 구성되었다. 모든 군단병은 ''하스타에''를 ''글라디우스''로 교체했으며, 근접전 전 두 개의 ''필라''를 장비했다. 이전 가난한 군단병 계급인 ''아켄시'', ''로라리이'', ''레베스''는 ''벨리테스''로 대체되었다. 부대 규모도 확장되었다.

비시민 또는 ''페레그리니''도 보조병으로서 군대에서 복무할 기회를 얻었다.

4세기에는 동로마 국경 수비대 군단(''리미타네이'')이 더욱 작아졌을 가능성이 있다.

6. 규모

초기 로마 왕정 시절 '군단'은 로마 육군 전체를 의미했을 수도 있으나, 당시 사료는 부족하고 신뢰성이 떨어진다.[31] 이후 군단 조직은 시대에 따라 크게 변했지만, 일반적으로 약 5,000명의 병사로 구성되었다. 로마 공화정 시대 대부분 기간 동안 군단은 10개의 마니풀루스로 구성된 세 개의 열로 나뉘었다. 공화정 말기와 제정 시대 대부분(대략 기원전 100년부터)에는 하나의 군단이 각각 500~600명으로 구성된 10개의 코호르스로 나뉘었다. 군단에는 소규모 알라 기병대도 포함되었다. 서기 3세기부터 군단은 대략 1,000명에서 1,500명 규모로 훨씬 작아졌으며, 그보다 규모가 더 큰 경우도 있었다. 서기 4세기 동로마군의 국경 수비 군단은 훨씬 더 작아졌을 수 있다. 공화정 시기 군단은 고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수 있다.[32]

제정 시기 대부분 동안 로마 군단은 로마 시민으로만 구성된 로마군의 정예 중보병이었고, 군대의 나머지는 추가적인 보병 및 로마 기병대의 대부분을 제공한 보조군으로 이루어졌다. 시민권을 원했던 속주민들은 보조군에서 명예 제대를 하면 시민권을 받았다. 제정 시기 대부분 동안 로마군은 군단병보다 보조군이 더 많았다.[33]

로마 군단은 마리우스 군제개혁(기원전 107년) 전까지는 영구 부대가 아니었고, 창설, 동원, 해체를 반복했기 때문에 수백 개의 군단이 로마 역사에서 언급되고 확인되었다. 현재까지 대략 50여 개의 군단이 식별되었다. 공화정 시기 군단은 스스로 군사 장비를 마련한 징집병으로 구성되었고, 따라서 당시 로마군의 구조는 로마 사회를 반영했다.

기원전 2세기 말부터 로마는 군대 인력 부족을 겪었고,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재산 자격을 폐지하고 국가가 장비와 보상을 지급하여 모든 시민이 복무할 수 있게 했다. 로마군은 자발적이고 전문적인 상비군이 되었으며, 복무를 마치면 로마 시민권과 약탈물들을 보상받았다.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군단은 약 25–35개의 상비 군단으로 유지되었다.

로마 군단의 규모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시기군단 규모
로마 공화정 시기4,200명 + 기병 300명 (초기에는 모든 병사가 직접 장비 마련)
제정 시기5,200명 + 보조군 120명



4세기경, 로마 군단은 대략 1,000 ~ 1,500명으로 규모가 작아졌고, 더 많은 경우도 있었다. 이는 넓은 영토를 담당하기 위해 큰 규모의 군단과 보조군 부대가 작은 부대 단위로 쪼개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7. 역사

초기 로마 왕정 시절에 "군단"이란 말은 로마 육군 전체를 뜻하기도 했지만, 이 시기의 사료들은 수가 적고 신뢰하기 어렵다.[31] 그 후 군단 조직은 시간이 흘러 크게 변화했음에도, 군단은 일반적으로 대략 5,000명의 병사들로 이뤄졌다. 공화정 시대 대부분 기간 동안 군단은 10개의 ''마니풀루스''로 구성된 세 개의 열로 나뉘었다. 공화정 말과 제정 시대 대부분 시기(대략 기원전 100년부터)에, 하나의 군단은 각각 500~600명으로 된, 10개의 코호르스로 나뉘었다. 군단에는 또한 소규모의 ''알라'' 또는 기병대가 포함되었다. 서기 3세기부터, 군단은 대략 1,000명에서 1,500명 규모로 훨씬 작아졌으며, 그보다 규모가 더 큰 경우도 있었다. 서기 4세기에, 동로마의 국경 수비 군단 (''리미타네이'')은 훨씬 더 작아졌을 수도 있다. 군단의 구성과 기능 면에서, 공화정 시기의 군단이 고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수 있다.[32]

제정 시기 대부분 동안, 로마 군단들은 로마 시민들에서만 모집됐던 로마군의 정예 중보병을 형성했고, 군대의 나머지는 추가적인 보병 및 로마 기병대의 대부분을 공급해준 보조군들로 이뤄졌다. (시민권을 바라던 속주민들은 보조군에서 명예 제대를 하면 시민권을 부여받았다.) 제정 시기 대부분 동안에, 로마군은 군단병보다는 대부분 보조군으로 구성됐다.[33]

기원전 40년 이전에 창설된 많은 군단들이 최소한 5세기까지는 여전히 활동했으며, 그중에 마케도니카 제5군단은 기원전 43년 아우구스투스가 창설하여 이슬람의 이집트 정복 기간인 7세기 때 이집트에서 활동했다.

로마 군단은 마리우스 군제개혁 (기원전 107년) 때까지 영구 부대가 아니라, 대신 창설되고, 동원되고, 해체되는 것을 반복했다. 현재까지 대략 50여 개의 군단이 식별되었다. 공화정 시기의 군단은 스스로 군사 장비를 마련한 징집된 자들로 이뤄졌고, 당대 로마군의 구조는 로마의 사회를 반영했다. 항상 4개의 집정관 군단들(임기 중인 두 명의 집정관들이 나누어 지휘)이 있었고 전쟁 시에는 추가 군단들이 징집될 수 있었다. 기원전 2세기 말부터, 로마는 군대에 들어가기 위한 재산 및 재정적 자격 때문에 인력 부족을 겪기 시작했다. 이 상황은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재산 자격을 폐지하고, 국가가 복무 기간에 장비 및 보상을 지급함으로써 재산이나 사회적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들이 복무를 할 수 있게 하는 법령을 발표하게 했다. 로마군은 자발적이고, 전문적인 상비병이 되었으며, 복무가 로마 시민들을 넘어 시민들이 아닌 자들에게도 확대되어 보조병으로 입대할 수 있었고 복무 활동을 마칠 시 로마 시민권 및 수반된 모든 권한과 약탈물들을 보상받았다. 아우구스투스 시기에, 그가 물려받은 군단은 대략 50여 개였지만, 이 수를 약 25–35개의 상비 군단으로 줄였고 이때의 기준은 로마 제국의 역사 대부분 모습을 유지했다.

로마 군단은 로마 공화정 시기 3,000명에서 기본 부대 단위 켄투리아로 구성하는, 제정 시기에는 5,200명이 넘는 숫자로 변화하였다. 1세기 중엽까지, 10개의 코호르스 (개당 대략 500명)가 하나의 로마 군단을 이뤘다. 이는 나중에 첫 번째 및 5번째 코호르스가 인원이 두 배인 160명으로 된, 9개의 코호르스 (개당 80명으로 된 켄투리아 6개로 구성)로 바뀌었다. 4세기 쯤에, 로마 군단은 대략 1,000에서 1,500명으로 훨씬 작아졌고 이보다 많은 경우도 있다. 이 현상은 10,000명 규모의 커다란 대형의 군단과 보조군으로 된 부대 단위가 더 넓어진 영토를 담당하기 위해 본래 임시 파견대 규모였던 작은 부대 단위로 쪼개지면서 나타난 것이다. 4세기에, 동로마의 국경 수비 군단 (''리미타네이'')가 훨씬 더 작아진 것으로 보인다. 구성과 기능 면에서, 공화정 시기의 군단은 고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팔랑크스의 영향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32]

로마 군단의 일반적 규모는 공화정 시기(보병들은 120명의 군단병으로 된 네 개의 마니풀루스로 이뤄진 코호르스 10개로 나뉘었다)의 4,200명의 군단병과 300명의 에퀴테스(부유한 계층에서 모집한 인원들로, 초기 로마의 모든 병력들은 직접 본인이 장비를 구했다)으로 된 완편 체제에서 제정 시기(각 480명으로 구성된 10개의 코호르스로 나뉘고, 첫 번째 코호르스는 900명으로 이뤄졌다)의 5,200명의 군단병과 보조군 120명에 이르기까지, 고대 로마의 역사 기간에 따라 변화했다.

로마 왕정 시대와 로마 공화정 초기 군단, 그리고 로마 공화정 중엽 군단에 대한 설명은 왕정 시대, 로마 공화정, 로마 공화정 말기 섹션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약한다.


  • 왕정 시대: 100명 단위의 ''켄투리아''로 조직.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인구 조사 후 재산에 따라 5개 계급으로 구분.
  • 로마 공화정 초기: 두 명의 집정관에게 각각 할당된 두 개의 군단으로 나뉨. 필요시 10개 군단까지 양성.
  • 로마 공화정 중엽: ''에퀴테스''(기병), ''벨리테스''(경보병), 중보병(''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리아리이'')으로 구성.
  • 로마 공화정 말기: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으로 재산 자격 폐지, 국가가 장비 지급, 코호르스 단위의 영구 부대화, ''마리우스의 노새''라 불리는 개인 짐 분담.
  • 제정 초기: 아우구스투스가 군단 수를 25-28개로 줄이고, 봉급 규격화, 친위대 창설, 영구적인 전략 기지 배정.
  • 제정 말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군제 개혁으로 군단 규모 축소, 야전 기동군(코미타텐세스)과 국경 수비대(리미타네이) 분리.

7. 1. 왕정 시대 (기원전 500년경부터)

''레기오''(legio)가 생기기 이전, 로마 왕정 시기에는 군대가 약 100명으로 구성된 ''켄투리아''들로 조직되었다. 이 켄투리아들은 필요시에 편성되어 자신들을 고용하거나 양성한 지휘관에게 복종했다. 켄투리아의 지휘관 (이후에 켄투리온으로 공식화), 부지휘관, 기수의 역할들은 이 초기 시기에 명시되었다.

로마의 초기 시기는 기록이 부족하고 신화 속에 묻혀있지만,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의 통치 기간에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인구 조사를 통해 모든 신체 건강하고, 재산을 보유한 로마인 남성 시민들은 그들이 지닌 재산을 기준으로 군 복무가 5개 계급으로 나뉘었고, 그 후 큰 규모의 군대 혹은 ''군단''의 하급 부대 단위인 켄투리아로 조직되었다. 군에 입대하는 것은 로마 시민권의 의무이자 분명한 증표였다. 마리우스 군제 개혁 이전에는 부유한 지주들이 가장 긴 군 복무를 했다. 이들은 국가가 무너졌을 때 가장 많은 것을 잃을 사람들이었다.

왕정 시대의 "'''레기오'''"라는 말은, 후대의 제정 시대와는 달리, 소집된 로마 시민으로 구성된 중장보병과 기병을 포함한 로마군 전체를 가리켰다. 전설에 따르면 건국의 조상 로물루스는 케레레스(Celeres)라 불리는 일종의 친위대를 거느렸다고 하나, 그 실존을 증명할 만한 자료는 현재 없다. 이 시대의 전술은 고대 그리스에서 전래된 중장보병 전술이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왕은 자군의 병력을 파악하기 위해 켄수스(인구 조사)를 실시했다. 이후 군제 개혁이 이루어져, 병사들을 소유 재산에 따라 5개의 계급으로 구분했다(당시 병사 각자의 무기는 스스로 구입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 병장의 균일화를 위해 소유 재산으로 구분하는 것은 효과적이었다). 구분된 계급은 다시 100명의 집단으로 나뉘어 켄투리아(백인대)라고 명명되었다.

7. 2. 로마 공화정 (기원전 509년– 기원전 107년)

로마 공화정 초기, '군단(레기오)'은 로마 육군 전체를 의미하기도 했으나, 이 시기 자료는 부족하고 신뢰성이 떨어진다.[31] 이후 군단 조직은 크게 변화했지만, 일반적으로 약 5,000명의 병사로 구성되었다. 공화정 시대 대부분 군단은 10개의 마니풀루스로 구성된 세 개의 열로 나뉘었다.

'군단'이 생기기 전, 로마 왕정 시기와 공화정 초기에는 로마군이 약 100명의 ''켄투리아''들로 조직되었다고 묘사된다. 이들은 필요에 따라 편성되어 자신들을 고용하거나 양성한 지휘관에게 응했다. 이러한 독립적 조직은 기원전 2세기까지 경보병과 기병에서 지속됐으나, 보조 역할이 동맹군으로 대체되면서 이후 완전히 폐지되었다. 켄투리아 지휘관(켄투리온으로 공식화), 부지휘관, 기수 역할은 이 초기 시기에 명시되었다.

로마 초기,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역할 중에 인구 조사가 실시되었다. 이 조사를 통해 모든 신체 건강하고 재산을 보유한 로마 남성 시민들은 재산에 따라 군 복무가 5개로 나뉘었고, 그 후 군단 하급 부대 단위인 켄투리아로 나뉘었다. 군 입대는 로마 시민의 의무이자 증표였다. 마리우스 군제개혁 이전에는 부유한 지주들이 가장 긴 군 복무를 했다. 이들은 국가가 무너졌을 때 가장 많은 것을 잃었을 것이다.

로마의 왕들이 쫒겨난 후 공화정이 시작된 어느 시점에, '군단'은 두 개의 분리된 군단으로 나뉘었고, 각각은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에게 할당되었다. 전쟁이 주로 약탈에 치중하던 공화정 초기, 군단의 모든 전력이 총동원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기원전 494년, 독재관 마니우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10개 군단을 양성했는데,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는 이전 어느 때보다 많은 수였다.[34]

일부 전쟁은 군단 구조에서 벗어난 로마군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유명한 예가 에트루리아 도시 베이이를 상대로 파비아 씨족 군대가 벌인 기원전 479년의 전쟁이다(이 전투에서 파비아 씨족은 전멸). 군단은 로마의 전쟁 활동이 빈번해지고 계획된 작전으로 발전함에 따라 기원전 4세기에 공식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집정관 병력도 각각 두 개의 군단으로 양성됐다.

공화정 때 군단은 일시적 존재였다. 집정관 군대였던 1군단에서 4군단(집정관 한 명당 2개씩 배정)을 제외한 다른 부대들은 전쟁 시 모집되었다. 로마의 이탈리아 동맹시들은 로마 군단 지원을 위해 10개 코호르스(보조병들은 군단병으로 조직되지 않았다)를 제공할 것을 요구받았다.

공화정 중엽 군단은 다음 부대들로 구성됐다.

  • ''에퀴테스'' (기병): 기병은 부유하고 젊은 로마 남성들이 실력과 가량을 선보이던 명망있는 부대로, 정치 경력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기병 장비는 기수가 마련했고 원형 방패, 투구, 검, 갑옷, 하나 또는 하나 이상의 랜스로 구성됐다. 군단 내 기병은 수가 적었다. 군단 인원 대략 3,000명 중(벨리테스들이 합해지면 평균 4,200명), 300명만이 기병이고, 이들은 30명으로 구성된 부대 단위(''투르마'') 10개로 이뤄지며, 데쿠리온들의 지휘를 받는다. 중기병 외, ''하스타티'' 또는 ''에퀴테스''가 되기에 어린 부유하고 젊은 시민들을 징집한 경기병도 있었다. 전투 시, 기병들은 적 보병 진형을 혼란시키고 측면 공격하는 데와 적 기병대와 교전 때 사용되었다. 후자의 경우, 그들은 종종 (항상은 아니고) 이 당시에 흔하지 않은 전술로, 하마 상태의 비유동적 전투를 수행하기 위해 일부 또는 전부가 말에서 내렸으며, 이 전술은 등자가 등장하기 이전 시기에 안정성과 민첩성 면에서 상당한 이점을 제공했다.[35]
  • ''벨리테스'' (경보병): ''벨리테스''들은 주로 스스로 적절한 장비를 갖추지 못했던 가난한 시민들이다. 이들의 주 임무는 재블린을 던지는 산병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적들을 괴롭히거나 적들 뒤 부대의 움직임을 담당하기 위해 일찍이 교전한다. 재블린을 던진 후, 그들은 마니풀루스 사이 공간으로 후퇴해 중보병들의 열을 통해 보호를 받는다. 공화정 초기와 중기 시절 군대의 기병이 모자라면, 벨리테스들이 척후병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들은 엄밀한 공식적인 조직이나 대형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 중보병: 중보병은 군단의 가장 핵심적인 부대였다. 중보병은 철 투구, 방패, 갑옷, 대략 30m 사거리를 지닌 무거운 재블린 필룸 등으로 구성된 장비들을 구할 수 있는 시민 군단병으로 이뤄졌다. 기원전 387년 이후,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들에게 선호되던 무기는 단검의 일종인 글라디우스였다. 이들의 징박힌 샌들(''칼리가이'')도 쓰러진 적들에게 효과적인 무기였다. 마리우스 군제개혁(아래 참조) 이전, 중보병들은 경험에 따라, 세 개의 다른 열의 부대로 나뉘었다.
  • ''하스타티''(단수형. ''하스타투스'')는 경험이 없거나 적은 신병들로 이뤄졌고, 몇 년 간 복무한 군단병들보다는 덜 믿음직스럽다고 여겨졌다. 로마가 경험있는 병사들을 잃을 만한 여유가 없었기에, 가장 신병들을 전방에 배치했고 이들이 살아남는다면, 소중한 경험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이유는 신병들이 전투에서 겁을 먹고 무너져 도망치려 할 경우, 그들 뒤에 경험있는 군사들이 신병들의 의지를 굳게 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 ''프린키페스''(단수형. ''프린켑스'')는 보다 경험있는 병사들로, 일반적으로 하스타티들보다는 장비를 잘 갖췄고, 전장에서 경험도 더 많아, 하스타티가 무너지거나 패주하면 전장에서 제2열을 맡았다. 이들은 마리우스 군제개혁 이전 초기 공화정 군단병의 두 번째 공세였다.
  • ''트리아리이''(단수형. ''트리아리우스'')는 베테랑 병사들로, 심각한 상황의 전투에서만 사용됐다. 그들은 비전투 시에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트리아리이''는 주로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를 지원하도록 마련된 예비병력이나 엄호 부대 역할을 했고 ''필룸''과 ''글라디우스''보다는 긴 ''하스타이''(창)로 무장했다(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는 기원전 387년에 창 사용을 멈췄다). 따라서, 이들은 팔랑크스 대형으로 싸웠다. ''트리아리이'' 군단병의 중무장한 대형이 전진하는 모습은 퇴각하는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를 추격하는 의기양양한 적들을 자주 기죽였다. ''Ad triarios redisse'' – ''트리아리이에 의지하기''는 로마의 격언으로,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는 것을 뜻한다.


세 개의 열들 각각은 마니풀루스라는 핵심 전술 부대 단위(주로 10개)로 나뉘었다. 하나의 마니풀루스는 2개의 켄투리아로 구성되고 두 켄투리아의 선임 지휘관의 지휘를 받았다. 이 시기, 하스타티와 프린키페스의 각 켄투리아는 60명으로 구성되고, 트리아리이의 켄투리아는 30명으로 구성됐다. 대략 벨리테스 1,200명, 기병 300명과 함께, 3,000여 명(120명으로 된 마니풀루스 20개, 60명으로 된 마니풀루스 10개)이 공화정 중엽("manipular") 군단의 명목상 4,500명의 병력을 구성했다.

'''기원전 509년부터 241년까지 로마 중앙 조직 분석'''[29]
계급인구조사 평가 재산(재산)소유 선거권장비
(개인 소유품)
파트리키 (당시의 귀족제)
원로원 의원400,000 세스테르티우스(1,000,000 아스(청동화))
에퀴테스**400,000 세스테르티우스말, ...
플레브스 (평민)
First (트리아리이)100,000 아스(청동화) (100 유게라)2투구, 원형 방패, 흉갑, 정강이 보호대, 검과 창
Second (프린키페스)75,000 아스(청동화) (75 유게라)1투구, 원형 방패, 정강이 보호대, 검과 창
Third (하스타티)50,000 아스(청동화) (50 유게라)1투구, 사각 방패, 정강이 보호대, 검과 창
Fourth (레베스)25,000 아스(청동화) (25 유게라)1사각 방패, 검이나 창, 투창
Fifth11,000 아스(청동화) (11 유게라)
12,500 아스(청동화) (12 유게라)
1투석기 (아켄시), 투창 (벨리테스)
프롤레스 (토지 없음, 무산 계급)
프롤레타리이11,000 아스(청동화) 이하배(노 젓는 사람)
colspan=4 align=left> 켄투리아 민회의 시스템, 세르비우스 헌법의 관행이다. 리비우스, 폴리비우스, 할리카르나소스의 디오니시우스를 기반으로 역사가 팀 코넬에 의해 정리된 정보
비슷한 자료에 대해서는:en:Equites#Centuriate_Cornell_1995_380를 참조.
colspan=4 align=left> 에퀴테스는 평민인 대상인이나 귀족 등 야심 있는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에게 선호되었다.
colspan=4 align=left>당시의 가격으로 1 데나리우스는 10 아스(청동화)가 적절하다. 역사가 루크 더 리흐트는 여러 요인에 따라 변동하지만, 대략 1 유게라의 토지는 1,000 아스(청동화) 또는 100 데나리우스에 해당한다고 말한다.[30]


7. 3. 공화정 말기 (기원전 107년–기원전 30년)

마리우스 군제개혁 이후 군단의 크기 및 보병 대형 배치를 보여주는 시각 자료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기원전 107년)은 로마 군단을 크게 변화시켰다. 이 개혁 이전까지 로마 군단은 재산과 재정적 자격에 따라 징집된 시민들로 구성되었고, 스스로 군사 장비를 마련해야 했다.[31] 이는 로마군의 구조가 로마 사회를 반영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말, 로마는 인력 부족을 겪게 되었는데, 이는 군대에 들어가기 위한 재산 및 재정적 자격 때문이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정관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재산 자격을 폐지하고, 국가가 복무 기간에 장비 및 보상을 지급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이로써 재산이나 사회적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시민들이 군 복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군은 자발적이고 전문적인 상비군이 되었으며, 복무는 로마 시민뿐만 아니라 비시민권자에게도 확대되어 보조병으로 입대할 수 있게 되었다. 복무를 마치면 로마 시민권과 그에 따른 모든 권한, 약탈물들을 보상받았다.[31]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은 군단의 내부 체계도 규격화했다. 각 군단은 ''코호르스''로 나뉘었고, 이전의 임시 행정 단위였던 코호르스는 이제 6개의 켄투리아로 구성된 영구 부대가 되었다. 첫 번째 코호르스는 다른 코호르스의 두 배 규모인 5개의 켄투리아로 구성되었으며, 각 켄투리아는 ''옵티오''의 도움을 받은 백인대장이 지휘했다. 코호르스는 로마 군단의 기본 전술 단위가 되었다.

군단 내 계급은 복무 기간을 기준으로 했으며, ''프리무스 필루스''(첫 번째 창)라고 불리는 선임 백인대장이 첫 번째 코호르스의 첫 번째 켄투리아를 지휘하며 고위 장교들에게 직접 보고했다. 모든 병사들은 용기나 가치 있는 활약을 통해 인정받으면 고위 계급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마리우스는 또한 군단병들이 갑옷, 무기, 15일치의 식량 등 대략 25–30kg 정도의 장비를 직접 휴대하게 했다. 이를 위해 십자 모양의 막대기를 지급했고, 병사들은 많은 짐 때문에 ''마리우스의 노새''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이러한 개인 짐 분담은 군단의 본대와 일시적으로 떨어져 있을 때 물자 공급 훈련을 가능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필요시 군대의 진군 속도를 크게 증가시켰다.

마리우스 군제개혁 이후, 군단은 밀집 대형을 한 시민 중무장 보병대로서 대중에게 익숙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병사들의 충성심이 로마 당국 자체가 아닌 지휘관에게 쏠리는 결과를 낳았고,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건너 공화정을 사실상 끝내는 상황을 초래했다.

공화정 말과 제정 초의 군단들은 흔히 ''마리우스 군단''이라고 불린다. 기원전 101년 베르켈라이 전투 이후, 마리우스는 모든 이탈리아 동맹군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며, 동맹군 군단이라는 개념을 없애고 모든 이탈리아 동맹군 군단을 로마 군단으로 간주했다. 이와 동시에, 세 가지 종류의 중보병들은 ''프린키페스''를 기준으로 한 단일 유형으로 대체되었으며, 이들은 ''필룸''이라는 무거운 재블린 2개, ''글라디우스''라는 단검, 쇠사슬 갑옷(''로리카 하마타''), 투구, 정사각형 방패(''스쿠툼'')로 무장했다.

이 시기의 전형적인 군단은 5,120명의 군단병과 많은 주둔지 행상, 일꾼, 노예 등 많은 인원들이 있었다. 보조병들을 포함할 경우 최대 11,000명의 전투 인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로마 제국 말에는 군대 파견을 더 쉽게 하고 감시 범위를 늘리기 위해 군단 규모를 1,000명으로 감축하기도 했다.

마리우스 군제개혁 이후와 로마 공화정 말기 동안, 군단은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했다. 기원전 1세기부터 데마고그 지휘하의 군단의 위협이 인지되었고, 로마 총독들은 자신의 군단을 데리고 속주를 벗어나면 안 되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 법을 깨고 갈리아 속주를 떠나 루비콘강을 건넌 것은 헌법 위기를 일으켰고, 이는 내전으로 이어져 공화정의 종말과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 통치하의 제정 시대의 토대를 마련했다.

7. 4. 제정 초기 (기원전 27년–서기 284년)



''로마군의 하급 부대 참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내전을 마친 아우구스투스는 대략 50여 개의 군단을 물려받았으나, 일부 군단은 번호가 중복되는 경우도 있었다(예: 여러 개의 10군단).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군단 수를 28개로 줄였고,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3개 군단이 게르만족에게 전멸당한 후에는 25개로 더 줄였다.[8]

아우구스투스는 군대 규모를 줄이는 동시에 병사들의 봉급을 규격화했다. 또한, 보조병의 수를 군단병과 유사한 수준으로 크게 늘렸다. 해군과 친위대를 창설했으며, 해방 노예(''리베르티'')도 해군에 복무할 수 있게 했다. 로마 군단은 특정 전쟁을 위해 모집되지 않고 영구적인 부대가 되었으며, 영구적인 ''카스트라 레기오나리아''(군단 요새)와 같은 전략 기지가 배정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군사 정책은 타당하고 비용 효율적인 것으로 입증되었으며, 그의 후임자들도 대체로 이 정책을 따랐다. 후임 황제들은 상황에 따라 상설 병력을 30개 군단까지 신중하게 늘렸다. 철학자 파보리누스는 ''30개 군단의 주인과 논쟁하는 것은 좋지 않다''라고 풍자하기도 했다. 각 군단은 보통 5,120명의 군단병과 동일한 규모의 보조군으로 구성되었으며, 팍스 로마나 기간 군단 사령관은 11,000명 이하의 병력을 운용할 수 있었다. 적대적인 국경이나 반항적인 속주에 주둔하는 군단은 더 많은 보조군을 보유하기도 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기(193-211년)에는 보조군이 로마군 447,000명 중 250,000명(55-60%)을 차지했다. 일부 군단은 특정 시점에 15,000~16,000명(오늘날의 사단 규모)으로 보강되기도 했다.

제정 시대에 군단은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군단의 행동은 제국을 제위 찬탈자로부터 보호하거나 찬탈을 가능하게 했다. 예를 들어, 네 명의 황제의 해비텔리우스의 패배는 다뉴브 지역 주둔 군단들이 베스파시아누스를 지지하면서 결정되었다.

제정 시대에 군단은 문장과 군단 역사를 통해 규격화되었고, 병사들은 이에 대한 자부심을 가졌다. 군단은 ''레가투스''(Legatus)가 지휘했다. 레가투스는 대략 30세 정도의 3년 임기직 원로원 의원이었다. 레가투스 직속 하급자로는 6명의 선출된 ''군사 호민관''이 있었는데, 5명은 참모 장교, 1명은 원로원 의원 계급 귀족이었다(원래 이 호민관이 군단을 지휘했다). 의무 장교, 공병 장교, 기록 보존 장교, ''프라이펙투스 카스트로룸''(주둔지 관리 장교), 군종 장교, 군악 장교 등도 있었다.

7. 5. 제정 말기 (서기 284년 이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1세 황제의 군제 개혁으로 로마 군단은 큰 변화를 겪었다. 군단의 수는 늘어났지만, 각 군단의 규모는 1,000명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는 제국 내부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기동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였다. 또한, 문무 관직의 분리가 이루어지면서 군사 지휘관은 군사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중요한 변화는 야전 기동군(코미타텐세스)과 국경 수비대(리미타네이)의 분리였다. 코미타텐세스는 특정 지역에 얽매이지 않고 제국 전역을 이동하며 위협에 대응하는 정예 부대였다. 반면, 리미타네이는 국경 요새에 주둔하며 경비 임무를 수행하고, 필요시에는 야전군에 합류하여 대규모 전투에도 참여하는 정규군이었다.[37] 이러한 분리는 방어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도 "레기오"라는 명칭은 동로마 제국에 남았지만, 군사력의 중심은 기병으로 이동했다. 7세기 이후 동로마 제국은 이슬람 세력과 불가리아 제국 등과의 전투를 겪으며 군제가 크게 변화했다.

테마 제도가 도입되면서 무장한 자영농인 테마병[27]이 지방 방어를 담당했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황제 직속의 중앙군(타그마)과 근위대가 배치되었다. 바실리오스 2세 시대에는 47개의 테마가 존재할 정도로 테마 제도가 발전했다.[28] 그러나 11세기 이후 자영농의 몰락으로 테마병이 약화되자, 군사력은 용병과 군사 귀족의 사병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고대 로마 군단과는 전혀 다른 군사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보병은 주로 용병으로 구성되었으며,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당시에는 제노바 용병대가 방어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8. 군단병 계급



로마 군단병의 계급은 크게 고위 장교, 켄투리오(백인대장), 하위 계급, 특수 보직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각기 다른 역할과 책임을 맡아 군단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기원전 107년) 이후, 군단병의 계급은 더욱 세분화되고 전문화되었다. 각 계급은 복무 기간, 경험, 능력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용맹하거나 가치 있는 활약을 펼친 병사는 더 높은 계급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군단병의 급여는 데나리우스로 지급되었으며, 계급에 따라 차등 지급되었다. 예를 들어, 일반 군단병은 연간 225 데나리우스를 받았지만,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에는 300 데나리우스로 인상되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이를 다시 500 데나리우스로 인상했다. 군단병들은 급여의 일부를 국가에 세금으로 납부했으며, 전쟁에서 노획물을 얻거나 포로를 판매하여 추가 수입을 얻기도 했다.

복무 기간(25년)을 마친 군단병은 '프라이미아'(praemia)라는 퇴직금을 받을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는 3,000 데나리우스와 비옥한 농지를 받았으며, 카라칼라 황제는 이를 5,000 데나리우스로 인상했다. 퇴직금으로 받은 농지는 국경 지역이나 반항적인 속주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8. 1. 고위 장교

로마 군단의 고위 장교는 군단을 지휘하고 운영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다. 주요 고위 장교는 다음과 같다.

  • '''레가투스 레기오니스(군단장)''': 군단 전체를 지휘하는 최고 사령관이다. 주로 원로원 의원 중에서 황제가 임명하며, 3-4년 이상 복무했다. 속주에 군단이 하나만 있을 경우에는 속주 총독 역할도 겸임했다. 레가투스는 군단에 소속된 보조병들의 지휘관 역할도 했다.[40]

  • '''트리부누스 라티클라비우스(넓은 띠 호민관)''': 황제나 원로원이 임명하며, 주로 원로원 의원 계급 출신이었다. 레가투스 다음 가는 지휘관으로, 레가투스가 사망 시 군단을 지휘했다.

  • '''프라이펙투스 카스트로룸(주둔지 행정관)''': 군단 내 서열 3위의 고위 장교이다. 주로 오랜 경험을 가진 베테랑이 임명되었으며, 군단 훈련을 담당했다. 보조병 1개 코호르스를 지휘하기도 했다.[40]

  • '''트리부니 앙구스티클라비이(좁은 띠 호민관)''': 각 군단에 5명씩 있었으며, 주로 에퀴테스 계급 출신으로, 최소 몇 년 간의 군 경험을 가진 이들이었다. 대개 행정 장교 역할을 수행했다.[40]

  • '''두クス(duxla)''': 주로 속주 총독, 집정관, 또는 인페리움 소유자를 가리켰다. 일반적으로 2개 이상 군단의 지휘권을 가졌다.

  • '''트리부누스 밀리툼''': 레가투스를 보좌하는 참모로, 1개 군단에 6명이 배치되었다. 그중 5명은 참모 장교였고, 1명은 원로원에서 파견된 감찰관이었다.

  • '''프리무스 필루스(primus pilusla)''': “필두 백인대장”으로, 명예로운 제1 코호르스(대대)를 지휘했다.

8. 2. 켄투리오



켄투리오(Centurio)는 '백인대장'으로 번역되며, 현대의 소대장에 해당한다. 이들은 켄투리아를 지휘했다. 로마 군단의 핵심으로서 전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전투 지휘뿐만 아니라 비전투 시 군단병의 군 생활 전반을 총괄하는 등 업무 범위가 넓었다.[19] 각 켄투리오에게도 서열이 있으며, 일반적으로는 경험을 쌓는 것으로 등급이 올라갔지만, 황제 또는 상급 장교에 의해 발탁되는 경우도 있었다.[19]

일반적인 코호르스의 6명의 켄투리오는 다음 순서로 구성되었다:

  • 전방 하스타티 (forward hastati) (전방 창병)
  • 후방 하스타티 (rear hastati) (후방 창병)
  • 전방 프린키페스 (forward principes) (전방 주력열)
  • 후방 프린키페스 (rear principes) (후방 주력열)
  • 전방 트라아리이 (forward triarii) (전방 제3열)
  • 후방 트라아리이 (rear triarii) (후방 제3열)


켄투리아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세 개의 병사 계급(하스타티, 프린키페스, 트라아리이)을 사용하여 전투 열을 정렬했었던 로마 군단의 옛 사용 방식에서 가져왔다. 이 켄투리아의 명칭들은 당시에 근본적으로 명목상이었지만,[19] 각 켄투리아들은 이 이론적 열의 모습을 유지했을 것이다. 세 개의 열 각각은 켄투리아 내에서 전방 및 후방으로 세분화되었다.

  • '''프리무스 필루스(Primus pilus)''': 제1 켄투리아와 첫 번째 코호르스를 지휘하는 켄투리오로, 전체 군단 내 최고 선임 켄투리오였다. 다른 코호르스와 달리, 첫 번째 코호르스는 "전방 창"과 "후방 창" 켄투리아 대신에 하나의 재블린 켄투리아만을 두었다. 프라이펙투스 카스트로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은퇴하면 에퀴테스 계급으로 편입이 가능했다. 기본 사병 봉급의 60배를 받았으며, 평균적인 켄투리온보다 많이 받았고 좁은 띠 호민관들과 비슷했다.

  • '''필루스 프리오르(Pilus prior)''': "전방 종렬" 켄투리오들은 군단 내 제1 켄투리아들의 지휘관들로, 각자의 소속 코호르스 내 선임 켄투리온이었다. 교전 시에, 필루스 프리오르는 소속 코호르스 전체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프리무스 필루스 역시도 필루스 프리오르 중 하나였다. 이 직위는 경험 많은 베테랑 병사 출신들이 맡았고 프리무스 필루스보다 하급 계급이었다.

  • '''프리미 오르디네스(Primi ordines)''': "첫 번째 [코호르스] 계급"은 첫 번째 코호르스의 다섯 켄투리오들이며, 프리무스 필루스를 포함한다. 프리무스 필루스를 제외한 이들은 기본 사병 봉급의 30배를 받았다. 이 직위는 프리무스 필루스, 필루스 프리오르를 제외한 그 외에 모든 켄투리오들보다 선임이었다.

  • '''그 외 켄투리오''': 각 군단은 10개 코호르스의 각 켄투리아를 지휘하는 59명 또는 60명의 켄투리오들을 두었다. 이들은 직업군의 핵심이었고 생애 내내를 군인으로서 보내고 전투를 지휘하는 직업 군인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은 계급에 따라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일부에선 황제 혹은 다른 고위 공직자가 직접 지정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코호르스는 1 코호르스에서 10 코호르스 순으로 순서가 매겨지고 각 코호르스 내의 켄투리아는 1 켄투리아에서 6 켄투리아 순서로 매겨졌다 (제1 코호르스의 경우엔 5개의 켄투리아만 존재하여, 총합 59명의 켄투리오와 프리무스 필루스 한 명이다). 켄투리오가 지휘했던 켄투리아는 지휘하던 켄투리오의 계급을 직접적으로 반영했는데, 첫 번째 코호르스의 첫 번째 켄투리아가 가장 높고, 10번째 코호르스의 6번째 켄투리아가 가장 낮았다. 봉급은 기본 봉급의 10배였다.

8. 3. 하위 계급

로마 군단을 보좌하는 하위 계급은 다음과 같다.

  • '''옵티오''': 각 켄투리아마다 한 명씩 있었으며, 켄투리온이 임명하여 부지휘관 역할을 맡았다. 일반 군단병 봉급의 두 배를 받았다.[42] 오늘날의 선임 하사관과 유사하다.
  • '''테세라리우스''': 각 켄투리아당 한 명씩 있었다. 옵티오 다음 서열로, 암구호 관리, 본부 참모진 행정 보조, 켄투리아의 3지휘권자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일반 병사 봉급의 1.5배를 받았다. 오늘날 하사관과 유사하다.[42]
  • '''데쿠리온''': 10명에서 30명으로 구성된 에쿠에스 레기오니스 기병 부대를 지휘했다.[42]
  • '''데카누스''': 8명의 군단병과 2명의 비전투원으로 구성된 10인조 텐트 부대(콘투베르니움)를 지휘했다. 하사관 계급과 유사하다.

8. 4. 특수 보직

아퀼리페르는 군단 내에서 단 한 명만 존재했던 특수 보직이었다. 아퀼리페르는 군단기, 즉 ''아퀼라'' (독수리)를 들고 다니는 역할을 맡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하고 명예로운 지위였다. 아퀼라를 잃는 것은 군단이 겪을 수 있는 최대의 불명예로 여겨졌기 때문에, 이 직책은 군단의 전술에 대한 탁월한 이해력을 지닌 베테랑 병사들로 채워졌다. 아퀼리페르는 기본 봉급의 두 배를 받았다.[19]

시그니페르는 각 켄투리아마다 한 명씩 존재했으며 (따라서 한 군단에는 59명의 시그니페르가 있었다), 각 코호르스의 첫 번째 시그니페르가 다른 시그니페르들보다 선임이었다. 시그니페르는 메달로 장식되고 충성심을 나타내는 손바닥으로 장식된 창대인 ''켄투리알 시그눔''을 들고 다니는 군기수였다. 이 깃발은 병사들이 다시 모이는 집결지 역할을 했다. 군기를 드는 것 외에도, 시그니페르는 부대의 재정 관리 책임을 맡았고 군단병들의 은행원 역할도 했다. 이들은 기본급의 두 배를 받았다.[19]

코르니켄(나팔수)은 시그니페르와 협력하여 켄투리알 시그눔으로 병사들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장교들의 명령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코르니켄 역시 기본급의 두 배를 받았다.[19]

이마기니페르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에 생긴 특수 보직으로, 황제의 모습이 새겨진 군기를 들고 다녔다. 이는 황제에 대한 부대의 끊임없는 충성심을 상징했다. 이마기니페르 또한 기본급의 두 배를 받았다.[19]

임무네스는 특화된 기술을 가진 군단병들로, 더 나은 보수를 받았고 노역이나 경계 근무에서 면제되었다. 기술병, 공성병, 군악병, 행정병, 병참병, 무기 제작병, 목공병, 수렵병, 의무병, 헌병 등이 임무네스에 속했다. 그러나 이들 역시도 완전히 훈련된 군단병이었으며, 필요할 경우에는 전선으로 소집되었다.[19]

에보카투스는 군 복무에 대한 전역 증명서를 받았지만, 다시 입대한 베테랑 병사들을 말한다. 이들은 기본급의 두 배를 받았고, 일반적인 노역 등에서 제외되었다.[19]

두플리카리우스는 계급에 상관없이 기본급의 두 배를 받는 봉급이었다.[19]

9. 급여

가이우스 마리우스 이후 군단병은 연간 225 데나리우스 (900 세스테르티우스와 동일)를 받았으며, 도미티아누스는 이를 연간 300 데나리우스로 인상했다. 2세기에 꾸준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났으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연간 500 데나리우스로 올리기 전까지 봉급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군단병들은 급여를 전부 현금으로 받지 못했는데, 국가가 옷감 및 식량 세금 등으로 공제했기 때문이다.[21] 이 때문에 군단병들은 전쟁에 참전하여 적들의 시체나 거점에서 약탈물을 획득하기를 바랐다. 노예를 포로로 잡아 판매하여 군단에 분배하는 것은 군단병들의 급여에 상당한 보탬이 되었다.[21]

군단병들은 25년 이상 복무하면 ''프라이미아'' (praemia, 베테랑 급여)를 받을 수 있었다. 프라이미아는 상당량의 현금 (아우구스투스 시절에는 3,000 데나리우스) 및 비옥한 농지 (좋은 토지는 수요가 많았다)였으며, 베테랑에게 지급된 농지는 종종 국경 지역과 반항적인 속주를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후, 카라칼라 시기에 프라이미아는 5,000 데나리우스로 증가했다.[21]

로마 군대는 다양하고 많은 임무를 반영하는 복잡한 급여 체계를 유지했는데, 군단병 계급 내에는 세 가지 급여 등급이 있었다.


  • 칼리가티(Caligati): 표준 급여를 받는 급여 등급
  • 세스퀴플리카리이(Sesquiplicarii): 표준 급여의 1.5배를 받는 급여 등급
  • 두플리카리우스(Duplicarius): 표준 급여의 2배를 받는 급여 등급[21]

10. 상징

기원전 104년 이래로, 각 군단은 아퀼라 (독수리)를 군단의 상징으로 사용했다. 아퀼라는 아퀼리페르라는 장교가 들고 다녔으며, 아퀼라의 상실은 매우 심각한 굴욕으로 여겨져서, 군단 해산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전투에서 아퀼라를 되찾는 것이 불가능한 군단은 몹시 큰 피해를 보아 더 이상 효과적인 전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43]

아폴로리나리스 제15군단의 군단병을 재현한 리인액터.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기''(Bk IV, Para. 25)에서 기원전 55년 브리타니아 정복을 시작할 때 한 사건을 묘사하는데, 아퀼라에 대한 로마 병사들의 두려움을 설명한다. 카이사르의 군대가 브리튼인들을 두려워하여 배에서 내리는 것을 주저하자, 제10군단의 아퀼리페르가 아퀼라를 쥔 채 배 밖으로 뛰어들어, 홀로 적에게 돌진했다. 부끄러움을 느낀 그의 동료들은 다 함께 배에서 내려왔고 다른 배의 병사들도 뒤를 따랐다.

로마 제국이 탄생하면서, 로마 군단은 황제와 유대감을 형성했다. 각 군단에는 이마그니페르라는 장교가 있었는데, 이들은 폰티펙스 막시무스로서의 황제의 ''이마고''(형상, 조각 등)가 있는 창을 들고 다녔다.

각 군단에는 벡실룸 혹은 군단의 이름과 상징물이 새겨진 ''시그눔''을 들고 다니는 ''벡실리페르''(vexillifer)가 있었다. 군단에서 다른 부대를 지원하기 위해 본 주둔지에서 예하 부대 형태로 파견되는 경우가 흔했는데, 이때 파견된 부대는 아퀼라가 아닌 벡실룸을 들고 다녔고, 벡실라티오네스라 불렸다. 은으로 도금된 벡실룸 미니어처는 장교들에게 은퇴 또는 재복무 시 복무에 대한 노고를 인정하는 증표로 수여되기도 했다.

민간인도 로마 군단에 도움을 주면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뛰어난 행위를 한 대가로, 민간인은 화살촉이 없는 화살을 받았는데, 이는 큰 영예로 여겨졌고 수여자에게 많은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11. 군단병 훈련

로마 군단병이 되기 위한 훈련은 매우 엄격하고 체계적이었다. 훈련의 목표는 군단병 개개인의 전투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군단 전체의 조직력과 응집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몽테뉴는 "로마인들이 세계의 지배자가 된 주된 이유는 모든 민족들과 차례로 싸우면서, 더 나은 것을 발견하는 즉시 자신의 관습을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25]

로마 군단은 훈련, 조직, 체계화를 통해 오랜 기간 전투 효율성을 유지했다.[25] 십초벌과 같은 규율도 적용되었다.[25] 엄격하고 통일된 훈련은 로마 군단병을 지휘, 유지 및 대체하는 것을 훨씬 더 일관되게 만들었다.

훈련 과정은 크게 체력 훈련, 무기 사용 훈련, 전술 훈련으로 나눌 수 있다.


  • 체력 훈련: 로마 군단병은 강인한 체력을 요구받았다. 훈련병들은 완전 군장을 하고 장거리를 행군하거나,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 등의 훈련을 받았다.
  • 무기 사용 훈련: 로마 군단병은 글라디우스(이베리아인에게서 유래), 필룸 과 같은 다양한 무기를 능숙하게 다루어야 했다.[25] 특히, 로마 군사 훈련은 베기보다는 더 효과적인 검의 찌르기에 초점을 맞추었다.
  • 전술 훈련: 군단병들은 개인 전투 기술뿐만 아니라, 마니플, 켄투리아, 코호르트 단위의 전술 훈련도 받았다. 이를 통해 군단병들은 복잡한 전술 대형을 이루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로마의 군사 및 시민 문화는 군단에 지속적인 동기와 결속력을 부여했다. 로마 군사 장비, 특히 갑옷은 대부분의 적들보다 품질이 좋고 보편적이었다. 방패, 투구, 고효율 갑옷은 장기전에서 큰 이점을 제공했다. 또한, 로마의 공학 기술은 고대 유럽에서 최고였으며, 요새 건설 (수디스, 카스트라 참조) 등에 대한 숙달은 로마 군단에게 큰 이점이었다.[25]

로마 군단 훈련을 재현한 영상

12. 군기

로마 군단은 군기가 매우 엄격했으며, 규율을 엄격하게 시행하여 다양한 처벌을 내렸다.[1]

12. 1. 사소한 처벌

로마 군단의 군기는 엄격했다. 규정은 엄격히 시행되었고, 다양한 벌이 가해질 수 있었다.[1]

  • '''징벌''' – 백부장의 지팡이로 맞는 것[1]
  • 식량 감소 또는 평소 곡물 배급 대신 보리를 먹도록 강요받는 것[1]
  • '''페쿠니아리아 멀크타''' – 급여 감소, 벌금 또는 급여 공제[1]
  • 중대, 코호르트 또는 군단 앞에서의 태형[1]
  • '''채찍'''(flagrum)으로의 매질 – 단순한 태형보다 훨씬 더 잔혹한 처벌. "짧은 채찍"은 로마 제국 후기에 군대의 대다수를 구성했던 노예 자원병인 볼로네스(volones)에 의해 사용되었다.[1]
  • '''계급 강등''' – 계급 강등[1]
  • '''불명예스러운 제대''' – 불명예 제대[1]
  • 복무상 이점의 손실[1]
  • '''밀리티아이 무타티오''' – 열악한 복무 또는 임무로의 강등[1]
  • '''무네룸 인디크티오''' – 추가적인 임무[1]

12. 2. 주요 처벌

로마 군단의 군기는 엄격했다. 규정은 엄격히 시행되었고, 다양한 벌이 가해질 수 있었다.

  • 후스투아리움 – 탈영이나 직무유기, 절도, 위증, 성적 비행, 그리고 같은 범죄를 세 번 반복한 경우에 내려지는 형벌이었다. 기타 부대원들 앞에서, 동료 병사들이나 그들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린 자들에 의해 돌이나 곤봉으로 참수형을 당하거나 구타당해 죽임을 당했다. 후스투아리움을 선고받고 달아난 병사들은 추격당하지 않았지만 로마에서 추방당하는 형벌을 받았다. 여러 명의 군단병이 이 형벌을 받게 될 경우, 호민관은 피고인 대다수를 살리기 위해 변경을 가했다. 호민관은 먼저 몇 명의 유죄 판결을 받은 자들을 선정하고, 선정된 자들은 후스투아리움에 따라 원래의 형벌을 받았다. 나머지 피고인들은 야영지에서 쫓겨나 방어되지 않은 장소에서 정해진 기간 동안 생활해야 했고, 보리만 먹도록 제한되었다.[23]
  • 십분의 일 처형 – 17세기의 믿음에 따르면[24], 로마인들은 반란을 일으키거나 탈영하거나 직무유기를 한 전체 부대에 대해 이러한 형벌을 집행했다. 제비뽑기로 선정된 열 명 중 한 명은 다른 아홉 명에 의해 보통 맨손으로 구타당해 죽임을 당했고, 그들은 야영지 밖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크라멘툼을 갱신해야 했다.

13. 요약

로마 군단은 유연한 조직, 엄격한 훈련, 뛰어난 공학 기술, 군사 문화, 우수한 장비, 효과적인 검술 등 복합적인 요인을 바탕으로 당대 최강의 군대로 자리매김했다.[25]

13. 1. 로마 군단의 성공 요인

로마 군단이 당대 최강의 군대로 불린 이유는 다음과 같다.

  • '''유연한 조직''': 로마 군단은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초기에는 사회 계급에 따라 병사를 구성했지만, 이후에는 나이와 경험을 바탕으로 병력을 편성하여 전투 효율성을 높였다. 또한, 필요에 따라 기병, 궁병 등 다양한 병과를 활용하여 전술적 유연성을 확보했다.[25] 예를 들어, 탁 트인 평지에서는 궁병을 장비한 경기병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용병을 고용하여 이러한 약점을 보완했다.
  • '''엄격한 훈련''': 로마 군단은 엄격한 훈련을 통해 규율과 전투 능력을 유지했다. 십초벌과 같은 가혹한 형벌도 있었지만, 이러한 규율은 전투 효율성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25] 훈련을 통해 부대 교대가 가능해져 다른 나라보다 높은 지구력을 자랑했고, 장기전에서 유리했다.
  • '''뛰어난 공학 기술''': 로마 군단은 뛰어난 공학 기술을 바탕으로 요새 건설, 공성전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알레시아 포위전에서 볼 수 있듯이, 단기간에 견고한 요새를 구축하여 적을 압박했다. 또한, 로마 가도 건설을 통해 군수 물자 수송과 병력 이동의 효율성을 높였다.
  • '''군사 문화''': 로마 군단은 군사 문화와 시민 문화를 결합하여 병사들에게 지속적인 동기와 결속력을 부여했다.
  • '''뛰어난 장비''': 로마 군단병은 로마 군사 개인 장비에서 알 수 있듯이 특히 갑옷의 품질이 우수했고, 대부분의 적들보다 보편적이었다.[25] 글라디우스와 같은 효율적인 무기를 사용했으며, 갑옷, 투구, 방패 등 방어 장비도 잘 갖추어져 있어 장기전에서 유리했다.
  • '''효과적인 검술''': 로마 군사 훈련은 베기보다 더 효과적인 검의 찌르기에 초점을 맞추었다.[25]


테스투도(Testudo)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로마 군단은 당대 최강의 군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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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웹사이트 The Histories of Polybius: Fragments of Book VI https://penelope.uch[...] 2020-04-02
[24] 웹사이트 It's totally fine to use 'decimate' as a synonym for 'devastate'. This is why. https://www.merriam-[...] 2018-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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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문서 비잔츠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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